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운성시의 하늘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대지를 하얀색으로 뒤덮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에 금색 롱원피스를 입었고 밖에는 하얀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쁜 실버 귀걸이를 매치했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길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운성시는 아주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방황하듯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찬바람이 스치면서 눈꽃이 얼굴에 내려앉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평범한 한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던 그때 나는 용기 내어 다가가 은행 카드를 건네면서 부탁했다.“내가 10억 원 줄 테니까 나랑 3개월만 연애할래요?”그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나를 보았다.“미안해요. 난 여자 친구가 있어요.”혼자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용기 내서 다가간 것이었는데...“알겠어요. 괜찮아요.”나는 실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또 다른 평범한 남자를 찾았다. 사실 나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고 게다가 10억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들은 되레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나랑 연애할래요?”“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가족한테 연락해 줄까요?”나는 멋쩍게 웃었다.“아닙니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었다.“나랑 연애할래요?”“미안해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행복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까?내가 해본 거라곤 임지혜를 미친 듯이 질투한 것뿐이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나랑 연애할래요?”그런데 그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진짜 언니였어요?”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고씨 가문 사람 고민영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현성이 싸늘하게 서 있었다.나는 민망함이 극에 달했고 고민영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오늘 밤의 일은 정말 불쾌하게 끝났다. 담현아가 그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진심으로 최희연을 친구로 여겼다.별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함승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가주님, 죄송합니다. 아까 샤워 중이라 보내신 메시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석씨 가문에서 분명 가능할 겁니다. 가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알려주세요.”나는 최희연을 위해 복수를 하고 싶었다.주민솔이 저지른 일을 그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그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의 뜻에 따라 처리하겠습니다.”석씨 가문과 고정재가 동시에 주민솔을 상대했다. 비록 진유겸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보니 형벌까지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가 양어머니와 관련된 일을 마치고 나서 주민솔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녀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며 고통을 겪을 것이다.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다.“희연이 너무 안타까워.”마치 예전의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하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받아들여야 했다.게다가 오늘 그녀의 상태를 보니 꽤 괜찮아 보였다. 진유겸이 그녀의 얼굴 흉터를 보았을 때 잠시 당황한 것 외에는 늘 차분함을 유지했다. 심지어 진유겸 앞에서 주민솔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예전의 그녀라면 아마 진유겸을 위해 한발 물러섰을 것이다.석지훈은 깊은 생각에 빠진 나를 보더니 물었다.“둘의 이혼 때문에 그래? 사실 진유겸은 나름의 사정이 있어.”그는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내 궁금해서 물었다.“유겸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희연이를 잠깐 사랑했던 거예요?”창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창문을 닫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주민솔은 어린 시절부터 진유겸 곁에 있었어. 아마 열다섯 살 때, 진유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었어. 그 당시 유겸은 아무런 권력도 없어서 그저 주민솔이 그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그 일이 있고 주민솔은 죽을 뻔했어. 정신 상태가
그녀를 사랑하냐고?고정재는 이 질문을 수천 번도 더 생각해 봤다.그는 평생 덤덤하게 살아왔고 결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처음 연수아를 만나고 나서 그녀의 변함없는 확신에 감동하며 마음속에 서서히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녀에게 한평생까지 약속했다.그러나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엄현히 달랐다.그는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사랑한다.그녀는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었다.비록 그녀의 성격이 그보다 더 차갑다 해도 상관없었다.고정재는 몇 해 전 설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단호하게 그를 거절했고 올해 설날에 다시 그의 마음을 고백하려던 찰나, 그녀는 다른 남자랑 함께 핀란드로 떠나버렸다.다른 남자와 함께 새해를 보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정재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마음속은 온통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이 아이는 결코 그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마침 연수아에게서 문자를 받았다.그녀가 단지 일 때문에 핀란드에 간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은 그녀를 원망했다.지난 2년 동안 그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그 생각에 고정재는 억울함을 느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그는 이 추격전에서 결국 졌다고 생각했지만 담현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저랑 결혼할래요?”그는 그녀와 남은 생을 함께하고 싶었다.그는 간절히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다.그는 서둘러 서류를 챙기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결혼 등록소에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한겨울에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야말로 너무 아름다웠다.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현아야.”그는 그녀보다 14살이나 더 많았다.사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너무 어리다 보니 고정재가 나이가 많아 보였다.담현아는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바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얇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훤칠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고정재를 보았다.그는 담현아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아마 한민영에게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는 점점 자신의 소유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남자들은 원래 이렇게 질투심이 강한 존재였나?담현아는 몸을 살짝 굳힌 채 돌아서며 말했다.“아저씨.”고정재는 멍한 표정의 한민수를 지나 담현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담현아는 고정재를 매우 의지했다. 마치 딴사람이 된 것마냥 차분한 목소리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데는 없어?”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희연 언니가 너무 억울해요.”그녀는 고의로 진유겸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그러나 진유겸은 여전히 주민솔을 품에 꼭 안은 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고정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이곳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했다.“네, 사건 접수해주세요. 그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담현아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서에서 새로 팀을 조성해서 사건을 조사할 거야. 우린 집에 가자. 멍든 곳부터 처리해야지.”그는 이미 그녀의 몸에 생긴 멍을 눈치챘다.그녀의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순간 그가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랐다.“세상을 돌아다니며 권력을 알아가라.”고정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그녀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재가 먼저 돌아선 뒤 그녀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저 먼저 돌아갈게요.”“응, 나머지 일은 내가 맡아서 할게.” 내가 말했다.담현아는 고정재와 함께 경찰서를 떠났다.한편, 주민솔의 정신 상태는 꽤 좋아진 듯했다. 그때 진유겸의 전화가 갑작스럽게 울렸고 그는 주민솔을 맡긴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경찰서에는 이제 우리 몇 명만 남았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최희연에게 물었다.“이제
진유겸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어?”담현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럼 당신도 끝장날걸!”진유겸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입 닥쳐.”담현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최희연이 급하게 그녀를 붙잡자 조용해졌다. 더는 진유겸을 자극하지 않았고 최희연의 마스크를 찾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최희연은 말없이 마스크를 다시 썼다.사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최희연이었다.진유겸이 주민솔에게 더 애틋하게 대할수록 최희연이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마치 과거의 모든 일이 신기루 같아지며 진유겸이 그녀를 사랑했던 기간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20분 뒤 경찰은 떨리는 손으로 우리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나는 가는 길에 고정재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지금 현아가 경찰서에 있어요.]그는 담현아의 남편이었다. 당연히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석지훈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그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최희연을 위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였기에 그를 이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 걱정 마, 한민수가 있으면 안전할 거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현아와 함께 경찰서로 들어갔다.경찰은 간단하게 진술을 기록했고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그러자 담현아는 자백하며 사실을 폭로했다.“그리고 저 여자가 고의로 살인을 했어요. 피해자가 현장에서 고소하면 바로 구속할 수 있죠?”법률상 가능한 일이었다.경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피해자가 누구인가요?”담현아는 최희연을 가리키며 말했다.“이분이요.”그 말을 들은 진유겸은 시선을 즉시 최희연에게 고정했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해?”그는 최희연에게 고소하고 싶은지 물었다.처음부터 그는 이 일을 누가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숨겼다.이를 눈치챈 최희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경찰에게 말했다.“네, 고소하겠습니다.”순간 진유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솔이는 최희연에게 화살을 돌렸다.나는 최희연을 오래전부터 알아 왔고 그녀는 절대 억울하게 당하며 참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갑자기 마스크를 벗자 사람들은 흉터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모두 숨을 들이쉬었다.오직 담현아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최희연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어느 재벌 딸에게 말했다.“네가 보고 싶은 건 내 얼굴 아니야? 망가진 얼굴 하나쯤이야, 그게 뭐 어때서? 난 열등감도 없고 슬프지도 않아.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고. 뭘 비웃고 싶은 거야? 내가 못생겨서? 못생겼으면 또 어때? 그때 네 언니가 사람을 시켜 폭탄을 설치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알고 보니 솔이가 한 짓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악랄할 줄이야.나는 한때 그녀가 생각보다 엄청 털털하다고 생각했었다.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나는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최희연을 위해 반드시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담현아가 바로 주민솔을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응할 틈도 없이 바닥에 세게 나뒹굴었다. 순간 그녀의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담현아는 곧 그녀 위에 올라타더니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였다.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와 최희연도 급히 싸움에 끼어들었다.방 안에서는 여덟아홉 명이 뒤엉켜 싸우며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민수는 더 이상 구경만 하지 않고 담현아를 지켰다. 그러나 담현아는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은 채 팔을 물어뜯었다.순간 그녀의 팔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했다.밖에 있던 두 남자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더니 이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유겸은 얼른 담현아를 주민솔한테서 떼어내고는 최희연도 한쪽으로 밀쳐버렸다.갑자기 나타난 진유겸 때문에 최희연은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찾았다.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이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곧 담현아도 내 옆으로 끌어들였
그중 가장 가난한 사람은 최희연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니 돈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담현아도 그녀가 돈을 잃게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나는 계속 놀았고 계속 돈을 잃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는 이렇게 나에게 자리를 맡기고 가 버렸다.이때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재벌가 아가씨가 최희연을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얼굴 좀 보여 줘 봐.”나는 불쾌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재벌가 아가씨가 대답했다.“그냥 최희연 씨의 얼굴 좀 보고 싶은데 계속 가리고 있으니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잖아.”최희연은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고 재벌가 아가씨의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이 친구는 온갖 고난을 겪은 후 짧은 시간 안에 강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나는 웃으며 물었다.“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그때 담현아가 패를 탁 내려놓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도대체 놀 거야 말 거야? 돈도 없고 머리도 없는 재벌가 아가씨 주제에. 너랑 게임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아?”담현아의 말에 그 재벌가 아가씨는 자극을 받았는지 울먹거리며 솔이를 바라보았다.“솔이 언니, 내가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쟤네 다 날 괴롭혀요.”솔이는 나와 담현아를 번갈아 보고는 최희연을 지나쳐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진유겸은 차갑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놀 거면 놀고 안 놀 거면 빨리 꺼져.”솔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유겸아. 내 친구한테 왜 그래? 일부러 나랑 싸우자는 거지?!”이 세상에서 석지훈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민영이었다면, 진유겸에게는 솔이가 있었다.하지만 솔이는 그럴 만도 했다.진유겸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곧 결혼할 사이였으니까.그는 당연히 자기 여자 편을 들어줘야 했다.진유겸은 미간을 찌
진유겸은 더 이상 말을 섞기 귀찮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솔이가 더 이상 최희연을 괴롭히지 않자 나도 조용히 있었다. 룸 안은 갑자기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때 예유진이 카드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마침 세 테이블을 채울 수 있는 인원이었다.예유진은 도박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지난번 모임도 그가 주최했었다.담현아, 솔이, 최희연 그리고 재벌가 아가씨가 한 테이블에 앉았고 석지훈, 예유진, 진유겸 그리고 한민수가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나는 놀고 싶지 않아서 석지훈의 옆에 앉았고 담유미 역시 놀고 싶지 않아 예유진의 옆에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를 시작했다.담현아는 머리가 좋아서 패를 다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최희연이 같은 테이블이니 최희연이 괴롭힘을 당할 걱정은 아예 없었다.석지훈은 두 판을 치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네가 대신 좀 놀고 있어.”나는 테이블에 앉아 한민수에게 말했다.“좀 봐줘요.”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지훈이 돈인데 많이 잃어도 괜찮아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나는 거절했다.“지훈 씨 돈이면 내 돈이죠.”그 말을 들은 예유진은 나를 놀렸다.“형수님, 너무 쫀쫀한 거 아니에요?”예유진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나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말했다.“그럼 내가 나중에 몰래 패 좀 넘겨줄게요.”옆에 있던 한민수가 콧방귀를 뀌었다.“형수님 소리 한 번 들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다니. 내가 형수님이라고 몇 번 더 불러 주면 나 돈 따게 해 줄 거예요?”“민수 씨가 왜 나한테 형수님이라고 불러요?”그는 석지훈을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보였다.그가 원한다면 나야 좋았다. 나는 동의하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형수님이라고 몇
석지훈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나는 갑자기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가서 뺨에 뽀뽀했다. 그는 재빨리 반응하며 나를 밀쳤고 나는 바닥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너무 창피했다. 석지훈은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차가웠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어두웠다.나인 것을 알아보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다급한 모습에 나를 비웃던 사람들은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한민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서 말했다.“지훈은 여자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해요. 수아 씨가 누군지 몰랐으니까 그런 거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까이 가면 크게 혼나요.”담현아가 있었지만 그는 예전처럼 반갑게 그녀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마치 담현아를 자신의 세계에서 배제한 것 같았다.그럴 만도 했다. 담현아는 이제 고정재의 아내였고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100년짜리 혼인 신고를 했으니 한민수가 마음이 있어도 소용없었다.그의 마음은 분명 괴롭고 답답할 것이다.어린 여자를 2년이나 쫓아다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결국 다른 사람이 채가서 결혼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사실 룸 안 분위기는 꽤 어색했다. 진유겸과 최희연 그리고 솔이, 한민수와 담현아, 나와 담유미까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부터 솔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담현아는 최희연을 데리고 한민수의 옆에 앉혔고 석지훈은 내 엉덩이를 계속 문질러 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행동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오빠 눈빛이 나를 죽일 것 같았어요. 그리고 엉덩방아도 세게 찧어서 너무 아파요.”그가 방금 밀치는 바람에 배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제발 상처가 터지지 않았기를.석지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인 줄 몰랐어.”“그래
나는 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고씨 가문 20주년 기념 파티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 같았다. 당시 나는 그녀의 몸을 발로 차기까지 했었는데.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이번엔 아예 담현아에게 뺨을 맞았다. 내가 놀란 것은 물론이고 그 아가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담현아를 바라보며 화를 꾹 참고 말했다.“왜 날 때려?”담현아는 손목을 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래? 최 참새? 네 꼴을 봐. 까투리 같은 주제에 어떻게 남을 욕해?”그 아가씨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담현아에게 말했다.“현아야, 까투리랑 뭘 그렇게 따져?”“못생긴 게 꼴값 떨잖아요.”담현아가 말했다.그 아가씨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창백했다가 파랗게 질렸다가 검게 변했다. 그때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이슬아, 아직도 아래에 있었어? 어머, 최희연 씨도 있었네? 위에 올라와서 놀래요?”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늘은 원수들만 만나는 날인가 보다.2층에서 부르는 사람은 솔이었다.일단은 솔이라고 부르겠다.이름을 다 알지 못하니까.그런데 그녀는 정말 대단했다. 최희연이 저렇게 온몸을 가리고 있는데도 알아봤기 때문이다. 마치 최희연과 아주 친한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나는 최희연과 친한데도 어제 가까이 가서야 알아봤는데 2층에서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아무래도 평소에 최희연을 많이 관찰한 모양이었다.솔이는 진유겸을 역겹다고 말했던 여자였다. 쿨하게 뒤돌아설 줄 알았던 그녀는 단순한 여우가 아니었다. 어쩌면 여우보다 더 높은 단계의 불여우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완벽한 연기는 나조차도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최희연에게 물었다.“갈래?”불여우의 수법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최희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관심 없어.”담현아는 눈치가 빨라서 이상한 낌새를 금방 알아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