“오, 이분이 최씨 가문 도련님?”한 중년 남성이 핸드폰의 동영상을 보며 말했다. 특히 마지막의 ‘우리 윤씨 가문을 무시하는 거냐’는 말을 듣고는 더욱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윤정재는 눈을 바둑판에 고정한 채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툴툴거렸다.“내 말을 듣긴 하는 거야?”윤정재가 바둑돌 하나를 꽝 하고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자네...”“그러게 집중했어야지, 누가 내 사위를 연구하랬어?”남자가 야비한 눈빛으로 윤정재를 째려보았다. 윤정재는 피식 웃고는 남자가 가지고 온 차를 음미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의학 서적 몇 권을 가져오라고 부탁까지 했다.이는 독채였다. 정교하게 지어진 화원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사처의 경비들이 없었다면 이곳이 남양 교도소의 한 부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윤정재와 바둑을 둔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대장군, 나도훈이었다.윤정재는 잠시 남양 교도소에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훈은 인맥을 동원해 그를 이곳에 배정한 뒤 종종 그를 보러 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어느날 윤정재와 영상통화를 하던 강서연이 깜짝 놀라 말했다.“아빠, 감옥에도 특실이 있어요?”“왜, 최연준 그 자식이 네게 얘기해주지 않았어?”강서연이 입을 삐죽하며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곳에 가보지도 않은 최연준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어이, 뭐 해?”나도훈이 윤정재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정신을 차린 윤정재가 바둑판을 치웠다.“안 해.”나도훈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최연준이 장모를 돕는 장면을 반복해 보고 있었다.“자네 데릴사위를 정말 잘 들였어.”“데릴사위는 무슨! 내 딸이 최씨 가문에 시집간 거야.”“오, 그래? 꽤 마음에 드나 보네? 전엔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누가 그래? 우리 사위가 최고야! 다시 한번 함부로 말했다간 침으로 찔러버릴 거야!”두 사람이 티격태격했다. 마침
가연의 짓이 분명했다. 이 한 달 사이에 송임월에게 계속 이전의 약물을 주사해 영원히 깨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윤정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석진아, 지금은 누가 임월 전하를 치료하고 있어?”“예전의 의사요. 이모부께서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가연 왕후가 예전의 의사들을 모두 불러왔어요.”윤정재의 판단이 맞았다. 송임월에게 주사한 약물이 만악의 근원이었다!“서지현더러 그 약을 가져오라고 해!”“이모부, 그건...”나석진이 인상을 썼다. 그 혼자서 모험을 하더라도 서지현이 이 일에 휘말리는 건 싫었다.“꼭 서지현이 해야 해.”“왜요?”“그건...”윤정재가 말하려다 말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찬이한테 가서 검사지를 달라고 해, 그리고 서연이와 연준이가 네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거야. 그걸 들으면 알 수 있어.”나석진과 나도훈은 모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나도훈이 나석진을 떠밀었다.“됐어, 이모부가 시키는 대로 해. 이 자식 이상한 짓 많이 하잖아.”“뭐라고?”“너 이상하다고!”“나도훈!”두 사람이 한데 엉겨 붙었다. 나석진이 다시 둘을 뜯어말렸다.......서지현이 꽃에 물을 주러 가려는데, 먼 곳에서 몇 사람이 걸어왔다.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궁은 경비가 삼엄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데, 저 사람들은...서지현이 물통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송혁준이었다. 그는 서지현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의 눈이 많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고모는 좀 어때요?”“똑같아요,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여긴 예전에 고모를 치료했던 의사들이에요. 숙모님이 소개해 주셨어요.”송혁준이 낮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서지현이 뭔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몇몇 의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서지현에게 제지당했다.“황실 규칙에 따라, 임월 전하의 내전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새로 온 시녀인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지현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벽에 기대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얼마 뒤 맨 앞에 선 의사가 조용히 서지현에게 말했다.“임월 전하에게 약물을 주사하려고요.”“어떤 약이죠?”“당연히 병을 고치는 약이죠, 전부터 써왔어요. 진정 효과가 뛰어나서요.”“아, 네... 그럼 주사기는 어디 있나요?”의사가 가방 속에서 약물이 든 주사기를 꺼냈다. 서지현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주세요!”“네?”“임월 전하는 누구든 가까이 오지 말라 하세요, 주사를 놓는다 해도 말이에요. 전에 윤 회장님이 침을 놓았는데, 그때도 너무 무서워 오열했어요! 그러니 제게 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예요. 이건 정맥주사죠? 저도 놓을 줄 알아요.”송혁준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이분에게 주면 돼요. 임월 전하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이분이에요.”“하지만...”“제 말도 못 믿겠다 이거에요?”송혁준이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의사들은 몇 번이나 황궁을 드나들었지만 이런 모습의 송혁준은 처음 본 지라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이분에게 주지 않아도 돼요, 스스로에게 주사를 놓거나, 모두 버려도 안 되는 건 없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돌아가면 숙모님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텐데...”“하, 할 줄 안다니 잘됐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의사가 주사기를 서지현에게 돌려주었다. 서지현은 웃으며 송혁준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내전으로 달려갔다. 내전을 지나 바깥의 작은 화원으로 들어가자 풀숲에 엎드린 윤찬이 보였다.“자, 여기요! 그들이 임월 전하에게 주사하려던 약이에요.”윤찬이 조심히 약물을 건네받아 시약병에 담은 뒤 뚜껑을 닫았다.“이게 뭔지 정말 알아낼 수 있어요?”“당연하죠! 이건 제 전문인데요.”“얼마나 걸려요?”“내일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너무 잘됐네요!”“벌써부터 기뻐하지 마요. 아빠가 말했어요, 이건 그저 추측일 뿐,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요.”
강서연이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내 생각도 그래요, 매일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는 사람 같지는 않아요. 보미 씨가 그러는데, 덕수 아저씨의 책을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대요. 그런데 이야기도 참신하고 논리 있고,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숨어있잖아요. 내 생각엔...”“내 생각엔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 같아.”최연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항상 변덕수의 작품이 있었다. 그의 추리소설 몇 부는 모두 탐정의 시점에서 써 내려간 것이었다. 그저 소설의 특징으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그 탐정은 변덕수 본인일 가능성이 컸다!강서연이 시계를 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됐어요, 이 얘긴 그만해요. 시간도 이른데, 야시장에라도 갈까요?”최연준은 귀를 의심했다. 아들이 생긴 뒤로 강서연은 자신과 데이트를 나간 적이 없었다. 아들이 집에 있으면 그녀도 집에서 아들을 보살폈다.‘웬일이지?’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최연준의 반응을 본 강서연은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아들에게만 신경 쓰다 보니 남편을 잊었다.그래서 그녀는 최연준에게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왜요? 나가서 음식도 먹고, 물건도 사고 싶은데... 전에 강주에 있을 때처럼요. 그래도 돼요?”“당연하지!”최연준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오늘은 그녀와의 데이트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최연준과 강서연이 손을 꼭 맞잡고 떠나려는데, 최군형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서연이 급히 달려가 보니 최군형이 칭얼거리며 엄마를 찾고 있었다.보모가 멋쩍게 웃었다.“죄송해요, 도련님을 목욕시키려던 참이었어요.”최군형이 손에 든 고무 오리를 휘두르며 말했다.“싫어! 싫어! 엄마가!”강서연은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최연준과의 데이트를 저 멀리 뒷전으로 던져버렸다.“좋아, 엄마가 씻겨줄게!”강서연이 최군형을 안아 들고 목욕시키러 가는데, 마침 최연준과 딱 마주쳤다.“서연아...”“오늘은 나가지 말죠? 군형이를 두고 가려니...”최연준의 표
최군형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오늘은 아빠랑 같이 씻자, 앉지 말고, 서서!”“응? 그러면 안 돼요. 그럼...”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최연준은 아들을 데리고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철컥 잠가버렸다.강서연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뒤 물소리가 들려왔다. 최군형이 칭얼댔지만 최연준은 엄격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했다.“사나이가 이 정도로 무서워하면 어떡해? 머리 감는 거잖아! 왜 우는 거야? 최군형! 다시 한번 울었다가는 우유 없을 줄 알아!”강서연은 문을 따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군형은 이내 적응한 듯 깔깔 웃어댔다.얼마 후...“악!”최연준의 비명에 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왜 그래요? 넘어졌어요?”그 말이 끝나자 욕실 문이 열리더니 최연준이 수건을 두르고 굳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여보? 왜 그래요?”“괜찮아, 이 자식이 날 꼬집어!”“네? 어디를요?”최연준이 입을 꾹 다물고는 허리에 두른 수건을 꼭 잡고 있었다.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이때 최군형이 거품도 닦지 않은 채 흥분해 달려 나왔다.“응가, 응가! 가지고 놀래!”최연준이 최군형을 흘겨보고는 도망갔다. 강서연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웃으며 아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잘 씻기기나 하지, 왜 같이 씻겠다고 해서는!사실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군형이 손힘이 센데, 다친 건 아니겠지?......늦은 밤, 황궁에는 온통 불이 켜져 있었다.옥이는 특제 복숭아 향 향초를 켰다. 가연은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송이수가 이를 좋아했기에 계속 켜두고 있었다.향이 온 궁전에 퍼졌다. 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마마, 이제 쉬시지요.”옥이가 천천히 말했다. 가연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맨체스터 시티의 일은 잘 해결된 거야?”“네, 그 둘을 찾아냈습니다. 서지현의 양부모더군요.”“어떻게
가연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뭔데?”옥이가 침을 삼켰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부터 가연을 모셨기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깊었다. 하지만 가연에게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닌 듯싶었다.“제 아들 학교 말인데요...”“이미 해결해 줬잖아?”“마마, 그 학교는 꼴통 학교에요! 학생들은 패싸움하고, 선생들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하지만 호적이 필요 없는 건 거기뿐이잖아. 옥아, 네 아들은 사생아야. 호적도 없는 애가 어떻게 공립학교를 다녀?”옥이가 멍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가연의 비웃음 어린 눈길을 쳐다보았다. 십여 년의 충성이 한낱 종이조각이 된 기분이었다.호적?왕후의 시녀가 제 아들의 호적도 만들지 못한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가연이 입만 열면 해결될 문제였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가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가연에게 옥이는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옥이는 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 강서연에게 똑같이 말했었다.“제 아들은 사생아라서 호적에 없어요. 그래서 공립 학교를 못 다니는데, 사립 학교를 보내려니 학비가 너무 비싸네요.”“걱정 마요, 제가 해결해 줄게요.”강서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저 해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흘 뒤 남양 최고의 공립학교 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멍하니 뭐 해?”가연의 질책에 옥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붉어진 눈시울을 가렸다.“옥아,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알겠지만, 이게 내 최선이야. 내가 왜 한낱 시녀 때문에 학교 교장에게 부탁해야 해? 심지어 사생아잖아. 치욕스러운 사생아 말이야!”“마마! 사생아가 뭐 어때서요? 사생아는 이 세상에 살아갈 자격도 없는 거예요? 교육받을 권리도 없는 건가요?”가연은 서지현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사생아는 방해만 되는 존재야. 됐어, 여기까지 하자. 경고하는데, 여기저기 내 이름 대고 다니지 마. 들켰다가는 너고 네 아들이고 모두 끝이야!
서지현은 진작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이 일을 떠벌린 거잖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가연 왕후께서 저더러 법정에 출석하라고 했죠, 전하를 해친 사람이 윤정재 회장님인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죠.”송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지만 왕후의 바람대로 할 생각은 없어요. 법정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현 씨도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송혁준은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재판 과정이 복잡할 테니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죠.”“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고요?”서지현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송혁준은 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지현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났다.서지현은 그와 함께 자랐어야 하는,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생이었을 텐데 말이다.“전하.”서지현이 더 물었다.“무슨 일이 발생하는데요?”송혁준은 옆에 있던 나석진을 바라봤다.그는 오늘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두 사람 모두 이 일을 어떻게 서지현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윤정재는 진작 서지현의 혈통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는 기회를 빌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알리길 바랐다. 그래야 가연 왕후든 송지아든 더는 서지현에게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는 바로 이 사실을 재판할 때 알리는 거였다.“아, 아니에요.”송혁준은 팔꿈치로 나석진을 툭툭 치며 말했다.“무슨 말이라도 해봐. 오늘 밤도 네가 꼭 와야 한다고 해서 온 거잖아.”나석진이 고개를 들었다.서지현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그녀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맨체스터 시티 슬럼가에서의 첫 만남, 병원에서 생겼던 오해, 호텔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 그리고 스테이지 위에서 그녀와 같은 꽃차에
“서지현.”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지난번에 내가 술에 취했을 때 네가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잖아. 그때 반지 사이즈도 딱 맞는 것 같았어. 나, 나 그렇게 잘 맞은 반지를 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아.”“네?”서지현은 이 상황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나중에 네가 다시 가져갔잖아. 내 손가락이 텅텅 빈 것 같아 너무 괴로워!”“...”“서지현, 넌 내가 괴로운 게 좋아?”서지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나석진이 이렇게까지 조바심이 난 모습은 처음 봤다.그는 조급해 보였으나 또 그녀에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유달리 인내심이 있었고, 말투는 상냥함을 넘어서 비굴하기까지 했다.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서지현은 문득 누군가에게서 들은 남양의 주술을 떠올렸다. 그 주술은 사람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심장이 쿵 내려앉은 그녀는 바로 나석진에게 물었다.“아저씨, 혹시 주술에 걸렸어요?”...송혁준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서궁은 원래도 외딴곳이었지만 정원 안은 더욱 조용해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이 평온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하지만 이때, 반대편에서 흥분한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서지현의 목소리, 나석진의 목소리.그러다가 서지현과 나석진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기도 했다.‘뭐야? 두 사람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왜 싸우고 있어?’다시 돌아가려고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핑크색 가발을 쓰고 있는 나석진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반짝이는 뭔가가 하나 더 생겨 송혁준은 흠칫했다.‘끝내 반지를 뺏어온 거야?’“서지현, 감히 나에게 반지를 안 주려고 해? 흥, 이제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겠지?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만만한 사람인 줄 아나 봐!”송혁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석진을 보며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이때, 반대편에서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