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15년 동안 키운 여식이다…비통함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진산군의 눈가가 붉어졌다.하지만 사람들 앞이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는 앞으로 계속 걸었다.어디까지 왔을까.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폈다.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등불 하나, 빛 하나조차 없었다.진산군은 그제야 힘이 다 풀린 듯 바닥에 엎드렸다.곧이어 마치 거대한 바위가 깨질 것 같은 고함을 질렀다.비통함이 어느새 통곡으로 변했다.날이 밝기도 전에 조모의 부고가 사가의 종친들에게 전해졌다.소한은 부고 소식을 받고 서둘러 진산군 관저로 향했다.빈소 안.흰 비단이 높게 걸려 있다.임학은 임 씨 부인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소한이 향을 피우러 들어오고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하지만 그는 빈소를 둘러보기 바빴다.임학은 소한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임 씨 부인에게 몇 마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곧이어 소한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임학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한이 물었다.“단이는 어딨소?”임학은 짜증이 밀려왔다.“울다가 몇 번이나 기절했는지 모르네, 지금은 의원이 준 약을 먹고 쉬는 중이오.”그는 말하는 도중에도 소한을 노려 보았다.하지만 소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학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소한, 원이는 궁금하지 않은 것이오?자네는 누구의 약혼자인지 인지하시오!”그의 말에 소한은 눈을 내리 깔았다.하지만 눈썹은 움찔거렸다.당연하다는 듯 임원의 안위는 묻지 않았다.임학은 그의 이러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곧이어 소한의 뒤를 한 번 보고 물었다.“정암은 어디갔소?”정암은 무조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김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정암뿐이다.소한이 입을 열었다.“갔소.”“어디를?”임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물었다.“어디를 갔단 말이오?”“당우리의 산적이 촌 사람을 죽였소, 전하께
곧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진산군 댁으로 모여들었고, 임원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임씨 가문의 친딸이 양녀에게 무릎을 꿇고 애절하게 통곡하는 모습을 보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친척 중 한 명이 다가와 김단을 꾸짖었다. “김단, 너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거칠어서 원이를 괴롭히곤 했었지. 오늘은 큰 마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다!”김단이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하고 예민했기 때문에 모두 김단이 임원을 괴롭혔다고 생각했다.허, 정말 기가 찼다!김단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핏발 선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김단은 임원을 죽일 듯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들으셨소? 큰 마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군!”임원이 바로 큰 마님을 죽인 살인범인데, 어떻게 감히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까?!임원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 역시 두려웠다!지금 이 순간 큰 마님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그녀는 진산군 댁의 친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큰 마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나?그렇기에 두려웠음에도 와야 했다.가슴이 죽을 듯이 아파와도, 오래 못 버티고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큰 마님의 장례식에서 쓰러져야 했다!그런 생각을 하자 임원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가슴의 압박이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 창백했던 얼굴은 더욱 초췌해 보였다. “김씨 낭자, 비록 내가 큰 마님과 겨우 3년밖에 살지 못했고 낭자만큼 큰 마님과 정이 깊지는 않지만, 나는 큰 마님의 친손녀이오. 큰 마님을 보내드리게 해주시오!”'친손녀'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주변 사람들은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지. 임원이야말로 큰 마님의 친손녀이지. 너는 양녀인 주제에게 왜 저 아이를 막는 거냐?”“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오늘처럼 중요한 날, 양녀인 네가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게냐?”김단은 다른 사람들의 말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영정 앞으로 향했다.조모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심장을 잃어버린 망자와 같았다. 가슴속 텅 빈 공허함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들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가족의 연이 끊어졌으니, 일단 지금은 조모를 잘 보내드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만약 임학이 제정신이라면, 오늘 임원을 영정 앞에 오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바로 사람을 불러 임원을 내쫓아 버릴 것이다!김단의 힘 없는 뒷모습을 보며, 임학의 마음도 저절로 아파왔다.품 안의 누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임학은 정신을 차리고 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아, 몸에 상처도 생겼으니 일단 돌아가서 쉬거라.”그는 남들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임원의 상처로 화제를 돌렸다.그래야 임원이 조모를 화나게 해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임원은 초조해하며 임학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라버니...”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임학에게 가기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임씨 부인 옆에 앉아 사람들에게 자신이 임씨 집안의 딸임을 보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임학은 인상을 찌푸리며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몸이 중요하다.”말투는 걱정하는 듯했지만, 임원은 그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는 김단이 했던 말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조모가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임원은 포기하지 않고 두 손으로 임학의 팔을 꽉 붙잡았다.하지만 임학은 이미 마음을 굳혔고, 옆에 있던 하인에게 명령했다. “어서 아씨를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거라.”그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는 강한 어조가 담겨 있었다.임학이 임원 앞에서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임원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늘 영정 앞에 갈 수 없다.그녀는 이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일어섰고, 일부러 다리를 후들거리며 비틀거렸다.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이틀 후, 큰 마님의 장례가 치러졌다.김단은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조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임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이 잠든 사이에 임원을 데려와 조모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다가 기절해서 임원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임원이 조모를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그녀의 장례를 이용해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게 둔다?그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김단은 그렇게 조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임씨 가문 사람들은 김단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마님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싶었고, 집안의 추악한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임원은 영정은 물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김단은 임원이 영정 앞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건 물론, 큰 마님의 장례 행렬에 따라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임씨 가문 사람들은 임원이 슬픔에 잠긴 나머지 몸이 아파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몇 명이나 믿을지 김단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조모가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시기를 바랄 뿐이었다.김단은 장례 행렬을 따라 산에 올라가 조모의 무덤에 흙을 덮고 나서야 힘이 빠져 쓰러졌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3일 뒤였다.김단은 눈을 뜨고 익숙한 방을 둘러보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머리가 멍하고 오늘이 몇일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것처럼 느껴졌다.목이 너무 말랐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물을 한잔 마시려 했다. 두 발이 아직 땅에 떨어지기 전, 그녀의 눈에 침대 옆에 놓인 나무 상자가 들어왔다.작고 아름다운 금색 상자로, 사방이 금으로 둘려져였다.김단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문득 조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를 가장 아끼고 보호해주었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던 조모가, 떠났
숙희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소인 지금 당장 짐을 싸겠습니다!”김단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숙희는 문득 물었다. “그럼 아가씨,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일단 정암이 있는 곳으로 가 며칠 지내며 갈 곳을 정하자구나!” 김단은 앞으로 한양을 떠날지, 아니면 남아 있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정암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으니, 남아 있을지 떠날지는 정암과 상의해야 했다.일단 지금 당장 그녀는 진산군 관저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이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창고에 있는 하사품은 왕철 아저씨에게 말해 정 종사관님 집으로 보내라고 할까요?”“그래, 보내거라.” 김단이 대답했다. 그것은 왕와 중전이 그녀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혼인 문제로 인해 그 난리를 겪으며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 했기 때문에, 하사품은 당연히 가져가야 했다.숙희는 알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일을 처리하러 갔다. 숙희가 너무 서둘러 일을 처리하며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는지, 임씨 부인이 왔다. 김단이 짐을 싸고 나가려는 모습을 본 임씨 부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단아, 너, 너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게냐?”임씨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김단이 무엇을 하려는지 어찌 모를 수 있겠나?그녀는 그저 마음을 돌리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김단은 임씨 부인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마음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이미 대감 마님과 가족의 연을 끊은 이상, 제가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신세를 졌다니.그 말이 임씨 부인의 가슴을 찔렀다.임씨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단아, 어찌 이리 무정하니, 어찌...”“저는 조모님 앞에서 대감 마님과의 연을 끊었습니다.”김단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임씨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해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김단과 진산군의 관계가 끊어
드디어, 진산군 관저를 떠났다.높은 대문 앞에 서서 흰 천이 걸린 현판을 올려다보며 김단은 씁쓸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교차했다.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조모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숙희는 뒤돌아보는 김단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아쉬워하는 듯하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이틀만 더 있다 가면 어떨까요?”임 부인의 말처럼 큰 마님의 5일장이 이틀 후에 끝나기 때문에, 그때까지 있다가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하지만 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숙희의 손을 잡고 성큼 성큼 나섰다.진산군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저택, 정씨 가문의 내외는 그녀가 보내 놓은 많은 귀중품들을 보며 당황해하고 있었다.김단이 오자 두 사람은 서둘러 인사를 올리고 물었다. “큰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김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제 진산군 댁과 관계없습니다. 큰 아버님, 큰 어머니께서도 앞으로 큰 아가씨라 부르지 마시고 단이라고 불러주시지요.”“관계가 없다?” 멀리 서 있던 정유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김단을 보고 물었다. “왜 갑자기 연을 끊으셨단 말입니까?”정유이의 말투가 불손하다고 생각한 정씨 가문 어르신은 딸을 흘겨보고 김단에게 물었다. “큰 마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연을 끊으셨습니까? 그들이 괴롭히기라도 하셨습니까?”둘째 어르신은 말을 하며 김단 쪽 편을 들어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정유이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김단은 크게 감동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들이 저를 괴롭혀서 연을 끊었습니다. 잠시 갈 곳이 없어져 두 분께 잠시 머물 수 있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하지만, 그녀와 정암은 아직 정식으로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같은 집에 살면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정씨 부인이 김단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곳이 네 집인데 무슨 말이니?”그리고 그녀는 무언가를 눈치 챈 듯 김단의 손을 보며 안타
사실 김단은 자신이 정암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모가 병을 얻으시고, 그 뒤로는 밤낮으로 상을 치르느라 정암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정암이 온다고 했어도 진산군 쪽에서 거절할 것이다.그래서 정암이 어디 있는지 그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그런데 김단이 이를 묻자 정유이의 표정이 굳어졌고, 정씨 부인도 인상을 찌푸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그 모습을 본 김단은 불안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정 종사관님은 어디에 계시죠?”정씨 부인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정씨 어르신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애는 종사관 아니느냐, 나라에서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 듣자 하니 산적떼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하더구나!”산적떼 소탕? 그 말을 들고 김단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산굴에서 만났던 무시무시한 산적들을 떠올렸다. 이어서 다급히 물었다. “혹시 당우리의 산적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네가 어떻게 아는 것이냐?” 정씨 어르신이 깜짝 놀랐다. “사실 듣기로 당우리의 산적떼가 마을 사람들을 습격해, 조정이 밤새 군사를 보내 소탕하도록 했다더구나.”김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더 이상 말함으로써 두 어르신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김단이 아무 말이 없자 정씨 부인은 김단이 걱정하는 줄 알고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산적들이 아무리 세도 산적일 뿐이야. 정암은 8년 전부터 군에 있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 않니. 잔혹한 돌궐족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 애가, 고작 산적 몇 명을 두려워하겠느냐?”“그럼, 물론이지.” 정씨 어르신도 거들었다. “아무 일 없을 거다. 아마 한 달 안으로 돌아올 거야!”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암은 아무 일 없을 거다.한 달 후, 정암은 돌아올 것이다!이 집은 크지는 않지만 방이 세 개나 되었다.정씨 부부가 한 방을 쓰고, 정암과 정유이가 각각 한 방씩 썼다.이제 김단이 왔으니, 정유이와 함께 방을 쓰게
김단은 정유이의 질문에 당황했다.그동안 의산적으로 무시해왔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폭발했다.김단의 얼굴은 더 이상 평온하지 못했고, 이마를 찌푸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오?”만약 정유이가 정씨 부부처럼 아무것도 몰랐다면, 지금처럼 그녀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김단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정유이는 자신의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음 속 외침이 입안 머물다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오라버니는 낭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간 것이라는 것이오!”김단은 정유이의 말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세히 묻기도 전에 정유이가 이어서 말했다. “오라버니는 낭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소. 낭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없애기 위해 군 공을 세워 낭자를 지키려는 것이오! 낭자가 없었다면 오라버니는 이번에 산적떼 토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오.”그 말에 김단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가 생각했던 대로였다.정암이 갑자기 토벌에 나간 것이 그녀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소매 속에 있던 두 주먹을 꽉 쥐며, 김단은 마음이 흔들렸다.정유이도 두 손을 꼭 쥐었다.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김단의 붉어진 눈을 보고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마지막으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낭자를 용서하지 않을테니!”정유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문을 나서던 와중, 숙희와 부딪혔다.하지만 정유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숙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 정씨 아가씨께서 왜 우시는 겁니까?”운다고?김단은 흠칫 놀랐다. 오늘 정유이가 할 말이 더 있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정유이는 분명 무언가를 더 알고 있는 것이다!정암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당우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부터 울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
이 어찌 속임수가 아니란 말인가?그는 당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해진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황급히 말했다. “사실 소인은 부인보다 완벽한 환자를 본적이 없습니다.”말을 하면서 김단은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부인은 반응이 둔하셔서 소인이 어떻게 손을 써도 아파하지 않으시니, 소인의 침술을 시험해 보기에 딱 이십니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순간 크게 소리쳤다. “어딜 감히!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내 부인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시는 것이란 말이오!”김단은 민태훈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며 속이 메슥거렸으나, 고개를 숙여 공손히 예를 올렸다. “대감,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다만 부인의 상태가...”“꿈도 꾸지 마시오!” 민태훈은 코웃음을 쳤다. “비록 곧 죽을지라도 내 부인인데, 어찌 자네의 장난감으로 만들 수 있겠소!”그 말인 즉, 민태훈이 김단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그의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다.맹영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민태훈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어리석었다!김단이 다시 말을 꺼내려 하자 민태훈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소, 낭자도 오늘 보았으니 부인이 꺼져가는 등불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꺼져가는 등불이라니, 스물다섯도 안 된 아가씨를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김단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끝내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상관없었다.민태훈이 그녀를 멸시하고 무시한다면, 그가 수긍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서도록 만들면 된다!이에 김단은 일부러 미시에 이르러서야 중전의 침소로 향했다.그곳에는 서원 공주도 있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김단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중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원 공주는 다소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오? 오늘 어마마마의 맥을 짚어 드려야 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오? 아니면 아바마마 곁에 가까워지니 낭자의 재주가 대단한 것처럼
민태훈은 답례하며 말했다. “난 낭자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올 줄 알았소.”하지만 그의 동작은 어색했고 말투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김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감까지 느껴졌다.분명 그는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었다.김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민태훈이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몰래 괴롭히겠는가?맹영지의 현재 상황 역시 민태훈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민태훈의 학대가 맹영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어 조금씩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민태훈은 맹영지에게 의원을 불러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영지의 상태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한양 내에서는 맹영지에 관한 소문이 전혀 없었다.오늘 그녀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맹영지가 지금 이런 상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아마 구 씨의 제안을 민태훈은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맹영지의 하녀를 시켜 그녀를 불러들였을 것이다.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 그녀를 향한 민태훈의 멸시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녀가 명의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에도 민태훈은 그녀 같은 하찮은 의녀가 맹영지를 치료할 의술을 갖췄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그는 김단이 차를 엎질렀다는 것을 듣고도 슬쩍 하녀를 흘겨볼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김단이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하녀를 물린 뒤 말했다. “내 아내가 3, 4년 전부터 병세가 깊어져 수많은 명의를 불렀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소.”그의 말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그는 김단에게 명의도 고치지 못한 병이니 그녀는 더더욱 고칠 수 없을 것이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못 알아들은 척, 속으로 생각했다. 소 오라버니는 5년 동안이나 마비되어 있었고,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맹영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어의원 의녀로, 부인을 진료하러 왔소.”역시나 그녀의 말을 듣고도 맹영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김단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맹영지의 맥을 짚었다.맥은 매우 약했다. 심지어 죽어가는 듯한 맥 기운마저 느껴졌다.보통 이런 맥은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에게서 나타났다.김단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 같은 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때 방금 전 그 어린 하녀가 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아씨, 차 드세요.”김단은 감사 인사를 하고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했으나, 순간 찻잔이 엎어졌다.김단에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몽땅 맹영지의 이불 위로 쏟아졌다.“아이고! 이년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어린 하녀는 그 말과 함께 어지러워진 것을 허둥지둥 치우기 시작했다.김단도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어 어린 하녀가 편히 치울 수 있도록 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어린 하녀는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다.맹영지를 그토록 걱정하면서 왜 일부러 침상에 차를 쏟았을까?김단은 의심을 품은 채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초가을의 얇은 이불은 차에 금세 젖어 들었고, 맹영지의 옷과 바지까지 전부 젖었다.어린 하녀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외치며 옷장에서 깨끗한 옷과 바지를 꺼내 맹영지를 갈아입히려 했다.하지만 맹영지는 반응이 느리고 동작이 어설펐기 때문에 어린 하녀는 애를 먹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아씨,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김단은 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그녀가 맹영지를 부축하자 어린 하녀는 맹영지의 바지를 벗겼다.그러자 그녀의 다리에 있는 서슬 퍼런 보라색 멍 자국이 김단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깜짝 놀라
명일.김단은 다시 어의원으로 돌아가야 했다.마차가 평양 대군의 관저에서 곧 도착하려 하자, 누군가에 의해 저지 당했다.“무엄하도다! 감히 평양 대군 관저의 마차를 막는 것이냐!”마부의 목소리는 두터워 마치 무예를 하는 자의 기운이 느껴졌다.김단은 마차 안에서, 마부가 검을 꺼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이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나으리,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노비는 도련님의 명을 받아 찾아 왔나이다. 도련님께서 관저에 들르시어, 큰 며늘 아씨의 목숨을 구해주시어라 청 하셨사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 안으로 손 하나가 들어왔다.마부가 옥패를 쥐고 있었다.옥패는 투명하여 윤기가 돌았다.마치 드문 옥패 같았다.중요한 것은 옥패 위로 ‘민’ 자가 새겨있다.곧 정승댁 민 씨 집안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큰 며늘 아씨 라니.김단은 소하의 말이 떠올랐다.맹영지가 이후에 정승댁의 장남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어제만 하여도 어찌 맹영지에게 다가갈까 머리가 아팠는데, 민 씨 집안이 자처하여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마차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민 씨 집안의 몸종이 소리를 높였다.“구 씨 집안의 셋째 아씨가 제 큰 도련님께 나으리를 소개하셨다고 하옵니다!아씨께서 이르시길, 나으리의 의술이 높고 인자하셔서, 큰 며늘 아씨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거라 하셨나이다!”몸종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보고 있었다.드디어 마차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구 아씨의 소개라면 저도 거절할 수 없소이다. 정승댁으로 가시오!”“감사하옵니다, 나으리! 감사하옵니다!”몸종의 말투에는 기쁨이 섞여있었다.김단은 순간 숙희를 떠올렸다.만일 김단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숙희는 이 몸종 보다 더 조급할 것이 분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정승댁에 도착했다.김단은 처음이 아니었다.어렸을 때, 민 씨 집안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그 당시에 진산군과 임 씨 부인과 같이 참석했었다.어찌 된 일 인지, 민 씨 집안의 큰 도련님께
서아름의 상황을 보아, 조산을 면할 수 있다고 하나 중전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하다.허나 서아름을 살펴야, 두 사람 모두 구할 수 있을 것이다.잠시 생각하고는 김단이 말했다.“스승님, 부디 제게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 주시옵소서. 저도 스승님과 같이 연구를 하겠나이다, 소하 오라버니는 제가 틈틈이 살필 터이오니, 오라버니의 팔이 차가워지면, 저와 스승님이 같이 한빙산을 연구하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스승님께서도 강한 독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그러하면 어렵지 않을 것 이옵니다!”화월과 융골산 같은 독을 의원이 해독 법을 연구하지 않았는 가.의원은 김단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허나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해독 법은 그가 연구한 것이 아니다.약왕곡의 주인이 직접 연구해 낸 것이었다.독에 대해 모르는 이가 한빙산의 독성을 연구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곧이어 그의 시선이 바구니로 향했다.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사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네.”김단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방법이옵니까?”“약왕곡의 독은 해독약과 같이 판다네. 소 총령에게 독을 푼 자가 분명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야.”곧 소하에게 독을 푼 자를 찾으면, 해독약을 빼내어 더 일찍 고칠 수 있을 것 이다.허나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에,독을 푼 자를 찾아도 해독약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김단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소하 오라버니는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다른 이가 용골산을 풀고 나서, 오 년 동안 하반신은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밤 마다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는 가.이토록 잔인하고, 악독한 자가 어찌 해독약을 순순히 내어 놓겠는 가.허나 시도는 할 수 있다.만일 다른 방도가 없다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맹 씨에게 해독약을 내어 놓아라 해야 할 것이다.김단은 관저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의원이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주자마자, 김
의원의 말에 김단의 얼굴이 얼어붙었다.의원은 소 총령 다리의 퍼진 독은 융골산이라 했다.“그 독은 몸 전체의 뼈를 녹이는 것이 아닌, 두 다리만 녹여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네. 더하여 독에 걸린 사람은 종종 독성이 일어나, 두 다리의 뼈가 끊어 질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지. 초반의 소 총령의 증상과 같아.”김단은 의원의 말을 경청했다.사실 융골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이제 소하 오라버니는 걸을 수 있지 않은 가.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소하 안의 다른 종의 독이다.의원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소 총령 체내 안의 독은 아마도 한빙산 일 것이야.초반에는 그저 손과 발이 차가울 뿐이지,허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죽고 말 것이야.”그의 말에 김단은 등에 서늘함이 느껴졌다.의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허나 그 독은 약왕곡에 있다네. 그리 위험한 독은 아니야, 하지만 독성이 쉽게 퍼져 팔 전체가 차가워 지기도 전에, 체내에 있는 독성은 사라질 거야. 그 탓에 네가 소 총령의 손이 차갑다 하였을 때,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네.”의원의 말에 김단은 안도를 했다.“그리하면 소하 오라버니께서는 괜찮으신 것이옵니까?”“장담은 하지 못하네.”의원이 김단의 말을 끊었다.“세상 만물에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있듯이, 독성도 마찬가지네. 이전에는 융골산에 억눌려 제대로 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네. 오 년이야. 오 년 동안, 한빙산이 혈을 따라 소 총령의 몸 구석구석에 퍼졌을 거야. 오늘날에는 폐로 들어가서, 빼내기 어려울 것이야.”“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김단이 서둘러 물었다.의원은 화월, 융골산 모두 침으로 해독했다.그리하면 한빙산도 침으로 해독 할 수 있지 않은가!허나 김단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퍼지기 쉬운 한빙산의 독성은 그 누구도 연구하려 들지 않았네.”그는 김단을 바라보았다.“자네는 내가 귀식환을 연구하길 바라는가, 아니면 한빙산을 연구하길 바라는가.”그는 몸이 하나였기에 두 가지를
죽음을 가장 한다니.의원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깊게 고민하고는 대답했다.“약왕곡에 귀식환이라 하는 약이 있네. 먹고 나면 한 시진 안에 숨이 멈추어 죽은 자와 같지. 허나 제조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위의 분들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울 거야.”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혹여 다른 방법이 있사옵니까?”“있긴 하지.”의원이 말을 이었다.“폐와 심경 양쪽 혈에 침을 일촌삼푼 으로 놓으면, 숨을 멈춘 것과 같은 상태를 만들 수 있네. 허나 위험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곧 귀식환이 더 신뢰할 만한 수법이었다.김단은 잠깐 생각하고는 의원에게 절을 했다.“부탁드리옵니다, 스승님. 귀식환을 만들어 주시 옵소서.”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일으켰다.“고운 마음씨를 보아, 이 스승도 최선을 다할 것이야. 허나 위험한 일이라 만일 잘못된다면, 공주와 중전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야.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야.”“예, 알겠나이다!”김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리고 의원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스승님께서 남은 일이 있사옵니까?”의원은 단번에 김단의 뜻을 알아챘다.“맥을 배우고 싶으냐?”김단이 예, 라며 대답했다.이전에도 의원을 따라 맥을 배웠지만,소하의 맥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더 배우고 싶었다.날이 밝자마자 왔으니,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진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의원은 은침을 꺼냈다.곧이어 두 사람은 작은 방 안에서, 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멈추었다.의원도 지친 모습을 보였다.“시진도 꽤 지났지 않느냐. 배가 고프구나,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련?”김단의 손은 의원의 손목에 맥을 짚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이때, 검지와 중지 사이에 익숙한 움직임이 느껴졌다.김단이 깜짝 놀랐다.의원이 은침을 천천히 빼려고 하자 서둘러 말했다.“움직이지 마십시오!”의원도 깜짝 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