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는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었다.송임월은 그의 앞길을 막더니 절반 바느질한 옷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바느질 다 하고 가!”“네?”어리둥절한 나석진의 표정을 보며 서지현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송임월은 서지현의 작은 손을 꼭 잡더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는 그녀를 데리고 편전으로 향했다.“나쁜 놈이니까 바느질을 마저 다 해게 해야지! 그래야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 아니야. 흥!”나석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가 서지현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메롱’ 표정을 지었다....요 며칠 동안 최연준은 변덕수를 도와 자료를 번역하고 있었다.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전의 도움이 있었기에 번역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어느덧 시간은 거의 자정이 되어 갔다.강서연은 서재에 들어가 우유 한 잔을 최연준의 옆에 살포시 내려놓은 후 그의 어깨를 주물러줬다.“군형이는 자?”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잠깐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강서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자기 전까지도 아빠가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렸어요. 그런데도 여보는 오지 않았죠!”“날 기다렸다고?”최연준은 약간 놀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놀라운 마음을 넘어서 감격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녀석은 그를 기다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요.”강서윤은 허리를 숙여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볼과 볼을 맞대며 말했다.“남자애니까 용감하고 듬직한 아빠가 옆에 함께하길 바라는 건 아닐까요?”“생각해 보니 군형이를 품에 안아 애지중지 키울 수 있는 시간도 2, 3년밖에 안 되더라고요. 이제 막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하겠죠? 그러면 집에서 기린처럼 목 빼고 자기를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겠죠?”최연준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김자옥은 전혀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보다 자
강서연은 표정이 나른해진 최연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손을 뻗어 최연준의 목을 감싸고는 그의 입가에 키스하기 시작했다.최연준은 바로 강서연의 교활한 눈빛을 포착했다.‘뭐야? 방금은 나 놀리려고 한 말이야? 아들 일곱 명이라니, 대단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군. 그렇게 많이 낳고 싶다고 해도 내가 원하지 않아. 아들 일곱 명이면 골칫덩이들만 등에 업는 셈이잖아, 그래도 딸이 좋지.’그렇게 생각한 최연준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굶주린 늑대처럼 강서연에게 덮쳤다.“여보!”강서연은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간파당할 줄 몰랐다.“정말 아들 일곱 명을 낳을 셈이에요?”“여보, 우리 내기할까?”“무슨 내기요?”“이번에는 무조건 딸일 거야!”“우웁!”강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최연준은 그녀에게 딥 키스를 퍼부었다....이튿날 아침.강서연은 몸이 부서진 듯이 아파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했다.어젯밤에 장난삼아 아들 일곱 명을 낳을 거라는 말을 했었는데 최연준은 그 거짓말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세를 몰아 새벽까지도 그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강서연은 온몸에 힘이 탁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최연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그의 얼굴을 찬찬히 지켜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아이가 생긴 후로 그녀는 정성을 다해 아들을 돌보느라 남편에게 소홀했었다.최연준은 이 일로 강서연에게 몇 번이나 불평했지만 강서연은 그를 아들에게 질투심이나 느끼는 철없는 인간으로 간주했다.미안한 마음이 든 강서연은 부드러운 손길로 각진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최연준은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아빠! 엄마!”이때 문밖에서 군형이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서연은 깜짝 놀라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때 가정부가 문을 두드렸다.“도련님, 사모님, 아기 도련님께서 두 분을 찾으시는데 들어가도 될까요?”“문을 잠그지 않았으니까 들여보내세요.
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소리 내 웃으며 얼른 아들을 안아 들었다. 산발이 된 최연준이 몸을 일으켰다. 놀라움이 가득 담긴 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진 상태였다.최군형만이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손뼉을 치며 깔깔 웃었다. 최연준은 깊이 심호흡하며 되뇌었다. 친아들이야! 친아들이라고!“여보, 괜찮아요?”강서연이 물었다. 최연준이 억지로 웃음을 쥐어짜며 대답했다.“괜찮아.”“그럼...”오늘도 변덕수에게 자료를 번역해 줘야 하나 물어보려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남양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서연아, 일어났어?”윤정재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최군형이 외쳤다.“하부지, 하부지!”“우리 강아지, 할아버지 생각 많이 했어? 어서 돌아와, 할아버지랑 반딧불이 잡으러 가자! 그런데 지금 할아버지가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 조금만 기다려줄래?”최군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폰을 강서연에게 넘겨주고 최연준의 품에 안겼다.아마 남양 쪽에서 때가 된 모양이었다.“무슨 일이에요?”“경찰서에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아마도 요즈음이 될 거야.”“왜요?”“최근 임월 전하가 발작을 일으킬 거야, 모든 단서는 날 가리키고 있고.”강서연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윤정재는 자신을 미끼로 숨은 주동자를 잡아낼 모양이었다.“그럼, 임월 전하는 안전해요?”“지현이에게 얘기해 뒀어. 혁준 친왕이 이미 서궁의 경비 절반을 나 장군의 수하들로 바꿔놓았어. 그러니 안전할 거야.”“네! 맨체스터 시티에서도...”“어서들 돌아와, 이번엔 꼬리 남기지 말고 확실하게 처리해야 해!”강서연이 뭔가를 결심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전화가 끊기자 최연준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덕수 아저씨가 민간 자료를 얻어냈대. 그 빈민가 길에서 한 외국 여자가 갓난아이를 남녀 한 쌍에게 넘겨줬대. 그걸 직접 본 사람이 있고.”“우리가 잡은 사람들일까요?”“그럴 가능성이 크지.”강서연이 생각에 빠졌다. 그들은 남녀 한 쌍뿐만 아니라 숙이와 옥이까지 잡았다.
최연준은 눈을 부릅뜨고 최군형의 다리를 잡아 한쪽으로 밀어버리려 했다. 다행히 강서연이 잽싸게 움직여 다시 아들을 안아왔다.최연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제삼자가 생기고 말았다.강서연이 아들을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아들에게도 질투해요? 덕수 아저씨께 드릴 자료는 다 됐어요?”“응. 다 끝났어.”“그럼 우리...”“이제 남양으로 돌아가 모든 진실을 밝힐 차례야!”......서지현이 황급히 서궁에서 뛰쳐나왔다.“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그녀의 비명이 황궁 안을 뒤덮었다. 하지만 서궁에는 시위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그녀는 문가에서 그만 막히고 말았다.“제발 나가게 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을 찾아 임월 전하를 구해줘요! 꾸물대다간 정말 큰일 나요!”시위들은 서로를 힐끔거렸다. 의문이 들었지만 이는 황족의 일이었기에 그들은 바로 가연 왕후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연이 송지아를 데리고 서궁 바깥에 나타났다.문 앞에서 기다리던 서지현은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가연의 앞으로 다가갔다.“왕후 마마, 임월 전하를 구해주세요!”“무슨 일이에요? 어서 말해요!”이때 송혁준이 궁전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이를 본 송지아도 썩 놀란 눈치였다.“네... 네가 어떻게?”“고모께서 아프신데 당연히 와 봐야지.”송혁준이 일정한 속도로 위엄 있게 말했다. 송지아는 가연을 슬쩍 보고는 송혁준에게 물었다.“지금 상태가 어떠셔?”“이미 안정되셨어.”송혁준이 왕후에게 다가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숙모님, 걱정 마세요. 소식을 듣자마자 의사를 데리고 왔어요, 이미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에요. 지금 내전에 계시는데, 아직 많이 허약하셔서 사람을 만날 수는 없대요.”가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마침 잘된 일이다. 그녀는 애초에 송임월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가연이 날카로운 눈길로 서지현을 쳐다보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중해졌죠? 간호를 제대로 안 한 거 아니에
윤제 그룹의 재산을 빼앗아 올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송지아가 부추겼다.“숙모님, 어떻게든 윤정재를 잡아야 해요. 황족을 암살하려 했으니 사형에 처해야 해요!”가연은 인상을 쓰고 송지아를 째려보았다. 사형 여부는 사법 기관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벌써부터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을 하지 않는데, 군주가 되었다간 남양의 국격이 떨어질 게 뻔한 일이었다.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차가운 목소리로 서지현에게 물었다.“지현 씨는 요새 계속 서궁에 있었는데, 별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서지현은 옷깃을 꼭 잡고 눈을 도르르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이건 엉클이 가르쳐준 연기였다. 두렵고 초조한 사람은 이렇게 행동한다고 했다.나석진의 도움하에 열몇 번을 시도해서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서지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왕후마마, 전하... 저, 제가 임월 전하를 보살피긴 했지만, 윤 회장님이 오시면 저를 내전에서 쫓아냈어요! 저와 다른 시녀들을 모두 내쫓고 홀로 임월 전하를 치료했어요요.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오늘 전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잘못되는 줄 알고... ”송혁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썼다.‘나석진 이 자식, 대체 뭘 가르쳐준 거야? 저 표정이며 동작이며 너무 과장됐잖아, 연극 하는 거야?’하지만 서럽게 우는 서지현의 모습에 가연은 속아넘어간 듯했다. 가연이 명령했다.“윤정재가 확실해! 어서 궁전을 수색해서 증거를 찾아! 찾으면 바로 경찰에 넘기고.”증거란 주방 꼭대기 찬장에 있는 주사 한 병이었다.가연이 서늘하게 웃었다. 윤정재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번엔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었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최군형을 데리고 남양에 돌아왔다.전용기가 착륙하자마자 강서연은 윤정재가 잡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남양시의 유명인이었기에 이 소식은 금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각 포털사이트의 서버가 마비되었다.“윤제 그룹 회장 윤정재가 황실 사람을 해치려 했다는 소식
윤제 그룹이 금세 통제당했다. 그 산하의 공장과 약국이 모두 운영을 중단했다. 외국과의 무역도 모두 중단되었다. 심지어는 윤제 그룹 소유의 병원들도 환자를 받지 않았다.단 며칠 사이에 윤제 그룹이 통째로 흔들렸다.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송이수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본 윤정재는 뛰어난 실력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윤제 그룹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공장이 약값을 올릴 때도 20년간 같은 가격을 고수하던 사람이었다.한두 번, 한두 달은 자선 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20년씩이나 이런 일을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송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연의 말이 그런 송이수의 생각을 억눌러놓았다.“폐하,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도 폐하와 같은 생각이겠지만, 이번 일은 임월이에게 일어난 일이에요! 폐하가 가장 아끼는 동생 말이에요! 전에 저희 쪽 의사가 치료했을 땐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왜 윤정재의 치료를 받고 갑자기 쓰러진 걸까요? 폐하, 이번 일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임월이를 가장 아낀다고 할 자격도 없어요!”“내 동생을 해친 자는 엄하게 벌해야 해!”송이수가 고민하다 손을 저으며 왕후에게 일의 뒤처리를 남겼다. 가연이 집중한 얼굴로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토록 못된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송이수의 말 한마디에 가연은 한참을 기뻐했다.“이수 씨,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날 너무 미워하지 마요, 네?”...윤상 빌라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윤제 그룹의 원로, 주주, 가문의 친척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거실의 식탁에 모여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누군가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회사는 어떻게 할까요?”“전 지분 0.5%를 가지고 있어요, 현금으로 바꿔줘요!”“제 지분도 1%가 채 안 돼요, 하지만 전 이외에도 배상금을 원해요!”“맞아요! 집이든 땅이든 나
“오, 이분이 최씨 가문 도련님?”한 중년 남성이 핸드폰의 동영상을 보며 말했다. 특히 마지막의 ‘우리 윤씨 가문을 무시하는 거냐’는 말을 듣고는 더욱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윤정재는 눈을 바둑판에 고정한 채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툴툴거렸다.“내 말을 듣긴 하는 거야?”윤정재가 바둑돌 하나를 꽝 하고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자네...”“그러게 집중했어야지, 누가 내 사위를 연구하랬어?”남자가 야비한 눈빛으로 윤정재를 째려보았다. 윤정재는 피식 웃고는 남자가 가지고 온 차를 음미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의학 서적 몇 권을 가져오라고 부탁까지 했다.이는 독채였다. 정교하게 지어진 화원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사처의 경비들이 없었다면 이곳이 남양 교도소의 한 부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윤정재와 바둑을 둔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대장군, 나도훈이었다.윤정재는 잠시 남양 교도소에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훈은 인맥을 동원해 그를 이곳에 배정한 뒤 종종 그를 보러 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어느날 윤정재와 영상통화를 하던 강서연이 깜짝 놀라 말했다.“아빠, 감옥에도 특실이 있어요?”“왜, 최연준 그 자식이 네게 얘기해주지 않았어?”강서연이 입을 삐죽하며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곳에 가보지도 않은 최연준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어이, 뭐 해?”나도훈이 윤정재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정신을 차린 윤정재가 바둑판을 치웠다.“안 해.”나도훈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최연준이 장모를 돕는 장면을 반복해 보고 있었다.“자네 데릴사위를 정말 잘 들였어.”“데릴사위는 무슨! 내 딸이 최씨 가문에 시집간 거야.”“오, 그래? 꽤 마음에 드나 보네? 전엔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누가 그래? 우리 사위가 최고야! 다시 한번 함부로 말했다간 침으로 찔러버릴 거야!”두 사람이 티격태격했다. 마침
가연의 짓이 분명했다. 이 한 달 사이에 송임월에게 계속 이전의 약물을 주사해 영원히 깨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윤정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석진아, 지금은 누가 임월 전하를 치료하고 있어?”“예전의 의사요. 이모부께서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가연 왕후가 예전의 의사들을 모두 불러왔어요.”윤정재의 판단이 맞았다. 송임월에게 주사한 약물이 만악의 근원이었다!“서지현더러 그 약을 가져오라고 해!”“이모부, 그건...”나석진이 인상을 썼다. 그 혼자서 모험을 하더라도 서지현이 이 일에 휘말리는 건 싫었다.“꼭 서지현이 해야 해.”“왜요?”“그건...”윤정재가 말하려다 말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찬이한테 가서 검사지를 달라고 해, 그리고 서연이와 연준이가 네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거야. 그걸 들으면 알 수 있어.”나석진과 나도훈은 모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나도훈이 나석진을 떠밀었다.“됐어, 이모부가 시키는 대로 해. 이 자식 이상한 짓 많이 하잖아.”“뭐라고?”“너 이상하다고!”“나도훈!”두 사람이 한데 엉겨 붙었다. 나석진이 다시 둘을 뜯어말렸다.......서지현이 꽃에 물을 주러 가려는데, 먼 곳에서 몇 사람이 걸어왔다.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궁은 경비가 삼엄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데, 저 사람들은...서지현이 물통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송혁준이었다. 그는 서지현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의 눈이 많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고모는 좀 어때요?”“똑같아요,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여긴 예전에 고모를 치료했던 의사들이에요. 숙모님이 소개해 주셨어요.”송혁준이 낮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서지현이 뭔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몇몇 의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서지현에게 제지당했다.“황실 규칙에 따라, 임월 전하의 내전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새로 온 시녀인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