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지나간 후 운성시에는 뜻밖에도 해가 떠올랐다.나는 현정우가 내게 가져다준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즐기며 함승윤이 가져온 석씨 가문의 권력 분포도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어떤 권력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게 된 자료였다.차근차근 살펴보니 석씨 가문의 위세는 소름 끼칠 정도였는데 내가 보고 있는 자료는 석지훈조차 모르는 자료였다.‘이렇게 보니 나의 생부는 아들에게조차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네.’나는 권력 분포도를 보며 별장 아래 정원에서 몇몇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제일 큰 아이는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였고 가장 어린아이는 세네 살쯤 되어 보였다.도시의 소음에서 멀리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은 꽤 행복해 보였다.손에 든 권력 분포도를 내려놓고 아래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임신과 출산을 겪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나에게 유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에서 고은경이 여섯 일곱 달 된 아기를 안고 나왔다.그녀의 뒤에는 두 명의 가정부가 뒤따랐는데 그들도 각각 여섯 일곱 달 된 아기를 안고 있었다.‘유씨 가문은 자손이 번성하네.’고은경은 아기를 담요를 깔아둔 화단에 내려놓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정원에는 여러 명의 아이만 남아 놀고 있었다.내가 아이들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지 옆에 있던 현정우가 제안했다.“가주님, 아이들이 좋으시면 내려가서 보시죠.”나는 그를 힐끔 보며 물었다.“얼마 전에 유서정을 상대로 한 일을 생각하면 유근수가 날 반겨줄 것 같나요?”현정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석씨 가문 사람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해도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을 테니까요.”‘모든 사람이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건 아닐 텐데.’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동의했다.“한번 가볼까요.”현정우가 내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었고 나는 그와 함께
사별이와 사현이는 순번에 따라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차례대로라면 아이들의 이름은 서구와 서십이 되어야 했다.가정부가 웃으며 설명했다.“아이가 너무 많아서 어르신께서 서팔 이후의 아이들은 별자리로 이름을 짓자고 하셨어요. 며칠 후 전갈자리인 아이 하나가 더 이곳에 와서 같이 생활하게 될 거예요. 어르신께서 그 아이의 이름은 전유라고 지어주셨어요. 사모님께서는 어르신이 게을러서 아이 이름 짓는 것도 귀찮아하신다며 웃으셨죠. 하지만 그냥 애칭일 뿐이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긴 하죠.”나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가정부는 드물게 친절하게 덧붙였다.“내일이면 저희는 서당시로 돌아가 설을 보낼 거예요. 설이 지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니 그때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오세요. 그땐 사모님께서 허락하실 거예요. 저는 가정부일 뿐이라서 그런 권한이 없네요.”“감사합니다.”갑자기 사별이 내 손가락을 꼭 잡더니 흐릿한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부드러운 아이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단번에 파고들었다.순간 멈칫한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사별이를 바라보았다.나는 얼른 물었다.“사별이가 뭐라고 했나요?”옆에 있던 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사별이가 방금 무의식적으로 엄마라고 불렀어요. 여섯 달 된 아기는 아직 말할 수 없지만 가끔 무의식적으로 단어를 내뱉곤 합니다. 아가씨도 나중에 직접 아이를 키워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아이가 여섯 달이라고? 사별이... 사자자리... 여섯 달짜리 쌍둥이면서 사자자리면 죽은 나의 아이와 똑같네. 사별이도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하지만 이 아이는 유씨 가문 아이인데? 유씨 가문 핏줄이야. 나랑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물었다.“아이 부모님은 어디 있나요?”“서당시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일 아이를 데리러 올 거예요.”“아, 그렇군요.”나는 넋이 나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내 마음을 눈치챈
운성시의 따뜻한 햇살이 그 남자에게 내려앉아 아련한 느낌을 더했다.마음도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하는 말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가슴을 찔렀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당신이랑은 상관없잖아요.”전화기 너머로 고현성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우리 반년 만에 만나는 거야. 그동안 나는 미상국에서 치료받고 있었는데 이제 상태가 안정돼서 귀국할 수 있었어. 내 생각은 안 했어?”고현성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진 건 유서정 때문이었다.나는 그가 줄곧 다른 인격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또한 다른 인격이 저지른 일을 건강한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나는 평생 그를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그래요. 축하해요.”나는 성의 없이 답했다.이 자리에서 나는 고현성이 따뜻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는 이웃집 청년처럼 전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보러 가도 될까?”그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묻어 있었고 그런 그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한때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자였고 또한 나는 그가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무조건적인 사랑은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남부럽지 않은 것이었다.‘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인생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고현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앞이 막힌 사람이었다.그는 나를 구하려 했지만 나는 그를 떠났다.누구보다 단호하게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현성 씨, 저는 곧 동성시로 돌아갈 거예요.”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의 과거를 용서한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나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기도 했다.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차분하게 부르자 전화기 너머로 고현성이 낮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수아야, 고마워.”그는 내 뜻을 이해했다.“그래요.
「호밀밭의 파수꾼」책은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책을 받아 첫 페이지를 펼치자 석지훈의 유려한 필체로 적힌 서명이 보였다.아래에는 20세기 초라고 시간이 표기되어 있었다.이 책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책이었다.책 중간에는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나는 책을 더 넘기는 대신 현정우에게 던지며 입을 열었다.“보관해 두세요.”석만호가 왜 나에게 이 책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한 이상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볼 생각이었다.나는 현정우와 함께 연씨 별장에 들렀다.별장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연시혁도 와 있었는데 어머니는 연시혁이 설을 함께 보내러 집에 왔다고 했다.연시혁은 마침내 연씨 가문을 자신의 집이라고 인정한 것이다.아버지는 내가 집에 온 것을 보고 매우 놀라며 물었다.“운성시에는 갑자기 어쩐 일이야? 3일 뒤면 네 25번째 생일이면서 설 전날인데 어떻게 보낼 예정이야? 지훈이가 생일 챙겨준대?”부모님 눈에 석지훈은 이미 예비 사위였고 내 미래의 남편이었다.부모님은 내 모든 일을 그가 나서서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잔혹했던 석지훈의 모습이 떠오르자 배가 점점 꼬이는 것처럼 아파진 나는 얼른 거짓말로 둘러댔다.“네. 핀란드에서 새해를 보내려고요. 그래서 설에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아요.”곧 명절인 상황에 굳이 부모님께 나와 석지훈 사이에 발생한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히 새해를 맞이했으면 했다.어머니는 기대하며 물었다.“그럼 새해가 지나면 집에 올 거니?”내가 혼자 집에 온다면 어머니는 걱정하실 것이다.석지훈과의 관계도 끝났으니 어머니께 다른 예비 사위를 보여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그러면 어머니는 더 걱정하실 것이다.나는 또다시 하얀 거짓말을 했다.“요즘 너무 바빠요. 석씨 가문 일도 많아서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찾아뵐게요.”소파에 앉아 있던 연시혁이 갑자기 물었다.“언제 결혼해? 알아야 미리 축의금도 준비하지.”연시혁이 묻자 부모님도 동시에 나를
석지훈이 직접 쓴 글씨체는 나에게 익숙했다.아래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가 약혼한 날이었다.석지훈은 나를 사랑했지만 그뿐이었다.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굴복했다.비록 그가 받았던 스트레스를 알고 있었지만 용서하기는 어려웠다.오히려 모르는 상황에서 자궁에 손상을 준 행동으로 인해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고 있었다.너무도 절망적이었다.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나는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많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여전히 내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어떻게 화를 억제하고 마음속 슬픔을 다스리는지에 대해서 말이다.하지만 감정을 억누를수록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하고 힘들어졌다.결국 나는 잠을 설쳤다.[이전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은 없었어. 네가 처음이야. 내가 미숙해서 네가 사랑을 그저 그런 것으로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워.]석지훈이 남긴 글은 사랑 고백인 동시에 치명적인 독 같았다.책갈피에 적힌 글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우리의 사랑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승윤이 보내준 자료를 확인했다.조직 이름은 타이탄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이었으며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크리스와의 만남은 여전히 생생히 기억났다.‘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어. 오만방자하게 아무나 괴롭힌다는 거지? 석씨 가문이 정말 그냥 이대로 넘어갈 거로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복수해야지. 평온한 설을 보내고 나면 그 뒤에는 처절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벼운 뇌진탕 후유증일 거로 생각한 나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다시 누웠다.늦은 밤에도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뜬 채로 날이 밝는 걸 지켜보았다.하늘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야 겨우 잠이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땐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비와 눈이 많은 운성시
‘설마 나랑 석지훈 사이를 알고 있는...’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나에게 있어 우리 꼬마 아가씨는 가족이야. 앞으로도 평생 그럴 거야. 아무도 네 생일을 함께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위해 연주해 줄게. 연주회가 끝나면 동성시로 가서 담현아랑 같이 새해 맞이하러 갈게.]‘고정재는 내가 석지훈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네.’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고마워요.]나는 그가 이번 생에서 내게 준 따뜻함에 감사했고 내 곁에서 빈틈없이 나를 지켜준 것에 감사했다.고정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사랑이 아닌 애정이 담긴 소중함만이 남아 있는 관계였다.연주회는 다음 날 오후에 열렸다.나의 휴식 시간과 딱 맞는 시간이어서 잠에서 깬 나는 특별히 밤하늘처럼 파란 드레스를 골랐다.드레스의 치맛자락은 땅에 닿았는데 하이힐을 신으니 발목까지 딱 맞았다.이 드레스를 입으면 마치 광활한 별하늘을 몸에 걸친 듯이 눈부시게 빛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운성시에서 나는 언제나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을 유지했다.특히 석지훈이 없는 운성시에서는 어느 자리에서도 항상 완벽히 아름답게 꾸몄는데 피곤한 삶이었다.최희연도 이전에 한 번 내게 물었었다.“이렇게 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든가?’하지만 이런 것도 내가 선택한 삶일 뿐이었다.흰색 코트를 걸치고 나서자 현정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가주님, 어디 가십니까?”“연주회 들으러 가요. 오늘은 동행하지 않아도 돼요.”현정우는 걱정하며 말을 이었다.“하지만...”현정우는 내 안전을 염려했다.“그렇다면 따라오세요.”“가주님께서는 저희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가주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핸드폰에 있는 긴급 호출 장치를 사용하시면 됩니다.”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정우는 나를 연주회장까지 데려다주었다.나는 입구에서 잠시 서 있다가 연주가 시작되기 직전에 들어갔다.자리에 앉자마
“기억하지. 석씨 가문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폐물일 뿐이잖아.”당황한 크리스는 말이 꼬이며 당황해서 물었다.“폐... 폐물?”나는 가볍게 비웃으며 조롱하듯 말했다.“아니면 뭐야? 그럼 폐물이 아니라 쓰레기야?”내 눈에 크리스는 그냥 쓸모없는 쓰레기일 뿐이고 또한 나의 수치였다.그는 분노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석지훈의 여자답게 만만하지 않네.”그는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이름을 언급했다.나는 잠시 침묵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온한 생활을 잘 즐겨봐. 설만 보내고 나면...”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타이탄은 떠돌이 개가 될 거야.”그는 웃으며 말했다.“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용기를 준 거야?”나는 비웃으며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다른 쪽에서는 크리스가 책을 읽고 있는 석지훈을 보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네 여자 성격이 왜 이래? 혹시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는 거 아니야?”석지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원래 복수는 철저히 하는 사람이야.”원한을 잊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녀는 고현성을 용서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석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석지훈이 책장을 넘기자 크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처음부터 친절하게 대해줄 걸 그랬어.”석지훈은 고개를 들어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수아한테 뭘 했는데?”크리스는 못된 생각을 품었던 자신의 과거를 직접 말할 생각이 없었다.석지훈이 알게 된다면 이 자리에서 죽으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크리스는 재빨리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말했다.“경기장에 밀어 넣었잖아.”석지훈은 순간 멈칫했다.그날 그는 그녀를 두 번이나 발로 찼다.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몰라 심히 걱정되었지만 지금 그는 궁지에 몰린 짐승과 같았다.원태웅은 아직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는데 이는 원태웅의 행동이 느린 것이 아니라 타이탄이 그를 숨기기 위해 백 년의 기반을 망가뜨리기까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예전의 나는 참으로 비참했다.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현정우에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 주세요.”나는 눈 내리는 거리를 밟으며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길고 긴 골목은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다.나는 예전에 그 가로등 아래까지 걸어가며 혼잣말로 한탄했다.“요즘 왜 이렇게 슬프지?”나는 눈을 감으며 울먹였다.“석지훈, 네가 내 믿음을 산산조각 냈어.”석지훈은 내가 힘들 게 다시 쌓아 올린 사랑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거기, 아가씨. 혼자야?”깜짝 놀라서 눈을 뜬 나는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너 보고 싶어서.”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내 옆에 따라붙으며 물었다.“나 싫어해?”사실 나는 그를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오히려 죽어가던 나를 구해줘서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와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석지훈이 그를 변덕이 심하고 기분도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안 그래도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데 이런 사람과 엮여서 더 불안정해지고 싶지는 않았다.내가 그를 밀어내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야, 생일 축하해.”고현성을 제외하고 생일 축하한다고 직접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리고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첫 축복이었다.그 순간 마음속의 강인함과 자제력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뭐가 그렇게 슬픈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밀려왔다.소년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왜 울어?”‘내가 왜 울고 있을까?’“나도 모르겠어.”그는 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슬퍼?”“욱현아, 이번 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야.”그는 단호하게 답했다.“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그렇다. 이제 막
나는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왜요?”그러자 그가 말했다.“한 모금 더 마셔 봐.”시키는 대로 살짝 마시자 그제야 버터처럼 부드러운 크림 향이 샴페인의 톡 쏘는 맛과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제 입맛에 딱이네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금만 마셔.”수술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사실 술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겨우 두 모금만 맛보고 조심스럽게 잔을 그에게 건넸다.“왜? 입에 안 맞아?”그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예전의 석지훈이라면 내가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떠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를 건드리지 않는 건 뭔가 꺼리는 게 있는 걸까? 설마 내가 수술받은 걸 아는 건 아니겠지? 분명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는데.’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 이따 현정우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에요. 그냥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내가 싫다고 하니 석지훈도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그는 나를 쇼핑몰로 데려갔다.석지훈은 와인 두 병을 고르더니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더 안 사도 돼요?”내가 묻자 남자는 간단히 대답했다.“됐어.”그리고는 나한테 물어봤다.“갖고 싶은 거 있어?”“없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옷이나 화장품, 액세서리는 부족한 적이 없었으니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런 것들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살 수 있었으니까.내 말에 석지훈은 나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 쇼핑몰을 나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나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본 석지훈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어디 아파?”“좀 피곤하네요.”내가 대답했다.지금 당장 진통제가 먹고 싶었다.석지훈은 한 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차를 몰고 곧장 별장으로 데려왔다. 난 궁금해서 물었다.“어르신을 뵈러 가
나는 석지훈과 한씨 가문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위층으로 올라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여자 옷이 많이 있었다. 나는 먼저 따뜻한 내복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스웨터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치고 따뜻한 목도리를 했다.나는 추위를 많이 탔다. 최근에 생긴 일이었다.아마도 몸이 예전보다 약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나는 연한 립스틱을 바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신발을 신으며 물었다.“선물 사 갈까요?”석지훈은 대답했다.우리가 별장을 나서며 보니 현정우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담배를 끄고 달려와 공손한 말투로 불렀다.“가주님, 석 대표님, 나가십니까?”석지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차 키 주세요.”현정우는 순순히 차 키를 건넸다.석지훈은 현정우가 가리키는 차를 찾아갔다. 내가 조수석에 앉고 나서야 그는 운전석에 앉았다.현정우와 경호원들은 동행하지 않은 채 나와 석지훈은 단둘이 별장을 떠났다. 그는 나를 에르크 중심가로 데려갔다. 에르크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어 길이 미끄러웠다. 석지훈은 안전하게 운전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2~3시였다.선물부터 사러 갈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자 난 대충 훑어보고 느끼하지 않은 음식 몇 개와 케이크 두 조각, 요구르트 과일 플래터를 주문했다.그리고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는 뭐 먹고 싶어요?”“스테이크 주세요. 미디엄 레어로.”잠시 멈추더니 종업원에게 말했다.“그리고 딸기 주스 한 잔 주세요. 따뜻하게 데워서 설탕을 좀 넣어 주시고요. 샴페인도 한 병 주세요.”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가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석지훈에게 물었다. “오빠, 딸기 주스는 저 마시라고 시킨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좋아해요.”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네가 이름을 지어줘.”그가 말했다.“정말요? 얘들 데리고 있을 거예요?”내가 기뻐하며 묻자 그가 대답했다.“좋아한다면서?”“난 이름 잘 못 짓는데.”내 말에 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니까.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궁금한 듯 물었다.“오빠, 사별의 이름을 왜 윤아라고 지었어요?”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네가 처음에 그 이름으로 날 속였잖아. 그 이름은 나에게 의미가 있어. 넌 윤아고 사별이는 작은 윤아고, 둘 다 내 아가야.”진지한 표정으로 이런 달콤한 말을 하다니, 그는 정말 심쿵하게 만드는 남자였다.나는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윤민이는요?”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냥 아무렇게나 지은 거야.”나: “...”‘앞으로는 윤민이를 더 예뻐해 줘야겠다.’나는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석지훈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그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로 경고했다.“적당히 해.”나는 그때 석지훈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가 오랫동안 금욕했다는 사실을 잊은채 더욱 들이대며 말했다.“오빠는 내 남자인데 뽀뽀하는 게 뭐 어때서요? 난 오빠가 좋은걸.”...침대에서 뒤척이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발코니로 나가 보니 인부들이 개집을 짓고 있었다. 옆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놀이터도 만들고 있었다.한민수는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별장 마당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언가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갔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나를 보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배고파?”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때 인부가 말했다.“배고픈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석지훈은 나를 꽉 껴안더니 손바닥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자, 내가 옆에 있잖아.”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네.”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품이었다. 나는 그의 향기에 취해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밖에는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아래층에 내려가 봤지만 석지훈은 없었다. 다시 위층 서재로 갔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나는 서재에서 그가 어제 쓴 글씨를 보았다. 마지막에 ‘자경’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설마 이게 그의 호인가?석씨 가문은 명문가였으니 석지훈에게도 당연히 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몰랐다.자경,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내가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볍게 만지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급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한민수가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힘겹게 끌고 오고 있었고 석지훈은 처마 밑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민수와 그의 개들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는 아주 건장했고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민수는 힘겹게 개들을 끌며 웃으면서 말했다.“왜 인상 쓰고 있어? 너희 집 지키라고 경비견을 데려온 거야.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집에 들락거리지 않게 말이야.”이상한 사람들...한민수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석지훈은 거절했다.“너나 데리고 있어.”“안돼. 멀리서부터 데려왔단 말이야.”한민수는 두 마리의 저먼 셰퍼드를 마당의 나무에 묶고 뻔뻔하게 말했다.“여기 묶어둘게. 이따가 사람이 와서 개집을 설치할 거야. 걱정 마, 네가 먹이를 줄 필요 없어. 내가 사람을 시켜서 매일 정기적으로 밥 주고 정기적으로 애견 삽에 데려가서 목욕도 시키도록 할 테니까.”석지훈: “...”그는 한민수에게 대꾸도 않고 집
하필이면 이 부분을 설명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몸이 다시 안 좋아져서 의식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매우 서투른 거짓말을 했다.“사진은 순간 포착된 거예요. 미처 그를 밀어낼 틈도 없었어요.”석지훈은 더 이상 그 일을 묻지 않고 갑자기 침묵에 잠겼다.2월의 핀란드는 전통적인 스키 성수기이자 눈이 가장 자주 내리는 계절이었고 이때 밤하늘에는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나는 몸이 약간 추웠다. 석지훈은 내가 떨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소파 위의 담요를 끌어다 나에게 덮어주었다. 나는 그의 이런 세심함에 감동했고 마음은 물처럼 녹아내려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 너를 칼로 찌른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준 건 사실이야. 그건 인정해! 그리고 너와 고현성은 네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는 결국 너에게 키스했어. 난 남자야. 내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짓을 당하는 걸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너는 인정해야 해. 그러니 우리 이 일로 저 일을 퉁 치고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자.”석지훈의 뜻은 그냥 두 가지 일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거였다.그는 정말 너무나 쉽게 나를 용서했다.예전에도 그랬다. 그는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나무란 적이 없었고 내 과거를 존중한다면서 나를 오해하거나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는 정말 관대하고 사심 없는 사람이었다.그런 그였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나는 이번 생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석지훈을 한결같이 믿고 다시는 그를 오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다.나는 그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는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말했다.“일어나. 버릇없이 굴지 말고.”그는 또다시 어른처럼 나를 훈계하고 있었다.원래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얌전히 일어났다.
전화 속 목소리는 진유겸이었다.‘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결혼한단 말인가? 약혼녀랑 결혼하는 건가? 그럼 2년 동안 그와 같이 있었던 최희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석지훈은 애매모호하게 말했다.“나중에 봐.”“그래. 운성에서 보자고.”석지훈은 전화를 끊고 침대 위에 던졌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진유겸은 그 솔이라는 여자랑 결혼하는 거예요?”석지훈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다시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바닥에 앉아 우동을 다 먹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설거지를 했다.주방 정리를 끝내고 위층 침실로 돌아왔지만 석지훈은 아직 욕실에 있었고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나는 맨발로 방안을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해야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까.나는 그가 나를 봐주길, 나를 안아주길, 그의 온기를 나에게 나눠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욕실 문이 갑자기 열리자 나는 얼어붙은 채 시선을 돌렸다. 석지훈의 이마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고 검은색 실크 가운은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드러난 가슴은 없었고 바닥에 닿은 두 다리는 길고 곧으며 탄탄했다.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석지훈은 나를 지나쳐 발코니로 향했다. 그곳에는 소파 세트와 테이블 위에 놓인 레드 와인 한 잔이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곧은 등으로 나를 등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부드럽게 불렀다.“오빠.”석지훈은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이리 와.”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옆에 얌전히 쪼그려 앉았다.그는 위에서 아래로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감히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잘못했어요.”그 말을 들은 석지훈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잘못이 아니야.”그는 갑자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나는 영문을 몰랐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아빠를 더 사랑했다.그는 내 마음의 전부니까.석지훈이 내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일어서라고 하지 않고 붓을 들어 하얀 선지 위에 ‘석윤아’, ‘석윤민’이라고 적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짐작하며 굳은 몸으로 물었다.“이건 뭐예요?”석지훈은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설명했다.“석윤아, 사별의 이름이야.”나는 석지훈의 말에 이어서 물었다. “그럼 석윤민은 사별이 오빠의 이름인 거예요?”그러고 보니 석지훈은 이미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놓았던 것이다.마음속에 따스함이 차올랐다. 나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껴안고 참았던 마음을 털어놓았다.“고마워요. 오빠. 미안해요. 다시는 오빠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내가 너무 세게 껴안았는지 아니면 그가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탓인지 그는 무심하게 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뻔뻔하게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원태웅이 예전에 석지훈을 상대하려면 적극적이고 뻔뻔해야 한다고 했었다.석지훈은 갑자기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가에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잘생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이런 걸 가르쳐줬어?”나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석지훈은 바로 돌아서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 찰싹 붙어 따라갔다. 마치 작은 강아지가 주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 그는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던 것 같은데.석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나도 따라 내려갔다.그가 주방으로 가자 나는 주방 문 앞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사실 나는 고현성과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그러니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나는 정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석지훈은 우동 한 그릇과 샌드위치 두 개를 만들었다.그리고 우유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우동은 안 먹어요?”
2층은 매우 조용했고 서재는 더 조용했다. 나는 뭔가 엿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갔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보니 석지훈은 여전히 고개를 살짝 숙이고 큰 글씨를 쓰고 있었고 흰 선지에는 빽빽하게 작은 해서체 글씨가 가득했다. 그리고 석나은은 그의 옆에 서서 감상하고 있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세월이 정지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늑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가시에 찔린 듯 아팠다. 그 순간 고현성이 나에게 키스하는 사진을 봤을 때 그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소유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세상에. 석지훈과 석나은이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나와 고현성은 키스까지 했으니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석지훈이 주먹을 날린 것도 이해가 됐다.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엄청 우울했을 것이다.갑자기 석지훈의 마음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항상 내 감정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봤지 한 번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감정은 애써 달래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이다.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쓰레기 같다고 느꼈다. 석지훈과의 관계에서 나는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몰래 그에게 상처를 거듭해서 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석나은이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었다.“지훈아.”석지훈은 대꾸하지 않았는데 늘 그랬듯 무뚝뚝한 모습이었다.석나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수아 씨가 왔어.”석지훈이 석나은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붓을 내려놓고 석나은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서 데려다줄게.”석지훈의 말에 석나은의 고운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알았어
석나은이 갑자기 제안했다.“수아 씨,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를 줘요. 만약 이번에도 제가 실패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게요.”차가운 강바람에 으슬으슬 떨렸고 몸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그런 유치한 내기 같은 건 생각 없어요. 하지만 지훈 씨에 대한 그쪽의 마음은 존중해요. 그게 다예요. 그러니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약속을 하려 하지 마세요!”그녀가 석지훈을 좋아하든 말든, 쫓아다니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와 그런 쓸데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까.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나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었다.석나은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수아 씨는 정말 냉정하고 무정하네요.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고집불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항상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두는 것이 참 존경스러워요.”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은 씨와 지훈 씨의 일에 대해서 나는 할 말 없네요.”지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한단 말인가?석나은은 나와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렸다.그녀는 분명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 남자를 찾아갈 것이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현정우는 석나은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내게 다가와 코트를 걸쳐주었다.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석나은 씨 예쁘죠?”현정우는 남자의 시점으로 대답했다.“예쁩니다.”나는 이어서 물었다. “정우 씨 이상형이에요?”현정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석나은 씨에게 흑심을 품겠습니까.”나는 그를 흘겨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냥 이상형인지 물어봤을 뿐이에요.”현정우는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네, 맞아요.”나는 무심코 말했다.“그럼 지훈 씨의 이상형이기도 하겠네요.”옆에 있던 현정우는 대담하게도 되물었다.“가주님, 질투하시는 겁니까?”질투?!내가 현정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