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깨어났을 때 밖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멀리 산의 경계선에는 아침 햇살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고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문득 석지훈을 보니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마치 무언가 근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씩 편안해졌다.“평소 같았으면 벌써 깨어났을 텐데.”나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고 작은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문지르며 혼잣말로 말했다.’“참 예쁘네.”귓가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소리를 따라갔다. 몇 마리 참새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잠시 후, 한 마리 크고 튼튼한 까마귀가 날아왔다.“정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구나.”기지개를 켜며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멀리 풀밭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보였다.호기심에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석에는 정자체로 빼곡히 글이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석민기, 안혜인’석민기는 내 친부의 이름이었고 안혜인은 내 친모의 이름일 것이다.그리고 운산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약속했을 것이다.내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밤까지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첩을 거느린 남자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논할 수 있을까?단지 자기 연민일 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나는 풀밭에 쪼그려 앉아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우리의 인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가정을 이루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내 사랑의 고통이 끝날 날이 오길 바라며 그때쯤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를 소망한다.’비석에 적힌 글은 간단하지만 나의 어머니가 그의 가족 상황을 알고서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친어머니를 원망하냐고요?”전에 나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내가 석씨 가문을 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 당시 나는 석지훈의 어머니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녀가 아들만을 위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그러나 내가 그 여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안도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처럼.나는 고개를 저었다.“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저를 포기한 것도 그분의 선택이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저에게 신장을 주셨으니 제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분 덕분이잖아요.”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나는 그 여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결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그 여자가 신장을 기증해 나를 구한 것도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지금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잘 알고 있구나.”나는 말없이 웃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랐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운성시에서 보기 드문 아침 햇살을 감상했다.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좋아해요?”이곳은 곳곳이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석지훈이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응, 조용한 곳이니까.”그것뿐일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나 어젯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두 아이와 승아랑 함께 석씨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
윤다은은 과거에 고정재를 깊이 사랑했다. 몇 년간 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지만 얼마 전 어렵게 고정재를 포기하고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내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윤다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나 임신한 지 거의 두 달 됐어요.”그녀가 결혼하려는 이유였다.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 남자를 사랑해?]며칠 전 그녀가 의사와 통화하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네. 사랑해요.]윤다은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가 사랑으로 결혼하길 바랐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축하해, 다은 씨.]윤다은은 곧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수아 언니, 내 들러리 좀 해줄래요? 희연 선배도 부르려고요. 아, 맞다. 담현아도 초대하려고 해요.]윤다은이 담현아까지 초대할 생각이라니.그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좋아, 어디에서 결혼할 거야?][금운시요. 우리 둘 다 거기에 가족이 있거든요.][알았어. 희연이랑 같이 갈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나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곧바로 최희연에게 윤다은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최희연이 바로 답장했다.[나도 방금 알았어. 한 달도 안 남았더라. 그런데 우리 둘이 누군가의 들러리를 서는 건 처음 아닌가? 너는 축의금을 얼마나 할 생각이야?][윤다은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어. 그때 가서 정해야지. 고씨 가문의 형제들도 참석할 거야.]나는 지금 고현성과 마주치는 게 가장 싫었다.최희연이 물었다.[석지훈 씨도 너와 함께 가는 거야?]나는 옆에서 운전 중인 석지훈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답장했다.[잘 모르겠어.]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겠지.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담현아가 메시지를 보냈다.[고정재 씨의 여동생이 나를 들러리로 초대했어요. 그런데 나랑 그렇게 친
고정재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담현아와 잘 되길 바랐다.잠시 후,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나는 휴대폰을 넣고 눈을 감고 쉬었다.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석지훈은 대화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에 석지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석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멀리서 저택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과거에 자신을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라 칭했던 여자였다.석지훈도 그 여자를 발견한 듯했고 그는 차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운 후 안전벨트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날 찾은 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거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나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지만 석나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면 석지훈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냉랭함만이 느껴졌다.석나은은 석지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마디로 응답했다.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석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둔 차를 타고 떠났다.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석지훈에게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두웠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어머니가 나보고 다시 운성시로 오라고 하셨어.”‘우리는 방금 돌아왔는데.’나는 그에게 물었다.“그럼 갈 거예요?”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석지훈은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재로 들어갔고 나는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우려 그의 서재로 가져갔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차가운
좋았던 기분은 석지훈 어머니의 메시지를 본 뒤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나는 석지훈이 눈치채는 것이 두려워 화면이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그는 나를 말없이 한참 안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나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섰다.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가 갑자기 멈춰서서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멈춰 서며 물었다.“왜 그래요?”그가 부드럽게 말했다.“고양이처럼 따라다니지 말고.”나는 무심코 대꾸했다.“고양이는 도도해요. 오빠가 말하는 건 아마 강아지겠죠.”말을 하고 나서 순간적으로 입을 막았다. 석지훈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못됐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그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뒤돌아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똥강아지,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맙소사. 이 말은 정말 심쿵이었다.내 마음을 정확히 저격한 이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오빠.”그는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게 대답했다.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나 오빠 좋아해요.”석지훈은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음 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그의 턱 밑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나 좋아해요?”그가 차분하게 말했다.“응.”나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응이라니,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내가 계속 물으니,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만 좀 해.”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하지만 드물게 보이는 그의 어색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는 장난스럽게 계속 물었다.“그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결국 석지훈은 말없이 나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나는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살짝 서운했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다.계단을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나는 그들 사이의 일이 이렇게나 복잡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정희가 한평생 그 남자를 원망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어떻게 보아도 아버지가 먼저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그리고 어머니는 그저 그런 아버지에게 당한 것뿐이었다.나는 갑자기 어머니와 이정희가 모두 불쌍한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불쌍한 건 나의 친아버지였다.친아버지는 병에 시달리면서도 석씨 가문을 위해 이곳에서 일생을 갇혀 지냈다. 그런 굳건한 의지는 결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더욱 세 사람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세 사람 모두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잘못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석지훈에게 주고 석지훈이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밀실로 데리고 갔다. 그 엄청난 비밀은 그렇게 순식간에 세상에 까발려졌고 비밀을 마주한 석지훈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서렸다.“밀실의 비밀번호는 오빠 어머니 생신이에요.”석지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아버지께서 나한테 이 밀실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는데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리고 이 밀실에 자신의 지나온 삶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셨지만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대. 밀실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건 어쩌면 하늘의 뜻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냥 밀실을 그대로 놔두려고 했대. 너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내 어머니께서 엄청 많은 비밀번호를 시도해보고 그 분야의 전문가도 찾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어. 오로지 본인의 생일만 시도를 안 해본 거지. 그러고 나서 홧김에 이곳을 없애려고 한 걸 내가 말렸어. 너희 아버지께서도 일생을 바쳐 지켜온 곳인데 이렇게 없어지길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내가 그날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만약 석지훈이 자신의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정희도 이 비밀을 알게 됐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이정희는 남자의 딱딱한 대답에 투덜거렸다.“오빠 진짜 차가워.”남자는 다시 애정이 어린 말투로 이정희를 달랬다.“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알잖아, 나 꿀 발린 말 잘 못 하는 거. 그래도 난 한 번도 너한테 무관심했던 적은 없어.”이정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알지 그럼. 오빠가 나랑 결혼해줄 거란 것도 잘 알고.”“맞아. 넌 미래에 정식으로 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그럼 혹시 오빠도 오빠 아버지처럼 많은 첩을 둘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오빠랑 결혼하지 않을래!”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난 아버지와 달라.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고 넌 내 인생의 전부야. 유이야, 우린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고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잖아. 네가 날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널 속상하게 만들겠어.”하지만 그 남자는 말과 달리 이정희를 평생 속상하게 했고 이정희가 평생 집착하게 했으며 이정희를 평생 차갑게 대했다.그렇게 내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이윽고 이정희의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극이 끝나갈 때쯤 이정희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난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오빠도 날 실망하게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나중에 날 배신하면 난 그 두 배로 오빠한테 갚아줄 거야!”그리고 이정희는 정말 그렇게 했다.자신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과 복잡한 관계도 스스럼없이 가졌고 결국엔 석지훈까지 낳았다.나는 황급히 밀실에서 나와 로비로 갔다. 석지훈은 내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것을 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관을 아직 닫지 않았기에 나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이정희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이정희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무대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열심히 황매극을 불러주던 천진한
그 편지는 매우 짧았다.「올해는 너를 사랑한 지 12년째 되는 날이자 너와 결혼한 지 3년째야. 네가 내 아내라서 행운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나는 널 평생 사랑해줄 수 없을 것 같아!유이야, 내 기억력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의사가 말하길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거래. 그게 당장 오늘 밤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어쩌면 내가 이 밀실에서 나가는 순간일 수도 있어.난 내가 너를 잊을까 봐 너무 무서워.난 내가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운명을 피해가긴 무리였나 봐.유이야, 내가 너를 잊은 후에도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족들까지 잊어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너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야! 내 나약함 때문에 석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사명과 책임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거든.정말 미안해, 유이야.언제가 됐든 기억을 잃는 날이 온다면 그땐 내가 먼저 너를 알아볼게.믿어줘, 이번 생에 절대 널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나는 또 다른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고 역시나 모두 이정희에 관한 것이었다. 제일 처음 보았던 편지가 시간상으로 제일 마지막 편지였는데 마침 이정희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그 말인즉슨,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이 밀실을 드나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절대 석만호가 말한 27년이 다가 아니었다.현정우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원래 가주님을 대신해서 유품을 정리할 때 가주님의 베개 옆에 두꺼운 일기장이 있는 걸 봤습니다. 일기장에 적힌 이름은 안혜인이었는데 아마도 원래 가주님과 안혜인 씨, 그러니까 가주님 어머니 사이의 사소한 일들을 적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기장은 후에 석 대표님께서 핀란드로 가져갔습니다.”이 편지들은 온통 아버지가 이정희와 보낸 나날들에 대한 것이었다.오늘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빠짐없이 적어두었다. 나는 시간을 들여 모든
“네,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르셨을 겁니다.”그렇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갑자기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나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번호를 삭제했던 것 같았다.나는 현정우의 휴대폰으로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이 벽의 비밀번호가 왜 이정희의 생일인 거예요?”석만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회장님 방에 있는 밀실 말씀이십니까?”나는 차분하게 말했다.“맞아요. 비밀번호는 이정희의 생일이었어요.”“저는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27년 동안 그 밀실을 열지 않으셨거든요.”내 친아버지는 27년 동안 이 밀실을 열지 않으셨다...27년...그때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고 어머니를 막 만난 시기였다.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큰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나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현정우는 내 뒤를 따랐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 가득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표본으로 만들어진 말린 꽃으로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밀실 곳곳에는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모두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근대 시대의 화장을 하고 있었고 흑백사진이었지만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옛 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녀는 분명 이정희였다.아버지의 밀실에는 이정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나는 엄마의 인생이 한낱 웃음거리가 아니었을까 두려웠다.나는 밀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옛날 물건이었지만 이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정우는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 봉투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는 나에게 편지를 건네준 후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수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나는 편지 봉투의 먼지를 털어냈다. 현정우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진실은 더욱 잔혹할지도 몰라요.”잔
담현아는 황급히 부인했다.“말도 안 돼요. 난 아직 어린데 무슨 애를 가져요. 그리고 아저씨도 아직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어요. 연말쯤에나 생각해 보려고요.”“임신한 줄 알았잖아.”담현아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라니까요.”그녀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서려고 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석씨 가문 전체가 언니 거고 지훈 오빠도 여기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요.”조심하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특히 아이들 일에는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담현아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섰다.나는 윤아를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담현아를 따라갔다.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나와 현정우만 남았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현정우는 휴대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주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그칠 것 같네요.”“음, 다행히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니까.”나는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음침했다.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으스스했다.현정우는 방의 불을 켰다.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두운 불이었다. 현정우는 오랫동안 석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했다.“저는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친 후 처음부터 이 정원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근데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석 회장님은 1년 내내 매일 방 안에만 계셨거든요.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 봐야 새해에 가족들과 거실에서 식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석씨 가문 사람들은 회장님을 두고 방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렸었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사모님이 이 방을 정리했고 석 대표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무런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밀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열 수 없었죠. 부수지 않는 이상은요. 사모님은 부수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이정희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은 석지훈을 위해서였다.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강해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담현아도 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너 내 비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지훈 오빠가 나보고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하던데요.”이 시간에 석지훈이 담현아를 나에게 보내다니...나는 담현아에게 의아하게 물었다.“이해가 안 돼. 내일 아침이면 우린 떠날 건데, 너 괜히 왔다 가는 거잖아?”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근데 연락은 아침에 받았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늦어졌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이쪽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강 비서님을 만났거든요. 그냥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목적지가 같더라고요. 아, 맞다! 윤민이가 방금 나보고 이모라고 불렀어요!”나는 그녀의 품에서 윤민이를 받아안으며 물었다.“네가 가르쳤어?”“강 비서님이 가르쳤어요. 이 녀석 너무 똑똑해요!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워요. 근데 수아 언니, 나 윤아랑 윤민이 양엄마 하면 안 될까요?”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아직 한참 어리잖아.”내가 거절하자 담현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나도 결혼한 성인이거든요.”“알았어, 알았어. 성인인 거 인정할게.”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담현아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양엄마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모 할게요.”담현아는 아직 어려서 아이들의 양엄마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담현아와 함께 정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석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누가 데려왔어?”내가 설명했다.“내가 강 비서에게 부탁했어요.”석지훈은 담현아의 품에서 윤아를 안아 들었다. 윤아는 그의 품에서 얌
수아야. 넌 참 가여운 사람이야.난 도대체 내가 왜 불쌍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석지훈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차갑게 대할 수 있겠어요?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빠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고요.”석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단호하고 따뜻하게 말했다.“난 오빠를 좋아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오빠를 사랑하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나는 고현성과 사귈 때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석지훈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아마도 장례식 중이라 그런지 석지훈은 나를 놓아준 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정우의 말대로, 남자는 그저 따뜻함을 원하는 존재인 것 같다. 따뜻함을 충분히 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지금의 석지훈처럼 말이다.그는 계속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꼭 어린아이 같았다.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그는 내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나를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왜 나를 안 불렀어?”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깨울까 봐...”내 말을 듣자 석지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다음에는 그러지 마.”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면 너랑 같이 운성에 갈 거야. 운성에서 며칠 있다가 아이들과 함께 핀란드로 가자.”나는 놀라서 물었다.“나랑 아이들을 핀란드에 데려간다고요?”석지훈은 검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가겠다고. 윤아야, 더 이상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우리 핀란드와 운성을 오가며
점심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에 밥도 못 먹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배고파요.”석지훈은 짧게 응수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서 무덤덤한 눈빛으로 천장의 하얀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특히 그의 어머니가 나 때문에...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현정우가 밥을 가져왔다. 석지훈은 많이 먹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석지훈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석지훈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좀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중에.”아침부터 하루 종일 석지훈은 계속 바쁘게 일했고 석나은도 그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었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석나은과 비교되니 아주 한심해 보였다.나는 힘없이 정원으로 돌아와 문턱에 앉았다. 현정우도 내 옆에 앉았고 우리 둘 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물었다.“나 진짜 쓸모없는 것 같아요.”이럴 때 석지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위로조차 해 주지 못했다.현정우는 대답했다.“지금 가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든 관에 누워 계신 분이... 가주께서는 그냥 여기서 석 대표님을 기다리세요. 지쳐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주님, 남자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온기면 충분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에요?”현정우: “...”내 말에 현정우는 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지훈 씨라고 부르면 멀게 느껴져.”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석지훈이 언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가?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드러낼 정도로 약해지다니. 순간 마음속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희연이가...”그녀는 내 말을 듣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비록 그녀가 죽였다고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석지훈한테 죄책감이 좀 덜할 뿐이었다.그는 다시 말했다.“넌 잘못 없어.”석지훈은 항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길 바랐다.적어도 화라도 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어쩔 줄 몰라 말했다.“오빠,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오늘 밤 나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나는 몸이 안 좋아서 후반야쯤 되니 힘들었고 결국 석지훈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나는 또 꿈을 꿨다.꿈에는 엄마만 나왔다.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나는 나지막이 불렀다.“엄마.”“수아야, 넌 참 가엾구나.”나는 놀라서 물었다.“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사랑하는 남자, 애들 둘, 부모님, 친구, 돈, 권력... 다 있는데 내가 왜 가엽다는 거지?“수아야, 넌 가여운 사람이야.”엄마는 왜 날 가엽다고 하는 걸까?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엄마는 대답 없이 꿈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놀라 눈을 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석지훈은 날 안아줬다.“왜 그래?”“오빠, 나 악몽을 꿨어요.”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나는 엄마의 이 꿈을 악몽이라고 했다.요즘 들어 자꾸 엄마 꿈을 꾼다.지난번에는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내가 가엽다고 했다.왜 이런 꿈을 꿀까?뭔가 징조인가?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