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전의 회의는 유난히 견디기 어려웠다.강서연은 왠지 방진영이 줄곧 야릇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고 이에 성소원은 적의에 찬 눈빛으로 날카롭고 예리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것만 같았다.회의가 끝난 후 방진영이 먼저 찾아와 말을 꺼내기 전에 강서연이 재빨리 깍듯하게 웃으며 핑계를 둘러대고 회의실을 나섰다.문을 나서기 전 성소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대체 뭐 하는 거야? 여우 같은 년한테 아주 시선을 못 떼던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강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점심시간에 이 일을 임우정에게 알리자 그녀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큰 회사에서 하필이면 그 두 원수와 마주치다니, 임우정도 기막힌 우연에 한탄했다.“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조심스럽게 상대해.”임우정은 나지막이 그녀에게 말했다.“서연아, 난 이미 영업팀에서 나오다 보니 널 챙겨주기가 힘들어. 게다가 그 성소원 씨 외삼촌이 이 회사 대주주라 평소에 그것만 믿고 기고만장하게 날뛰어... 아무튼 앞으로 네가 갈 길이 험난할 거야. 조심스럽게 상대해야 해!”“알았어요, 걱정 말아요.”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나만 실수하지 않으면 성 매니저도 딱히 날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다만 그날 오후 성소원은 일부러 그녀에게 미션을 하나 주었다.“잠시 후에 티타임이 있을 예정이야. 이건 참석자 명단이고. 전부 우리 회사의 중요한 바이어들이니 준비 제대로 해.”강서연은 머리를 끄덕였다.명단에 대략 십여 명 인원이 적혀 있었다. 이번 티타임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고객이 만족할 수 있게 깔끔하고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참 그리고, 진안 그룹의 은 대표를 많이 신경 써야 할 거야.”성소원이 입꼬리를 올렸다.“모든 방면에 막강한 여자 대표인데 유독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서 디저트 준비할 때 절대 땅콩이 들어가면 안 돼.”“네, 명심하겠습니다.”강서연은 명단을 들고 자리를 나섰다.비록 첫 출근한 신인이지만 그녀는 조리 밝고 꼼꼼하게 정
“영업팀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중 하나에요.”성소원이 일부러 회사 정기 회의에서 야유 조로 비아냥거렸다.“누구든 영업에 천부적 재능이 없으면 자리만 떡하니 차지하지 말고 다른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남겨줘야죠! 우리 회사는 노후 보내러 온 장소가 아니란 걸 다들 잘 알고 있겠죠? 오더를 한 개도 내리지 못한 채 기본 수당만 받는 사람은 앞으로의 진로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요!”강서연은 줄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후 내내 그녀는 구겨진 미간을 펴지 못했다.다만 종일 지쳐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자마자 구현수가 양반처럼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주방은 텅 비었고 목을 축일 따뜻한 물조차 없었다.강서연은 오랫동안 참은 서러움이 그 순간 완전히 폭발하고 말았다.“당신... 밥을 안 지었어요?”구현수가 흠칫 놀라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눈앞의 그녀는 작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강서연은 맑고 커다란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만 질문 조의 말투가 전혀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서러움에 북받친 새신부가 제 남편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것만 같았다.구현수는 가슴이 움찔거려 그녀를 더 지그시 바라봤다.“왜 그래?”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무고한 표정으로 물었다.“결혼한 뒤로 줄곧 당신이 밥을 했잖아?”강서연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구현수의 체구에서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 앞에 서 있으니 덩치가 훨씬 더 커 보였고 순간 강서연은 마냥 연약해 보였다.게다가 그녀의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럽게 포용해주다 보니 구현수를 탓할 것도 없었다.다만...“그래요, 맞아요.”강서연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줄곧 내가 밥을 했죠. 하지만 이젠 출근도 해야 하잖아요. 현수 씨가... 현수 씨가 집안일을 좀 분담하면 안 되나요? 이 집에 나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오늘 늦게 돌아왔는데 현수 씨가 밥을 짓지 않더라도 최소한 식자재는
강서연은 이 제안을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구현수에게 이끌려 집 문을 나섰다.가는 길에서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머릿속엔 오직 이까짓 월급으로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그녀는 구현수를 힐긋거리며 생각했다.‘현수 씨는 줄곧 가난하게 살아서 강주시에 어떤 음식점들이 있는지 모를 거야! 현수 씨 소비 수준이라면 길거리 음식으로도 대충 끼니를 때울 수 있어. 그리고 어떤 음식점들은 주식이 무한 리필이라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야.’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그녀는 결혼한 이후로 줄곧 아껴 쓰며 검소하게 생활했다. 평소 끼니를 준비할 때도 저렴한 채소만 골라서 샀다. 다만 전에 강씨 일가의 연장자 도우미가 말하기를 젊은 부부는 열정이 식어가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가끔 나가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는 것도 부부의 감정을 더 승화할 수 있다고 했다.‘그럼... 오늘 아예 현수 씨를 데리고 밖에서 거하게 한 끼 먹을까?’강서연은 생각에 푹 빠져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보니 어느덧 구현수와 함께 가장 번화한 거리의 제인 호텔 입구에 떡하니 서 있었다!“여기로 해.”구현수는 마치 재래시장에서 배추 고르듯 홀가분하게 말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여기서 먹자고.”구현수가 실눈을 뜨고 가볍게 웃었다.“이 호텔 괜찮은 것 같아.”강서연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심코 가방을 꽉 잡았다.이곳은 강주에서 가장 비싼 오성급 호텔이라 그녀는 평소 문 앞을 지나면서도 고개 들어 간판을 쳐다보지 못했다.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으면 그녀의 월급으로 아마 밑반찬 한 접시도 사지 못할 것이다!구현수가 그녀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 두 명이 깍듯하게 90도 경례를 했고 매니저가 앞으로 마중 나오며 노련하게 미소 지었다.“어서 오세요.”“현수 씨!”강서연은 불쑥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왜 그래?”“우리...”‘우린 돈이 모자란다고요. 딴 곳으로, 저렴한 곳으로 바꾸면 안 될까요? 우리와 같은
강서연은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심장이 쿵쾅댔다.그가 뭘 알아낸 걸까?아니면 딴 사람들에게 강씨 일가에 사생아가 한 명 있는데 강유빈을 사칭하여 이 혼약을 이행했다고 엿들은 걸까? 그와 결혼한 여자는 사실 짝퉁이고 강씨 일가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걸까?남자들은 다 허영심이 있다 보니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가 예쁜 재벌 집 딸이길 바라지 그녀처럼 못생기고 촌스러운 신데렐라길 원치 않을 것이다.강서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녀는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 구현수는 싸움을 벌여 감방까지 갔던 사람이다...그런 그가 작정하고 화를 내면 후폭풍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네? 할 얘기라니요?”그녀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애써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아 참, 나 이번 달에 실적이 별로 없어서 다음 달에 더 분발해야 해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 함께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을 거예요. 현수 씨 혼자 잘 지낼 수 있죠?”“내가 애야?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구현수가 웃으며 그릇에 담긴 랍스터 볶음밥을 절반 덜어서 그녀에게 줬다. 강서연이 기어코 안 받으려 하자 구현수가 음침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내가 먹여줘?”그녀는 결국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수긍했다.잠시 후 구현수의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배경원한테서 온 문자였다.그는 몰래 주변을 살피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악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배경원과 그의 옆에 서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유찬혁을 발견했다.“나 화장실 다녀올게.”구현수는 담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하고는 레스토랑 복도 모퉁이로 걸어갔다.배경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부부가 애틋해 죽던데요?! 랍스터 볶음밥 1인분을 서로 한 숟가락씩 나눠 먹다니, 심지어 머리까지 맞대고요... 형이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걸 난 왜 전에 몰랐죠?”구현수가 힐긋 째려보자 배경원은 애써 입을 다물고 더는 나불거리지 못했다.“형, 경원이 뭐라 할
배경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배씨 가문이 강주에서 세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깨알만 한 작은 회사까지 조사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신분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만에 하나 또 저번처럼 강명원을 처리하다가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는다면...배경원은 마른기침을 해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형, 알아볼 순 있는데 미리 부정적인 얘기부터 해둘게요. 이 기간에 누군가가 헛소문을 퍼뜨리며 내가 형수님과 바람났다고 떠들어대도 절대 믿으면 안 돼요... 악!”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찬혁이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입사한 지 2개월이 되어가니 강서연은 더 열심히 일에 전념했다. 사회초년생의 생존 법칙도 거의 파악했고 성소원의 괴롭힘에도 원만하게 해결할 줄 알게 되었다. 방진영이 대놓고 또는 은밀하게 집적거려도 그녀는 저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하여 업무상에서 그와 최대한 적게 접촉하려 했다.다만 이 또한 엄청난 정력을 소모하기에 그녀는 매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집에 돌아와 하이힐을 벗고 소파에 누우면 가끔은 너무 피곤해 새벽까지 잠들기가 일쑤였다. 깨어나 보면 몸에 얇은 담요를 덮고 있고 구현수가 옆 마룻바닥에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구현수의 소파를 차지하고 잠들었을 때 구현수는 침실에 있는 그녀의 침대에 들어가 자지 않았다.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가슴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구현수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회사 다니기 그렇게 힘들면 그냥 관둬, 하지 마.”“어떻게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일을 안 하면 무슨 돈으로 집세를 내고 밥을 먹어요 우리?”“이까짓 돈에 연연하는 거야?”“이까짓 돈이요?”강서연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양반 납셨네요. 집안 살림을 안 하니까 쌀이 귀한 줄도 모르겠죠? 내 월급으로 우리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어휴, 오더를 많이 내리지 못하고 보너스를 받지 못하면 우리 앞으로 엄청 고생해야 할
임우정은 강서연이 회사에서 성소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안쓰러워 그녈 위해 업무를 더 뛰었고 본인의 거래처들도 그녀에게 소개해주며 발주를 내리는 데 관한 기교를 많이 전수해주었다.“너 기억해. 오더는 한 번에 성사되는 게 아니야. 주문 건 한 건도 수차례 상의해야 성사할 수 있어. 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강서연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평소에 바이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 네가 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그 사람들도 너에게 오더를 한 건이라도 내릴 것 아니야!”“네, 그건 저도 알아요.”“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임우정이 웃으며 말했다.“영업을 뛰려면 뻔뻔스러워져야 해! 체면을 다 내려놓아야 지갑이 두툼해질 수 있다고! 알겠어?”강서연은 예쁘고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반달웃음을 지었다. 이때 스크린에 그녀들의 식번이 떴고 강서연은 재빨리 음식을 가지러 카운터로 향했다.점심은 아주 간단한 패스트푸드인데 강서연은 가장 저렴한 야채 요리만 한 개 들고 왔다. 이에 임우정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그걸로 배부르겠어?”“문제없어요.”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저 원래 적게 먹어서 이거면 돼요.”“되긴 뭘 돼?! 영업을 뛰려면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엄청날 텐데 너 그 작은 체구로...”임우정은 말끝을 흐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집에 남편이 너 돈을 못 쓰게 감시하고 있어?”강서연이 해명하려고 할 때 구현수한테서 문자가 한 통 날라왔다.그녀는 문자를 확인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임우정은 어두운 표정의 강서연을 보더니 휴대폰을 뺏어와 힐긋 보고는 화가 나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너무했네 진짜!”임우정은 화가 나서 말까지 더듬거렸다.“아니 어떻게... 쇼핑을 할 수 있어? 벨트 하나에 60만 원이라고?”“언니, 목소리 낮춰요!”강서연이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다만 요즘 들어 구현수가 이상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즐겼는데 어느 하루는 강서연이
“언니는 몰라요.”강서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사실 현수 씨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잘해줘?”임우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결혼 둘째 날 강서연이 드레스를 돌려주러 가게에 갔다가 점원에게 굴욕을 당했을 때 구현수가 홧김에 가게에서 제일 비싼 드레스를 구매했고 그 점원더러 강서연에게 무릎 꿇고 사이즈를 재게 했다. 임우정도 그녀에게서 이 얘기를 전해 들었다.그땐 이 남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허영심이 차서 체면만 중히 여기며 심지어 성격이 매우 난폭하다고 생각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강서연의 적금으로 제멋대로 즐긴다는 것이다!“서연아, 현수 씨가 드레스 가게에서 널 위해 앞장 서주고 집에서 전해 내려온 가보까지 너에게 줬다고 널 엄청 잘해주는 거라고 여긴다면 네가 아직 너무 단순하고 결혼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밖에 해석이 안 돼!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꾸며나가는 거야. 너 혼자 죽어라 애쓰는데 남편이란 자는 정작 집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네가 벌어온 돈이나 마구 써대는 게 아니야! 그건 잘못된 거야.”임우정은 화가 나서 손가락으로 강서연의 머리를 살짝 찔렀다.강서연은 참 좋은 여자아이였다. 그저 심성이 너무 착한 게 탈이었다.누군가가 조금만 잘해줘도 평생 기억하며 여력을 다해 보답하려고 한다.구현수처럼 감방까지 갔다 온 사람을 만나니 착하고 순진한 그녀는 등골이 빼 먹혀 뼈도 추스르지 못할 정도였다!“사내대장부가 나가서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종일 마누라 돈만 써대는데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남자가 될 자격도 없어!”임우정이 한마디 보태자 강서연은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음침한 눈길로 정색하며 쏘아붙였다.“내 남편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임우정은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요, 난 항상 남편을 맞춰주고 보호해주려고 애써요!”강서연이 작정하면 말로 그녀를 이길 자가 없다.“그 사람은 내 남편인데 지켜주고 맞춰주는 게 뭐가 잘못됐죠? 단점이 얼마나 많은지도 다 알아요. 이
구현수는 제인 호텔 맨 위층 테라스에 앉아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는 거의 타들어 갈 듯싶었다. 먼 곳의 해수면에 파도가 반짝이고 바닷새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하얀 덫을 수놓아 절경을 이루었다.이때 탁자 위의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카드에 6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배경원과 유찬혁은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형 진짜 여복이 터졌네요! 형수님이 예쁜 데다가 흔쾌히 돈까지 주잖아요, 하하하!”“여태껏 살아오면서 여자 돈을 써보긴 형도 처음이죠? 느낌 어때요? 짜릿해 죽겠어요?”구현수가 둘을 힐긋 째려보며 휴대폰을 다시 원위치에 내려놓았다.비록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마음속에서부터 따뜻한 전류가 흐를 것만 같았다.강서연이 진짜 계좌 이체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녀의 은행카드에 기껏해서 60만 원 정도 남아있다는 걸 구현수는 잘 알고 있었다.그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몇 번 털면서 복잡한 눈길로 먼 곳을 바라봤다.“아 참, 형.”유찬혁이 나지막이 말했다.“경원이가 직접 나서기 불편해서 내가 호정 무역회사를 조사했어요. 성소원 씨는 회사 임원 층인데 주주인 외삼촌을 믿고 안하무인 격이래요. 게다가 또...”유찬혁은 계속 더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구현수의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얘기해.”“게다가 또 방진영 씨의 여자친구예요.”유찬혁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방진영 씨는 강서연 씨 부서의 매니저이자 대학교 선배이기도 해요. 학교 때 서연 씨를 쫓아다니기도 했고요...”구현수의 얼굴은 굳어버린 얼음처럼 아무런 파동이 없었지만 책상 위에 놓인 두 손은 어느샌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유찬혁이 마른기침을 해댔다.“형, 사실 학교 때 일은 별 거 아니에요.”“그래.”구현수가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내가 뭐라고 했어?”유찬혁은 실소를 터트렸다.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말을 내던진 것보다 더 심각했으니까.“계속해.”“회사에서 성소원 씨가 항상 서연 씨를 괴롭히고 있대요. 그래서 서연 씨는 입사한 첫 달에 오더를 한 개도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
백시연이 병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좌우에서 갑자기 두 명의 경호원이 다가와 백시연을 붙잡았다.머릿속이 새하얘진 백시연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거구의 남자들이었기에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한 남자가 거칠게 천 조각을 백시연의 입에 밀어 넣었다.백시연은 신음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그들은 병원의 구조를 꿰뚫고 있는 듯, 감시 카메라가 없는 경로를 정확히 따라 움직였다. 백시연은 어느 한 실험실로 끌려갔다.그곳에서 창가를 등진 채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욱이었다. 햇빛이 권욱의 실루엣을 감싸며 그의 냉혹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백시연은 눈을 크게 뜬 채 두려움에 몸부림쳤고 더 다급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백시연, 미안하군.”권욱의 목소리는 낮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널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권욱은 옆에 서 있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의사들은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호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백시연은 그대로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졌다.“윽!”“백시연,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권욱은 백시연을 냉랭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했다.“네가 더 몸부림칠수록 이 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거야. 하지만 협조하면 고통은 최소화될 거야. 알아서 잘 판단해 봐.”권욱은 경호원에게 손짓하며 백시연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빼내게 했다.갑자기 숨통이 트인 백시연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나는 네가 약속을 지키길 바랄 뿐이야.”“권욱...”“백시연.”권욱은 차갑게 말을 이어 나갔다.“넌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부모에게 아이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야. 그리고 내 딸은 지금 목숨이 위태로워. 네가 계속 핑계를 대며 골수 검사를 하지 않고 있으니... 흥!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렇게라도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설마 강제로 골수 검
종수의 눈빛에 묘한 어둠이 깃들었다.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사진 몇 장을 꺼내 백인서 앞에 내던졌다.백인서는 멍하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자신과 똑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듯 백인서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단번에 멈춰버렸다.“이 아이는 백시연이다.”종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의 쌍둥이 동생이지.”“쌍...쌍둥이요?”백인서는 귀를 의심하며 중얼거렸다.종수는 백인서를 잠시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홍이 누님은 한 번도 이 사실을 말한 적 없었겠지.”백인서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백인서는 줄곧 자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 백홍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세상에 더 이상 자신의 혈육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하지만 자신과 피를 나눈, 게다가 얼굴마저 똑같은 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당시 홍이 누님은 두 명의 아이를 낳았어. 하지만 너희는 사생아였고 이름도 가문도 없었지.”종수는 조용히 말했다.“홍이 누님은 입지도 부족했고 평판 또한 좋지 않았어. 늘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살아야 했지. 그래서 두 아이를 모두 데리고 있을 수 없었기에 결국 동전을 던져 남을 아이와 떠날 아이를 정했어.”백인서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리고 시연이가 남게 되었어.”종수는 백인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그리고 너, 인서... 너는 떠나는 쪽이었어.”백인서라는 이름도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떠날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홍이 누님은 널 정대명에게 맡겼고 매달 돈을 보내며 널 돌보게 했지. 그 작은 마을에 널 숨긴 이유는 그곳이 세상과 단절된 곳이라 누군가 널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홍이 누님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만약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너와 시연의 인생은 평생 망가졌을 거야.”백인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흥, 그 작은 마을이 정말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