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이와 사현이는 순번에 따라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차례대로라면 아이들의 이름은 서구와 서십이 되어야 했다.가정부가 웃으며 설명했다.“아이가 너무 많아서 어르신께서 서팔 이후의 아이들은 별자리로 이름을 짓자고 하셨어요. 며칠 후 전갈자리인 아이 하나가 더 이곳에 와서 같이 생활하게 될 거예요. 어르신께서 그 아이의 이름은 전유라고 지어주셨어요. 사모님께서는 어르신이 게을러서 아이 이름 짓는 것도 귀찮아하신다며 웃으셨죠. 하지만 그냥 애칭일 뿐이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긴 하죠.”나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정부는 드물게 친절하게 덧붙였다.“내일이면 저희는 서당시로 돌아가 설을 보낼 거예요. 설이 지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니 그때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오세요. 그땐 사모님께서 허락하실 거예요. 저는 가정부일 뿐이라서 그런 권한이 없네요.”“감사합니다.”갑자기 사별이 내 손가락을 꼭 잡더니 흐릿한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부드러운 아이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단번에 파고들었다.순간 멈칫한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사별이를 바라보았다.나는 얼른 물었다.“사별이가 뭐라고 했나요?”옆에 있던 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사별이가 방금 무의식적으로 엄마라고 불렀어요. 여섯 달 된 아기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가끔 무의식적으로 단어를 내뱉곤 합니다. 아가씨도 나중에 직접 아이를 키워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아이가 여섯 달이라고? 사별이... 사자자리... 여섯 달짜리 쌍둥이면서 사자자리면 죽은 나의 아이와 똑같네. 사별이도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하지만 이 아이는 유씨 가문 아이인데? 유씨 가문 핏줄이야. 나랑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물었다.“아이 부모님은 어디 있나요?”“서당시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일 아이를 데리러 올 거예요.”“아, 그렇군요.”나는 넋이 나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내 마음을 눈치챈
운성시의 따뜻한 햇살이 그 남자에게 내려앉아 아련한 느낌을 더했다.마음도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하는 말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가슴을 찔렀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당신이랑은 상관없잖아요.”전화기 너머로 고현성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우리 반년 만에 만나는 거야. 그동안 나는 미상국에서 치료받고 있었는데 이제 상태가 안정돼서 귀국할 수 있었어. 내 생각은 안 했어?”고현성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진 건 유서정 때문이었다.나는 그가 줄곧 다른 인격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또한 다른 인격이 저지른 일을 건강한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나는 평생 그를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요. 축하해요.”나는 성의 없이 답했다.이 자리에서 나는 고현성이 따뜻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는 이웃집 청년처럼 전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보러 가도 될까?”그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묻어 있었고 그런 그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한때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자였고 또한 나는 그가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무조건적인 사랑은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남부럽지 않은 것이었다.‘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고현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앞이 막힌 사람이었다.그는 나를 구하려 했지만 나는 그를 떠났다.누구보다 단호하게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현성 씨, 저는 곧 동성시로 돌아갈 거예요.”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의 과거를 용서한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나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기도 했다.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차분하게 부르자 전화기 너머로 고현성이 낮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수아야, 고마워.”그는 내 뜻을 이해했다.“그래요.
「호밀밭의 파수꾼」책은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책을 받아 첫 페이지를 펼치자 석지훈의 유려한 필체로 적힌 서명이 보였다.아래에는 20세기 초라고 시간이 표기되어 있었다.이 책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책이었다.책 중간에는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나는 책을 더 넘기는 대신 현정우에게 던지며 입을 열었다.“보관해 두세요.”석만호가 왜 나에게 이 책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한 이상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볼 생각이었다.나는 현정우와 함께 연씨 별장에 들렀다.별장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연시혁도 와 있었는데 어머니는 연시혁이 설을 함께 보내러 집에 왔다고 했다.연시혁은 마침내 연씨 가문을 자신의 집이라고 인정한 것이다.아버지는 내가 집에 온 것을 보고 매우 놀라며 물었다.“운성시에는 갑자기 어쩐 일이야? 3일 뒤면 네 25번째 생일이면서 설 전날인데 어떻게 보낼 예정이야? 지훈이가 생일 챙겨준대?”부모님 눈에 석지훈은 이미 예비 사위였고 내 미래의 남편이었다.부모님은 내 모든 일을 그가 나서서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잔혹했던 석지훈의 모습이 떠오르자 배가 점점 꼬이는 것처럼 아파진 나는 얼른 거짓말로 둘러댔다.“네. 핀란드에서 새해를 보내려고요. 그래서 설에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아요.”곧 명절인 상황에 굳이 부모님께 나와 석지훈 사이에 발생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히 새해를 맞이했으면 했다.어머니는 기대하며 물었다.“그럼 새해가 지나면 집에 올 거니?”내가 혼자 집에 온다면 어머니는 걱정하실 것이다.석지훈과의 관계도 끝났으니 어머니께 다른 예비 사위를 보여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러면 어머니는 더 걱정하실 것이다.나는 또다시 하얀 거짓말을 했다.“요즘 너무 바빠요. 석씨 가문 일도 많아서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찾아뵐게요.”소파에 앉아 있던 연시혁이 갑자기 물었다.“언제 결혼해? 알아야 미리 축의금도 준비하지.”연시혁이 묻자 부모님도 동시에 나를
석지훈이 직접 쓴 글씨체는 나에게 익숙했다.아래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가 약혼한 날이었다.석지훈은 나를 사랑했지만 그뿐이었다.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굴복했다.비록 그가 받았던 스트레스를 알고 있었지만 용서하기는 어려웠다.오히려 모르는 상황에서 자궁에 손상을 준 행동으로 인해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고 있었다.너무도 절망적이었다.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나는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많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여전히 내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어떻게 화를 억제하고 마음속 슬픔을 다스리는지에 대해서 말이다.하지만 감정을 억누를수록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하고 힘들어졌다.결국 나는 잠을 설쳤다.[이전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었어. 네가 처음이야. 내가 미숙해서 네가 사랑을 그저 그런 것으로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워.]석지훈이 남긴 글은 사랑 고백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 같았다.책갈피에 적힌 글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우리의 사랑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승윤이 보내준 자료를 확인했다.조직 이름은 타이탄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이었으며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크리스와의 만남은 여전히 생생히 기억났다.‘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어. 오만방자하게 아무나 괴롭힌다는 거지? 석씨 가문이 정말 그냥 이대로 넘어갈 거로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복수해야지. 평온한 설을 보내고 나면 그 뒤에는 처절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벼운 뇌진탕 후유증일 거로 생각한 나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다시 누웠다.늦은 밤에도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뜬 채로 날이 밝는 걸 지켜보았다.하늘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야 겨우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땐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비와 눈이 많은 운성시
‘설마 나랑 석지훈 사이를 알고 있는...’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나에게 있어 우리 꼬마 아가씨는 가족이야. 앞으로도 평생 그럴 거야. 아무도 네 생일을 함께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위해 연주해 줄게. 연주회가 끝나면 동성시로 가서 담현아랑 같이 새해 맞이하러 갈게.]‘고정재는 내가 석지훈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네.’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나는 그가 이번 생에서 내게 준 따뜻함에 감사했고 내 곁에서 빈틈없이 나를 지켜준 것에 감사했다.고정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사랑이 아닌 애정이 담긴 소중함만이 남아 있는 관계였다.연주회는 다음 날 오후에 열렸다.나의 휴식 시간과 딱 맞는 시간이어서 잠에서 깬 나는 특별히 밤하늘처럼 파란 드레스를 골랐다.드레스의 치맛자락은 땅에 닿았는데 하이힐을 신으니 발목까지 딱 맞았다.이 드레스를 입으면 마치 광활한 별하늘을 몸에 걸친 듯이 눈부시게 빛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운성시에서 나는 언제나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을 유지했다.특히 석지훈이 없는 운성시에서는 어느 자리에서도 항상 완벽히 아름답게 꾸몄는데 피곤한 삶이었다.최희연도 이전에 한 번 내게 물었었다.“이렇게 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든가?’하지만 이런 것도 내가 선택한 삶일 뿐이었다.흰색 코트를 걸치고 나서자 현정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가주님, 어디 가십니까?”“연주회 들으러 가요. 오늘은 동행하지 않아도 돼요.”현정우는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현정우는 내 안전을 염려했다.“그렇다면 따라오세요.”“가주님께서는 저희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가주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핸드폰에 있는 긴급 호출 장치를 사용하시면 됩니다.”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정우는 나를 연주회장까지 데려다주었다.나는 입구에서 잠시 서 있다가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에 들어갔다.자리에 앉자마
“기억하지. 석씨 가문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폐물일 뿐이잖아.”당황한 크리스는 말이 꼬이며 당황해서 물었다.“폐... 폐물?”나는 가볍게 비웃으며 조롱하듯 말했다.“아니면 뭐야? 그럼 폐물이 아니라 쓰레기야?”내 눈에 크리스는 그냥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고 또한 나의 수치였다.그는 분노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석지훈의 여자답게 만만하지 않네.”그는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이름을 언급했다.나는 잠시 침묵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온한 생활을 잘 즐겨봐. 설만 보내고 나면...”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타이탄은 떠돌이 개가 될 거야.”그는 웃으며 말했다.“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용기를 준 거야?”나는 비웃으며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다른 쪽에서는 크리스가 책을 읽고 있는 석지훈을 보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네 여자 성격이 왜 이래? 혹시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는 거 아니야?”석지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원래 복수는 철저히 하는 사람이야.”원한을 잊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녀는 고현성을 용서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석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석지훈이 책장을 넘기자 크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처음부터 친절하게 대해줄 걸 그랬어.”석지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수아한테 뭘 했는데?”크리스는 못된 생각을 품었던 자신의 과거를 직접 말할 생각이 없었다.석지훈이 알게 된다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크리스는 재빨리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말했다.“경기장에 밀어 넣었잖아.”석지훈은 순간 멈칫했다.그날 그는 그녀를 두 번이나 발로 찼다.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 심히 걱정되었지만 지금 그는 궁지에 몰린 짐승과 같았다.원태웅은 아직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는데 이는 원태웅의 행동이 느린 것이 아니라 타이탄이 그를 숨기기 위해 백 년의 기반을 망가뜨리기까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예전의 나는 참으로 비참했다.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현정우에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 주세요.”나는 눈 내리는 거리를 밟으며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길고 긴 골목은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다.나는 예전에 그 가로등 아래까지 걸어가며 혼잣말로 한탄했다.“요즘 왜 이렇게 슬프지?”나는 눈을 감으며 울먹였다.“석지훈, 네가 내 믿음을 산산조각 냈어.”석지훈은 내가 힘들 게 다시 쌓아 올린 사랑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거기, 아가씨. 혼자야?”깜짝 놀라서 눈을 뜬 나는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너 보고 싶어서.”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내 옆에 따라붙으며 물었다.“나 싫어해?”사실 나는 그를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오히려 죽어가던 나를 구해줘서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와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석지훈이 그를 변덕이 심하고 기분도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안 그래도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데 이런 사람과 엮여서 더 불안정해지고 싶지는 않았다.내가 그를 밀어내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야, 생일 축하해.”고현성을 제외하고 생일 축하한다고 직접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리고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첫 축복이었다.그 순간 마음속의 강인함과 자제력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뭐가 그렇게 슬픈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밀려왔다.소년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왜 울어?”‘내가 왜 울고 있을까?’“나도 모르겠어.”그는 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슬퍼?”“욱현아, 이번 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야.”그는 단호하게 답했다.“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그렇다. 이제 막
욱현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할 때는 이어폰을 벗은 상태였다.나는 대담하게 그에게 청각 장애가 있다고 추측했다.‘두 번이나 귀머거리라고 욕하다니!’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의 죄책감은 점점 더해졌다.욱현이 언제 무시했냐고 물을 때 나는 얼버무리며 답했다.“장난은 그만 치고 이따가 현정우랑 먹을 거 좀 사러 다녀와. 나는 별장에서 기다릴게.”욱현이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집에 가도 되는 거야?”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거절해도 돼.”결국 나는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욱현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역시 수아는 나한테 다정해.”나는 먼저 산속의 별장으로 돌아왔고 욱현과 현정우는 장 보러 갔다.나는 두 사람에게 봉투 스물다섯 개의 추가로 사 오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별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쯤이었다.눈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고 나는 다른 경호원 몇 명과 함께 부엌에서 한참 동안 저녁 준비를 했다.저녁이 다 준비될 즈음 욱현과 현정우가 물건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그들은 먼저 집안을 예쁘게 단장하고는 정원에 폭죽을 준비해 두었다.자정이 되면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다.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나는 내 경호를 맡고 있는 24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설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낯선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예전의 23명을 떠올렸다.그들은 생존을 위해 내 곁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들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점점 더 깊어졌다.식사 중 나는 술잔을 쳐들고 건배사를 외쳤다.“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의 노고에 대하여 건배!”경호원들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가주님, 그건 저희 의무입니다.”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그들의 존재는 나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었다.술잔을 비운 나는 목구멍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옆에 있던 욱현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석지훈이 방을 나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 심심함을 느꼈다. 하지만 석지훈이 왕자현을 안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 진유겸에 왕자현까지 만나러 간다니.하필 그 두 사람 다 최희연과 얽혀있는 남자들인데.문득 석지훈이 내게 덮어주었던 양복이 온천 옆에 놓여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양복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양복 주머니에는 석지훈의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이 켜지면서 원태웅이 보낸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다.나는 원태웅이 석지훈에게 보낸 문자가 항상 궁금했다.석지훈의 휴대폰에는 비밀번호 잠금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문자를 열어보니 원태웅이 여러 개의 문자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 몇 시간 전 대화 내용을 보니 석지훈이 원태웅에게 말한 내용이었다.[모든 기억이 돌아왔어.]원태웅은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벌써요?]석지훈: [...][그럼 형은 어디에 있어?]석지훈은 간단하게 답했다.[아이스랜드.][아이스랜드에는 왜? 설마 윤아 때문인가? 윤아가 아이스랜드에 있어? 맞다, 형이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낸 이유가 뭐지? 윤아가 또 형한테 화난 거 아니야?]원태웅은 석지훈의 습관을 꿰뚫고 있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답했다.[...]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안다. 이 말줄임표는 원태웅을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여자는 화가 나도 달래기 쉬워. 게다가 형은 잘생겼으니 누가 정말 형한테 화를 내겠어? 내 말 믿어. 윤아는 분명 거절할 거야. 그럼 그냥 좀 더 박력 있게 나가. 그리고 윤아가 좋아하는 말 많이 해줘. 뭘 좋아하든 그냥 다 맞춰줘. 원칙 같은 건 필요 없어. 자기 여자 앞에서 무슨 원칙이야. 내 말 들어. 틀림없다니까.]석지훈이 답장이 없자 원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윤아는 그냥 좀 까다로울 뿐 온순해서 달래기 쉬워.]내가 까다롭다고?석지훈이 대꾸하지 않자 신이 난 원태웅
하지만 그건 과거의 연수아일 뿐이었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 예전보다 성격도 더 까칠해졌지만 살아있는 사람다웠다.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수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여기며 그에게서 원하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여자들처럼 꾸밈없이 사랑하고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화가 나면 바로 표정을 굳히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모습이 진짜 연수아였다. 더 이상 과거 고현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러워하거나 가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석지훈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윤아는 까다롭지 않다. 그의 윤아는 그저 평범한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우는 그런 그녀야말로 석지훈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비록 그가 시시때때로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 해도 괜찮았다.석지훈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사랑을 받는 이런 나날들이 행복했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인생은 늘 엇갈리고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다.석지훈은 옆에 있는 윤 비서를 바라보며 갑자기 뜬금없이 말했다.“윤아가 내 곁에 온 후로 너뿐만 아니라 태웅이를 포함한 몇몇이 규칙을 잊고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계속하더라.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멈추질 않고. 내가 우습게 보여? 설마 내 뒷말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연수아가 석지훈의 곁에 나타난 후에야 윤 비서를 비롯한 원태웅 등은 석지훈에게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자 수염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게 농담도 하고 그랬지만 나름대로 선은 지켰다고 생각했다.윤 비서 일행은 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석지훈에게 들통나고 말았다.역시 석 대표님은 세상에서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닿았고 붉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그 순간 그가 날 끌어안았다.나는 결국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내 몸의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에 눕혔다.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의외로 농담을 건넸다.그는 예전보다 더 뻔뻔해진 것 같았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넌 내 사람이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우리 어머니 일은... 내게 위협이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누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 설령 어머니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난 슬프고 안타깝겠지만 그뿐이야. 그분이 내 행복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순 없어. 그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둘 수 없어.”석지훈은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아이들도 너에 비할 바가 못 돼. 아이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너야말로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여자라는 거야. 아이들은 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고! 윤아야, 앞으로는 네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직접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갈게. 괜찮겠니?”그 후에도 석지훈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난 조용히 응수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잠깐 자고 있어. 유겸이가 아직 아이스랜드에 있는데 만나고 와야 해. 그리고 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도 만나야 하고.”예전 같았으면 절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난 그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볼일 보고 와요.”석지훈이 일어서자 난 그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는 누군데요?”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왕자현.”석지훈과 왕자현이 아는 사이라고?...석지훈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코트로 갈아입고 온천 회관을 나섰다. 계속해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 비서는 석지훈이 나
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게 싫었다.하지만 또 그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기를 바랐다.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아니, 그 사람 눈에 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눈가가 빨개진 채로 그를 쳐다보니 석지훈은 내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자신의 정장을 벗어 내게 덮어주며 한숨을 쉬었다.“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태웅이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게 정답이라고 해서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잊었어.”나는 억울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석지훈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태웅이가 그러더라. 차가운 남자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나도 네가 내가 무뚝뚝해서 여러 번 화를 냈다는 걸 알아. 그리고 핀란드를 떠날 때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화를 냈다는 것도.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네가 원하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을 주었어.”역시, 석지훈은 정말 다 알고 있었다.그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었다.그는 눈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어머니 일은 아직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이 일로 네게 실망을 안겨 줘서 미안해. 그러니, 우리 당분간 결혼은 미루는 게 어떨까?”눈이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먼저 내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아가야, 나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이해해.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야.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석지훈이 이렇게까지 낮추다니.나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자. 몸 녹이고
석지훈은 담현아보다 훨씬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었다.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고정재와 그만큼 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금방 내 진심을 알아채 버렸다.나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네, 그런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했던 그 말 때문이기도 해요. 당신이 아무리 부정하고 사과해도 그건 당신의 진심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항상 위험한 일에 뛰어들잖아요. 우리는 항상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고...”나는 몸을 돌려 무표정한 석지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결혼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건 내가 꿈꾸던 가정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가정은... 지훈 씨, 난 매일 아침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깨어나고 싶어요. 그가 내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 사람이 진정한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요. 그리고 그의 세계에 녹아들고 싶어요. 난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하고 친밀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난... 그리고 결혼은 두 가족의 문제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동의하시겠지만, 당신 어머니는... 난 이렇게 몰래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떳떳하게 당당하게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나는 그를 강요하려는 게 아니었다.단지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싶었다.그렇다고 그의 아내가 되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나는 그저 그가 또 다른 어머니를 잃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 온천 옆에서 패딩을 찾아 입고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폭풍설이 몰아쳤다.몸은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더욱 시렸다.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답답했다.나는 붉어진 눈으로 밖으로 나왔다. 패딩 안에는 얇은 시폰 드레스 한 장뿐이라,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텅 빈 듯 추웠다.망망한 설원을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눈구덩이에 빠졌다. 순식간에 온몸을 덮치는 냉기에 이가 덜덜 떨렸고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내 모습이 한심해서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에서
나는 이해했다. 누구보다 그의 고통을 이해했다.석지훈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아들을 협박하는 것이 나 역시 혐오스러웠다.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한쪽에는 사랑이, 다른 한쪽에는 가족이라는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그건 마치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없는 천칭 같았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차가운 입술로 내 손바닥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나와 결혼해 줄래? 석지훈의 아내가 되어 줘.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줘. 나중에 꼭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려 줄 테니 지금은 잠시만 억울해도 참아줘.”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물었다.“괜찮겠어?”괜찮겠냐고?마음이 갑자기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 그의 어머니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그때의 결말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나는 갑자기 딜레마에 빠졌다.석지훈과 나는 결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예유진이 했던 말도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석지훈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굳어졌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는 조용히 물었다.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았다. 내 모습을 본 석지훈의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왜 그래?”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조심스러웠다.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석지훈은 나를 품에 꼭 안았다. 그 순간, 나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어머니의 협박 때문에 망설이겠지만 그는 말과 행동이 매우 단호한 남자였다. 결혼하자고 하면 정말 결혼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석지훈은 누군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성범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내가 전부였으니까.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두려웠다.나는 석지훈의 어머니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
석지훈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확실한 태도를 보고 싶었다.나는 그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을 원했다.하지만 그건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그의 친어머니가 목숨을 담보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나는 갑작스러운 무력감에 휩싸여 석지훈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는 내 마음속 거부감을 읽었는지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나는 그의 품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짧고 얇은 시폰 원피스가 앉은 자세에서 더 올라가 새하얗고 곧은 긴 다리가 석지훈의 시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남자는 매혹된 듯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 무릎을 감싸 쥐었다.“아직도 화났어?”마치 설명을 들었으니 이제 용서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한 말투였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야, 그날 밤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야. 그리고 기억이 돌아온 걸 바로 말하지 않은 것도 잘못했어. 사과할게.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 줄 거야?”이렇게 거듭해서 사과하는 석지훈에게 어떻게 매정하게 굴 수 있겠는가?나는 입술을 깨물며 서글프게 말했다.“화내려는 게 아니에요.”나는 그의 세계에서 무력감을 느꼈다.나는 결코 그의 진정한 아내가 될 수 없었다.예유진도 나를 '둘째 형수'라고 부르면서도 늘 남처럼 대하지 않았던가.그가 다시 물었다.“그럼 용서해 줄 거지?”내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석지훈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지훈 씨.”오빠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사랑하는 남자에게 나는 언제나 이랬다.마음이 약해서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석지훈은 몸을 숙여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의 몸을 밀쳐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단숨에 품에 안아 버렸다.“놔요!”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침묵으로 일관하며 내가 마음이 약해지고 다시 그에게 의지하기를 기다렸다.나는 그의 품 안에서 계속 버둥거렸다. 그때, 석지훈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아가야, 가만히 있어 봐.”순간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결국 나는 그에게 진정으로 화를 낼 수 없었고 그를 향한 분노를 쏟아낼 수 없었다.나는 석지훈을 사랑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나는 언제나 너무나 쉽게 그를 용서했다.그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 응어리는 더욱 깊어졌다.그가 기억상실증 연기를 해서도, 그가 했던 말 때문도 아니었다.나는 그저 그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었다.아주 단순한 바람이었다.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고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예유진에게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곁에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그것뿐이었다.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마음속에 천근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이 막혔다. 그때 석지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야, 그날 밤에 했던 말, 미안해.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이혼한 여자가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나는 무심히 물었다.“답은요?”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있어.”“지훈 씨, 그런 감언이설은 그만둬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못을 만회하는 중이야.”“하지만 진심이었잖아요.”내가 말했다.“그래. 내가 한 말이니까.”석지훈은 부드러운 입술로 내 따뜻한 뺨을 스치며 나직이 속삭였다.“하지만 그건 다른 여자에게 한 말이야. 우리 윤아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윤아야, 난 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나는 수건을 두르고 온천을 나와 방으로 향했다. 남자는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진유겸이 그에게 전화를 건 지 두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스랜드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으로 놀랐다.그건 진유겸이 그에게 전화했을 때 이미 아이스랜드로 오는 중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나의 행적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기억상실인 척하는 것인가?!내가 아직 그가 기억상실인 척하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계속 기억상실인 척할 셈인가?나는 방에 들어가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남녀가 한 방에 있는 건 안 좋아요.”석지훈이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는 나타난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듯 했다.나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낫지 않은 감기 때문인지 정신은 계속해서 몽롱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문득 석지훈이 떠올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얇은 종이로 된 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비쳤다. 크고 단단한 그의 실루엣은 마치 나를 지켜주는 굳건한 산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그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태도는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그는 내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안겨주었다.현정우의 말대로 석지훈의 세계는 영광과 재난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걸 이해하지만 나는 그 세계에서 배척당하는 기분이었다.나는 한 번도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고 그도 나를 자신의 세계로 이끌어 준 적이 없었다.게다가 우리 사이에는...아이가 있었다. 즉, 가정이 생겼다는 뜻이다.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내가 꿈꿔왔던 가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그는 여전히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한 후에야 겨우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