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서연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유진 씨, 심미연이 그렇게 좋아?”그 여자는 그저 자기보다 얼굴만 더 예쁘장하게 태어났을 뿐인데 박유진이 이토록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연도 밉고 박유진도 미웠다.“심서연, 네가 했던 말을 잊지 마!”박유진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지금 심미연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중요한 건 자신이 심미연에게 무얼 해줄 수 있냐는 것이다.“절대 심미연을 괴롭히지 않을게. 그러니까 저녁에 식사 자리고 뭐고, 그냥 다음 주에 결혼하자!”심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진 채 그에게 말했다.박유진이 심미연을 위해 이 결혼을 하는 거라면 어디 해보자고!앞으로 평생 서로가 괴로워하면서 살아가 보자!“그래.”박유진이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심서연,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 약속 꼭 지켜.”말을 마친 뒤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마치 불결한 물건을 만지기라도 한 듯 손을 빡빡 씻기 시작했다.심서연은 그의 행동을 보더니 또다시 화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박유진은 지금 그녀와 살이 닿는 것조차 혐오스러워할 정도였다.손을 닦으며 나오다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심서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는 심서연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다.“지금 당장 우리 부모님께 다음 주에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어. 근데 유진 씨, 우리 결혼식에 심미연도 꼭 데려와!”심서연의 말에 박유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불행하게 살아가는 심미연에게 자신이 행복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하지만 박유진은 그대로 심서연을 지나쳐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우리 결혼식에 어떤 분들을 초대할지는 우리 어머니가 결정할 거야.”당연히 심미연은 초대하지 않을 것이고 오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왜? 심미연이 보고 속상해할까 봐 걱정돼?”그러다가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어쩌면 홀가분해할지도? 애초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이때 심서연이 허리를 숙이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됐다. 이제 갈게. 저녁에 봐.”역시나 남자는 물티슈를 급히 뽑아내더니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벅벅 닦았지만 어차피 이제 곧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라 상관없었다.결혼하기만 하면 이런 스킨십은 할 기회가 많으니까.박유진은 얼굴을 닦은 뒤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하지만 너무 덤덤한 그의 반응에 심서연은 또다시 짜증이 슬슬 몰려왔다.그렇게 한참 동안 박유진을 쏘아보다가 결국 병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떠나간 뒤 박유진은 곧바로 진이경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안 돼서 그는 병실 안으로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대표님... 저는...”“말해. 왜 그 소식을 퍼뜨렸는지.”박유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협박하셨어요...”진이경은 한껏 낮은 소리로 답했다.그 소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자기 회사 대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머니한테는 당연히 말해줘야 하지 않나?“당장 인수인계 시작하고 넌 내일부터 해고야.”한번이 쉽지, 나중에는 계속 이런 실수가 반복될 게 뻔한데 그의 곁에는 이런 사람을 두면 안 된다.“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진이경은 회사에서 붙여준 비서인데 같이 일한 시간이 짧다 보니 박유진의 성격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여 이미자가 그를 협박했을 때도 솔직하게 다 말해줬다.박유진은 단호하게 다시 그에게 말했다.“그만 돌아가.”그는 한번 결정한 일은 쉽게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다.하여 진이경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대표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진이경마저 떠난 뒤 박유진은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일부터 네가 내 비서로 일해.”전화를 끊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심미연이 로펌에 도착해보니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이때 임현이 다급히 다가오면서 그
“변호사님, 근데 사장님은 왜 또 오셨어요? 할 일이 그렇게도 없으신지.”임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녀에게 말했다.“그만 나가서 일 봐요.”강지한이 그녀를 찾는 원인은 아까 병원에서 그를 못 본척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다가도 혹시나 온지유를 달래주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근데 표정이 너무 무섭던데 혹시 변호사님께 손을 대는 건 아니겠죠?”임현은 살기 어린 모습으로 들어오던 강지한을 발견하고 걱정되어 냉큼 달려왔다.들어보니 명문가에는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들이 많다고 하던데 보통 가정 폭력이나 바람피우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괴롭힌다고 했다.근데 자기 회사의 잘생긴 사장님이 이런 변태적인 성격을 가진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심미연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빨리 가요. 사장님께 들켰다가는 이대로 해고당할지도 모르니까.”임현도 참 대담한 것 같다.혹시나 강지한이 듣게 되면 바로 그녀를 해고할 텐데.“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혹시나 사장님께서 손찌검이라도 하면 바로 저를 부르세요.”임현은 그래도 심미연이 걱정되었다.“그래요.”그렇게 임현은 빠르게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본 심미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자 강지한이 그녀에게 다가와 차갑게 물었다.“뭐가 웃겨?”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그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이때, 갑자기 강지한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물었다.“미연아, 오늘 왜 병원에 간 거야?”충분히 사람을 보내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는 심미연이 하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얼굴이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혔는데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심미연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되물었다.“유진 씨 보러 갔어. 나도 묻고 싶은데 왜 유진 씨랑 술 마시게 된 거야?”강지한은 심미연 입에서 박유진의 이름이 들리자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박유진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설마 박유진이 심미연한테 모든 걸
강지한은 욕망에 사로잡혀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심미연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다급하게 말했다.“지한 씨, 여기는 로펌이고 내 사무실이야.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른다고! 우리 관계를 공개하고 싶다면 난 상관없어. 다만 온지유가 로펌에서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이지!”온지유를 향한 강지한의 사랑은 맹목적이었으니 그녀가 조롱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볼 터였다.강지한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심미연의 귓불을 물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미연아, 너 사실 무서워하고 있는 거지?”만약 이 여자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아는 걸 개의치 않는다면 지금쯤 온갖 방법으로 그를 유혹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를 막기 위해 급하게 애쓰고 있다.이혼을 제기한 후 이 여자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졌다.예전에는 그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이것은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는 원래 그녀와 마음을 나누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나 심미연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속에 허전함을 느꼈다.심미연은 그의 말을 듣고는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맞아, 무서워. 나는 온지유가 내연녀라고 욕먹고 되려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았다고 거짓말을 퍼뜨릴까 봐 두려워!”온지유는 거짓말과 피해자 코스프레에 능숙해서 결국에는 온갖 거짓말로 그녀를 모함할 것이었다.그럼 로펌 전체에 또 뒷말이 무성할 테고 바닥이 좁은 업계 특성상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심미연은 절대 남들이 자신과 강지한이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했고 말투는 당당했다. 이에 강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소송에서 이기는 이유는 말을 잘하는 것 외에 연기까지 잘하기 때문이군... 저런 청순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면 누가 의심이나 하겠는가.’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에 끓어오르던 욕정은 가라앉았지만 이상하게도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
강지한의 가슴에 심미연은 토사물을 쏟아냈다. 시큼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미연아...”강지한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가 키스하는 게 이렇게 싫단 말인가? 토하기까지 하다니!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휴지를 뽑아 그의 옷을 닦아주었다.“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옷을 닦자마자 속이 다시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강지한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사무실을 뛰쳐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다행히 점심을 시어머니와 함께 먹어 많이 먹진 않아서 한 번 토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심미연이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정말 고고한 줄 알았더니! 뒤로는 남자한테 배까지 불리셨군요! 가식 좀 그만하시지.”심미연은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한 후 천천히 돌아서 백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내 사생활에 관심이 많네요. 설마 나 좋아하세요?”“미연 씨, 임신했네요!”백현지는 심미연을 훑어보며 비꼬듯 웃었다. “어떤 늙은 남자 거예요?”심미연은 고고한 척했지만 임신 사실을 퍼뜨리기만 하면 그녀는 바로 나락으로 떨어져 영원히 재기 불능이 될 것이다.심미연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백현지가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다니.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임신했다고?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백현지는 코웃음을 쳤다.“지금 나랑 병원 가서 피검사 하면 30분 안에 임신 여부를 알 수 있어요. 감히 할 수 있겠어요?”전에 두 번 임신했을 때 입덧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방금 심미연이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임신을 떠올렸다.심미연은 손을 닦으며 말했다.“지원 씨가 본가로 돌아간다던데 현지 씨나 잘하세요. 내 일에 신경 끄시고.”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심미연이 나가자마자 백현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온 팀장님, 방금 미연 씨가 임신한 걸 발견했어요...”온지유는 그 말에 저도 모르
강지한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마음이 불안했다.“미연아, 왜 자꾸 토해?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온지유도 임신했을 때 자주 토하고 입맛도 없었다.심미연은 눈꺼풀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음속 불안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말했다. “아까 키스할 때 혀를 깨물어서 입안 가득 피 맛이 났거든. 그게 너무 역해서 토할 수밖에 없었어. 왜 자꾸 임신 얘기를 꺼내는 거야? 설마 나한테 애 낳아달라는 건 아니겠지?”그녀는 강지한을 속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만약 속이지 못하면 그는 분명 병원에 가라고 할 것이다.피검사 한 번이면 모든 게 다 들통날 테니까.일단 강지한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낙태는 불 보듯 뻔했다.이런 생각에 심미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리를 급히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심미연은 바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분홍빛의 작은 혀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배어 나와 혀끝을 붉게 물들였다.“깨문 자국 보이지?”심미연이 물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으로 그녀의 혀끝을 꼬집으며 코웃음 쳤다.“유난은.”여자의 피부는 약해서 조금만 세게 힘을 줘도 멍이 들고 며칠씩 가는 법이었다.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힘 조절을 못 했더니 혀를 깨문 줄도 몰랐다.그의 말에 심미연은 안도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나 깨물랬어!”이제 그는 임신에 대해 캐묻지는 않을 것 같았다.강지한은 그녀의 귀엽고 순진한 모습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박유진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좋은 사람이 아니야!”심미연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랜 시간 박유진과 함께해 온 그녀는 강지한보다 그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박유진은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심서연과 이렇게 된 것도 다 자기 때문이었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만큼 그에게 큰 빚을 진 심미
소리를 듣고 백현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지한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빨리 뛰었다.‘잘생겼다! 목소리도 좋아! 몸매도 짱이네! 이 사람이 대표님이라고?’심미연은 빠른 걸음으로 강지한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회사로 돌아간다며? 빨리 가!”지금 문이 열려 있는데 백현지가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면 로펌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러 몰려들 게 분명했다.그녀는 강지한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어차피 곧 그와 이혼할 텐데 애초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강지한은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심기가 불편해졌다.이 여자는 자신과 엮이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미연아, 너...”강지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연은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이어서 백현지까지 밀쳐낸 후 문을 쾅 닫았다.하마터면 문에 코끝을 부딪칠 뻔한 강지한은 반사적으로 코를 만지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감히 그를 내쫓다니.정신을 차린 백현지는 달려들어 심미연을 잡아끌었다.“비켜요! 대표님을 만나야겠어요!”대표님이 심미연과 잘 수 있다면, 분명 그녀와도 잘 수 있을 것이다.그녀가 심미연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더 좋으니까.백현지는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되뇌었다.심미연은 그녀를 밀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과 온 팀장이 무슨 사이인지 잊었어요? 감히 온 팀장님 남자를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둘 텐데?”백현지는 굳어버렸다.조금 전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어때요? 정신이 좀 들어요?”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먹었다는 것을 알았다.온지유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어떻게 온지유를 화나게 할 수 있겠는가.백현지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온 팀장의 남자를 빼앗겠다고 했어요! 미연 씨, 그쪽이야말로 대표님과 단둘이 뭐 하는 거예요? 온 팀장님에게 다 이를 거예요!”온지유에게 비밀을 많이 알려줄수록, 그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
정말 무서웠다.백현지가 가고 심미연과 강지한 두 사람만 남았다.“방금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미연아,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강지한은 심미연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그런데 뭐가 이상한지는 딱 짚어 말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내 일은 당신이 원하면 다 알아낼 수 있는데 뭘 숨기겠어?”역시 이 남자는 의심이 많기에 그녀의 비밀은 언젠가 들키고 말 것이다.그러니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 강지한을 떠나서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심미연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강지한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그가 심미연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뒤에서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지한 씨, 내가 병원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여기까지 나 찾으러 온 거야, 참!”심미연은 목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온지유가 있으면 강지한은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마침 그의 추궁을 피할 수 있었다.“두 분 얘기 나눠. 나는 바빠서 이만!”심미연은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고 강지한은 또다시 문밖에 내버려 졌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숯처럼 검게 변했다.온지유는 다가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자!”백현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온지유는 심미연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로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강지한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강지한은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며 그녀의 부은 얼굴을 보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여기 왜 왔어?”온지유는 팔짱을 끼려다 실패하자 얼굴이 굳었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왔어. 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 여긴 사람들이 많아서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몰라! 미연 씨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 내 사무실로 부르도록 할게. 내가 너희를 도와 감싸줄 테니까.”온지유는 마치 본처인 양 굴었다.마치 심미연이야말로 떳떳하지 못한 내연녀인 것처럼 말이다.강지한은 그녀를
강지한은 핸드폰을 꺼내 보았고 화면에 떠 있는 이진영의 번호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들과 연락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진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이진영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항에서 신하린과 심미연을 봤어.” 강지한은 갑자기 전에 박시훈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잠시 멈칫했다. “박유진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 이진영은 신하린이 박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년간 신하린의 마음 속에는 늘 박유진이 있었고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떠올리는 사람은 항상 박유진이였다. “정말 공항에서 심미연을 봤다고?”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그렇다면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그럼. 절대 틀림없어. 살아있는 심미연 씨야.” 이진영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심미연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신하린은 한 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그녀의 얼굴에서 본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진영은 심미연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심미연 씨 정말 대단해. 모두를 속였어.’‘강지한까지 속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해.’“그럼 그 사람이 진짜 심미연인지 신하린 씨에게 물어봤어?” 강지한이 물었다. 그는 이진영과 신하린 사이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이들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락 안 했어.” 이진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심미연이 사라진 이후 신하린의 정신 상태는 항상 불안정했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자주 싸웠고 그의 가문과 한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서 그는 처리하느라 바빴고 신하린과의 연락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녀와 만난 횟수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신하린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강지한은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상미가 그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점점 약해져 이제는 무언가를 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두었다고 떠들고 있는데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살겠다는 거야?” 우선 강지한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강지한의 전 부인 행방을 알아내면 그때 자신이 먼저 대시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때면 강지한도 그와 경쟁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박시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신의 성격이라면 반드시 심미연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명의 찾아서 상미 치료부터 해.”강지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세상이 뭐라 하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시 여자를 찾아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상미가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박시훈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바로 사람을 보내 심미연을 찾기 시작했다.강지한은 전화를 쥐고 박시훈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 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심미연이 죽지 않은 걸까? 아니면 누군가 심미연과 똑같이 성형한 걸까?’ “아빠, 상미 때문에 속상한거에요?” 병상에 누워 있는 상미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목소리는 가늘고 약했다. “미안해요, 아빠. 제가 아프게 해서...” 상미는 어느 날 엄마와 친구들이 나눈 전화를 우연히 듣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상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아빠가 자신을 잃으면 얼마나 슬퍼할지 걱정됐다. “우리 상미가 얼마나 대견한데.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강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마치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강상미는 작은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오늘부터는 꼭 밥 잘 먹을게요
박시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얼마 전에 그 명의와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미 진료 기록은 이미 전달했어. 명의가 치료법을 찾으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래.” “그게 사실이야?” 강지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받은 이후 그는 그 아이를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상미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선뜻 수술을 감행하려는 의사는 없었다.작년에 강지한이 진성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하나가 그의 귀에 박혔다. “우리 진성에는 명의가 한 분 계시죠. 못 고치는 병이 없어요. 불과 2년 만에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셨다니까요.” 말하는 이는 별 뜻 없이 흘렸지만 듣는 이는 달랐다. 강지한은 그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경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시훈에게 명의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박시훈의 정보망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원하는 그 명의를 찾지 못했다. 강지한 역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단 한 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상미는 고열로 입원했고 어린 몸으로 이 병을 버텨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명의를 찾고 싶었다. 명의만 찾을 수 있다면 상미는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진짜 너무하네.” 박시훈이 발끈하며 투덜거렸다. 강지한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게 서운했다. “그러니까 빨리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기억이 안 나면 다시 말해 주지. 심미연은 이미 죽었어.” 박시훈은 한순간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아, 넌 네 전 부인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강지한은 순간 멈칫했다. 그 한마디에 묻어
‘방금 아빠랑 엄마가 뽀뽀했어.’ ‘나도 해야지.’ 심미연은 말문이 막혔다. ‘이 녀석이 정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꼭 집어서 하는 재주는 여전하네.’ 심미연은 이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하지만 심태하는 엄마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엄마, 왜 나만 안 안아줘요? 왜 나만 뽀뽀 안 해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나 아니에요?” 심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이 녀석, 또 어디서 저런 말을 배워 온 거야!’박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를 번쩍 안아 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엄마가 일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널 안을 힘이 없대.” 심태하는 곧장 심미연의 손을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엄마, 피곤하면 쉬어요. 아빠랑 내가 성 만들 거에요.” 박유진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같이 쉬고 싶은데.’ 심미연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아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엄마는 조금 더 일해야 하니까 아빠랑 성 만들고 있어.” 그 아이의 수술을 위해 아직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했다.“그럼 엄마 눈 마사지해줄게요.” 심태하의 작은 손이 심미연의 이마를 살짝 눌러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흘렸다. ‘우리 태하 정말 똑똑하네.’ 며칠 전에 그는 심미연에게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의 기억력이 많이 놀라웠다. 심미연은 그 순간 마음속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게 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엄마 이제 일하세요.” 심태하는 손을 떼며 박유진에게 레고 놀이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박유진은 그를 안고 돌아서 나가려 했다
“미연아...” 박유진은 가슴이 살짝 떨렸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낮고 부드럽게 입을 떼며 적막을 깨뜨렸다. “응?” 심미연이 가볍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온통 부드러웠다. 박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미연아, 오늘... 괜찮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깊었다. 온전히 그녀만을 향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지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유진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특히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그때 그는 한순간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너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릴까 봐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박유진이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순순히 치료를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에 성실히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우울증을 극복해냈다. 지금 그때의 힘든 나날들을 되돌아보면 항상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박유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상처투성이인 마음과 불완전한 몸으로는 완벽한 박유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늘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오늘 그녀는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박유진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결국 아직도 그 벽을 넘지 못한 듯했다.그는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술을 살짝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민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 예전 진성에 있을
심미연의 눈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걸어내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듯했다.그때부터 심미연은 데이터 하나, 리포터 하나 놓치지 않고 아이의 병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키보드 소리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뿐이었고 적절한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들리는 그 소리는 생명과 희망을 담은 교향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심미연은 본인의 전문적인 지식과 용기로 작은 생명을 살릴 방도를 모색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그 시각, 심태하를 데리고 집으로 온 박유진은 역시나 조용한 집안에 심미연이 또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하야, 엄마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박유진의 말에 2층으로 올라간 심태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왜 혼자 내려와? 엄마는?”“엄마는 안 먹는대요. 난 할 만큼 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빠가 해요.”심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박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 내가 가볼게.”성큼성큼 걸어 올라간 박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방이 하도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마저 소음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 소음이 심미연을 방해하지는 못한 듯했다.박유진은 부드러운 불빛이 비춰진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심미연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넓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심미연의 얼굴에는 노트북 화면에서 나온 불빛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평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두 눈도 이 시각만큼은 노트북에 고정한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심미연만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박유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그러다가 자연스레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들과 그래프를 보게 된 박유진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작게 쓰여있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박유진에게는 그저 낯선 부호였지만 거기에 쏟은 심미연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박유진은 감히 함부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심미연의 건강이 걱정됐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 때문에 심미연의 손톱은 이미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이 되어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부서진 가구들과 온몸을 뒤덮은 상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도망가지 못해서 절망만 가득한 그 눈동자.가정폭력만 한 게 아니라 바람까지 피우면서 남자는 여자의 정신을 처참히 짓밟고 있었다.그 배신이 피해자의 마지막 남은 선까지 무너뜨려서 결국 그들을 이혼에 이르게 한 것이다.여자는 해방되고 싶어서 제안한 이혼이 자신의 명을 단축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폭행을 일삼고 바람까지 피우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했던 남자는 오히려 의심병이 도져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는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배 속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여기까지 본 심미연은 숨이 가빠와서 호흡이 거칠어졌다.인간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분노로 쌓인 한기가 서서히 심미연의 영혼을 뒤덮고 있었다.어쩜 사람이 이처럼 잔인하고 매정할 수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이딴 짓을 할 수 있는지 심미연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인간이야!”차오르는 분노와 비통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지자 심미연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그게 경찰 출동을 알리는 경보음인가 싶어 심미연은 순간 숨을 죽였다.물론 이내 자신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심미연은 그 짧은 순간에 전화벨 소리가 마치 생명을 구원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졌다.“여보세요?”전화를 받은 심미연이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아이 사건은 보셨어요?”여자의 말에 그제야 잊고 있던 심장병 걸린 세 살 아이의 사건을 떠올린 심미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바로 볼게요.”
3년 동안 심태하를 자신의 친아들로 여기며 온 정성을 다 쏟은 박유진은 심태하가 신나게 떠드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아빠, 얼른 와요!”그때 들리는 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춘 박유진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심태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환한 아이의 미소 덕분인지 박유진은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아이에게로 다가간 박유진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자 심태하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내가 엄마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엄마는 일만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니까요. 아들인 나도 설득 못 한 엄마라고요.”말을 하며 옆자리를 손으로 콕콕 찌르는 아이의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서 박유진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엄마는 항상 그래요. 일만 하면 밥 먹는 것도 까먹어요.”심태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엄마가 가슴 아픈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내가 말려봐도 일은 엄마의 사명이라면서 말을 안 듣는다니까요. 그래도 엄마가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나도 떼는 안 썼어요. 그냥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많은 걸 배우려고요. 그러면 엄마가 조금은 편해질 거잖아요.”심태하는 마치 박유진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맹세하는 사람처럼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를 생각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임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현은 저 말들이 세 살 난 아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영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면 자꾸 아까 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말들은 여름날 오후에 갑자기 찾아온 우레처럼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임현의 마음을 울렸다.임현은 그제야 왜 심미연이 아들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이런 아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았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심태하를 바라보던 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3년 전, 눈을 뜨자마자 심미연부터 찾은 박유진은 3
“죄송합니다!”“당신...”심미연의 사과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죽은 심미연 씨랑 똑같게 생겼어요.”그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심미연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는 바로 전설적인 존재인 박시훈이었다.그가 유명해진 건 그의 정보망 때문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이 찾기 싫은 건 있어도 못 찾는 건 없다는 말도 떠돌게 된 것이다.심미연과 일면식도 없는 그가 그녀를 알아봤다는 건 박시훈이 심미연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뒷조사를 한 사람과 지금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잠깐만요!”“이게 뭐 하는 짓이야?”그때 나타난 박유진이 심미연에게로 뻗어진 박시훈의 팔을 가로막았다.박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그제야 안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그가 있는 한 적어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는 없기 때문이었다.“박유진?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한편 이미 멀어진 심미연에 박시훈의 표정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그는 매번 나타나서 자신의 일을 망치는 박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저 사람은 내 아내 될 사람이야. 네 형수고. 앞으로 보면 예의부터 갖춰.”그 순간, 박유진은 진심으로 심미연을 숨겨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다.박시훈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그냥 혼자만 보며 심미연의 마음속에도 본인뿐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나를 가족으로 인정해준 적도 없는 박씨 집안 사람들이야. 자꾸 친한 척하지마. 너랑 나는 남이니까.”박씨 집안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그 집안사람과 엮이기도 싫었던 박시훈은 손을 쳐내며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하지만 심미연이 아직 멀리 못 갔을 걸 생각해 박유진은 또다시 박시훈의 팔을 붙잡았다.“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박유진, 너 진짜 미친 거야? 왜 자꾸 날 잡아!”또다시 잡힌 팔에 박시훈은 표정을 구기며 박유진을 노려보았다.이 순간만큼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