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강은 송윤지를 태운 채 차를 돌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차 안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송윤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고 몸도 떨고 있었다.임지강은 대화를 시도하며 송윤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아, 집이 이 근처인가요?”“여기서 조금 더 가야 해요.”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평소엔 이 길로 안 다녀요. 오늘은 퇴근이 좀 늦어서 여기로 가면 더 가까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따라올 줄은 몰랐어요...”“이런 어둡고 조용한 골목은 조심해야 해요.”“네...”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어 임지강을 바라보았다.“근데... 임 대표님,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임지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임지강은 자신이 송윤지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사실 임지강은 최근 송윤지를 계속 몰래 따라다녔다. 혹시 집으로 가는 길에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돼서였다. 송윤지의 집은 중간 정도의 가격대인 아파트 단지에 있었고 시내 중심가라 주변은 늘 붐볐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임지강은 입술이 바짝 말랐고 대충 둘러댔다.“제 친구가 근처에서 작은 바를 운영해요. 제가 가서 좀 도와줬거든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바람 쐬러 골목에 나갔는데... 우연히 송윤지 씨를 만난 거죠.”“술을 마셨어요?”송윤지는 눈을 크게 뜨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차 안에서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송윤지는 여전히 걱정하며 말했다.“술 마셨으면 운전하면 안 되죠!”“아, 뭐...”임지강은 자신이 벌인 거짓말이 허술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태연하게 계속 이어갔다.“아니에요. 제가 마신 게 아니라 친구가 마신 거예요. 그래서 친구랑 같이 바람 쐬러 간 거죠.”“그럼, 그 친구분은요?”“그게...”“친구를 골목에 혼자 두고 온 거예요?”“그러니까...”임지강은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자신이 왜 이렇게 허둥대는지 이해
“송윤지, 듣고 있어?”송윤지는 정신을 차렸다. 막 대답하려던 순간,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진 씨, 아직도 여기서 커피 마시고 있어요?”“리사, 무슨 일이야?”“서류에 서명할 게 있어요!”배현진은 웃으며 대답했고 그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윤지는 허탈한 마음에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으며 심장은 빠르게 뛰고 답답함이 온몸을 휘감았다.송윤지는 본능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저 여자는 누구일까? 왜 배현진은 저 여자의 말을 그렇게 잘 들을까? 어떻게 그 여자가 일하라고 부르자마자 바로 가버린 걸까?그들은 매일 같이 지내며 서로 다른 감정을 키워가고 있는 걸까?방금 배현진은 송윤지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감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송윤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 작은 딸기 곰 인형이 눈에 띄었다.참 아이러니했다. 약혼자인 배현진과 보낸 시간보다 이 작은 곰 인형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다.송윤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을 꼭 안고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송윤희가 오성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남편인 오강호는 송윤희를 찾지 않았고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송윤희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적어도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지금이 비교적 편안한 나날이었다.이날 아침, 송윤지는 출근했고 송윤희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너에서 갑자기 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송윤희는 반응할 새도 없이 누군가에게 입과 코가 막힌 채 인적 없는 구석으로 끌려갔다.송윤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벗어나 마주한 것은 그녀가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악마의 눈이었다.“오강호? 너...”“흥! 여보, 잘 지냈어?”오강호는 뻔뻔하게 웃으며 눈빛과 표정에 계산된 악의가 가득했다.오강호는 몰락한 모습 그대로였다. 더럽고 낡은 옷에 온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머리는 기름져 보였다.송윤희는 두려움에
임지강은 매일 같은 시간에 유치원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론 최가원을 데리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단지 송윤지를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임지강은 송윤지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지어 보이는 맑고 순수한 웃음을 좋아했다.그 모습은 마치 송윤지가 과거 임지강과 함께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임지강은 종종 상상했다. 만약 두 사람의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쯤 이 유치원에서 뛰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자신이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둘은 더 나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갈 용기도 없었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할아버지!”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임지강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냈다.그는 자신이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가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임지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할아버지, 우리 여기 오래 서 있었잖아요!”“아... 그렇구나.”임지강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최가원의 손을 잡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할아버지, 매일 이렇게 오는 거 힘들지 않아요?”“뭐?”최가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혹시 송 선생님 좋아해요?”임지강은 그 말에 순간 멈칫하며 당황했다. 얼굴은 살짝 굳었고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무슨 소리야! 이 꼬맹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흥!”최가원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어리다고 눈이 멀진 않았거든요! 할아버지, 송 선생님 볼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알아요? 할아버지만 몰라요!”“너...”임지강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내 눈 멀쩡하니까 신경 꺼!”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왜 또!”임지강은 짜증을 내듯 말했다.하지만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마음은 또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최가원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이스크림 사주시
송윤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결혼?생각해 보니, 송윤지와 배현진은 처음 만날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것 같다.임우정이 소개한 관계이기도 했고 송윤지 자신도 조건이 나쁘지 않았으니 배씨 가문에서도 만족스러워하며 미래의 배씨 가문 며느리로 받아들였다.배현진 역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배현진은 연애 경험이 없었고 송윤지는 기억을 잃은 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송윤지는 과거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것이다.배현진은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가 배씨 가문의 배경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송윤지는 늘 그와의 관계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윤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윤지야! 대답 좀 해! 무슨 일이야?”“아, 아무것도 아니야.”송윤지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언니,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전화기 너머에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한참 지나서야 송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난 네가 빨리 배씨 가문에 시집가서 배씨 가문의 보호를 받았으면 좋겠어.”송윤지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언니, 설마 형부가 언니를 찾아왔어?”“더 이상 묻지 마...”“솔직히 말해봐!”결국 송윤희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60억이 필요하대... 도박하다 고금리 대출까지 써서 총 60억이야! 저 천벌 받을 놈이!”송윤지의 가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언니, 60억이라고? 그 큰돈을 어떻게...”“그래, 도박하다가 돈을 잃고 고금리 대출까지 썼대.”“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침착해.”송윤지는 언니를 안심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내가 현진 씨
임지강은 송윤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서둘러 국제 유치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임지강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최가원의 첫 번째 보호자는 최군형과 강소아인데, 그들이 바쁘다고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있는데, 어째서 자신, 외종할아버지의 차례까지 넘어온 걸까?그럼에도 임지강은 곧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아마도 감정 이입 때문일 것이다. 요즘 최가원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아이가 자신이 만나지 못한 자식처럼 느껴져 더욱 애틋해졌다.임지강은 유치원 보건실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최가원을 발견했다.“가원아, 너...”최가원은 임지강을 한 번 보고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임지강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꼬맹이는 얼굴이 발그레하고 표정도 태연한 걸 보니 전혀 아픈 기색이 없었다.“어디가 아파?”임지강이 최가원의 작은 손을 잡으며 물었다.최가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지강을 살짝 꼬집으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하지만 곧 최가원은 힘없는 표정을 지으며 아픈 척하기 시작했다.“할아버지... 배가... 아파요.”“그래...”임지강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최가원을 안아 유치원을 나가려던 찰나, 송윤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임 대표님, 오셨군요!”송윤지는 몇 장의 검사 결과지와 약 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방금 가원이를 검진했는데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다만, 안전을 위해 약을 처방했으니, 집에 가서 복용하게 하고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감사합니다, 송 선생님.”임지강은 송윤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약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다. 이 꼬마는 꾀병이 확실했다.하지만 양심은 있었는지 꾀병을 부리면서도 송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었다.임지강은 송윤지에게 인사하고 최가원을 안고 유치원을 나왔다.유치원 정문을 나서자, 최가원은 임지강의 품에서 벌떡 뛰어내렸다.“할아버지, 저 잘했죠?”작은 얼굴을 들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임지강은 최
송윤지는 또다시 미행당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배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배현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송윤지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고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오늘은 사람이 많은 대로를 골라 걸었다. 전처럼 외진 골목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뒤따라오는 사람은 계속 송윤지를 쫓아왔다. 송윤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보통 이런 길목에는 경찰차가 순찰하곤 했으니, 경찰차를 발견하면 바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하지만 아직 경찰차를 발견하기도 전에 송윤지는 미행자가 한 명 더 늘어난 것을 알아챘다.물론 두려웠지만 송윤지는 지난번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배현진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송윤지는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송윤지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다. 송윤지는 곧장 뛰어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뒤따라오던 두 남자가 송윤지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송윤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번졌고 눈빛에는 악의가 서려 있었다.“송윤지?”한 남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형부가 돈을 못 갚았으니 널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네!”그 말과 함께 그들은 송윤지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송윤지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아파트 경비를 향해 외치려 했지만, 다른 한 남자가 송윤지의 입과 코를 거칠게 틀어막았다.송윤지는 어지러움과 구역질에 휩싸였지만 이를 악물고 숨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바로 그때였다. 남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고 송윤지를 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송윤지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휘청거리다가 곧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송윤지는 멍한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건 임지강의 든든하면서도 따뜻한 눈빛이었다.“무서워하지 마요.”임지강은 한 팔을 들어 송윤지를 단단히 지키며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송윤지는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에 휩싸였다.송
야채 국수에서 따뜻하고 고소한 향이 은은히 퍼져 나왔다. 송윤지가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임지강이 젓가락을 들려던 순간, 상처가 벌어져 거즈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송윤지는 다급히 임지강을 눕히고 상처를 다시 붕대로 감쌌다.손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송윤지는 조심스럽게 국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저기...”임지강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우스워졌다. 이 나이에 송윤지 앞에서 아직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굼뜨고 서툴다니.“다치셨잖아요. 움직이지 마세요.”송윤지의 눈빛에는 맑음과 단호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제가 먹여드릴게요.”임지강은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할 마음조차 없었다.송윤지가 건네준 국수를 한입 먹었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번지자,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저기.”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까 그 두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요?”송윤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송윤지는 몰랐다. 사실, 임지강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여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요. 이사를 가는 게 좋겠어요.”임지강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제 월급으론 여기서 더 좋은 데로 갈 수가 없어요.”“하지만 송윤지 씨는 배현진의 약혼녀잖아요.”임지강은 의아해했다.“배현진은 배씨 가문의 후계자인데 이런 문제에서 당신을 방치할 리가 없잖아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송윤지는 슬며시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위험한 순간, 배현진에게 음성 전화를 걸었지만, 배현진은 끝내 받지 않았다. 아마 시차 때문에 바빴겠지. 하지만 얼마나 바쁘길래 전화 한 통 받을 시간도 없었던 걸까?송윤지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배현진과의 관계를 떠올려 보니, 약혼할 사이가 맞는지 의문이었다. 처음 배씨 가문이 송윤지와 배현진의 관계를 받아들인 것도 아마 대부분 임우정의 영향 덕분일 것이다.
임지강은 주먹을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어도 돈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배현진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돈을 아껴본 적이 없었다.“설마.”임지강은 반쯤 농담처럼 물었다.“두 분 약혼하고도 비용 똑같이 부담하는 거예요?”송윤지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당황함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거짓말이 들통난 초등학생처럼 두 손을 불안하게 비비고 있었다.“저기... 제가 텀블러를 가져다드릴게요.”송윤지는 핑계를 대며 방을 나가려 했지만, 문가에 도달하기도 전에 임지강이 송윤지를 불러 세웠다.“윤지 씨, 저 빈 오피스텔 하나 있어요.”송윤지는 멍하니 멈춰 섰다.임지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곳으로 이사 가요. 제가... 월세는 좀 깎아 줄게요, 어때요?”...그 오피스텔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최고급 아파트였다.70평이 넘는 대형 평면 구조로, 남향이어서 채광이 아주 좋았다. 통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설계 덕분에 창 앞에 서면 거리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밤이 되면, 자동차 불빛과 도시의 야경이 장관을 이루었다.아파트는 깔끔한 회백색 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세련미와 고급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했지만, 인테리어 자재 하나하나가 최고급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지 한 장조차도 고급스러움이 배어 있었다.송윤지는 오피스텔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송윤지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묘한 고통이 서서히 밀려왔다. 아주 미세한 통증이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송윤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며 진정하려 애썼다. 옆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오피스텔을 둘러보던 언니 송윤희를 바라보며 송윤지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이 집은 임 선생님이 우리에게 빌려준 거야. 월세는 낮게 해준다고 했어.”송윤희는 깊은 뜻이 담긴 눈길로 송윤지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
임지강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만, 입이 머리보다 빨랐다. 임지강은 바로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가원아,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가는 곳이 어디야?”“음...”최가원은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남성이라는 곳이에요. 이름이 뭐더라... 아, 스튜디오였던 것 같아요!”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 최가원이 어설프게 짜맞춘 주소를 토대로 검색해 본 끝에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그곳은 개인 고급 웨딩드레스 브랜드로 디자이너는 오성에서 최고로 손꼽히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임지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적인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을 배현진이 직접 찾았을 리 없었다. 아마도 배윤아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예약한 게 틀림없었다.생활비조차 반반 나누는 남자가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에 돈을 쓸 리는 없어 보였다....주말에 남성에서.배현진과 송윤지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웨딩드레스 매장에 도착했다. 최가원은 화려한 드레스를 처음 본 터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꼭 궁전에서 뛰노는 작은 토끼 같았다.수석 디자이너인 마리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다.“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화려한 꽃무늬 두건을 두르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독특한 스타일의 디자이너가 나타나자, 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에헴! 저는 Mary... 아니, 마리입니다!”“제 이름의 ‘리’는 날카롭다는 뜻이지,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에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이고 겨우 웃음을 참았다. 배현진이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송윤지도 한 발짝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마리는 송윤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정말 제가 본 신부 중 가장 아름다운 신부예요! 좋아요, 우선 신부 화장을 먼저 시험해 봅시다. 신랑분은 서두르지 마시고 잠시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배현진은 이 모든 일이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송윤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올 때만 해도 설렜던 마음이 한순간에
“원래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임우정이 웃으며 강소아를 끌어당겼다.“지강아, 잘 왔어. 오늘 점심은 집에서 먹고 가. 군형이랑 소아한테 기쁜 소식이 있거든!”“뭔데요?”“나, 곧 또 외할머니가 된다니까!”임지강은 순간 멍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강소아는 얼굴이 붉어져서 최군형의 어깨에 기대어 다정한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소아가 또 임신했어요.”최군형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딱 석 달 됐어요. 상태도 안정적이고 특별히 힘든 것도 없어서 모든 게 좋아요!”“아, 축하해.”임지강은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했다.정말이지...방금 매형과 누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나온 것도 모자라, 이번엔 이 두 사람까지. 이 집안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 외로운 싱글을 괴롭히려는 건가?“와! 할아버지다!”땀에 흠뻑 젖은 최가원이 신나게 마당에서 달려 들어왔다.손에는 장난감 총을 들고는 임지강을 향해 두 번 쏘는 척했다.임지강은 맞은 척하며 소파 위로 쓰러졌고 최가원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음소리를 터뜨렸다.“할아버지, 우리 마당에서 놀아요!”가원이는 임지강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잡아끌어 마당으로 데려갔다.임지강은 거실의 온갖 다정함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뻤다.마당에서 최가원은 깡충깡충 신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뒤따르던 임지강의 표정에는 어딘가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최가원이 임지강의 손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들어 물었다.“할아버지, 왜 저랑 안 놀아줘요?”“가원아, 우리 잠깐 앉아 있을까? 응?”“네!”최가원은 얌전히 임지강의 무릎 위에 앉았다.그리고 작은 손으로 그의 이마를 살짝 쓸어내렸다.임지강은 최가원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너희 엄마 뱃속에 작은 아기가 있는 거 알고 있어?”“알아요!”“그럼 동생이 남자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니면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음... 남자아이가 좋겠어요!”“왜?”“남자아이는 내가 때려도 되잖아
다음 날, 송윤지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임지강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송윤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임지강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송윤지 씨?”임지강은 속에서 밀려오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전화하셨어요?”“저... 언니 일에 대해서 들었어요.”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대표님이 도와준 거 알아요. 정말 감사드립니다.”“아, 별거 아니에요.”임지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조 회장이 예전에 우리 형부랑 좀 인연이 있었거든요. 이번에 형부 대신 옛정을 나눈 셈이죠.”“임 대표님, 제가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송윤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지난번처럼요. 집으로 오세요. 제가 요리를 준비할게요.”임지강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너무 기뻐서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소리치고 싶었다. 송윤지의 초대에 바로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임지강은 감정을 숨기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괜찮아요.”송윤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사실... 우리 언니가 초대하고 싶어 했어요. 임 대표님이 도와준 일에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빚 문제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도와주셨잖아요...”“정말 괜찮다니까요.”임지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겐 별거 아닌 일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임 대표님...”“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전화가 끊기며 화면이 꺼지자, 송윤지의 눈빛도 함께 어두워졌다.임지강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부하가 다가와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그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이 서류, 서명하실 건가요?”“아...”임지강은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서명하려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서류의 엉뚱한 곳에 서명할 뻔했다.부하는 임지강
“윤지야.”배현진이 송윤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말 이해했어?”송윤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송윤지는 배현진의 말을 이해했다.결혼 후에도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생활비도 나눠 부담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가정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돕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다.물론, 배씨 가문은 명문 가문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반면, 송윤지처럼 소박한 가정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 끊이지 않는다.“현진 씨.”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결혼 전에 계약서도 작성하자는 건 아니겠지?”“어떻게 알았어?”배현진의 눈이 반짝이며 웃음을 지었다.“송윤지, 네가 드디어 내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구나! 정말 너무 기뻐.”“그래... 그렇구나.”송윤지는 멍해졌다. 그저 배현진의 의도를 떠보려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게 되었다.“결혼 전 계약서는 반드시 작성해야 해.”배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요즘 외국에서는 젊은 부부들이 거의 다 이렇게 한다고. 나는 해외에서 오래 살면서 이런 관념에 익숙해서 결혼 전 계약서 작성하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결혼 전에 모든 걸 명확히 해두면, 나중에 이혼하게 되더라도 불필요한 갈등이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잖아. 그게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너...”송윤지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혼까지 생각하고 결혼하는 거야?”배현진은 가볍게 웃었다.“그냥 대비하는 거야. 물론 아무도 이혼하려고 결혼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배현진이 덧붙였다.“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 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런 관계를 맺는 방식은 논리적으로는 틀릴 게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혼한 후에도 경제적으로 각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하지만...만약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지 못하고 함께 고난을 이
며칠 동안, 송윤지는 유치원 앞에서 임지강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최가원을 데리러 오는 사람도 최씨 가문의 가정부와 경호원으로 바뀌어 있었다.송윤지는 방과 후 시간이 되면 이유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임지강을 찾곤 했다.스스로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임지강의 모습이 송윤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날, 아파트로 돌아온 송윤지가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맞은편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배현진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송윤지와 마주 섰다.“나... 주전자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현진을 안으로 들였다.송윤지는 자연스럽게 실론 홍차를 우려내어 가져왔지만, 배현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그래?”“나는...”배현진은 송윤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나는 이런 차를 좋아하지 않아.”송윤지는 놀라서 멈칫했다.사실 송윤지는 배현진이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이 실론 홍차는 며칠 전 임지강이 왔을 때 마셨던 차였다.송윤지는 얼굴이 붉어졌다.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차를 바꿔오려 하자 배현진이 송윤지를 붙잡았다.“송윤지,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송윤지는 배현진의 눈을 보며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지난번엔... 내가 잘못했어.”배현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와 임지강 씨의 사이를 오해한 것도, 너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도 다 미안해. 내 약혼자를 믿어야 했었는데...”송윤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네 형부의 60억은...”배현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송윤지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 긴장한 표정으로 배현진을 바라봤다.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초조한 마음이었다.“내 의견은 여전히 같아.”배현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분명했다.“이 빚은 그 사람의 문제야. 그 사람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은 기억나지 않았다.“제 사업은 모두 부하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정지한은 솔직하게 말했다.“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죠.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강호라는 사람은 놀고먹으며 도박에 빠진 쓰레기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분은...”임지강은 잠시 멈춘 뒤 말을 이었다.“그자는 제 아내의 형부입니다.”“아내의 형부라고요?”“그렇습니다.”임지강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오강호이라는 자가 대담하게도 제 아내를 담보로 삼았습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정 회장님의 사람이 와서 제 아내를 데려갈 거라고 말했더군요.”“세상에, 그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정지한의 표정이 한순간에 심각해졌다.그때, 누군가가 정지한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다.정지한은 문득 깨달은 듯 눈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며칠 전, 제 부하 둘이 잡아간 게 당신 짓이었군요!”임지강은 여유롭게 대답했다.“그들은 제 아내를 괴롭히러 왔습니다. 경찰에게 넘긴 건 오히려 가벼운 처벌이죠.”“임지강 씨...”정지한은 순간 자신이 경찰과 함께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정지한이 눈짓을 보내자, 주위 부하들이 순식간에 총을 꺼내 임지강에게 검은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임지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그의 눈빛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정 회장님, 오늘은 진심으로 대화하러 온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찰은 데려오지 않았습니다.”정지한은 눈을 굴리며 부하들에게 총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누군가 오강호가 작성한 고금리 대출 차용증을 가져왔다.차용증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송윤지를 담보로 넘기고 정지한이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차용증은 여기 있습니다. 임 대표님, 혹시 제가 이걸 찢어버리길 원하는 겁니까?”
며칠 후, 부하가 초대장 한 장과 함께 정지한이라는 사람의 자료를 임지강 앞에 가져왔다.“정지한이라는 사람은 줄곧 운산시 암흑가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오성에서 세력은 크지 않지만,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습니다.”“그래서.”임지강은 자료를 대충 넘기며 말했다.“결국 성공했어?”“그다지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부하가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오성은 원래부터 대표님 매형의 영역입니다. 경섭 형님은 암흑가에서 손을 뗐지만, 그분의 영향력은 여전히 정지한보다 훨씬 큽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뭔데?”“정지한은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람입니다. 오성의 소규모 세력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더구나 경섭 형님은 이미 암흑가 일에 손을 뗐기 때문에, 정지한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규칙에 따라 경섭 형님은 아무리 영향력이 있어도 이런 일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지한의 주요 사업은 카지노와 고금리 대출입니다. 운산시와 오성 양쪽 모두 그의 카지노와 대출 사업이 자리 잡고 있죠. 오강호가 바로 정지한이 운영하는 카지노에서 돈을 잃었고 그 60억도 정지한에게 빌린 돈입니다. 다른 소규모 세력들도 이 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정지한의 일이기 때문에 암흑가의 규칙을 깨뜨릴 수 없거든요.”“음...”임지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초대장을 흘깃 쳐다보았다.“이번 주말, 정지한이 새로운 카지노를 개업한다고 합니다.”부하가 말했다.“대표님이 경섭 형님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 같습니다.”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알았다.”부하가 물러난 뒤, 임지강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니코틴 냄새가 임지강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임지강은 예전에 담배와 술을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송윤지와 헤어진 후 모든 것을 끊어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위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송윤지를 위해 나서기로 마음먹었다.주말이
임지강은 송윤지가 환하게 웃으며 배현진을 집 안으로 들이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지강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복도를 서성이다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분을 삼키지 못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배현진이 왜 여기 살고 있는 거야?”전화를 받은 부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임지강은 눈을 감고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깊이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었다.“그러니까 배현진이 어떻게 마린 광장 아파트로 오게 됐는지, 왜 하필 내 집 바로 건너편인지 그 이유를 묻고 있잖아!”“그게...”“당장 조사해!”임지강은 전화를 끊고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가 다급히 조사 결과를 보고해 왔다.“임 대표님, 배 도련님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배씨 가문의 소유가 아닙니다. 벤처 투자로 번 첫 수익으로 구입한 개인 자산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런데 왜 하필 여기야?”“그게...”부하는 난감해하며 말했다.“아파트가 워낙 인기 있다 보니, 사고 싶다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죠.”임지강은 가슴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송윤지 집 앞까지 천천히 걸어가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이 아파트는 최고급 자재로 지어진 데다 방음까지 완벽해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배현진... 오늘 밤 이곳에 머무를까?사람들은 흔히 떨어져 지낸 사이는 더 애틋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아니야!임지강은 즉시 부정했다.송윤지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결혼하지 않는 이상 절대 자신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예전에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머릿속이 복잡한 상념으로 뒤엉키며 부적절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임지강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팔뚝에는 핏줄이 터질 듯 도드라졌다. 그리고 두 눈은 문에 고정되었다. 이성을 붙들고 있던 끈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당장이라도 문
“뭐라고?”임지강은 고개를 돌려 최가원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살짝 안아 올렸다.“가원아, 집에 데려다줄게.”“그럼, 할아버지는 어디 가려고요?”“나는 놀이공원에 가볼까 해.”최가원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나도 갈래요!”“미안해, 가원아.”임지강은 최가원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함께 갈 수 없어. 할아버지 혼자 있고 싶어.”최가원은 살짝 입을 내밀었지만, 떼를 쓰거나 울지 않았다. 늘 자신을 아껴주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무거운 고민이 담겨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그의 마음속 고민이 혹시 송 선생님과 관련된 걸까?작은 공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송 선생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려주면 항상 기분 좋은 반응이 돌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밀을 하나 알려주면 할아버지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최가원은 입술을 꾹 누르더니 임지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할아버지, 제가 송 선생님에 대한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송 선생님이 왕자님이 곧 돌아온다고 했어요!”“뭐라고?”임지강의 얼굴빛이 변했다.“진짜예요!”최가원은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아까 고추장 사러 갔을 때, 송 선생님이 직접 그랬어요. 왕자님이 이번에 돌아오면 결혼 얘기를 하자고 했대요... 할아버지, 결혼하면 아빠랑 엄마처럼 사진도 같이 찍고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거죠?”임지강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최가원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거의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다행히 뒤에 있던 경호원이 재빠르게 최가원을 받아냈다.놀라움에 휩싸인 최가원은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 창백했고 눈동자 깊숙이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몇몇 경호원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임지강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임지강은 주먹을 더 단단히 쥐었다.“임 선생님, 저희가...”경호원 중 한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임지강은 갑자기 몸을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