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성시의 오늘 밤은 유난히 맑았다.늘 이어지던 비도 그치고, 공기 중의 습한 기운도 사라진 상태였다.맑은 달빛이 부드럽게 비추고, 살랑거리는 선선한 바람까지 더해져 데이트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데이트... 이걸 데이트라고 할 수 있을까?’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차를 타고 30분쯤 지나 꽃집 하나가 보였다.나는 차를 멈추고 내려, 탐스럽게 피어난 붉은 장미 아홉 송이를 골랐다.검은색 카드지로 직접 꽃다발을 포장한 뒤, 차에 다시 올랐다.꽃다발을 품에 안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석지훈이 보낸 위치 정보대로 해변 근처였다.내려다보니 검은색 캐주얼 코트를 걸친 남자가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그 차분한 자세를 보고 한눈에 그가 석지훈임을 알 수 있었다.오늘따라 서류 가방과 정장을 벗어 던지고 캐주얼한 차림을 한 그가 조금 색다르게 보였다.나는 현정우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며 살금살금 그의 뒤로 다가갔다.그와의 거리가 반 미터쯤 되었을 때, 장난기가 발동해 튀어 오르듯 그의 등에 매달렸다.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안 떨어질 자신 있어?”나는 그의 목을 꼭 안고 웃으며 대답했다.“오빠가 있으니까 무서울 게 없죠.”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저녁은 먹었어?”“아니요. 우리 석 대표님이 해 주실 건가요?”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현정우의 말처럼 이곳은 석지훈의 자택이었다.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절벽 위에 호화로운 별장이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가 해 주시는 건 뭐든 다 좋아요.”석지훈은 나를 등에 업고 해안선을 따라 별장을 향해 걸었다.그의 등에서 나는 조용히 마음속의 질문을 꺼냈다.“엄마가 오빠 만나고 왔다고 말해줬어요... 뭐 안 좋은 말씀 하신 건 아니죠?”그는 무심히 물었다.“응?”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부모님이 오빠를 힘들게 하신 건 아니죠?”내가 아는 아빠의 성격이라면 그 자리
“윤아야, 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건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당부야. 더군다나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 아버지 눈에는 언제나 소중한 딸이고 나한테도 네 과거가 어떻든 간에 너는 내 인생에서 단 하나,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여자야.”석지훈이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내가 멍하니 웃고 있을 동안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가문이나 외모는 더더욱. 사랑은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야.”‘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나는 마음이 벅차올라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오빠는 사랑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니! 언제부터 사랑하게 된 거예요? 혹시 우리 아버지랑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예요? 오빠는 결혼 얘기는 했으면서 왜 아직도 나한테 청혼하지 않는 거죠?”석지훈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내 코끝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결혼하고 싶어?”나는 결혼하고 싶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뭐가 중요해!’‘내가 부인해도 내 마음을 꿰뚫어 볼 텐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네. 오빠랑 결혼해서 아내가 되고 싶어요.”그는 가볍게 웃으며 약속했다.“우리 동성시로 돌아가면 약혼하자.”그 약속은 현실감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에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있던 장미꽃을 그의 품에 안겨주며 달콤하게 말했다.“자, 이 장미는 오빠한테 줄게!”석지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그는 장미를 손에 쥐고 내 손을 꼭 잡고 별장으로 돌아갔다.나는 그의 곁을 따라가며 물었다.“오늘 내게 편한 옷을 입으라고 한 건 여기 데려오려고 했던 거야?”“이따 운산에 같이 가려고.”‘운산이라...’나는 이 지명이 낯익었고 적어도 처음 듣는 건 아니어서 망설이며 물었다.“
“네 생각이 맞아.”그의 가벼운 대답은 내 마음속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별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석 집사, 이미 석씨 가문에서 은퇴한 거 아니었어요?”“그 사람은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어. 일생을 석씨 가문에 바쳤기 때문에 어디 갈 곳도 없었지. 그래서 결국 여기 남기로 한 거야.”석만호는 석지훈을 망가뜨린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나를 데리고 석만호가 있는 곳에 온 이유는 그 역시 이 모든 일이 석만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석만호는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결국 명령을 내린 사람은 석지훈이 존경하고 경외했던 그의 아버지였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는 석씨 가문을 원망하지 않아요?”차는 천천히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석지훈은 내가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 알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원망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나를 받아준 것도 석씨 가문이었으니까. 내가 친부모한테 버려졌을 때 나에게 안식처를 준 곳이 바로 석씨 가문이야. 이번에 그 사람들이 내게 한 일은 그동안 받은 수십 년의 은혜를 갚은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어머니야.”석지훈은 아기 시절, 석씨 가문의 안주인이 그를 데려와 키운 것이었다. 안주인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석씨 가문은 그에게 부와 권력을 쥐여주었다.이렇게 보면, 나의 친아버지는 확실히 그에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하지만 가장 존경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건 그에게 가장 큰 상처였다.권력을 잃은 것보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이 한 발 한 발 집요하게 몰아붙였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웠을 것이다.그 시절의 석지훈이 얼마나 약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 내 마음이 쿡쿡 쑤셨다.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누르며 그에게 말했다.“오빠 덕분에 내가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요. 하지만 오빠, 석씨 가문은 내 것이고 나는 오빠 사람이잖아. 우리 사이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어야 해요!”석지
“그는 어릴 때부터 백혈병을 앓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발달한 의학 덕분이야.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행동이 극단적일 수밖에 없어.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네가 그의 허상에 속지 않기를 바라서야.”석지훈의 말투는 마치 내가 앞으로도 최욱현을 만날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그토록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남자가 어떻게 불치병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다시는 그 사람이랑 만나지 않을 거예요.”석지훈이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다 쉬었으면 이제 일어나자.”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걸음을 옮겼지만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불치병을 앓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단순히 두 상자의 금을 위해 우리를 납치했을 리는 없었다.최현욱...아니, 이제는 그의 본명인 최욱현이라고 불러야겠지.그는 우리를 납치한 후 빠르게 도망쳤다가 이내 뻔뻔하게 별장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 별장이 그의 소유인 것처럼.갑자기 내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별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사람들일까?’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석지훈과 원한이 있었다면 나를 납치한 후 옷을 갈아입으라고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 독특한 장난을 할 사람은 최욱현밖에 없었다.나는 몰래 휴대폰을 꺼내 한민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최욱현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산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한민수의 답장이 도착했다.[F국 교포에요.]교포라...순간 윤 비서가 말했던 그 귀족 드레스가 떠올랐다. 그것은 F국왕실의 것이었다!나는 곧바로 별장에 있던 사람들 역시 최욱현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처음부터 모든 게 그의 자작극이었고 그 함정에 빠지고도 나는 그에게 감격하며 고마워하고 있었다.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덕분에 그의 신분이 매우 고귀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왕실 드레스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었다.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몇 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산
이른 아침에 깨어났을 때 밖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멀리 산의 경계선에는 아침 햇살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고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문득 석지훈을 보니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마치 무언가 근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씩 편안해졌다.“평소 같았으면 벌써 깨어났을 텐데.”나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고 작은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문지르며 혼잣말로 말했다.’“참 예쁘네.”귓가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소리를 따라갔다. 몇 마리 참새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잠시 후, 한 마리 크고 튼튼한 까마귀가 날아왔다.“정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구나.”기지개를 켜며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멀리 풀밭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보였다.호기심에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석에는 정자체로 빼곡히 글이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석민기, 안혜인’석민기는 내 친부의 이름이었고 안혜인은 내 친모의 이름일 것이다.그리고 운산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약속했을 것이다.내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밤까지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첩을 거느린 남자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논할 수 있을까?단지 자기 연민일 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나는 풀밭에 쪼그려 앉아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우리의 인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가정을 이루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내 사랑의 고통이 끝날 날이 오길 바라며 그때쯤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를 소망한다.’비석에 적힌 글은 간단하지만 나의 어머니가 그의 가족 상황을 알고서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친어머니를 원망하냐고요?”전에 나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내가 석씨 가문을 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 당시 나는 석지훈의 어머니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녀가 아들만을 위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그러나 내가 그 여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안도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처럼.나는 고개를 저었다.“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저를 포기한 것도 그분의 선택이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저에게 신장을 주셨으니 제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분 덕분이잖아요.”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나는 그 여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결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그 여자가 신장을 기증해 나를 구한 것도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지금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잘 알고 있구나.”나는 말없이 웃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랐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운성시에서 보기 드문 아침 햇살을 감상했다.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좋아해요?”이곳은 곳곳이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석지훈이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응, 조용한 곳이니까.”그것뿐일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나 어젯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두 아이와 승아랑 함께 석씨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
윤다은은 과거에 고정재를 깊이 사랑했다. 몇 년간 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지만 얼마 전 어렵게 고정재를 포기하고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내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윤다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나 임신한 지 거의 두 달 됐어요.”그녀가 결혼하려는 이유였다.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 남자를 사랑해?]며칠 전 그녀가 의사와 통화하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네. 사랑해요.]윤다은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가 사랑으로 결혼하길 바랐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축하해, 다은 씨.]윤다은은 곧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수아 언니, 내 들러리 좀 해줄래요? 희연 선배도 부르려고요. 아, 맞다. 담현아도 초대하려고 해요.]윤다은이 담현아까지 초대할 생각이라니.그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좋아, 어디에서 결혼할 거야?][금운시요. 우리 둘 다 거기에 가족이 있거든요.][알았어. 희연이랑 같이 갈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나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곧바로 최희연에게 윤다은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최희연이 바로 답장했다.[나도 방금 알았어. 한 달도 안 남았더라. 그런데 우리 둘이 누군가의 들러리를 서는 건 처음 아닌가? 너는 축의금을 얼마나 할 생각이야?][윤다은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어. 그때 가서 정해야지. 고씨 가문의 형제들도 참석할 거야.]나는 지금 고현성과 마주치는 게 가장 싫었다.최희연이 물었다.[석지훈 씨도 너와 함께 가는 거야?]나는 옆에서 운전 중인 석지훈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답장했다.[잘 모르겠어.]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겠지.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담현아가 메시지를 보냈다.[고정재 씨의 여동생이 나를 들러리로 초대했어요. 그런데 나랑 그렇게 친
고정재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담현아와 잘 되길 바랐다.잠시 후,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나는 휴대폰을 넣고 눈을 감고 쉬었다.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석지훈은 대화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에 석지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석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멀리서 저택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과거에 자신을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라 칭했던 여자였다.석지훈도 그 여자를 발견한 듯했고 그는 차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운 후 안전벨트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날 찾은 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거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나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지만 석나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면 석지훈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냉랭함만이 느껴졌다.석나은은 석지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마디로 응답했다.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석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둔 차를 타고 떠났다.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석지훈에게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두웠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어머니가 나보고 다시 운성시로 오라고 하셨어.”‘우리는 방금 돌아왔는데.’나는 그에게 물었다.“그럼 갈 거예요?”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석지훈은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재로 들어갔고 나는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우려 그의 서재로 가져갔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차가운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