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유가 뭐야?”‘온지유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휴가를 주는 거야?’“몸이 안 좋다며. 병원에 좀 더 있어.”강지한의 답변은 배려심 많은 이유처럼 들렸지만 심미연은 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스며들 뿐이었다.예전이라면 감동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몸속까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지한 씨, 편애는 당연히 할 수 있어. 근데 아무것도 모르고 남 말만 믿고 날 죄인 취급하는 건 아니지 않아? 이번 일은 리우 직원 중 누군가가 일부러 날 곤란하게 했고, 난 그냥 조금 반격했을 뿐이야. 근데 온지유 전화 한 통에 내일 출근하지 말라고? 이게 말이 돼?”심미연은 억울함에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휴가를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지한 씨가 날 사랑하든 말든 난 아직 지한 씨 아내야. 내 체면은 지한 씨와도 이어져 있어. 온지유가 정신을 못 차린다 쳐도, 지한 씨 머리까지 안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리우 직원들은 온지유를 미래 사모님으로 여기며 알랑대고 있다. 평소 심미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들은 얼른 그녀가 나가떨어지길 바라며 온지유에게 험담을 부풀려 전했을 것이다.온지유는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써서 심미연을 겨냥하고, 강지한은 심미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인물이다.강지한의 한 마디로 온지유는 목적을 달성하고, 심미연은 온지유가 권력을 과시하는 희생양이 된 꼴이었다. 생각만 해도 우스웠다.“심미연, 넌 왜 자꾸 지유 탓만 해? 너 자신부터 돌아봐. 지유는 줄곧 네 칭찬을 하면서 나한테 너랑 싸우지 말라고 했어. 근데 넌 지금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그게 뭐야?”심미연은 헛웃음을 지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내 손에 있는 사건들 다 처리한 뒤에 휴가 들어갈게. 그러면 됐지?”‘온지유가 나를 칭찬을 했다고?’웃기는 소리다. 그건 그냥 겉치레 말일 뿐이다. 눈치 있는 사람이면 바로 알 텐데, 강지한은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건지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이제 들어갈게. 너 먼저 가.”신하린은 등 돌리고 두어 걸음 갔다가 다시 달려와 심미연을 꼭 안으며 숨 가쁘게 말했다.“미연아, 나 그 사람한테 부탁해서 네 병원 바꿨어. 이제 병실에 몰래 들어와서 널 해치려는 사람 걱정 안 해도 돼!”그렇게 말한 뒤 신하린은 재빨리 달려가 버렸다.심미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겨우 그 사람에게서 벗어난 신하린이 그녀를 위해 다시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성인이 된 그녀가 둘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모를 리 없었다.‘신하린, 정말 바보 같아...’...인하병원, VIP 병실.온지유는 아직 얼굴이 부어 있어 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뱀독은 제거했지만 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상태였다.요 며칠 뱃속이 불편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스러웠다.그녀는 이 모든 불편과 고통을 심미연 탓으로 돌리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지한 씨, 미연 씨가 한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오늘 리우에서 기분 상했다잖아. 지한 씨가 남편이니까 화풀이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아? 이따 가서 좀 달래줘.”온지유는 살기가 서린 강지한의 얼굴을 보고도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넌 계속 걔 편만 들고, 걔는 널 마음에 안 들어 하잖아! 앞으로 내 앞에서 걔 칭찬하지 마. 듣기 싫어!”강지한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빛도 점점 험악해졌다.요즘 심미연은 왜 이렇게 성질이 거센지 의아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배짱이란 말인가?“둘이 부부잖아. 서로 이해하고 품어줘야지.”온지유는 강지한의 말을 듣지 않고 듯 계속 부드럽게 말했다.“이번에 미연 씨가 리우에서 의뢰인이랑 싸우고 소란 피운 건 사실 영향이 커. 며칠 쉬게 한 뒤, 일이 잠잠해지면 다시 출근하게 하는 게 오히려 보호하는 거야.”강지한은 미간을 주무르며 답했다.“심미연은 네가 말한 대로 처리할게. 의뢰인 쪽은 네가 사람 시켜서 얘기할 거야. 리우가 무료로 소송 맡아준다고
온지유는 속으로 깜짝 놀라며 무심결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둘이 사이 안 좋았잖아. 지한 씨가 왜 심미연 편을 들어주지? 심미연 그 천한 년이 분명히 나 몰래 지한 씨를 유혹한 거야. 뻔뻔하네!’“몸조리 잘하고 회복되면 퇴원해. 어머니한테 말해뒀으니 네가 가서 같이 지내. 성 비서한테 영양사랑 도우미 구하라고 했어. 돌아가면 널 보살펴줄 사람 있으니 신경 쓸 거 없어.”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나갈 준비를 했다.요즘 회사가 정말 바빴다. 지자체 입찰 건도 마쳐야 하고 해외 지사도 상장 준비를 해야 한다.“지한 씨, 나 어머님이랑 같이 살기 싫어. 혼자 살면 안 돼?”온지유는 정말 문소영과 한집에서 지내기 싫었다.문소영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면 뱃속 아이에 대한 비밀을 알아챌까 걱정이었다. 이 아이는 애초부터 강지성의 아이가 아니니까.강지한은 그녀 말을 듣고 돌아보며 물었다.“왜?”그는 전에 온지유가 일 안 하면 굶는다길래 먹고살 걱정 없게 해주려고 한 말이었다. 이제 와서 왜 또 싫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의사가 임신 기간 내내 기분 좋게 지내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아이한테 좋대. 근데 어머님이랑 같이 있으면 사이가 안 좋을 것 같고, 그러면 아이 키우는데도 안 좋아!”온지유는 다급하게 설명했다.그녀는 강지한이 진짜로 문소영과 살게 할까 봐 두려웠다.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성 비서한테 매달 생활비 넣으라고 할게.”온지유는 잠시 안도했지만 곧 다시 불안해졌다.“네가 내게 생활비 보내는 건 명분이 없잖아. 나중에 미연 씨가 알면 법적 수단으로 돈 돌려달라 할 거야!”온지유는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사실 빨리 강씨 가문의 정식 안주인이 되고 싶었지만 이런 말은 못 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일단 갈게. 이건 다시 생각해 보자.”병실을 나서며 강지한은 이번 달 심미연에게 생활비 2000만 원 더 주라고 성무진에게 말하는 걸 깜박했다고 생각했다.‘회사 돌아가면 바로 송금
그렇게 되면 강 대표한테는 말할 수 없다. 사무실에 돌아온 뒤, 성무진은 문을 닫고 박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에 가서 강지한에게 알린 다음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사실 그의 매달 월급은 꽤 높은 축이지만 업무 강도가 세고 또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요즘 바쁘고 힘든 데다가 강지한의 컨디션도 안 좋은 바람에 그는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해서 머리가 한 웅큼씩 빠지고 있는데 이대로 가다가 왠지 서른도 안 되어 대머리가 될 것 같았다.오전 근무가 끝난 뒤 그는 냉큼 컴퓨터를 끄고 강지한의 사무실로 향했다.“대표님, 가실까요?”박유진 쪽에서 이미 식당을 예약해서 12시까지 가면 된다.하여 지금 출발해도 12시가 넘을 것 같았다.“이 서류만 보고.”강지한은 성무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만 봤다.하여 그는 옆에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맞다, 이번 달부터 심미연에게 매달 5000만 원 씩 생활비로 보내.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그 미용실을 매물로 내놨는지 확인하고 내놨으면 그걸 사서 지유에게 넘겨.”방금 고민해 봤는데 매달 온지유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미용실 하나를 넘겨서 직접 운영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미용실로 돈을 벌게 되면 앞으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성무진은 당연히 이유를 묻지 않았다. 강지한의 결정이라 당연히 물을 이유도 없었다.그러다 문득 심미연이 안쓰러웠다.포브스 랭킹 3위 안에 드는 최고 부자와 결혼했지만 그에게 주는 생활비 5000만 원으로는 다른 부잣집 사모님의 가방 하나도 사지 못한다. 문서를 보고 있는 강지한이 혹시나 그의 속내를 알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그는 서류에 사인한 뒤 다시 펜 뚜껑을 닫고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고 성무진은 그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식당 룸 안에서 박유진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모든 행동에 우아함이 배어있어 한눈에 봐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 느낌이 들어 괜스레 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그러다가
박유진은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 자기도 모르게 술잔을 꼭 쥐었다.강지한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세계 500강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포브스 랭킹에도 올린 사람인데 이대로 아무 계획도 없이 손 놓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이런 사람은 특히 차갑고 냉정해서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심미연은 그와 같이 사는 게 가뜩이나 고통스러울 텐데 만약 이 화를 전부 그녀에게 돌린다면 그의 말대로 심미연만 고생하게 된다.그것만 생각하면 박유진은 가슴이 아파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절대 그 고통을 심미연에게 안겨줄 수 없었다.하여 박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뒤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원하는 게 뭐예요?”강지한은 괴로워하는 박유진의 모습이 이상하게 짜증 났다.그 원인이 바로 자기 아내인 심미연 때문이란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애틋한 사이인 것 같았다.“듣자 하니 지금 바렐 그룹에서도 정부 프로젝트에 참석한다고 하던데 그쪽에서 먼저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어떨지요?”현재 바렐 그룹은 가장 강력한 이노하이브의 경쟁그룹인데 만약 그들이 물러서면 이노하이브에서 이 프로젝트를 단번에 먹어버릴 수 있다.여기서 중요한 건 박유진이 회사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마침 주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근데 이 프로젝트를 잃게 되면 박유진이 이사회에 빨리 발을 붙이는 게 어쩌면 어려워질 수 있다. 강지한은 과연 박유진이 그만큼 심미연을 사랑하는지 떠보고 싶었다.“네! 그럴게요.”하지만 박유진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와 심미연중에서 당연히 심미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또한 그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잃는다고 해도 빠르게 바렐 그룹을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 만큼 자기 능력에 대해 자신 있었다.순간 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지금 바렐 그룹에 제대로 발도 못 붙이는 상황인데 이렇게 흔쾌히 받아들이다니!그만큼 심미연이 그에게는 매우
심미연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답했다.“점심이라고 같이할까요?”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다름 아닌 박유진의 어머니인 이미자였다.예전에 심미연을 엄청 사랑해줬고 또 심미연도 그녀에게 항상 고마웠다.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전화 왔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다.“뭐 먹고 싶어? 내가 예약할게.”이미자는 혹시나 심미연이 놀랄까 봐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이모가 중국 음식을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신촌에 그 중국집은 어떠세요?”예전에 심미연은 박유진네 집에 자주 가서 밥을 먹었기에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걸 기억하네. 그래, 그럼 그 식당으로 예약할게.”이미자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듯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심미연을 좋아했고 자기 며느리로 데려오고 싶었으나 아쉽게 그러지 못했다.너무 아쉽고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그럼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고 있을게. 이따 봐.”“네. 이따 뵙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심미연은 임현에게 말했다.“이건 나중에 정리하고 먼저 가서 밥 먹어요.”임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물었다.“변호사님, 혹시 계속 리우에 있으면 안 될까요?”“당연히 안 되죠.”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떠나는 즉시 임현 씨는 온지유에게 붙어요. 그 여자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줘야 나중에라도 임현 씨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변호사님이 가면 저도 갈래요.”임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임현 씨는 절대 가면 안 돼요. 리우에 있는 게 임현 씨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혹시 알아요? 제가 다시 돌아올지.”심미연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다독여줬다.강지한은 분명 그녀더러 휴가를 내라고만 했지 아직 해고한다는 말은 없었다.하여 최대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도 있고...하지만
심미연의 목소리에 주아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그녀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아까 나간 게 아니었어요? 왜 또 와요!”심미연은 책상 쪽으로 다가가 위에 놓인 화분에서 소형 카메라를 떼어내며 말했다.“당신 얼굴이 보여서 냉큼 달려왔죠.”“자기 사무실에 웬 카메라까지 달아놓고 난리예요!”그러다가 주아연은 옆에 있는 임현에게 말했다.“봤죠? 이런 식으로 감시하고 있는 거? 임현 씨를 전혀 믿지 못하는 뜻이라고요.”그 말에 임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심 변호사님께서 책상에 뭘 달아놓든 그건 변호사님 자유지, 왜 이간질해요?”최근 사무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기와 질투로 꽉 차 있었다.하여 믿을 사람이라고는 심미연 밖에 없었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무한 지지해 주기로 다짐했다.“주아연 씨, 당신은 오늘부로 해고입니다. 그러니까 제 사무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제 다시 쓸 일이 없을 거예요.”심미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모습에 주아연은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물었다.“지금 어디에 전화를 거는 거예요? 사장님? 아니면 온 팀장님?”심미연이 그녀의 물음에 미간을 찌푸렸다.온 팀장이라...강지한은 온지유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는구나.이때,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지금 내 사무실에 와서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사람 시켜서 처리해 줘.”심미연은 주아연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사실 저번에 주아연이 차에서 남자랑 불미스런 짓을 하던 동영상을 손에 넣은 뒤로부터 그녀를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녀와 같이 풍기 문란한 사람이 어떻게 변호사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주아연은 애써 괜찮은 척, 팔짱을 끼고 심미연이 통화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그러다가 문득 본인은 온지유가 직접 뽑은 사람인데 심미연의 한 통화 전화로 해고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여 그녀가 창
“미연 씨, 빨리 올라가요. 사모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왕지현이 낮은 소리로 그녀를 독촉했다.그녀는 이미자를 올해로 20년째 모시고 있는데 오늘처럼 컨디션이 나쁜 모습은 처음 본다. “네, 올라가요.”왕지현은 그녀를 데리고 이미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이미자는 아주 다정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는데 아마 박유진이 어머니 성격을 똑 닮은 것 같다.심미연은 어릴 적부터 거의 박씨 가문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미자도 그런 그녀를 엄청 예뻐해 줬다.그러다 나중에 강지한과 만나게 되면서부터 그쪽으로 발길을 끊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강지한과 결혼한 3년 동안 심미연은 박유진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씨 가문에 가지 않았고 천천히 그 집안과 선을 그었다.심씨 가문에서 그쪽을 주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지한이 박씨 가문에 대해 아는 게 싫었다.사실 강지한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혹시나 심미연과 사이가 틀어지면 박씨 가문으로 그녀에게 협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여 박씨 가문이 심미연의 약점이란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들아가 봐요.”왕지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그녀는 룸 안으로 들어갔다.이미자는 한창 차를 마시고 있었고 심미연은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입니다.”그제야 이미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미연아, 왜 이리도 말랐어?”예전에도 말랐지만 얼굴만은 살이 포동포동했었는데 지금은 한눈에 보아도 잘 지내지 못한다고 느낄 정도로 안쓰럽게 변해있었다.심미연은 지금 임신 상태지만 아무리 입덧이 줄었다고 해도 입맛이 없어 잘 먹지 못했다.게다가 강지한까지 괴롭히는 관계로 더욱 입맛이 사라져 제대로 안 먹었더니 지금처럼 야윈 것이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그녀는 자기 일에 대해 말하기 싫었다.우
“우린 서로 잘 알지도 않잖아요. 그러니까 박시훈 씨, 이런 농담은 삼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거예요.” 심미연의 말은 단호했고 표정에는 조금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에게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박시훈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화내지 마요. 농담 안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살짝 겁이 났다. 정색한 심미연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강지한이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심미연은 노골적으로 그를 내보내려는 기색을 멈추지 않았다. “저... 진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박시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연애도 해본 적 없고 야자 마음을 얻는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심미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제 가세요.”그녀는 주저함 하나 없이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시훈은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진심이었고 말 그대로 사실이였다. ‘난 능력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서로 마음만 맞으면 잘될 수 있는 거 아닌가?’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심미연은 이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시훈 씨, 조심히 가세요. 멀리는 안 갈게요.”그녀는 박시훈이 불쾌해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 그의 자기중심적인 말투는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박시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뭔가 씁쓸하고 아쉽고 괜히 찬물 끼얹힌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속으로
심미연은 그가 심태하까지 조사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순간적으로 본능처럼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됐다. 겉보기엔 멋대로 굴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한량 같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지나치게 날카롭고 마치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눈이었다. ‘이 남자, 뭐지...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겉모습만 보면 철없어 보이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의외로 능력 있어 보였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가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꺼내는가였따. ‘설마 진심으로 그냥... 내 정체가 궁금해서?’“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저 진짜 악의는 없어요.” 박시훈은 양손을 번쩍 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늘에 맹세할게요.”심미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이 날 찾아온 목적이 뭐죠?”박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진짜 이유를 말해도 돼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번쩍였고 그의 얼굴엔 순진해 보일 정도로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심미연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돈 뜯어내려는 건가? 내가 그런 일에 쉽게 넘어갈 만큼 만만해 보였나.’“좋아합니다.”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온 거예요. 좋아해도 될까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박시훈의 얼굴엔 서서히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숨겨왔던 속마음을 한 번에 쏟아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를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컸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또박또박 물었다. “당신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는 알아요?”그녀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친 게 전부였고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타
심미연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심, 심 대표님... 아까 어떤 남자분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대표님을 찾으러 올라가셨어요.”프런트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누구라고요?” 심미연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장미를 들고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를 찾은 거 맞아요?” “네... 확실합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는데 그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올라가셨어요...” 잘릴까 봐 겁이 난 프런트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렸다. 그녀는 심미연이 이 거짓말을 영원히 눈치채지 않길 바랐다.심미연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장미를 들고... 누굴까?’그때 사무실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났다.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기도 전에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설마... 강지한? 다시 만날 일 없다고 말했는데 또 온 건가?’ 전화를 끊은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 며칠 전, 하늘 하우스 앞에서 명함을 건넸던 그 남자였다.심미연은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 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네. 근데 사무실까지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이 있나?’ ‘자, 받아요. 이거 당신한테 주는 거예요.” 박시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장미꽃을 밀어넣으며 말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심미연은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뭔데요?” “앉아서 얘기해요. 당신이 힘들면 안 되니까.” 박시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 옆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공간.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박시훈은
이진영은 핸드폰을 쥔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리 뒤져도 끝내 밝혀내지 못한 아버지의 비밀. ‘설마... 한석훈이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아니면 그냥 떠보는 소리일까?’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머릿속을 뒤엉켰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찾고 싶은 충동이 다시 치밀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다은의 병실로 향했다. ...이노하이브 대표실. 강지한은 막 성무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소영이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쫓기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현장은 심하게 어질러졌고 문이 잠겨 있어 그녀는 도망칠 틈조차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119에 실려 갔다. 강지한은 메시지를 닫고 입술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제멋대로 날뛰면 그땐 진짜로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막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전화를 받자 박시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한아, 큰일 났어!” 강지한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온지유가... 나왔어.” 박시훈은 말끝을 떨며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어떻게...?’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로 온지유를 꺼낸 거지?’ 강지한의 눈빛이 서서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떻게 된 거냐.” 그 말을 뱉는 순간, 심미연과 심태하가 본능처럼 떠올랐다. ‘온지유가 풀려났다고? 그럼 미연이랑 태하가 위험할 수도 있어.’‘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나도 방금 들었어. 지금은 육현성 별장에 있다는 것 같아.” 박시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기에 곧장 강지한에게 알린 것이었다. “확실해?” 강지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성무진을 시켜 교도소 내부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이진영은 단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더니 곧장 의자에 앉아 이다은의 창백한 손끝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곤 한 톤 낮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육현성 그 자식은 아버지 자격 없어. 네가 그 인간 아이를 낳으면 평생 끌려다닐 거야. 정말 그걸 바라는 거야?” 이다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육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이진영의 말처럼 그 인연은 평생 끊어낼 수 없었다. 반면 아이가 없다면 그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다은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마음을 다잡은 듯 결심이 담긴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알았어. 오빠, 지금 바로 수술 예약해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래. 병실에 얌전히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알았지?” 이진영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이미 진운혁과 연락을 마친 상태였다. 진운혁은 이다은이 재판에서 반드시 승소할 수 있도록 돕겠다 했고 육현성의 재산 절반은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이진영은 믿고 있었다. 동생이 건강만 회복하고 이혼만 잘 마무리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육현성 같은 쓰레기는 다은이 앞에 다시는 나타나선 안 돼.’ “알겠어. 오빠, 이제 가봐.” 결정을 내린 이다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음 한쪽이 가볍게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테니까. 이진영은 병원 접수처로 향해 곧바로 수술 일정
“오빠,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서 정말 고마워.”온지유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지금의 온지유에게 육현성은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를 잃는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육현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됐다. ‘심미연, 기다려. 복수할 기회는 반드시 만들 거야.’“세상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유야, 그런데 만약 네가 날 배신한다면 그때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어.”육현성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경고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너무 깊어서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만약 온지유가 그를 배신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오는 걸 느낀 온지유는 잠시 두려움이 스쳤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강지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오빠, 걱정하지 마. 난 절대 오빠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엔 오빠만 사랑할 거고 영원히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온지유는 속마음을 감추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은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육현성 앞에선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끝까지 사랑할 거야.” 그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유야, 이제 좀 쉬어. 나는 아래층 좀 보고 올게. 밥 먹을 때 부를게
보통이라면 그녀가 화를 내면 강지한은 한 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소영은 성무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며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강지한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차갑고 무표정한 시선만이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성무진은 그녀 앞에 서서 공손히 손짓하며 말했다. “큰 사모님, 모시겠습니다.”문소영은 강지한을 향해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 “강지한! 너 계속 이렇게 나를 몰아붙인다면 정말 당장 죽어버릴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책상 쪽으로 달려가 머리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려 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성 비서, 데려가.”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는 문소영의 모습이 점점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무진은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큰 사모님.” 그 말과 함께 그는 차가운 손길로 문소영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당장 놔!” “손 떼! 지금 당장!” 문소영은 크게 외치며 저항했지만 성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거칠게 차에 태웠다. 차에 태운 후 성무진은 팔을 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문소영은 재빨리 차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큰 사모님, 죄송합니다.”성무진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문소영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무진은 그녀를 차 안에 눕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차 밖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역시 대표님을 화나게 하면 끝이 좋을 리가 없지.’‘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성무진은 갑자기 떠오른
도진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진지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신하린 곁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어제 하린이를 하늘 하우스로 데려갔어요. 한 번 들러보세요. 하린이 곁에 조금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미연은 서류봉투를 흘깃 바라본 뒤 덧붙였다. “이 서류는 제가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도진혁이 직접 합작 제안서를 들고 찾아온 이상 함부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수익이 보장된 일이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놓쳐선 안 되는 법이었다. “네. 지금 바로 가보겠습니다.”도진혁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다 방금 전 그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에서 조용한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린이 목에 남은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 텐데...’‘진혁 씨가 그걸 보면... 혹시 이진영 씨에게 따지러 가는 건 아닐까?’강지한 사무실.성무진은 문소영을 데려다주고 서둘러 떠났다. 강지한의 얼굴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성무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무실 안에서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문소영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느긋하게 쏘파에 앉았다. “비서한테 차 좀 가져오라 해. 괜찮은 차로.” 그녀는 비서부가 꽤 유능하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웬만한 건 다 알아서 해줄 정도로. 하지만 강지한은 말없이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그 봉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직접 보시죠.”“뭘 보라는 거야?” 문소영은 그를 향해 냉정하게 시선을 던졌다. “보면 알아요.” 강지한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뭐가 들어있길래...?” 문소영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봉투를 들었다. 무
심미연은 박유진이 수년 동안 마음을 다해 사랑해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박유진이 쉽게 놓을 리 없었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던 비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 정말 모든 걸 걸고 계시는군요... 제발 심미연 씨가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기를...”한편,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세요.”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진혁이었다. 그는 마치 급히 돌아온 듯 피곤하고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 비서님...?” 심미연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휴가를 낸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그의 뒤에서 따라 들어온 비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심 대표님, 실례하겠습니다. 이분은 저희 도강홀딩스의 대표, 도진혁 대표님이십니다.”비서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말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서류는 도강홀딩스와 은성 그룹이 합작할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서입니다. 먼저 검토 부탁드립니다.”심미연은 비서가 놓고 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도진혁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도진혁 대표님...?’ ‘그렇다면 도진혁 씨가 휴가를 낸 이유는... 회사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였던 건가?”그때 도진혁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 잠깐 나가 있어. 심 대표님과 단둘이 얘기할 게 있어.” 도진혁은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신경 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말투와 행동은 여유롭고 예의 바르며 그에게서 흐르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 엘리트의 품위였다. “네. 대표님.” 최세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조심스럽게 심미연을 한 번 쳐다봤다. ‘이분이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분인가... 정말 예쁘다. 대표님이 회사를 물려받은 이유가 이분 때문이라면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