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듣고 백현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지한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빨리 뛰었다.‘잘생겼다! 목소리도 좋아! 몸매도 짱이네! 이 사람이 대표님이라고?’심미연은 빠른 걸음으로 강지한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회사로 돌아간다며? 빨리 가!”지금 문이 열려 있는데 백현지가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면 로펌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러 몰려들 게 분명했다.그녀는 강지한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어차피 곧 그와 이혼할 텐데 애초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강지한은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심기가 불편해졌다.이 여자는 자신과 엮이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미연아, 너...”강지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연은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이어서 백현지까지 밀쳐낸 후 문을 쾅 닫았다.하마터면 문에 코끝을 부딪칠 뻔한 강지한은 반사적으로 코를 만지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감히 그를 내쫓다니.정신을 차린 백현지는 달려들어 심미연을 잡아끌었다.“비켜요! 대표님을 만나야겠어요!”대표님이 심미연과 잘 수 있다면, 분명 그녀와도 잘 수 있을 것이다.그녀가 심미연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더 좋으니까.백현지는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되뇌었다.심미연은 그녀를 밀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과 온 팀장이 무슨 사이인지 잊었어요? 감히 온 팀장님 남자를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둘 텐데?”백현지는 굳어버렸다.조금 전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어때요? 정신이 좀 들어요?”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먹었다는 것을 알았다.온지유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어떻게 온지유를 화나게 할 수 있겠는가.백현지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온 팀장의 남자를 빼앗겠다고 했어요! 미연 씨, 그쪽이야말로 대표님과 단둘이 뭐 하는 거예요? 온 팀장님에게 다 이를 거예요!”온지유에게 비밀을 많이 알려줄수록, 그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
정말 무서웠다.백현지가 가고 심미연과 강지한 두 사람만 남았다.“방금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미연아,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강지한은 심미연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그런데 뭐가 이상한지는 딱 짚어 말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내 일은 당신이 원하면 다 알아낼 수 있는데 뭘 숨기겠어?”역시 이 남자는 의심이 많기에 그녀의 비밀은 언젠가 들키고 말 것이다.그러니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 강지한을 떠나서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심미연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강지한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그가 심미연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뒤에서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지한 씨, 내가 병원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여기까지 나 찾으러 온 거야, 참!”심미연은 목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온지유가 있으면 강지한은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마침 그의 추궁을 피할 수 있었다.“두 분 얘기 나눠. 나는 바빠서 이만!”심미연은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고 강지한은 또다시 문밖에 내버려 졌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숯처럼 검게 변했다.온지유는 다가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자!”백현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온지유는 심미연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로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강지한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강지한은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며 그녀의 부은 얼굴을 보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여기 왜 왔어?”온지유는 팔짱을 끼려다 실패하자 얼굴이 굳었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왔어. 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 여긴 사람들이 많아서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몰라! 미연 씨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 내 사무실로 부르도록 할게. 내가 너희를 도와 감싸줄 테니까.”온지유는 마치 본처인 양 굴었다.마치 심미연이야말로 떳떳하지 못한 내연녀인 것처럼 말이다.강지한은 그녀를
온지유는 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며 나지막이 말했다.“지한 씨, 나 토할 것 같아. 나 좀 부축해 줄래?”온지유가 토할 것 같다고 하자 강지한은 전에 심미연이 자신에게 토했던 일을 떠올렸다.온지유는 임신하고 나서 자주 토했다.그런데 심미연도 영문도 모르게 토했다.혹시 심미연이 정말 임신한 건 아닐까.강지한은 갑자기 침묵했고 온지유는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전에 그는 그녀 앞에서 이런 적이 없었다.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토할 것 같아?”온지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강지한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갔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화장실에 데려와서 뭘 하려는 거지?“토할 것 같다며? 왜 안 가?”정신이 번쩍 든 온지유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강지한은 흡연 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심미연은 토할 때 조금도 참지 못하고 바로 토해버렸다.하지만 온지유는 참을 수 있었다.왠지 심미연이 보였던 증상이 더 임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지유는 화장실에서 백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온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백현지는 알랑거리는 목소리였다.온지유에게 잘 보여 한 자리 차지하려고 백현지는 갖은 아양을 떨었다.“지금 당장 심미연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이래도 괜찮을까요?”백현지는 망설였다.“하라는 대로 해! 뭐가 문제야!”온지유는 싸늘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백현지는 잔뜩 겁먹은 채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병원에서 나가면 바로 승진시켜 줄게!”온지유는 미끼를 던졌고 백현지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네! 금방 갔다 올게요!”전화를 끊고 온지유는 차갑게 웃으며 속으로 욕했다.“바보 같은 년!”그러고는 휴대폰
심미연이 백현지가 부르는 소리에 나가보니 마침 남자가 온지유을 안고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자기라는 본처가 있는데도 저렇게 스스럼없이 껴안고 가다니.정말 자기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 두 장을 빠르게 찍고 돌아서니 백현지가 얄밉게 웃고 있었다.심미연은 백현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다니.“심 변, 대표님과 온 팀장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많이 힘들죠?”백현지는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심미연은 이젠 포기하겠지?’“멍청하다고 하는 것도 칭찬인 줄 알아요!”심미연은 그 말을 던지고 백현지를 지나쳐 걸어갔다.백현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화를 냈다.“심미연, 당신이 뭔데 날 욕해요!”그녀의 인식 속에서 심미연은 내연녀였다.내연녀는 그녀에게 욕할 자격이 없었다.심미연은 백현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임현은 막 타온 차를 들고나오다가 백현지의 옆을 지나가면서 작게 말했다.“누가 내연녀인지도 모르면서. 그쪽은 멍청한 게 아니라 바보예요! 변호사님이 아주 참아주신 거지!”그러잖아도 화가 잔뜩 나 있던 백현지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분노하여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 했다. 임현은 일부러 피하는 척하다가 차를 백현지에게 쏟아버렸다.옷을 입고 있었지만 백현지는 뜨거움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앗... 뜨거워!”임현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났으면 나한테 화내면 되잖아요. 왜 내 차를 엎어서 날 데우려고 하는 건데요? 정말 못됐어요!”봉변을 당하고도 되려 누명을 쓰자 백현지는 임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임현, 너...”욕을 다 하기도 전에 심미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세게 때려요! 나 지금 동영상 찍고 있으니까!”백현지는 깜짝 놀라서 손을 얼른 내렸다.직장 동료를 폭행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죄가 될 터였다.임현은 백현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심미연은 생각을 거두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저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체 무슨 일이지? 미연 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로펌을 나서자마자 심미연은 눈물을 쏟아냈다.택시 기사는 넋이 나간 듯 우는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참지 못하고 위로했다.“슬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힘내세요.”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활짝 핀 베니 벚꽃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온지유가 좋아한다고 강지한은 온 서울 가로수를 베니 벚꽃으로 도배해 버렸다.‘온지유한테는 정말 잘해주네!’운전기사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삶이 힘들면 견뎌내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남편이 잠든 사이에 묶어놓고 실컷 두들겨 패서 화풀이하세요. 상간녀가 찾아와 도발하면 주거침입으로 신고해서 널리 알려지게 하고요. 손님만 떳떳하면 쪽팔리는 건 바람난 남편하고 그 여자뿐이에요!”슬픔에 잠겨 있던 심미연은 운전기사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운전 기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가족이 아프면 모든 걸 쏟아부어 치료해 주세요. 살릴 수 있든 없든 후회만 남기지 않으면 되거든요!”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돈이 아까워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하고, 결국 그들이 떠난 뒤에야 후회하곤 한다.인생은 한 번뿐이고, 돈은 없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그러니 ‘그때 이렇게 할 걸’이라는 후회 속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보다,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편이 낫다.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남은 삶은 후회 없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테니까.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고마워요.”이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운전기사는 말이 많아서 줄곧 이야기했다.차에서 내릴 때 심미연의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기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가 외할머니 병실 문 앞에 서니 의료
시골로 보내졌던 2년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심미연을 ‘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 주셨다. 집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가 낳은 달걀과 오리 알은 모두 심미연의 차지였다.그 당시 외할머니는 시골에 살면서도 여름과 겨울 할 것 없이 한복을 입으셨다.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품이 있어서 심미연은 외할머니가 시골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콩이야, 이리 와. 얼굴 좀 보자!”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난 터라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분명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말하고 나서 숨을 헐떡였다.심미연은 황급히 다가가 앉아서 외할머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도록 도와주었다.외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지만 얼굴 윤곽이 아름다웠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젊었을 때는 분명 절세미인이었을 것이다.“우리 콩이 정말 예쁘구나.”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틋함과 미안함을 느꼈다.이 몇 년 동안 자신의 목숨은 콩이가 돈을 들여 연명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콩이에게 자신은 짐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죽으면 다 해결이 될 것을.콩이도 그녀 때문에 온갖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양수청을 안으며 말했다.“외할머니, 어서 빨리 나으세요. 그럼 제가 여행 데려가 드릴게요. 평생소원이 오로라 보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제가 모시고 갈게요!”“오로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나는 안 갈 거야.”양수청은 말이 느렸고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끊어서 말했다.“콩이야, 나 그냥 죽게 해 줘. 이렇게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이 망가진 몸뚱이는 너무 약해서 이제 흙에 들어갈 때도 된 듯했다.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고 곧 양수청의 환자복을 적셨다.“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나으실 거예요! 안 돌아가실 거예
심미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할머니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할머니는 지한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심미연의 반응은 양수청의 눈에 묵인으로 보였다.양수청은 마음이 무겁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손녀를 힘들게 만들었으니.양수청은 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한 이유가 분명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매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심미연이 아무리 일을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콩이야, 만약 그가 널 사랑하지 않고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와 헤어지거라.”사람은 꼭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외할머니, 저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그보다 아이 이름을 지어주시겠어요?”심미연은 강지한과의 결혼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걱정되었다.외할머니는 겉으로는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라실 것이었다.양수청은 심미연이 말하는 동안 눈빛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짓말을 밝히지는 않고 그저 안쓰러워했다.자신이 죽으면 손녀는 그 사랑 없는 남자를 떠날 수 있겠지.순간, 양수청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이 이름은 아이 아빠가 짓도록 하렴. 이 나이에 무슨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겠니!”“외할머니….”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그녀는 의사가 들어온 줄 알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때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미연아, 근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화가 난 것이 분명한 말투였다.심미연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고 남자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그가 또 심한 말을 할까 봐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물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왔어?”강지한은 온몸에서 냉기를 뿜으며 들
심미연은 그가 침묵하자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손을 잡아끌고 병상으로 향했다.강지한은 두 사람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침대 옆에 다다르자 심미연은 허리를 굽히고 양수청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외할머니, 이쪽은 강지한이에요.”그러고는 강지한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강지한도 허리를 굽히며 양수청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제야 시간을 내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양수청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심미연을 보며 말했다.“너희 둘 다 이렇게 잘생겼으니, 아이를 낳으면 정말 예쁘겠구나!”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했지만 심미연의 심장은 꽉 조여드는 듯했다. 아까 외할머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어쩌다 말씀하신 걸까.“예전에는 미연이가 어려서 너무 일찍 아이를 낳는 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아 2년 정도 기다렸어요. 이제는 저희도 임신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아이를 낳도록 노력하겠습니다.”강지한은 물샐 틈 없이 대답하며 심미연을 다정하고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심미연은 그가 살갑게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아찔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남자의 깊은 애정과 여자의 수줍음, 이런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양수청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어떤 여자가 보여준 로펌에서 찍힌 영상을 떠올렸다. 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고 자신의 손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웠다.그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의 아이만큼은 낳아 곁에 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자신의 몸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면 손녀에게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있어야만 자신이 죽고 나서도 손녀가 삶의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