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집과 독단이 심미연과 아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그래서 그는 인내를 배웠고 절제를 익혔다. 비록 그 절제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괴롭고 아팠을지라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박시훈일지라도 그와 심미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경계를 함부로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관통해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속에는 짙은 조소가 스며 있었고 그건 어떤 말보다도 상처로 깊이 박혔다.“강지한, 잊었나 본데...”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날카로운 칼끝처럼 정확히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우리 사이는 4년 전에 끝났어. 네 입에서 ‘내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건 너의 비정상적인 소유욕일 뿐이야.”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그 말은 마치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처럼 강지한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신념과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강지한은 당황했고 분노했으며 그보다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바로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사랑은 빼앗고 움켜쥐는 방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때 박시훈의 시선은 심미연의 작고 예쁜 얼굴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도 냉정했으며 세상의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넘을 수 없었다.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 불리는 존재에 도전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이었다.‘강지한’, 그 이름은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던 절대자, 사람들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
박시훈은 심미연의 부축에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그러면서도 시선의 끝자락으로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강지한이 보이는 반응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강지한의 얼굴은 마치 폭풍 전야의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의 날카롭기로 유명한 눈빛은 이 순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시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사업가로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전장’을 지휘하던 강지한은 언제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곤 없는 기계처럼 여겨졌었다.하지만 지금 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을 화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질투하게 만들었다.‘그러네, 질투하는 거였어!’박시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이번 무언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엔 조금의 기쁨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답답하고 찝찝했다.“박시훈 씨, 가요.”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그의 흩어진 생각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한을 앞에 두고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강지한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미연 씨는... 지한이를 사랑하지 않는구나.’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시훈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는데 그 말 한마디가 박시훈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찔렀다.“박시훈, 너 다리가 부러졌어, 아니면 팔이 나갔어? 왜 여자한테 부축까지 받는 거야?”그 말투엔 감춰지지 않는 조롱과 위압이 섞여 있었고 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그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박시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심미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랑 지유는...”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미연 씨... 가슴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박힌 것처럼 아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그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묻어났고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박시훈, 너... 정말로 내 사람을 가로채려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의 여인이 그렇게 쉽게 빼앗길 리가 있는가?박시훈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심미연만 쳐다보았다.“이제 가도 될까요?”그가 보기엔 심미연과 강지한의 언쟁은 겉으로는 날이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바람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만큼 지극히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반면 자신과 심미연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얇은 장막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도 전에 늘 놓쳐버리고 만다. 심지어 다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은 절대 저 둘이 더 오래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심미연은 잠시 강지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요. 지금 바로 같이 병원으로 가요.”그 말에 박시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같이’라는 단어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 싸늘하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그는 ‘심미연과 박시훈’이 아니라 ‘우리’였다.심미연은 더 이상 강지한을 돌아보지 않았고 박시훈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잠시 뒤 강지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그들을 뒤쫓아왔다. 그러고는 박시훈의 팔을 붙잡으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부축할게. 그래야 더 빨리 갈 수 있지.”그러자 박시훈은 속으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이 자식, 진짜 사람 속 뒤
심미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박시훈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과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이었다. 지금 박시훈은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이때 심미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즉시 깨달았다. 박시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임을.그녀가 가늘고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강지한 쪽을 돌아보니 그는 마치 온 세상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듯 분노로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은 단숨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 속엔 두 줄의 칼날이 담겨 있는 듯 단숨에 사람의 심장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드러났다.그녀는 단단한 결심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한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냈다.“박시훈 씨 다쳤는데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쩌려고!”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강지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이 정도 상식도 없어, 강지한?”심미연이 밀치자 강지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더 짙은 분노가 어렸다.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밀어낸 심미연을 바라보며 강지한은 그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 한편이 텅 비는 듯한 좌절감이 밀려왔다.‘안 돼. 심미연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어!’“박시훈 씨, 가요.”심미연은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얼굴로 박시훈을 바라보았다.박시훈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는 듯했다.‘미연 씨의 미소가 설마 치유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타요.”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심미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강지한이 다급히 달려와 차 문을 잡
박시훈의 상처가 너무 깊어 봉합이 필요해서 심미연은 곧장 그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수납 창구로 가 요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휙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도망쳤다.요금을 받던 직원조차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대낮에 병원에서 휴대폰을 털다니!’그런데 정작 휴대폰을 빼앗긴 심미연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또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번호를 눌렀다.“내 휴대폰 위치 추적해. 그리고 혹시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폭파해 버려!”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폭파’라는 단어는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친구랑 날씨 이야기나 하는 듯 가볍게 내뱉었고 일말의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심미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이 여자... 보통이 아니네.’‘멀리 있어야 괜히 엮이지 않겠지...’한편 병원 밖에서 한 남자가 외투를 벗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심미연 씨의 휴대폰을 확보했습니다.”“지정한 장소에 놔둬. 내가 사람 보낼게.”“예,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남자는 재빨리 택시 한 대를 세우고 주소를 불러주었다.그 시각 요금을 다 내고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던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방금 위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무슨 묘지 근처 같습니다.”심미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바로 사람 몇 명 보내. 나도 직접 갈 거야.”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수술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수술실 안의 불이 꺼졌다.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박시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심미연을 발견한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요!”그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심미연이 자신을 두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심미연, 나 임신했어. 지한 씨랑 빨리 이혼해. 우리 아이가 아빠도 없이 태어나는 걸 원하는 거야? 아이는 죄가 없잖아... 얼마나 불쌍하겠어!”심미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어차피 녹음 중이니까 지금 다 말해.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 도움 될 테니까.”“심미연, 너 진짜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거야? 나쁜 년, 녹음까지 하다니...”욕설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들려오는 삐 소리를 들으며, 심미연은 천천히 손에 든 임신 테스트기를 내려다보았다.[임신 4주 차]또렷한 글자가 눈에 박혔다. 원래는 오늘 밤 강지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이 아이는 나에게 찾아온 구원이야...’...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 도우미 임혜자가 반갑게 다가왔다.“사모님, 아침에 알려주신 레시피대로 요리 준비 다 해놨어요. 옷 갈아입고 내려오시면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심미연은 신발을 벗으며 무심히 답했다.“아주머니가 해주세요. 저는 목욕 좀 할게요.”임혜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알겠습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사모님이 평소에는 몸이 안 좋아도 도련님 밥은 꼭 직접 준비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심미연은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며 눈을 감았다. 차가운 물소리가 하루의 무게를 씻어내는 듯했지만, 깊은 피로는 그녀를 그대로 잠들게 했다.깨어난 것은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이었다. 몸이 들어 올려지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강지한의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쳤다.“아주머니한테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고 했다던데, 어디 안 좋은 거야?”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심미연은 온지유의 전화가 떠올라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형님... 임신하셨다면서? 아이를 낳으실 생각인가 봐?”강지한은
심미연은 방금 무례하게 끼어든 남자를 힐끗 보았다. 그는 바로 강지한의 소꿉친구이자, 경성에서 유서 깊은 육씨 가문의 자제인 육현성이었다.육현성은 언제나 심미연을 업신여겼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깔보는 태도는 노골적이었다.그러나 육현성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 뒤에서 온지유의 도구처럼 움직이는 존재였다. 온지유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녀를 공격하곤 했으니, 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그 생각에 심미연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큰형수님이란 호칭은 저희 아주버님의 아내를 말하는 거 맞죠? 방금 하신 말씀, 누가 들었다면 지한 씨가 큰형수님과 부적절한 관계라도 되는 줄 오해했을 겁니다.”육현성이 심미연을 불쾌하게 하려고 던진 말이었으니, 그녀도 굳이 체면을 살려줄 이유는 없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사랑했지만, 그의 친구들 앞에서까지 참으며 굽힐 생각은 없었다.그녀의 대답에 온지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원래 흐뭇하게 웃고 있던 그녀는 손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랑 지한 씨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 내가 돌본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아. 오히려 너야말로 지한 씨 좀 잘 챙겼으면 좋겠네. 지난달 건강검진에서 위 안 좋다고 나왔더라.”온지유의 말은 억울함과 은근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주버님 돌아가신 건 형님 얼굴이 과부상을 띠어서 그런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심미연의 말이 끝나자, 온지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강지한의 위 건강을 위해 3년 동안 애쓴 자신을 무시한 채 꾸며내는 비난에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가 심리전을 걸어온다면, 자신도 한 방 먹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과부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온지유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들어 심미연의 뺨을 때리려 했다. 과거에 시어머니에게 들었던 똑같
“혹시 진짜 죽었나 싶어서 확인하는 거야.”강지한의 목소리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꽉 쥐며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난 목숨이 질겨서 죽지 못했나 봐!”그렇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번호를 차단하는 일까지 한순간이었다....이노하이브 그룹 산하 병원의 VIP 병실.온지유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적으로 푸석한 안색과 마른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연약해 보였다.강지한은 병실 한쪽에서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온지유는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한 씨, 미연 씨는... 괜찮은 거야?”강지한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짧게 답했다.“괜찮아.”온지유는 속으로 심미연을 몇 번이나 저주하면서도, 겉으론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미연 씨랑 함께 있어줘. 여기 의사랑 간호사가 있어서 괜찮아.”강지한의 표정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자. 오늘 밤은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잠이나 자.”온지유는 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난처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오늘 밤 안 돌아가시면, 내일 미연 씨가 분명 할아버지께 고자질할 거야.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시잖아. 자주 화내시면 안 되는데...”강지한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고 얼른 자.”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강지한을 올려다봤다.“정말 여기서 나랑 같이 있어 줄 거야?”“그래. 자라.”...다음 날 아침.심미연이 눈을 뜨자마자 신하린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하린은 잔뜩 화가 난 듯 입술을 깨물고 서 있었다.“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심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신하린은 휴대폰을 내밀며 씩씩댔다.“온지유 그 뻔뻔한 게 자작극을 벌이고 실시간 검색에 올랐어! 이번엔 완전 자극적이야.”심미연은 하린이 내민 휴대폰 화면을 흘긋 보았다.[충격 폭로! 유명 무용가, 임신설?! 약혼남과 함께 병원 방문 포착]기사 내용을 확인하자 초음파
박시훈의 상처가 너무 깊어 봉합이 필요해서 심미연은 곧장 그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수납 창구로 가 요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휙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도망쳤다.요금을 받던 직원조차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대낮에 병원에서 휴대폰을 털다니!’그런데 정작 휴대폰을 빼앗긴 심미연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또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번호를 눌렀다.“내 휴대폰 위치 추적해. 그리고 혹시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폭파해 버려!”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폭파’라는 단어는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친구랑 날씨 이야기나 하는 듯 가볍게 내뱉었고 일말의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심미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이 여자... 보통이 아니네.’‘멀리 있어야 괜히 엮이지 않겠지...’한편 병원 밖에서 한 남자가 외투를 벗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심미연 씨의 휴대폰을 확보했습니다.”“지정한 장소에 놔둬. 내가 사람 보낼게.”“예,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남자는 재빨리 택시 한 대를 세우고 주소를 불러주었다.그 시각 요금을 다 내고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던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방금 위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무슨 묘지 근처 같습니다.”심미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바로 사람 몇 명 보내. 나도 직접 갈 거야.”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수술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수술실 안의 불이 꺼졌다.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박시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심미연을 발견한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요!”그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심미연이 자신을 두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
심미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박시훈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과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이었다. 지금 박시훈은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이때 심미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즉시 깨달았다. 박시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임을.그녀가 가늘고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강지한 쪽을 돌아보니 그는 마치 온 세상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듯 분노로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은 단숨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 속엔 두 줄의 칼날이 담겨 있는 듯 단숨에 사람의 심장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드러났다.그녀는 단단한 결심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한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냈다.“박시훈 씨 다쳤는데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쩌려고!”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강지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이 정도 상식도 없어, 강지한?”심미연이 밀치자 강지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더 짙은 분노가 어렸다.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밀어낸 심미연을 바라보며 강지한은 그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 한편이 텅 비는 듯한 좌절감이 밀려왔다.‘안 돼. 심미연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어!’“박시훈 씨, 가요.”심미연은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얼굴로 박시훈을 바라보았다.박시훈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는 듯했다.‘미연 씨의 미소가 설마 치유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타요.”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심미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강지한이 다급히 달려와 차 문을 잡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랑 지유는...”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미연 씨... 가슴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박힌 것처럼 아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그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묻어났고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박시훈, 너... 정말로 내 사람을 가로채려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의 여인이 그렇게 쉽게 빼앗길 리가 있는가?박시훈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심미연만 쳐다보았다.“이제 가도 될까요?”그가 보기엔 심미연과 강지한의 언쟁은 겉으로는 날이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바람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만큼 지극히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반면 자신과 심미연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얇은 장막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도 전에 늘 놓쳐버리고 만다. 심지어 다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은 절대 저 둘이 더 오래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심미연은 잠시 강지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요. 지금 바로 같이 병원으로 가요.”그 말에 박시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같이’라는 단어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 싸늘하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그는 ‘심미연과 박시훈’이 아니라 ‘우리’였다.심미연은 더 이상 강지한을 돌아보지 않았고 박시훈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잠시 뒤 강지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그들을 뒤쫓아왔다. 그러고는 박시훈의 팔을 붙잡으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부축할게. 그래야 더 빨리 갈 수 있지.”그러자 박시훈은 속으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이 자식, 진짜 사람 속 뒤
박시훈은 심미연의 부축에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그러면서도 시선의 끝자락으로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강지한이 보이는 반응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강지한의 얼굴은 마치 폭풍 전야의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의 날카롭기로 유명한 눈빛은 이 순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시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사업가로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전장’을 지휘하던 강지한은 언제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곤 없는 기계처럼 여겨졌었다.하지만 지금 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을 화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질투하게 만들었다.‘그러네, 질투하는 거였어!’박시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이번 무언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엔 조금의 기쁨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답답하고 찝찝했다.“박시훈 씨, 가요.”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그의 흩어진 생각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한을 앞에 두고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강지한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미연 씨는... 지한이를 사랑하지 않는구나.’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시훈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는데 그 말 한마디가 박시훈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찔렀다.“박시훈, 너 다리가 부러졌어, 아니면 팔이 나갔어? 왜 여자한테 부축까지 받는 거야?”그 말투엔 감춰지지 않는 조롱과 위압이 섞여 있었고 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그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박시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심미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강지한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집과 독단이 심미연과 아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그래서 그는 인내를 배웠고 절제를 익혔다. 비록 그 절제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괴롭고 아팠을지라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박시훈일지라도 그와 심미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경계를 함부로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관통해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속에는 짙은 조소가 스며 있었고 그건 어떤 말보다도 상처로 깊이 박혔다.“강지한, 잊었나 본데...”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날카로운 칼끝처럼 정확히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우리 사이는 4년 전에 끝났어. 네 입에서 ‘내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건 너의 비정상적인 소유욕일 뿐이야.”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그 말은 마치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처럼 강지한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신념과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강지한은 당황했고 분노했으며 그보다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바로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사랑은 빼앗고 움켜쥐는 방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때 박시훈의 시선은 심미연의 작고 예쁜 얼굴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도 냉정했으며 세상의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넘을 수 없었다.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 불리는 존재에 도전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이었다.‘강지한’, 그 이름은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던 절대자, 사람들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
박시훈은 주먹을 한 대 얻어맞고 간신히 일어선 몸이 다시 의자에 내동댕이쳐졌다. 금방 봉합한 가슴팍 상처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그는 고통을 꾹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 강지한의 팽팽히 당겨진 얼굴이 보였다. 평소엔 언제나 차분하고 깊은 눈빛을 지녔던 강지한이 지금은 분노를 안고 있는 듯 그를 삼킬 것만 같은 불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박시훈의 표정도 순간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놀람과 분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뒤엉켰다.결국 그는 거의 고함을 치듯 외쳤다.“강지한, 미친 거 아냐? 말도 없이 갑자기 왜 때려!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선을 심미연의 희고 가는 손에 꽂은 채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엔 설명할 수 없는 집착과 병적인 소유욕, 그리고 일종의 결벽증에 가까운 갈망이 서려 있었다.마치 그 손에 아직도 박시훈의 체온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듯 강지한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손을 잡고 데려가 찬물에 박박 씻어내고 싶었다. 손끝 하나 남김없이 처음처럼 깨끗하고 순결했던 상태로 되돌리려고.“누가 널 보고 심미연을 건드리랬어?”강지한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위협적이었다. 말끝마다 이가 부딪히는 듯한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고 타협 없는 위협을 의미하는 듯했다.강지한의 세계 속에서 심미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만의 ‘소유물’이었다. 그녀는 그의 여자였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연약하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그 누구도, 설령 오랜 친구라 할지라도 그 경계를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귓가에 아직도 강지한의 그 집착 어린 말투가 아른거렸다.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복잡한 감정을 삼켰다. 강지한은 한때 항상 온화하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낯선 표정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생
그래서 박시훈은 죽는 게 무서웠다. 아픈 것도 두려웠다.사실 이런 말이 남자 입에서 나온다는 게 창피한 일이란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걸 막을 수 없었다.“제가 있으니까 박시훈 씨는 죽지 않을 거예요!”심미연은 그렇게 말하며 은침을 꺼내 소독하더니 곧바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그러자 금세 출혈이 멈췄고 심미연은 재빨리 박시훈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박시훈은 그런 그녀의 분주하고도 진지한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어쩐지 넋을 놓고 보고 되는데 역시 여자가 진지할 때는 아름답다.‘저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상처는 일단 처리했지만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심미연은 약상자를 막 달려온 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비서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박시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누구지? 심하게 다쳤는데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잘생겼잖아...’박시훈은 그녀의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심미연을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도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의 불쾌한 기운을 감지한 비서는 얼른 눈길을 거두었다.‘어우, 무섭게 생겼네...’“그리고 혹시 누가 날 찾으면 바로 전화해.”심미연이 덧붙이자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심미연은 몸을 조금 굽혀 박시훈의 눈을 마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요? 아니면 경비를 불러 차까지 모셔드릴까요?”박시훈의 얼굴은 금세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워졌다. 세상이 그에게 따뜻함을 한 줌도 허락하지 않은 듯 억울한 표정이었다.‘이 정도로 다쳤는데 미연 씨가 날 부축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경비원을 부르겠다니...’박시훈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실망했다.“왜 그래요?”심미연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다.“그.
“미연 씨, 조심해요!”박시훈이 다급히 외치며 심미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온지유의 눈빛 속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심미연은 대체 왜 항상 누가 대신 막아주는 건데? 지난번엔 박유진, 이번엔 또 다른 남자야?’ ‘좋아. 그렇게 죽고 싶은 거면 그냥 둘이 같이 죽어버려.’ 이성 따윈 사라진 듯 온지유의 눈빛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고 그녀의 손끝은 망설임 하나 없이 심미연을 향해 뻗어갔다. 교도소에서 3년 넘게 몸으로 부딪치며 단련된 끝에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약하지 않았다. 힘도, 멘탈도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푹...” 날이 살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허공을 가르며 흩날렸다. 심미연은 놀라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창백하게 질린 박시훈의 얼굴이었다. “미연 씨... 빨리... 도망쳐요...” 박시훈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끌어모으듯 힘겹게 말을 뱉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극심한 고통이 그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심미연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일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틈도 없이 박시훈이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 덕분에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비껴갔다. 온지유는 심미연이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왜 저 여자만 매번 살아남는 건데?’ 분노와 증오가 폭발할 듯 솟구쳤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을 찔렀다. 그것도 대낮, 사람들 앞에서. 이대로 있다간 끝장이다. 온지유는 곧장 몸을 돌려 도망쳤다. 박시훈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심미연은 재빨리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그때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대표님!” “이 사람 좀 앉혀줘요.” 박시훈은 간신히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심미연은 바닥에 흥건히 번진 핏자국을 보며 눈빛을 차갑게 굳혔다. ‘온지유... 네가 은성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지한 씨가 날 사랑하는 거 너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땐 잘만 참더니 지금은 왜 못 참아?” 온지유는 심미연의 말에 단번에 반응했다. 두 사람이 강지한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늘도 내 편이야. 이건 기회야.’ 오늘 이 자리에서 심미연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지한 씨랑 재혼? 웃기고 있네.’ 온지유의 도발에 심미연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뼛속까지 아끼고 감쌌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예전엔 내가 눈이 멀었지. 하지만 지금은 눈이 멀쩡해. 그러니까 이제는 참을 이유도 없어.” 심미연은 담담히 웃으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머릿결이 살짝 감겼고 그 모습은 어딘가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참아줄 때 당장 꺼져.” 예전엔 강지한을 사랑했기에 온갖 수모를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이었고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심미연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온지유가 계속 도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순 없었다. 박시훈은 그런 심미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역시 달랐다. 머리카락 한 올 넘기는 그 동작조차도 치명적으로 보였다. 예전엔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문제는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상태하는 것. ‘이제는 미연 씨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박시훈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온지유는 심미연의 여유로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심미연, 분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강지한 이름만 꺼내도 감정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목적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