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성은 오랜만에 육연우와 함께 외출해 식사하러 나왔다. 최상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로, 모든 조건이 완벽히 갖춰진 곳이었다.최군성은 요리사에게 육연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고 외부의 방해는 전혀 없었다. 잔잔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고, 햇살은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와 다채로운 카스미 카펫 위에 따뜻하게 내려앉았다.모든 것이 평온하고 고요한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최군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육연우를 바라보았다. 육연우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육연우의 귀 옆으로 한 가닥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육연우는 손을 들어 조용히 그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은 예전과 다름없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최군성의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군성 씨.”육연우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지난번에 내가 읽어보라고 했던 책 다 읽었죠?”최군성은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까지의 평화로움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최군성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육연우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육연우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육연우의 눈엔 최군성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어른거렸다. 복잡하고 난해한 처세술처럼 육연우의 말과 태도는 최군성의 열정과 활기를 서서히 잠식해 갔다.“군성 씨?”육연우는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물었다.“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아...”최군성은 고개를 떨군 채 포크와 나이프로 접시 위 음식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응, 읽었어...”“다 이해했죠?”“응.”“경영학 책들도 모두 회사 운영에 관련된 실무 사례들이었는데, 그 책들도 다 읽었나요?”최군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꾸려 했다.“연우야, 이 새우 딤섬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너...”“최군성 씨!”육연우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좀 진지하게 할 수 없어요?”“...”“솔직히 말해봐요. 그 책들, 아예 안 읽었죠?”최군성은 입술을
최군성은 예전에 말했었다. 좋은 남자 친구라면 여자 친구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기에, 휴대전화를 언제든지 확인해도 괜찮다고.하지만 그때의 육연우는 어리석었다. 단 한 번도 최군성의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았다.지금은...연우는 시선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살며시 문질렀다....최군성은 화장실 안에서 한참을 있었다.차가운 물로 얼굴을 여러 번 씻어내며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잠시나마 진정시켰다.솔직히 말하면, 최군성은 지금 육연우에 대한 감정이 너무 복잡했다. 사랑보다는 죄책감이, 애정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이제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심지어 육연우를 보는 것도 두려웠다. 육연우의 메시지를 받는 것도, 전화를 받는 것도 두려웠다.하지만 최군성은 육연우를 완전히 떠날 수 없었다.최군성이 가장 두려운 것은 육연우가 다시 한번 자신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최군성은 평생 무거운 죄책감을 짊어지고 비참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최군성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얼굴을 닦아낸 후 밖으로 나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군성은 억지로 밝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했다.“연우야!”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최군성이 마주한 것은 육연우의 차갑고 음침한 눈빛이었다.최군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우야... 왜 그래?”최군성을 바라보고 있는 육연우의 눈에는 칼날이 숨겨진 듯했고 입가에는 차디찬 미소가 서렸다.“군성 씨,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었어요?”“뭐가?”육연우는 갑자기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최군성은 멍해졌다. 화면에는 배윤아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떠 있었다.최군성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고 온 세상이 하얗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최군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육연우를 바라보았다. 육연우는 예전에 절대 최군성의 휴대전화를 본 적이 없었다.최군성은 떳떳했기에 배윤아와의 대화를 굳이 지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연우야, 내 말 좀 들
최지용은 수면제 조사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최군형 집으로 왔다.“병에 라벨은 없었지만,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한 몇몇 약장수들은 병 모양만 보고도 이 약을 알아차리더군.”“너 대단하다.”최군형이 웃으며 말했다.“약장수들까지 알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이것이 최지용이 다른 최씨 자손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다.“이 약은 몇 년 전 이미 시장에서 퇴출당했어.”최지용이 간결하게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이 약을 자살 명약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지.”“뭐라고?”최군형은 놀라서 물었다.“하지만 사람들이 이 약을 사는 이유는 진짜 자살하려는 게 아니었어.”최지용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약장수 말로는 이 약을 사 간 대부분이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었고 상대를 붙잡기 위해 자살을 가장하려고 샀다고 하더군. 정해진 양을 먹으면 심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해를 끼치지 않지.”“일반적인 수면제는 과다 복용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 있지만, 이 약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이 약을 많이 이용해.”최군형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약이 이런 효과가 있었다고? 그럼, 의사들까지 속았다는 거야?“이 약은 사람을 속이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실제로 수면이 필요한 사람에겐 전혀 효과가 없어. 그래서 몇 년 전에 나라에서 이 약을 금지했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 팔리고 있지.”“그럼... 육연우가 암시장에서 이 약을 구한 게 확실하겠네?”최지용은 입꼬리를 올렸다.“당연하지.”“육연우가 어떻게 암시장 사람들과 연결된 거지?”“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지.”최지용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검은’ 일에 관한 건 네 장인이 전문가잖아!”최군형은 갑자기 이해했고 형제는 서로 웃음을 주고받았다.그때 서재 밖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본능적인 경계심이 발동한 최지용은 재빠르게 문을 열었고 밖에 있던 강소아는 놀라서 움찔했다.“어머, 미안해!”“괜찮아요.”강소아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강소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며 살며시 최군형의 어깨에 기대었다.강소아의 머릿속에는 항상 예전에 육연우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곤 했다.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느껴졌다.아마도 임신의 영향인지 요즘 강소아는 감정이 풍부해졌고 지금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마음 이해해. 동생이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아프겠지.”최군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군성이는 내 동생이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군성이를 지켜왔어...”“이번에도 예외는 없을 거야!”최군형의 말은 단호했다. 강소아의 슬픔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강소아는 최군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사실 최군형은 늘 강소아를 보호하고 있었다.이런 남자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강소아는 평생 어린아이처럼 안심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에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에요.”강소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최군형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덧붙였다.“나도 알고 있어요. 연우가 예전에 나에게 진심으로 잘해줬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많이 변했다는 것도 사실이죠.”“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야.”최지용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소유 동생, 사실 나랑 군형이가 제일 걱정했던 건 너였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니, 우리도 더 이상 걱정할 게 없네.”최군형은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너 지금 꽤 기뻐 보이는데?”“당연하지! 그 여자가 우리 집 인서를 그렇게 괴롭혔으니, 나한테도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야.”최군형과 강소아는 동시에 최지용을 쳐다보았다.“어...”최지용은 머리를 긁적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만약 육연우가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온다면, 나도 다시 친절하게 대할 거야. 하하!”*시간이 흘러 강소아는 임신한 지 어느덧 넉 달에 접어들었다. 강소아의 배는 살짝 불러왔고 초기 임신 증상은 사라졌으며 식욕이 왕성해졌고 잠이 많아졌다.최군형은 아내가 회사 일로 고생하는 것을 못 본 척할
동혜림은 순간 다른 속셈이 생겨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을 몰래 찍으려 했다.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동혜림의 어깨를 붙잡았다.“어머, 뭐해?”동혜림은 혼이 나갈 정도로 놀라 소리칠 뻔했다. 그녀는 몸을 움찔하며 뒤돌아서 조순영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마주했다.“사모님...”“뭐 찍고 있어?”조순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동혜림의 휴대전화 카메라가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쪽에 서 있던 사람은 바로 백인서였다. 그리고 백인서와 대화를 나누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최근 임시로 회사에 상주하고 있는 육씨 집안 사위, 최군형일 것이다.조순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최군형의 당당한 풍채와 백인서의 떳떳한 표정을 보아 두 사람은 그저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 어쩌면 업무상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그런데 이 여자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조순영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지었다.마음이 불순한 사람은 모든 것을 더럽게 보기 마련이다.지난번 백인서가 자신을 도와준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 이 비열한 여자가 백인서의 명예를 더럽히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래서 조순영은 동혜림을 향해 비꼬듯 말했다.“또 누구 남편을 눈여겨본 거야? 어머, 이번엔 최씨 집안의 도련님이네?”“아, 아니에요, 그게...”동혜림은 서둘러 해명하려 했지만, 조순영이 말을 막았다.“아이고, 동혜림 씨! 우리 집 그 평범한 남자를 꼬신 것도 모자라, 이제 금수저 물고 태어난 최씨 집안 도련님까지 노리려고? 그 사람 아내가 너희 회사 대표님이잖아!”“사... 사모님!”동혜림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제발 조용히 해요!”조순영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조순영은 알고 있었다. 동혜림이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리고 그 소리가 저쪽에 있는 최군형과 백인서에게 들리는 걸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말이다.그때 조순영은 손에 들고 있던 팥빙수가 생각났다... 이건 아침에 집에서 만들어온 것이었다. 며칠 전 권욱과 다투고 친정
“권 대표님...”동혜림은 온몸이 엉망이 된 채 눈물에 젖은 얼굴로 권욱을 바라보았다.권욱은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눈빛에는 연민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권 대표님, 사모님이 저를...”“내 아내가 왜?”“그게...”동혜림은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했다.이렇게 팥빙수를 뒤집어쓰고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게 뻔히 보이지 않는가?“재클린.”권욱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넌 줄곧 내가 널 애인으로 둔 걸 자랑으로 여겨왔잖아? 흥, 만약 옛날이었다면 넌 우리 집의 '첩'이었을 거야.”조순영은 순간 멍해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권욱을 바라보았다.“첩이라면.”권욱은 천천히 조순영 옆으로 걸어갔다.“본처가 너를 욕하고 때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러니 불만 느끼지 마. 팥빙수 한 통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설령 내 아내가 화가 나서 네게 염산을 뿌려도 넌 감수해야 해! 알겠어?”“뭐라고요?!”동혜림의 얼굴은 분노로 새하얗게 질렸다.하지만 조순영은 동혜림보다 더 놀랐다.조순영의 기억 속에서 권욱이 그녀의 편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권욱.”조순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권욱은 조순영을 힐끗 보며 말했다.“아직 노망 들 나이는 아니야.”“그럼...”조순영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왜...”“조순영.”권욱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정의의 사도처럼 보여?”조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스며들었다.사람들은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감탄과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권 대표님이 저런 사람이었네!”“흥, 너무 좋게 보지 마. 남자는 누구나 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남들 앞에서 본처 편을 들기 마련이지!”“그럼 됐지 뭐, 본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못 받더라도 적어도 체면은 챙겼잖아!”“다 이익 관계지. 권 대표님같이 똑똑한 사람이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동혜림은
조순영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권욱 앞에서 조순영은 강인하지도 않았고 날카로움이나 당당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조순영에게 남은 것은 그저 억울함과 끝없는 불만뿐이었다.알고 보니 최군형은 이미 동혜림이 몰래 사진을 찍고 있는 걸 보고 있었고 경호원에게 연락해 동혜림을 데려가게 하려 했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채 실행되기도 전에 조순영이 먼저 ‘정의를 실행’한 셈이었다.최군형은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은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백인서도 최군형을 따라갔다.조용한 곳에 이르자, 최군형은 걸음을 멈추고 몇 마디 더 당부했다.“제가 말한 것들, 다 기억하고 있죠?”백인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절대로 육연우가 소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요.”“알겠습니다.”백인서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말했다.“우리가 미리 대비하는 게 맞아요. 지금 육연우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에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소아 언니는 임신 중이라 더 조심해야 해요.”“그렇죠.”최군형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소아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네요.”백인서는 잠시 멍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왜죠?”“그건...”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아 언니가 저한테 정말 잘해줬으니까요.”“소아는 예전에 육연우에게도 정말 잘해줬죠.”“저는 육연우와 달라요!”백인서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저는... 저는 절대 소아 언니를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최군형은 더 묻고 싶었지만,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사실 최군형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는 최지용이 처음에 의심했던 것, 즉 백인서의 성향 문제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백인서와 최지용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백인서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최군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세상에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이익 때문에 서로를 해칠 수 있다.가
이전에 성소월을 조사할 때 이미 알아냈다. 성소월은 몰래 오성의 작은 조직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 일당은 모두 소규모의 불량배들이었다.성소월이 절벽에서 떨어지자, 그 일당은 마치 바람 속 나뭇잎처럼 흔적도 없이 흩어져 사라졌다.육경섭은 그 일당을 얼마든지 잡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명의 작은 잡범일 뿐, 큰일을 일으킬 인물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은 암시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희철 형이 그들에게 물어봤다더군.”육경섭은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그들은 삶의 길을 찾지 못해 작은 비리를 저지르며 보호비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더군. 그러다 약품 암시장을 눈여겨보게 됐고 이 업종이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함께 일하게 된 거지.”“그러다 얼마 전, 육연우가 그들을 찾아간 거였어.”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최군형의 얼굴에는 서서히 어둠이 드리웠다.“육연우가 그들에게 구해달라고 한 수면제는 ‘자살 명약’이라는 약이었어. 몇 년 전에 이미 나라에서 판매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여전히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어. 그들 진술에 따르면 육연우는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건넸고, 약을 받은 후 정해진 용량대로 복용했기 때문에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던 거지.”“육연우가 약을 복용한 후에도,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약에 대한 주의 사항을 물었다고 하더군.”육경섭은 조사한 통화 기록도 보여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최군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연우는 사고 전에 실제로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역시 육연우가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었군요!”최군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육연우는 이런 방식으로 군성의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 군성이를 곁에 붙잡아두려 했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속셈이죠!”육경섭의 얼굴이 굳어졌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군형아, 정말 미안하구나... 난 육연우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아버님, 이건 아버님의 잘못이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