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그는 자신이 상의 실종으로 오후 내내 양복점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에는 드나드는 손님이 많지 않았는데 다들 가게에 이런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내심 긴장했다.비록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얼굴이 너무 썩은 표정이었고 게다가 벌거벗고 있다.별로 정상적인 사람은 안 같아 보인다!그래서 나석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 많지도 않은 손님을 물리쳤다.그의 셔츠는 단추가 다 뜯어져서 입을 수도 없었다.결국 그는 할 수 없이 한숨을 쉬며 셔츠를 입고 단추가 없어서 셔츠 양 끝을 매듭지어 단단한 가슴이 은은하게 드러냈다.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지현이 손에 장미 빙수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그녀는 그를 보자 한 첫마디가...“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나석진은 이어 없어서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원수다!’그는 일생을 호탕하게 살았는데 하필이면 이런 원수를 만나다니!서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 보니 그가 여기서 오후 내내 앉아 있었으니 틀림없이 덥고 목이 마를 것이다. 평소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버릇이 되어 그는 물 한 잔도 스스로 따르지 못할 거로 생각해 그녀는 천천히 빙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뒤로 달려가 빈 그릇을 가지고 와 빙수를 반쯤 떠서 그에게 주었다.“아저씨도 드세요.”그녀는 배시시 웃었다.빙수는 투명하여 안에 있는 장미 꽃잎도 볼 수 있는데, 가까이서 냄새를 맡아보니 은은한 꽃향기가 난다.맛은 깔끔하고 좋을 것 같았다.보아하니 서지현의 솜씨다.나석진은 침을 삼키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갑자기 최연준이 전에 그에게 말해 준 것이 생각났다.그때 강서연이 막 최연준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받아들이지 못하여 한동안 그와 떨어져 지내며 그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그녀가 그와 말도 섞지 않고 상대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연준은 매일 뻔뻔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한번은 그가 또 그녀를 따라서 한 골목 식당에 들어가 국밥을 주문했는데 맞은편에 있는 그를 보며 빈 그릇 하나를
줄일 수 있다고?서지현은 약간 갈팡질팡했다.나석진은 그녀에게 다가가 속마음을 떠보았다.“전에 왕후가 네가 만든 옷을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만약 황궁에 들어가 수녀가 될 기회가 있다면 정식 신분을 빨리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돈도 벌 수 있을 거야. 이 기회가 있다면 할 거야?”서지현은 마치 로또에 당첨한 것 같았다.그러나 인생 18년의 경험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그녀의 그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통해 체득한 경험을 볼 때 좋은 일이 공짜로 나타날 수 없는 법이다.왕후는 너무 많은 인재를 보았기 때문에 굳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을 궁중에 남겨 수녀가 될 필요가 없었다.더군다나 그 궁전도 그리 재미있는 곳은 아니다. 황실이 어떤 곳인지 가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로 본 적은 있다.그 사람들은 하나둘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실은 속셈이 많다.그녀는 복잡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환경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화려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곳에 비하면 차라리 이 작은 양복점에서 15년을 더 기다리고 싶다.서지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전에 찾아온 그 여친왕을 생각했다...그녀를 궁전에 들여보내는 생각은 아마도 그 여자의 생각일 것이다! 도대체 뭘 하고 싶길래?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하든, 그녀와 접촉하지 않으면 송지아는 서지현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서지현은 담담하게 장미 빙수 한 입을 삼키고는 굳건히 고개를 저었다.“싫어요.”이 대답은 오히려 나석진을 기쁘게 했다!사실 아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계속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했다. 이 계집애가 신분을 얻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궁전에 덤벼들까 봐 두려웠다.만약 그녀가 정말로 궁전에 들어가겠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반드시 막을 것이다.송지아는 마음씨가 그리 착할 리가 없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 송지아의 그 한바탕 도발을 생각할수록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안전을 위해서 그는 서지현이 황궁에 들어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장단점을 분석했다 하더라도 장
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의 송혁준이 그의 눈에는 다소 이상하게 보였다.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없다고 말하면 되지 왜 그러지 못한다고 하는 거지?말을 하면 똑바로 말만 하면 되지 왜 또 고개를 숙이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지, 무슨 뜻이지?최연준은 자신이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고 생각하였으나, 오늘 송혁준을 보고 나서야 세상에는 아직 그가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잠시 침묵하다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전하께서 저에게 전하를 알아보는지 물으셨는데, 저는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괜찮아요.”송혁준은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학창 시절 일이니 잊어버리는 게 당연하죠.”“전하도 본트론에서 공부하셨어요?”“네.”송혁준은 두 손을 겹치고 엄지손가락을 비볐다.“그때 제 성적이 좋지 않아서 저를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죠.”그러나 그의 은혜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답하려 한다.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이 반쯤 풀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동문이었기에 송혁준이 두 번째 만남 때 그렇게 물은 거다.다만 그는 공부할 때 사람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아서...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전하께서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은 아니겠죠? 제게는 최연서라는 동생이 있는데 학교에서 아주 활발했어요. 전하께서 혹시...”“저는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습니다.”송혁준은 고개를 저으며 눈빛이 더 깊어졌다.“제가 아는 사람은 최씨 집안 셋째 도련님 최연준입니다. 이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고요!”최연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전에 아는 사이니까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송혁준은 그가 말하려 하자 바로 똑바로 앉았다.최연준은 여전히 안색이 굳어 있었고 표정은 엄숙했지만, 입에서 내뱉는 말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사실 전하께서는 일부러 제 아내에게 그렇게 많은 보살핌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아내는 단순하고 선량하지만, 결코 연약하지도 멍청하
최연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에 의문의 빛이 들었다.그는 몸을 돌려 송혁준을 바라보았는데 이 사람은 위엄 있는 친왕이라기보다는 잘못을 저지른 여자친구처럼 제자리에 서서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전하... 무슨 뜻입니까?”최연준은 눈빛이 어두웠다.“저는...”송혁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저 화내지 말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최연준은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몸에 밴 위압감이 송혁준의 부하도 저절로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는 송혁준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전하, 왜 그러세요?”부하가 작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자 송혁준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곧 몸을 곧추세우고 또다시 친왕의 모습으로 회복했다.최연준은 그를 힐끗 보더니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돌아가는 길에서 나석진의 전화가 걸려 왔는데 그는 마침 물어보고 싶었다.“정말 송혁준 친왕과 소꿉친구에요? 참으로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매제,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에게 들키면 어떡하려고요!”나석진은 여유롭게 넥타이를 고르는 중이었다.오늘 주명희 세 아들이 모두 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고 하니, 그는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줘야 한다.“듣고 싶으면 들으라고 하세요! 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최연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저는 남양의 사위지 노예가 아니에요!”“네. 귀한 사위시죠, 그것도 데릴사위!”“나석진 씨!”“그만 놀릴게요. 우리 송혁준 친왕이 어떻게 했길래 당신을 화나게 했어요?”최연준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만나는 내내 송혁준은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공손하게 대하여 확실히 황실의 기품을 가졌다. 딱히 화나게 하는 일은... 정말 없는 것 같다.최연준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다 큰 남자가 여자처럼 칭얼대는 게 제일 보기 싫어요!”나석진은 말을 하지 않고 전화기를 움켜쥔 손을 움찔했다.“매제...”그는 반쯤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라고?”이번에는 최연준이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안 돼! 여보, 우리 부자를 갈라놓을 셈이야? 약속할게! 다신 안 세울게!”다시는... 안 세운다고?강서연은 눈을 굴리면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최연준이 밖에서 아무리 카리스마 넘치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행동해도 집에 돌아오면 늘 이런 횡설수설 실수를 한다.“그래요.”강서연이 그를 놀렸다.“앞으로 또 이렇게 아들을 들어 올리면, 당신은 영원히 세워지지 않을 거예요!”“당신...”최연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하지만 최군형은 분위기를 띄워줄 줄 알아 통통한 두 손을 움직이면서 최연준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마도 방금 나는 느낌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최연준은 나쁜 남자 웃음을 지으며 아들 앞에서 이 작은 여자와 따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밤에 방에 들어가면...“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최연준은 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내동댕이쳤다.“아, 아무것도 아니야!”“아들 안으세요!”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최연준은 어리둥절 아들을 받아 왔지만 눈은 줄곧 아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졌지...“여보, 왜 그래?”강서연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고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이 양심 없는 자식! 내가 매일 아들을 돌보고 먹여줬고 당신은 단지 아들을 두 번만 안아 올렸을 뿐인데... 지금 아들이 당신한테 가잖아요.”최연준은 웃었다. 알고 보니 아들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다.옛날 같으면 강서연은 이런 사소한 일로 삐딱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도 사전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임산부의 감정 기복이 보통 사람보다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아이를 낳은 후 막 초보 엄마로 변신한 터라 분명 여러 가지 심리적인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호르몬 탓에 쉽게 일을 더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일부분 산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과로가 오고 가족들까지 이해하지 못해 끔찍한 산후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있다.최
강서연은 영롱한 눈망울을 들어 올리며 속삭이듯 물었다.“만약 귀찮아지면요?”최연준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진지하고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출산의 고통을 당신 혼자 감당하게 했어. 이것은 내가 영원히 당신에게 빚진 거야. 그래서 다른 일로는 당신을 조금도 억울하지 않게 할 거야.”“여보...”강서연은 그를 꼭 껴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다.최연준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이걸로 감동받았어?”“네...”“정말 바보야!”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문질렀다.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지친 새들도 둥지로 돌아가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때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한 가지 생각을 정중하게 말했다.“서연아, 우리 여기서 결혼식 할까?”“네?”강서연은 잠깐 멈칫했다.“아들이 태어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결혼식을 빚지고 있어!”그는 웃으며 말했다.“남양에서 결혼식 올리는 거 어떻게 생각해?”...송혁준은 그 카페에서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청소할 시간이 되자 사장님도 밖에서 서둘러 돌아오셨다. 원래는 저녁에 영업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문 앞에 여전히 황실 호위병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감히 다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송혁준은 멍하니 최연준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어릴 적 그는 조용하고 얌전하며 얼굴이 하얗고 예쁘게 생겨서 일반 가족에서 태어났으면 분명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였을 것이다.그러나 황실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항상 어울리지 못했다.여자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노친왕이 노발대발하며 그를 황족 전체의 수치라고 여겼고, 송씨 가문에 그와 같은 괴물이 나타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중학교 때 그는 외국으로 피신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감시를 피하지 못했다. 노친왕은 허락도 없이 복싱 학원에 등록을 시켜놓고는 사람들에게 그를 감시하게 했다. 만약 학원에 가지 않으면 그의 모든 생활 터전을 끊어버렸다.송혁준은 그의 사나이다운
그 소리는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송혁준 인생의 어둠을 밝혀줬다.그는 흑인 백인 몇 명이 얼만큼 맞아서야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는지, 또 어떤 비천한 자세로 그 앞에서 사과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그냥 그때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보호를 받은 것이라는 것만 기억한다.태양신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그 용사는 그에게 희망과 따뜻함을 주었다.“괜찮아요?”송혁준은 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저는 복싱팀 리더 최연준입니다.”“최연준...”그는 그 각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는 것보다 더 볼썽사나운 미소를 지었다....“전하, 왜 그러세요?”송혁준은 번뜩 두 눈을 뜨고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는 눈앞의 빈 커피잔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커피를 이렇게 많이 마셨는데 어떻게 잠이 들 수가 있지? 심지어 그런 꿈을 꾸다니...’송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부하가 갑자기 그를 치면서 눈은 문 쪽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송혁준도 시선을 따라 바라보고는 잠시 멈칫했다.송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송혁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말하며 트러플 한 접시를 주문했다.송혁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지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부하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고 넓은 공간에는 그들 남매 둘만 남았다.이제는 무슨 얘기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최연준 만났어?”송혁준은 잠시 멈칫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송지아는 웃었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이 어리석은 남동생이 또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참 아깝네.”그녀는 트러플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먹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처자식이 있고 너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잖아!”“나는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하기를 바란 적이 없어.”송혁준은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했다.“그리고... 누나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누나를 좋아하지 않잖아!”“너...”송지아는 그를 노려보았
그러나 이 대궐 안에서 오직 송혁준만이 그녀의 친형제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현재 분위기에 따르면... 송혁준이 그녀보다 먼저 이 황위에 오를 것이다!송지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가운 그녀의 눈빛에 그를 향한 원망이 더해졌다.“잘난척하지 마.”그녀는 냉소했다.“나는 언젠가는 나석진을 차지할 것인데 너는 영원히 최연준을 갖지 못할 거야.”“갖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송혁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나는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그래. 너만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쳐. 최연준이 너의 마음을 안다면 여전히 지금 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송지아는 그를 비꼬았다.“누나! 너...”송혁준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고 이마에 핏대가 솟구쳤다.송지아는 의기양양하면서 이것이 송혁준의 한계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두려워해야 할 것은 송혁준이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동생 어깨에 한 손을 올리며 앉으라고 했다. 가느다란 목소리에 약간의 도발과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내 귀여운 동생아, 왜 말만 하면 조급해하니? 걱정하지 마. 누나는 입이 무거워서 소문날 일이 없을 거야! 하지만... 이 누나는 어릴 때부터 버릇이 있는데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만일 누가 가져간다면, 내가 조급해서 무턱대고 세상에 까발릴 수도 있겠지. 남양의 미래 존경받고 사랑받는 군주께서 사실은 내면이 더럽고 추잡한 괴물이라고!”송혁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떨었다.그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최연준과 강서연에게 폐를 끼칠까 두려워했다.송지아는 양손으로 가슴을 감싸안았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작은 카페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송혁준의 창백한 얼굴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 그리고 살짝 떨리는 두 어깨를 보면서 더욱 흥분했고 거만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곧이어 그녀는 송혁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