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소미는 눈앞의 사내를 향하여 두 손을 합장하고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 장군을 뵙나이다.” 소한 역시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소미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자은 법사의 명을 받들어 장군부로 서찰을 전하러 가는 길이옵니다.” “본 장군도 마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하오?” 소한은 한없이 온화한 말투로 말하였다.소미는 소한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살가운 태도는 처음 보는 바였다. 내심 의아함이 일었으나, 마침 같은 길이기도 하니 동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법화사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다리도 이미 뻐근하였기에 예를 올리고는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은은한 향이 피워져 있어, 편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찰의 향불 냄새보다 훨씬 기분 좋은 향이었다. 소미는 그리 생각하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으나, 이내 나른함이 엄습해 왔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더니, 결국엔 이기지 못하고 러지 듯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소한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소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보게?” 두어 번 불러 보았으나, 소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소한은 손을 들어 향로를 집어 마차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소미의 품을 뒤져 서찰을 찾아내었다. 봉투를 열어 펼쳐 보니, 과연 자은 법사가 친필로 적어 내린 명서가 맞았다. 서찰에는 단 한마디 불길한 말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김단이 부귀와 번영을 누릴 팔자라 적혀 있었다. 소한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수레 가림막에 머물렀고, 깊은 눈빛 속에 조소가 스쳤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서찰을 구겨 작은 종잇조각으로 만들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하고는 미리 준비해 둔 서찰을 꺼내, 자은 법사의 필체를 본떠 적은 명서를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소미가 눈을 떴을 때, 소한 역시 옆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든 듯하였
매년 자은 법사가 친히 쓴 경문을 볼 수 있었으니, 자은 법사의 필적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더욱이, 방금 그 소미라는 승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승려는 자은 법사의 곁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고, 지금까지 10년을 넘게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서찰은 그 승려가 직접 그들의 손에 전달한 것이니, 어떠한 위조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확실히 천살고성이라 했다. 어쩌면, 그녀가 궁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마님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명정 대군과 혼인을 약속한 뒤, 명정 대군이 죽고, 곧이어 임씨 큰 마님까지 돌아가셨다. 하물며 그녀와 애매한 관계였던 정암까지 죽었다... 그럼 소하는 어찌 된단 말인가? 그는 김단과 부부가 된 몸인데 말이다! 옆에 있던 나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다리는 아씨께서 치료하신 것이 아니 옵니까?” 소씨 부인의 마음도 복잡했다. “그래, 김단이 치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직도 따로 방을 쓰고 있지 않느냐! 만약 정말로 부부의 연을 맺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일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각방을 쓴다는 것은 아직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만약 진정으로 함께 밤을 보내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길이 없었다.소하에 대해 주명희는 단순한 모성애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세상을 떠난 언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소하만큼은 지켜야 했다.수 나인 역시 그런 소씨 부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그렇다면 아씨의 처소를 따로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후에 방도를 알아보시지요. 불교에 해결책이 없다면, 도교에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두 줄의 글귀만 보고 아씨를 내쫓으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씨는 저희 소 씨 가문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김
소하는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시녀는 소하를 보자마자 급히 예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부인님께서는...”“모친께는 내가 친히 말하겠다.”소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런데도 시녀가 여전히 물러설 기색이 없자, 그는 고개를 들어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서리자, 시녀는 저절로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친히 바래다주어야겠느냐?” 흠칫 놀란 하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러났다.겁에 질려 도망치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고는 소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나가시면 어머님께서 마음이 상하실 것이옵니다.”소하가 어찌 어머니의 의도를 모를 리 있겠는가?그녀의 모든 결정은 결국 그를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단의 마음을 상하게 둘 수는 없었다.“내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것이오.”김단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하의 다리를 치료해야 하므로,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소하의 다리가 완전히 나은 후에는 떠날 것이니 상관없었다.어머니께서 언짢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하는 김단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숙희는 왜 보이지 않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의 부탁으로 신의께 서신을 전달하러 갔습니다.”그 말에 소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숙희는 이제 떠도는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왜 그녀의 처소를 옮기려고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을 것이었다.게다가 신의께서 소하가 다리를 못 쓰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거짓을 말한 소하에게 분명 실망할 것이다.그러
운명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소하의 목소리.“낭자.”김단은 소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그는 우뚝 서 있었다. 간혹 늘어지는 수양버들 가지가 그의 얼굴을 자꾸만 가리려 했다. 김단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레졌다. “오라버니 다리가, 이게 대체 어찌…” “내가 속였소.”소하는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이마에도 미묘한 미안함이 스쳤다. “미안하오.”김단의 미간도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속이신 겁니까? 설마 어제 궁에 다녀온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독을 탄 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셨던 겁니까?”그녀는 계속해서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소하의 대답은 마치 벼락처럼 김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김단은 잠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소.”“어제,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대 말을 잘랐소.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리가 낫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했소. 미안하오.”그는 또다시 사과를 건네며 김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소하도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리도 서툴고도 어설픈 거짓말이 어찌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막 사랑을 깨달은 소년이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이라면 모를 일이었다.그는 김단이 분명히 그를 비난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김단은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소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하의 “떠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삼년. 만약 그녀가 여전히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기꺼이 처음에 한 약속을 지키고 그녀를 떠나보내겠노라 생각했다.물론,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그녀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뿐이었다.김단은 소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소하는 항상 그녀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코 무언가를 시작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소하의 이 같은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삼 년. 그녀는 한때 약속했었다.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소하와 소한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고 화목한 가정이 그녀로 인해 깨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떠나야 했다. 과거에 얽매여 이곳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다.이성이 그녀에게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소하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고 말았다. “저, 저도 오라버니께서 저에게 잘해주시는 것을 알지만… 아!”순간, 그녀의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연못으로 휘청거렸다.깜짝 놀란 소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그러나 그의 몸은 그녀와 함께 연못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잔잔했던 수면 위로 물결이 일렁이며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소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김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몇 번이고 그를 불렀지만, 여전히 소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도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김단은 소하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소한은 소하에게 수영을 배웠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침대에 누워 지난 오 년 동안 한 걸음도 떼지 못했고, 수영은커녕 물속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 헤엄치는지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김단은 두려웠다. 물속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
그녀와 그녀의 미소만이 남았다.두 사람은 금세 하인들에 의해 발견되어, 물가로 올라왔다. 방에는 김단이 책상 앞에 앉아, 숙희가 억지로 건넨 생강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여름이라 해도 물에 빠지면 감기에 걸리실 수 있으니 반드시 마셔야 하옵니다!”숙희가 김단의 뒤로 돌아가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밖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아씨, 부인님께서 이리 오실 것 같사오니 문을 잠그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씨께서 몸이 불편해서 쉬고 계신다고 할까요?”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던 김단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어머님의 방문에 숙희가 왜 이렇게 거부감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숙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조용히 사실을 털어놀았다.“오늘 제가 소문을 들었사온데 아씨께서 남편을 해칠 운명을 지닌 분이라는 이야기이었습니다. 마침, 오늘 도련님께서 연못에 빠지셨잖습니까? 그러니 제 생각엔, 부인님께서 이 일을 아씨께 떠넘기려 하실 것입니다.”이 말에 김단은 숙희를 돌아보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숙희의 얼굴에 김단은 그 소문이 꽤 심각하게 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어쩌면 어제부터 어머님께서 자신에게 이상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그 소문 때문일지도 모른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더더욱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소하와 어머니의 관계도 불편해질 것이었다! 김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떠날 예정이지 않느냐.”숙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김단은 머리를 정리할 시간도 없이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소씨 부인은 급히 손을 뻗었다.“굳이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오늘 너도 많이 놀랐을 테지?”“괜찮습니다.”김단은 공손한 자태를 유지하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그녀는 김단의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무언가를 고민
그렇게 생각하던 중, 소하가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김단은 오늘 소하가 호숫가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금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소하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덩달아 소하도 발걸음도 멈췄다. 김단의 방과 단 세 걸음 남긴 거리에서 멈춰 선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부르러운 미소를 지었다. “편히 쉬시오.”김단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오라버니도 편히 쉬세요.”소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방문이 닫히자, 소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김단이 방금 물러나던 모습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그가 너무 직접적이었을까? 소하의 눈썹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김단의 환한 미소가 떠올라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털어놓는 것이 잘한 일 같았다. 적어도 앞으로 그가 베푸는 정을 남매의 감정으로 오해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가 지금은 거부하고 있었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리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 김단은 책상 앞에 앉아 안도하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그전에 했던 말을 꺼낼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른다.그때, 숙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저는 도련님이 참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단은 깜짝 놀라며 숙희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그녀의 반응에도 숙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솔직하게 말을 이어갔다.“도련님은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아씨께도 잘하십니다. 오늘 부인님께서 분명히 마님을 꾸짖으러 오신 것이지만, 도련님 덕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씨를 이토록 아끼시는 분이라면, 그 곁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숙희의 진심이었다. 아
그 밤, 김단은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눈을 감기만 하면 소하의 얼굴이 그려졌다.언급하지 않으면 그저 지나가지만, 한번 언급되면 마치 홍수와도 같아 파도처럼 밀려들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억지로 밀어내려 할수록 더더욱 뚜렷해졌다. 김단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네 아래에 앉아 달빛을 감상하며 바람을 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그네 옆 오동나무로 향했다. 잎이 무성하여,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잔뜩 경계하며, 나무 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네는 가볍게 흔들리고, 둥근 달은 나뭇가지 사이로 아련히 모습을 드러냈다 숨겼다를 반복했다.이 순간, 손에 매실주 한 병이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운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때, 오동나무 잎이 눈앞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여름이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낙엽이라니?김단은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저 미세하게 흔들리는 가지와 잎들뿐이었다. 분명 나무 위에 사람이 있었다! 김단은 즉시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소한의 실력으로 정말로 숨어 있었다면 그녀가 알아챌 리는 없었다.그래서 그가 일부러 나뭇잎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아니면, 어찌 이리도 기가 막히게, 그녀의 눈앞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그녀에게 그가 왔음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았고 지켜보면서 소하와의 그 어떠한 가능성도 막을 것이라는 경고였다.혼란스러웠던 마음은, 그 순간 갑자기 진정되었다. 김단은 자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김단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행히 숙희가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