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소한의 손이 김단의 치맛자락을 꽉 잡고 있었다.손끝에 담긴 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박하고 간절했다.“가지 마…”김단이 떠나려 하자 몽랑한 의식 속에서 소한은 가슴이 저려오는 듯한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그 고통이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그녀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다.“단이야, 가지 마…”가지 말아 줘.여기 있어줘.목소리에는 애절함이 깃들어 있었다.비록 이게 꿈이라 할지라도 제발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김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김단은 마음이 약해졌다.사람은 아플 때 가장 나약해진다지만 지금 소한의 모습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절박해 보였다.결국 김단은 그 자리에 서서 소한의 불안하고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았다.소한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그녀의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다행히 소한은 그저 김단을 바라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무리하게 굴지 않았다.김단은 그가 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마에 얹어둔 수건을 뒤집고는 팔을 만져보았다.확실히 열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너무나도 쇠약해진 소한은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의 손은 여전히 김단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시간이 흐르고 창밖에는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군의관은 어젯밤 약을 먹고 푹 잠들었던 탓에 늦게 깨어났다.밖이 밝아진 것을 본 그는 부랴부랴 연병장으로 달려왔다.여전히 침대 곁에 서 있는 김단의 모습을 본 군의관은 깜짝 놀라 다급히 외쳤다.“김 아가씨!”김단은 피곤한 얼굴로 군의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젯밤에 몇 번 깨어나셨습니다. 열은 두 번 정도 올랐는데 지금은 안정됐어요.”군의관은 놀란 표정으로 소한의 맥을 짚어보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김
김단은 발걸음을 멈추었다.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소 씨 집안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그들도 소한의 말을 들은 뒤였다.김단을 향한 소 씨 부인의 눈빛에는 미안함이 서려있다.어찌 김단을 대해야 할지 몰랐다.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보냈기 때문이다.하나 김단은 소하의 다리를 고쳐주고,소한을 저승 문턱에서 끌어내렸지 않은가.그녀는 자은 법사의 비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김단은 천살고성이 아니라 소 씨 집안의 은인이 아닌가.하나 소 씨 부인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곧이어 소하가 먼저 움직였다.일부로 김단을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소한의 침상 곁으로 다가섰다.“한아, 괜찮느냐?”그는 자신의 몸으로 소한의 시선을 막았다.단이가 한이의 약을 구해오고, 곁에서 밤을 지새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성의를 보여주었지 않은가.더 이상 그녀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소 씨 대감도 마침내 제정신을 차렸다.그는 소 씨 부인을 부축하여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끊임없이 소한을 불렀다.“한아, 한아, 괜찮으냐?”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단은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렸다.이때, 소한이 절규하며 그녀를 불렀다.“단아!”소한은 조급했다.그의 시선은 소하와 소 씨 부인의 틈 사이를 향했다.밖으로 나가는 김단의 뒷모습을 보며,중상을 입은 것도 잊은 채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그 탓에 감싼 붕대가 붉게 물들었다. 뒤이어 강렬한 고통에 순간 기절을 할 뻔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침상에 누웠다.하나 그의 두 눈은 김단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단아…단아..”허약한 목소리로 계속 그녀를 불렀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결국 그녀가 나가기 전에 소 씨 부인이 앞을 막아섰다.“김 낭자!”소 씨 부인은 그녀를 한 번 부르고는,무릎을 꿇었다.김단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소 씨 부인께서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이옵니까?”소 씨 부인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이리 부탁하겠소, 이곳에 남아
이때,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방 밖에 나타났다.최지습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곧이어 날카로운 눈빛은 소 씨 부인부터 방 안 사람들을 훑었다.그리고 그제야 김단을 향해 물었다.“가겠소?”아주 짧은 몇 마디였다.하나 김단은 최지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소 씨 부인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예!”그리고는 그에게로 발걸음을 돌렸다.이때, 소 씨 부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단아! 네, 네가 한이를 놔두고 갈 수는 없다! 이 아이에게는 네가 필요해.내가 이렇게 빌게, 남아서 곁을 지켜주겠니?”소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무리 소 씨 부인을 잡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는 더 이상 단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더하여 모친의 비루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하나 김단에게 달려가려는 모친을 잡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그는 자신이 미웠다.수 어의를 불러 올 수만 있다면, 소 씨 부인도 처량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최지습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더 들려왔다.“소 장군께서 중상을 입으셨나이다,지금 필요한 이는 단이가 아니라 수 어의 이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소신 도착하였나이다!”곧이어 수 어의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어젯밤 소한의 가슴을 열고 나서, 이른 아침에 그의 상황을 보러 가려 했다.하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호랑이군들에게 끌려 침상에서 일어나게 될 줄 은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의복을 언제 입었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나왔다.뒤이어 호랑이군들이 비아냥거렸다.“어찌 제자한테 소한을 맡길 수 있겠소?”수 어의는 그제야 김단이 밤새 소한의 곁을 지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나 소용없는 짓이다.아무 이상이 없었다면 몸이 버텨 준 것이고, 이상이 생겼다면 내의원들이 모두 모였어도 막지 못할 것이다.그는 최지습의 압도적인 권위에 눌
관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최지습을 흘깃흘깃 쳐다보았다.“혹여 소녀가 걱정을 끼쳤나이까?”최지습은 정병들이 자신을 재촉하던 장면을 떠올렸다.그리고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열 번째 도령이 걱정을 하였소.”하나 최지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중상을 입은 소한을 살피기 위해 곁에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어찌 다들 데려오라 하는 것인가.더하여 수 어의도 관저로 돌아갔고, 머지않아 김단도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밤새도록 그의 곁을 지켰을 줄을 예상이나 했으랴.최지습은 기다리면서 걱정하는 마음이 커졌다.날이 밝는 것을 보자 서둘러 호랑이군들을 시켜 수 어의를 불렀다.그리고 자신은 김단을 찾으러 간 것이다.김단은 호랑이군을 떠올렸다.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자신을 생각하는 그들의 행동에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다정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어제 떠나려고 했사옵니다. 하나 군의관께서 심장에 무리가 오셨습니다.만일 이대로 밤새 곁을 지키시면, 두 사람 모두 황천길을 넘겠다고 생각이 들었나이다. 그리하여 청을 올려, 군의관 대신 곁을 지켜야겠다 하였나이다.”최지습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이 연병장은 병영 보다 좋지 않소,평소에는 군의관 한 명이 지키고 있을 것이오. 어제 일은 소한에게 필히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오.”“예, 소 장군의 상황은 비참했나이다.”김단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안색이 어두워졌다.붉은 갈기를 가진 말.자신이 어렸을 적에 툭 던진 한 마디였다.어느새, 같이 그림을 그리던 세 명의 아이들은 서로를 미워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히자 한숨을 내쉬었다.침묵하는 김단을 보고, 최지습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마차는 천천히 앞을 향해 갔다.김단은 밤새 곁을 지키느라 온몸이 피곤했다.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긴 잠에 빠졌다.작은 숨소리가 들려오자, 최지습은 그제야 김단이 잠에 든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의 머리가 마차에 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간이 찌푸려지자, 최지습도 같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다른 손을 내밀어 햇빛을 막았다.곧이어 김단은 인상을 폈다.최지습도 그녀를 따라 미간을 폈다.그리고 자신이 김단을 보고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연스럽고, 따스한 미소다.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어떠한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하나 그는 그 악몽에 팔년 간 시달리고 있다.어찌 이리도 쉽게 미소를 지을 수 있단 말 인가.최지습은 돌아가는 길 내내, 한 손으로 김단의 머리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햇빛을 막아 주었다.마차가 멈추었다.마부는 김단이 자고 있는 줄 몰라 큰 소리로 외쳤다.“대군자가! 도착하였나이다!”김단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눈을 뜨자 최지습이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더니,그제야 자신이 최지습의 손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서둘러 몸을 꽂꽂히 세우고는, 혹여 침이 묻었을 까봐 입가를 닦았다.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도 최지습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마음속으로 몰래 웃어 보였다.하나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았다.이어서 손을 거두고는 낮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시오. 침은 흘리지 않았소.”김단의 얼굴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하나 최지습은 그저 묵묵히 마차에서 내릴 뿐이다.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자신을 한참동안 꾸짖고는 마차에서 내렸다.이때, 최지습이 말을 걸었다.“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피곤하겠소. 서둘러 돌아가 쉬시오.”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관저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걸음은 빠르기 그지없었다.어찌 최지습의 손을 기대어 잘 수 있는가, 이 얼마나 창피한 일 인가.김단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숙희가 서둘러 그녀를 맞이했다.“아씨, 돌아오셨나이까! 노비와 대군자가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시옵니까?”하나 김단은 숙희의 말에서 ‘최지습’ 이 거론되었다는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하룻 밤 내내 돌아오지 않았으니, 걱정을 하게 한 것
김단은 내시의 뒤를 따라 어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말없이 앞서가는 내시를 보며, 마음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임금이 어찌 자신을 궁에 들여보낸 것인가.문득 며칠 전에 최지습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그가 말하기를, 임금은 소한과 자신을 맺어 주고 싶어 하신다 했다.소한이 중상을 입고, 그녀를 하염없이 부르는 모습에 임금이 혹여 혼인을 시키려는 것인가.가는 길 내내, 김단은 안절부절 했다.혹여 진정으로 혼인을 주선하시면, 어찌해야 하는가.죽음으로 뜻을 밝혀야 하는 것인가.어서재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다.어서재 안의 소환을 듣고, 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억지로 침착하려 애를 쓰기 바빴다.그제야 눈을 아래로 떨구고는, 천천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백성 김단, 폐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절을 했다.대담한 태도로 하여금 전혀 심란해보이지 않았다.하나 말을 끝나기 무섭게 어서재 안이 조용해졌다.김단은 황제와 눈을 마주치기 두려웠다.그저 자신의 무릎만 바라볼 뿐이다.쥐 죽은 듯 조용한 곳에서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잠시 뒤, 황제의 위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짐이 자네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십중팔구, 소한 때문이 아닌가.김단은 말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송구하옵니다, 미처 알지 못하옵니다.”그녀의 말에 임금이 대답했다.“어제, 소한이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짐이 듣기로는 자네가 그의 곁을 밤새 지켰다 하더군.”김단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서둘러 입을 열었다.“군의관께서 심장에 무리가 가셨사옵니다, 소인은 그저 군의관 대신 머문 것뿐이옵니다.”절대로 소한 때문이 아니다.하나 임금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수 어의가 하는 말로는, 어제 소한의 맥이 허약하여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 하더군. 하나, 오늘 아침에는 맥이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무슨 수를 쓴 것이냐.”평온한 말투였지만 알 수 없는 엄숙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일이라면 어떻게든 반항할 생각이었다.만일 하나 잘못되면 죽음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하나 임금이 원하는 것은 의원이다.어찌 의원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가.여러 생각이 오가던 중에, 임금이 입을 열었다.“짐은 이리 대단한 인물이 있는 줄 몰랐다. 나라의 임금도 못 보는 의원이라.”임금은 화가 난 모양이다.김단이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송구하옵니다,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신의께서는 더 이상 세속에 나서기를 원치 않으시어,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가고 계시옵니다. 소인은 이전에 그분의 행적도 입 밖에 내지 않겠노라 굳게 약조하였나이다. 그제야 비로소 소 총령의 다리의 고칠 방도를 전해 들을 수 있사옵니다. 만일 하나 소인이 폐하께 이를 고하였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먼 곳으로 떠나시거나 대역죄를 범할 수도 있사옵니다.”김단은 임금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그가 의원에게 궁금한 것은 죽은 이를 살리고, 생명을 불어넣는 의술이 아닌가.그녀는 혹여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말을 더하여, 임금에게 거절을 돌려 말했다.신의는 죽는다고 하여도 얼굴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임금이 미간을 찌푸렸다.김단이 말은 도리가 있었다.신의에 ‘신’ 을 가진 자들은 성질이 결코 좋지 못하다.이때, 김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신의께 적지 않은 가르침을 얻었사옵니다. 이후에는 필히 의술을 팔구할 정도로 익혀, 자진하여 어의원에 들어가 폐하를 모시겠사옵니다.”그녀는 조급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의원의 의술을 거의 다 익히면, 이후에 임금도 작은 신의를 얻게 된다.임금은 코웃음을 쳤다.김단이 못 미더운 것이 아니다.신의의 의술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팔구할 정도?절반만 배워도 감지덕지이지 않은가.아예 모르는 것 보다는 낫다.그는 김단을 곁에 두는 것이 신의를 곁에 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마치 소한처럼 중상을 입었어도, 김단이 신의에게 약을 구하여 살아난 것처럼 말이다.이러한 생각에 임금은
김단은 임금의 뜻을 알아챘다.이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더하여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하나, 당장은 그렇고 싶지 않았다.다시 침묵하는 김단의 모습에 임금도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그녀를 떠나 보내려던 찰나, 어서재에 내시 한명이 들어왔다.임금에게 예의를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전하, 평양원군께서 찾아오셨사옵니다.”곧이어 임금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이전에 최지습이 김단을 지키겠다 말했기에, 일부로 그가 없을 때를 노리고 궐에 들인 것이다.그 자식이 이리 빨리 소식을 들을 줄 누가 알았으랴.임금은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자네는 돌아가도 좋다, 평양원군에게 들라하라.”“예.”김단은 예의를 차리고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어서재를 떠나기 전, 눈을 살짝 치켜들어 임금을 바라보았다.보아하니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다행히 마음을 놓일 수 있었다.최지습은 어서재 밖에 서 있었다.안에서 나오는 김단의 표정을 훑었다.평소와 큰 변화가 없는걸 보아, 형님께서 김단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던 모양이다.하나, 형님께서 김단을 궐에 들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물어보려고 입을 열자, 김단이 그에게 다가갔다.옆에 있던 내시에게 혹여 들릴까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작은 얼굴에 엄숙함이 가득했다.“전하께서 부화가 나지 않으셨나봅니다. 하나, 조심하시는 게 좋사옵니다.”해가 저물기 전이다.노을 빛이 그녀의 얼굴을 벌겋게 비추었다.최지습은 이유 모를 기쁨이 느껴졌다.그는 김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관저에서 기다리시오.”“예.”김단도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최지습은 김단이 멀리 가고 나서야,어서재 안으로 들어갔다.“황형을 뵙습니다.”그는 규칙대로 무릎을 굽힌 채 예의를 차렸다.눈을 치켜들자, 임금은 그저 조서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그에게 일어나라는 말 조차도 하지 않았다.임금은 눈 하나 꼼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어찌 이리 다급하게 온 것이야. 짐이 잡아먹을 것 같으냐?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