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주상이 소한을 보낼 줄은 몰랐고, 이렇게 빨리 올 줄도 몰랐을 뿐이다!아무리 그래도 그는 한양으로 돌아온 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김단은 최지습에게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머리가 심하게 아파왔고, 뇌리에서는 소씨 부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이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오.”최지습의 입버릇 같은 말이 다시 들려왔지만, 이번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김단은 더욱 크게 울었다. 마치 며칠 간 쌓인 억울함과 슬픔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했다.그녀는 정말, 너무나 슬펐다.자신이 왜 혼자 살아야 할 운명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왜 하나둘씩 떠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자신이 왜 소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저승의 문턱까지 다녀왔었다.그런데 왜 아직도 한양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김단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본 최지습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덩치 큰 남자는 그녀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런데 김단은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최지습은 깜짝 놀라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고, 그녀가 기절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옷 너머로 그녀의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하녀도 열이 났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린 최지습은 미간을 찌푸렸다.곧바로 그녀를 안아 들고 뒷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의를 불러라!”김단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여름 햇살은 일찍부터 뜨거운 열기를 방 안으로 쏟아냈지만, 그럼에도 김단은 추위를 느꼈다.옆에 있던 숙희는 김단이 깨어난 것을 보고 급히 다가와 말했다. “아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목마르세요? 물 드시겠어요?”걱정스러운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마치 목에 주먹을 여러차례 맞은 것 같았다.김단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러느냐?”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단은
최지습이 그녀를 밤새도록 돌봐줬다고?김단은 많이 놀랐다.그녀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소한이 호랑이군을 모두 데려간 후 그녀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만 기억났다.그녀는 그 장면이 떠오르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창피했다.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숙희는 이내 문을 열었고, 밖에는 최지습이 서 있었다.숙희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예를 갖췄다. “소인, 대군을 뵙습니다.”그녀는 어째서인지 최지습이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늘 두려움을 느꼈다.다행히 최지습은 그녀의 태도를 개의치 않아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단이는 깨어났느냐?”숙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께서 방금 깨어나셨습니다.”그녀는 길을 비켜주었다.최지습은 방으로 들어왔고, 김단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다가가 김단의 이마에 손을 얹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좀 뜨겁군. 숙희야, 네 아씨 약은 어디 있느냐?”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숙희는 더욱 당황하며 곧장 대답했다. “지금 가져오겠습니다!”그녀는 방에서 나갔다.그렇게 방 안에는 김단과 최지습만 남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다.어쩌면 김단만 어색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이에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라버니.”그녀는 울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일이 떠올라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평소에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 아닌데, 어제는 아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알았소.”최지습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소리가 잦아들자 방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최지습은 옆에 앉아 그녀를 보지 않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얼굴의 흉터 때문인지 그가 말을 하지 않을 때는 다소 험악해 보였다.김단도 무슨 말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만으로도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음에도 그 사람은 그런 모진 말로 그녀를 찔러 끊임없이 고통을 안겨주려 했다.그러니 그녀가 어젯밤 모든 게 자기 탓이라는 말을 한 것도 당연했다.호랑이군이 붙잡힌 일까지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린 것이다.이미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왜 스스로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려는 걸까.그런 그녀조차 무너지지 않는다면 누가 무너지겠는가?그때 숙희가 약을 가져왔다.어린 하녀는 아씨에게 빨리 약을 먹이는 데만 정신이 팔려 김단의 놀라고 감동받은 표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최지습은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조리 잘하시오. 바깥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났다.숙희는 영문을 모른 채 약을 한 숟갈 떠서 김단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아씨, 대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김단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내 숙희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저은 뒤 약을 삼켰다.그녀는 방금 최지습이 한 말을 숙희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몰랐다.그는 이미 피투성이인 상처를 헤집어가며 그녀를 위로해주었고,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그녀가 어떻게 그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숙희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김단이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약을 먹이며 말했다. “대군이 좀 험악하게 생기시긴 했지만, 제 생각에는 좋은 분 같아요.”방금 대군이 한 말만 봐도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게다가 대군은 하녀인 그녀의 병까지 어의에게 진찰받게 해주었다!그 말을 들은 김단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들어 숙희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기쁨 어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이 내 큰 오라버니시다.”“정말 잘됐습니다!” 숙희도 웃으며 말했다. “아씨께도 드디어 든든한 뒷배가 생겼네요!”
소한이 다가오는 것을 본 감옥 간수들은 급히 예를 갖췄다. “소 장군님, 안녕하십니까.”소한은 표정이 굳은 소하를 천천히 바라보고는 감옥 간수들에게 말했다. “형님이 들어가시려는 것을 감히 너희들이 막은 것이냐?”그 말을 들은 감옥 간수들은 다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막겠습니까.”소한은 피식 웃고는 성큼성큼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소하도 따라갔다.감옥 안의 공기는 매우 역했다.습하고 더우며 역겨운 악취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구역질이 났다.하지만 소한은 이미 이곳의 냄새에 익숙한 듯 멀리 있던 탁자 앞에 앉아 차 주전자를 들고 소하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형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소하의 눈에는 전에 없던 한기가 서려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 있느냐?”소한이 빈정거리며 감옥으로 들어오라고 했을 때 소하는 호랑이군이 이곳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분명 주상도 호랑이군이 감옥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소한은 고개를 들어 소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이 오실 줄 알고 사람들을 다른 곳에 숨겨놓았습니다.”소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속에 있던 분노가 점점 더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한,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그 말을 들은 소한은 물을 마시려다 멈추고 다시 소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께서도 제가 사적인 감정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냐?”소하는 싸늘하게 물었다. “호랑이군이 어찌 당우리 산적들일 수 있겠느냐!”“산적이 아니더라도 결탁했을 수도 있습니다.”소한의 목소리도 점점 차가워졌다. “그 호랑이 머리 문신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소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그는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 소한을 노려보았다. “네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 몰라도, 한아, 나는 봤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
그렇게 말하며 소하는 돌아서서 떠났다.그는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호랑이군이 이곳에 없는 이상 그는 소한의 손에서 그들을 구할 수 없었고, 선택은 하나뿐이었다.진실을 밝혀 호랑이군의 결백을 증명하는 것.소한의 태도가 짜증나긴 해도, 그의 말은 옳았다.어떤 일은 그저 말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조정에 평양원군과 호랑이군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에게 빌미를 줘서는 절대 안 된다!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소하는 사람을 보내 하만촌에 가서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다. 최지습과 호랑이군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백우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묻자 주민들은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이에 소하는 몇 명의 증인을 찾아 한양으로 데려갔다.하지만 소한은 이미 그보다 먼저 결론을 내렸다.대궐에서 소한은 무릎을 꿇고 며칠 동안 조사한 상황을 보고했다. “주상 전하께 아뢰옵니다. 제가 두 호랑이 머리 문신을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호랑이군의 문신은 모두 가슴에 있었지만 산적들의 문신은 대부분 팔에 있었습니다.”그는 두 장의 종이를 올렸다. 그 종이에는 두 호랑이 머리 문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주상은 슬쩍 보고는 옆에 서 있는 최지습을 바라본 뒤 다시 소한에게 물었다. “문신이 다르다고 해서 호랑이군이 산적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맞습니다.”소한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당우리에서 도망친 산적 한 명을 붙잡았는데, 그자가 당우리 산적들은 과거 전장에서 물러난 노병들이고 호랑이군을 선망하여 그들을 따라 문신을 새겼다고 증언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주상은 격노했다. “정말 못된 놈들이로군. 호랑이군을 선망한다면 그들처럼 나라를 지켜야 하지 않은가!”어떻게 마을을 학살하는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대궐 안이 조용해졌다.그때 주상의 시선이 한 쪽에 있던 소하를 향했다. “짐이 듣기로는 자네도 단서를 찾으러 갔다고 하던
이 한숨에 대궐 안에 있던 세 남자는 모두 표정을 굳혔다.소하와 소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주상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주상이 김단을 제거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뜻했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김단을 옹호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주상은 두 사람이 김단을 위해 자신에게 대들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더욱 미워할 터였다.대궐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주상은 소한과 소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한참 뒤에 말했다.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겠네. 물러가시오!”“예.”두 사람은 그제야 함께 예를 갖추고 대궐에서 물러났다.소씨 형제들이 떠나자 주상은 옆에 있는 최지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최지습은 앞으로 나아가 주상에게 예를 갖추고 나서 말했다. “주상 전하께서는 신의 성격을 잘 아실 것입니다. 늘 할 말이 있으면 하는 성격입니다. 그동안 김씨 낭자는 늘 수동적인 입장이었고, 화를 불러일으킨 적도 없었으니 ‘경국지색’이라는 비난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주상은 자신의 동생이 그 여인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최지습을 바라보았다. “그 낭자 때문에 짐이 얼마나 많이 시달렸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최지습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의 생각에 주상 전하를 괴롭히는 인물은 따로 있을 듯싶습니다.”유리잔 사건, 명정대군의 죽음, 진산군 집안, 소씨 집안 등 모든 사건에서 김단은 그 원흉이 아니었다.주상은 최지습을 흘겨보았다. 그는 최지습이 여인 때문에 자신에게 맞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그 낭자가 관련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 낭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냐?”“당연히 아닙니다.”최지습은 당당한 태도로 조리있게 말했다. “그 낭자는 무고하게 휘말렸을 뿐입니다. 주상 전하께서 모든 일에 낭자가 휘말렸다고 해서 그 죄가 낭자에게 있다 단정하시고, 정작 진정으로 문제를 일으킨 자를 놓아주셔서는 아니 됩니다.”분명 모든 일에서 그
최지습은 순간 당황했다. 환영 연회일 뿐인데 왜 김단을 데리고 입궁해야 하는 걸까?그녀는 분명 이런 복잡한 일을 가장 싫어했다.그가 거절하려는 찰나, 주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꼴을 보아하니,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짐이 낭자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주상이 약간 화를 내는 것을 본 최지습은 그제야 예를 갖추고 ‘명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한편, 궁궐을 나서는 소하와 소한은 양옆으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소한은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소하는 그를 계속해서 힐끗거렸고,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결국 소한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시지요. 꾸물거리지 말고.”담담한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소하는 미소를 지었다.이에 그는 입을 열었다. “형이 너를 믿었어야 했다.”소한은 그제야 소하의 얼굴을 힐끗 보고 냉소했다.그는 소한을 믿었어야 했다.소한의 퉁명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던 소하는 미소를 지었지만, 방금 주상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문득 걱정이 되었다. “한아, 단이 낭자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그 말을 들은 소한은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보았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주상 전하께 모든 것은 단이 낭자와 관련 없다고 말하겠습니다.”소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해서 괜찮아 질것이라 생각했다면 방금 내가 했을 것이다.”그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뒤로 뻗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결국 몇 걸음 걷지 않아 멈춰 섰다.소하는 그 모습을 보고 소한로부터 한 걸음 앞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소한의 두 눈은 붉게 물들었고, 심장의 두근거림은 그가 격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그가 말했다. “그럼 형님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그가 어떻게 해야 김단이 제발로 그에게 돌아오게 할
최지습이 평양원군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호랑이군 전원이 돌아와 있었다.그들은 모두 대청 밖에 서 있었고, 김단은 눈가가 약간 붉어진 채 한 명 한 명 살펴보았다.최지습은 영문을 모른 채 천천히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둘째 도령은 멋쩍은 듯 가볍게 웃었다. “김씨 낭자가 혹여 저희가 고문을 당했을까 봐 한 명씩 검사하고 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김단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들 웃으십니까? 소 장군의 고문 수법은 아주 잔인합니다! 제가 직접 봤어요!”“그것도 사람 봐가면서 하오.” 최지습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적을 상대할 때는 잔인하겠지만, 같은 편끼리는 다르오.”그 말을 들은 김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편이요?”소한이 그들과 어떻게 같은 편일 수 있단 말인가?!최지습이 말했다. “같은 조정의 장수이니 당연히 같은 편이지 않겠소.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젠가 전장에 나가면 목숨을 서로에게 맡겨야 할지도 모르오.”옆에 있던 여섯째 도령도 말했다. “우리도 소 장군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순순히 따라간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금위군들이 어떻게 우리를 잡을 수 있었겠소?”“걱정 마시오, 이제 호랑이군의 누명을 벗었으니, 다 잘된 일이오.”“맞소 낭자, 걱정 마시오. 우리 모두 괜찮소.”병사들이 한마디씩 거들자 김단은 비로써 안심했다.하지만 소한의 완고한 성격을 생각하니 그녀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소 장군이 또 다른 술수를 부리지는 않을까요?”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소한을 잘 알지 못했기에 단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최지습은 오늘 대궐에서 소한의 표정을 떠올렸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소한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그는 소한이 주상의 뜻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이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그러지 않을 것이오.”김단은 최지습이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