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윤지, 듣고 있어?”송윤지는 정신을 차렸다. 막 대답하려던 순간,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진 씨, 아직도 여기서 커피 마시고 있어요?”“리사, 무슨 일이야?”“서류에 서명할 게 있어요!”배현진은 웃으며 대답했고 그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윤지는 허탈한 마음에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으며 심장은 빠르게 뛰고 답답함이 온몸을 휘감았다.송윤지는 본능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저 여자는 누구일까? 왜 배현진은 저 여자의 말을 그렇게 잘 들을까? 어떻게 그 여자가 일하라고 부르자마자 바로 가버린 걸까?그들은 매일 같이 지내며 서로 다른 감정을 키워가고 있는 걸까?방금 배현진은 송윤지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감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송윤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 작은 딸기 곰 인형이 눈에 띄었다.참 아이러니했다. 약혼자인 배현진과 보낸 시간보다 이 작은 곰 인형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다.송윤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을 꼭 안고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송윤희가 오성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남편인 오강호는 송윤희를 찾지 않았고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송윤희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적어도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지금이 비교적 편안한 나날이었다.이날 아침, 송윤지는 출근했고 송윤희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너에서 갑자기 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송윤희는 반응할 새도 없이 누군가에게 입과 코가 막힌 채 인적 없는 구석으로 끌려갔다.송윤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벗어나 마주한 것은 그녀가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악마의 눈이었다.“오강호? 너...”“흥! 여보, 잘 지냈어?”오강호는 뻔뻔하게 웃으며 눈빛과 표정에 계산된 악의가 가득했다.오강호는 몰락한 모습 그대로였다. 더럽고 낡은 옷에 온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머리는 기름져 보였다.송윤희는 두려움에
임지강은 매일 같은 시간에 유치원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론 최가원을 데리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단지 송윤지를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임지강은 송윤지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지어 보이는 맑고 순수한 웃음을 좋아했다.그 모습은 마치 송윤지가 과거 임지강과 함께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임지강은 종종 상상했다. 만약 두 사람의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쯤 이 유치원에서 뛰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자신이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둘은 더 나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갈 용기도 없었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할아버지!”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임지강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냈다.그는 자신이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가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임지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할아버지, 우리 여기 오래 서 있었잖아요!”“아... 그렇구나.”임지강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최가원의 손을 잡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할아버지, 매일 이렇게 오는 거 힘들지 않아요?”“뭐?”최가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혹시 송 선생님 좋아해요?”임지강은 그 말에 순간 멈칫하며 당황했다. 얼굴은 살짝 굳었고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무슨 소리야! 이 꼬맹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흥!”최가원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어리다고 눈이 멀진 않았거든요! 할아버지, 송 선생님 볼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알아요? 할아버지만 몰라요!”“너...”임지강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내 눈 멀쩡하니까 신경 꺼!”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왜 또!”임지강은 짜증을 내듯 말했다.하지만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마음은 또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최가원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이스크림 사주시
송윤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결혼?생각해 보니, 송윤지와 배현진은 처음 만날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것 같다.임우정이 소개한 관계이기도 했고 송윤지 자신도 조건이 나쁘지 않았으니 배씨 가문에서도 만족스러워하며 미래의 배씨 가문 며느리로 받아들였다.배현진 역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배현진은 연애 경험이 없었고 송윤지는 기억을 잃은 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송윤지는 과거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것이다.배현진은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가 배씨 가문의 배경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송윤지는 늘 그와의 관계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윤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윤지야! 대답 좀 해! 무슨 일이야?”“아, 아무것도 아니야.”송윤지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언니,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전화기 너머에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한참 지나서야 송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난 네가 빨리 배씨 가문에 시집가서 배씨 가문의 보호를 받았으면 좋겠어.”송윤지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언니, 설마 형부가 언니를 찾아왔어?”“더 이상 묻지 마...”“솔직히 말해봐!”결국 송윤희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60억이 필요하대... 도박하다 고금리 대출까지 써서 총 60억이야! 저 천벌 받을 놈이!”송윤지의 가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언니, 60억이라고? 그 큰돈을 어떻게...”“그래, 도박하다가 돈을 잃고 고금리 대출까지 썼대.”“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침착해.”송윤지는 언니를 안심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내가 현진 씨
임지강은 송윤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서둘러 국제 유치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임지강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최가원의 첫 번째 보호자는 최군형과 강소아인데, 그들이 바쁘다고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있는데, 어째서 자신, 외종할아버지의 차례까지 넘어온 걸까?그럼에도 임지강은 곧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감정 이입 때문일 것이다. 요즘 최가원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아이가 자신이 만나지 못한 자식처럼 느껴져 더욱 애틋해졌다.임지강은 유치원 보건실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최가원을 발견했다.“가원아, 너...”최가원은 임지강을 한 번 보고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임지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꼬맹이는 얼굴이 발그레하고 표정도 태연한 걸 보니 전혀 아픈 기색이 없었다.“어디가 아파?”임지강이 최가원의 작은 손을 잡으며 물었다.최가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지강을 살짝 꼬집으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하지만 곧 최가원은 힘없는 표정을 지으며 아픈 척하기 시작했다.“할아버지... 배가... 아파요.”“그래...”임지강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최가원을 안아 유치원을 나가려던 찰나, 송윤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임 대표님, 오셨군요!”송윤지는 몇 장의 검사 결과지와 약 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방금 가원이를 검진했는데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다만, 안전을 위해 약을 처방했으니, 집에 가서 복용하게 하고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송 선생님.”임지강은 송윤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약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다. 이 꼬마는 꾀병이 확실했다.하지만 양심은 있었는지 꾀병을 부리면서도 송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었다.임지강은 송윤지에게 인사하고 최가원을 안고 유치원을 나왔다.유치원 정문을 나서자, 최가원은 임지강의 품에서 벌떡 뛰어내렸다.“할아버지, 저 잘했죠?”작은 얼굴을 들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임지강은 최
송윤지는 또다시 미행당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배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배현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송윤지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고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오늘은 사람이 많은 대로를 골라 걸었다. 전처럼 외진 골목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뒤따라오는 사람은 계속 송윤지를 쫓아왔다. 송윤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보통 이런 길목에는 경찰차가 순찰하곤 했으니, 경찰차를 발견하면 바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하지만 아직 경찰차를 발견하기도 전에 송윤지는 미행자가 한 명 더 늘어난 것을 알아챘다.물론 두려웠지만 송윤지는 지난번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배현진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송윤지는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송윤지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송윤지는 곧장 뛰어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뒤따라오던 두 남자가 송윤지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송윤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번졌고 눈빛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송윤지?”한 남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형부가 돈을 못 갚았으니 널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네!”그 말과 함께 그들은 송윤지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송윤지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아파트 경비를 향해 외치려 했지만, 다른 한 남자가 송윤지의 입과 코를 거칠게 틀어막았다.송윤지는 어지러움과 구역질에 휩싸였지만 이를 악물고 숨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바로 그때였다. 남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고 송윤지를 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송윤지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휘청거리다가 곧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송윤지는 멍한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건 임지강의 든든하면서도 따뜻한 눈빛이었다.“무서워하지 마요.”임지강은 한 팔을 들어 송윤지를 단단히 지키며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송윤지는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에 휩싸였다.송
야채 국수에서 따뜻하고 고소한 향이 은은히 퍼져 나왔다. 송윤지가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임지강이 젓가락을 들려던 순간, 상처가 벌어져 거즈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송윤지는 다급히 임지강을 눕히고 상처를 다시 붕대로 감쌌다.손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송윤지는 조심스럽게 국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저기...”임지강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 나이에 송윤지 앞에서 아직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굼뜨고 서툴다니.“다치셨잖아요. 움직이지 마세요.”송윤지의 눈빛에는 맑음과 단호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제가 먹여드릴게요.”임지강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할 마음조차 없었다.송윤지가 건네준 국수를 한입 먹었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번지자,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저기.”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그 두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요?”송윤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송윤지는 몰랐다. 사실, 임지강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여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이사를 가는 게 좋겠어요.”임지강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제 월급으론 여기서 더 좋은 데로 갈 수가 없어요.”“하지만 송윤지 씨는 배현진의 약혼녀잖아요.”임지강은 의아해했다.“배현진은 배씨 가문의 후계자인데 이런 문제에서 당신을 방치할 리가 없잖아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송윤지는 슬며시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위험한 순간, 배현진에게 음성 전화를 걸었지만, 배현진은 끝내 받지 않았다. 아마 시차 때문에 바빴겠지. 하지만 얼마나 바쁘길래 전화 한 통 받을 시간도 없었던 걸까?송윤지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배현진과의 관계를 떠올려 보니, 약혼할 사이가 맞는지 의문이었다. 처음 배씨 가문이 송윤지와 배현진의 관계를 받아들인 것도 아마 대부분 임우정의 영향 덕분일 것이다.
임지강은 주먹을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어도 돈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배현진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돈을 아껴본 적이 없었다.“설마.”임지강은 반쯤 농담처럼 물었다.“두 분 약혼하고도 비용 똑같이 부담하는 거예요?”송윤지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당황함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거짓말이 들통난 초등학생처럼 두 손을 불안하게 비비고 있었다.“저기... 제가 텀블러를 가져다드릴게요.”송윤지는 핑계를 대며 방을 나가려 했지만, 문가에 도달하기도 전에 임지강이 송윤지를 불러 세웠다.“윤지 씨, 저 빈 오피스텔 하나 있어요.”송윤지는 멍하니 멈춰 섰다.임지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곳으로 이사 가요. 제가... 월세는 좀 깎아 줄게요, 어때요?”...그 오피스텔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최고급 아파트였다.70평이 넘는 대형 평면 구조로, 남향이어서 채광이 아주 좋았다. 통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설계 덕분에 창 앞에 서면 거리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밤이 되면, 자동차 불빛과 도시의 야경이 장관을 이루었다.아파트는 깔끔한 회백색 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세련미와 고급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했지만, 인테리어 자재 하나하나가 최고급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지 한 장조차도 고급스러움이 배어 있었다.송윤지는 오피스텔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송윤지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묘한 고통이 서서히 밀려왔다. 아주 미세한 통증이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송윤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오피스텔을 둘러보던 언니 송윤희를 바라보며 송윤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이 집은 임 선생님이 우리에게 빌려준 거야. 월세는 낮게 해준다고 했어.”송윤희는 깊은 뜻이 담긴 눈길로 송윤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
송윤지는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송윤지는 낮게 대답한 뒤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늦은 저녁, 배현진에게서 음성 전화가 왔다. 여느 때처럼 바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송윤지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송윤지가 전화를 건 지 벌써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현진 씨.”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사이가... 뭔가...”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이 문장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꿀꺽 삼켜버렸다.배현진은 순간 말을 멈추고 무언가 눈치챈 듯 물었다.“송윤지, 너 거기서 무슨 일 생겼어?”“아니.”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이사했어.”“그래.”“다음에 돌아오면, 예전 집으로 가지 마.”“승진했어?”배현진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물었다.“월급 올랐겠네? 축하해!”송윤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희미한 쓴웃음을 지었다.송윤지는 배현진과 자신이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알았어, 더 얘기 못 해. 나 좀 바빠.”“바빠?”송윤지는 의아했다. 지금은 그곳에서 한밤중일 텐데, 대체 무슨 일로 바쁜 걸까?“현진 씨, 나...”“송윤지, 이따 얘기하자.”배현진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이제 다시 연락할게. 그리고... 다음 달 초에 잠깐 돌아갈 거야. 그때 우리 결혼식 일정 얘기하자, 알겠어?”“응.”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송윤지의 대답에는 약간의 무심함과 실망이 섞여 있었다.송윤지는 자신과 배현진 사이에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아마도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건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송윤지는 부드러운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였고 먼 경치를 바라보니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주말, 임지강이 약속대로 송윤지의 집에 찾아왔다.하지만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최가원도 데려왔다. 송윤지가 어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최가원은 문을 열자마자 송윤지에게로 달려가 품에 안겼다. 꼭 활기찬 작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