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뒤로 돌며 물었다.“나는 오빠가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내 뒤에 있어요?”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돌아보니 석지훈은 평소에 자주 입던 검은색 정장을 벗어 던진 채 얇은 검은색 군복 스타일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검은색 버클 벨트를 둘러 약간 조여 맨 것 같았다.이 때문에 석지훈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더욱 길고 강인해 보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줬다.게다가 차가운 석지훈의 표정과 뒤로 깍지를 낀 손까지 몸 전체에서 엄격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뿜어냈다.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는 그의 이미를 가리고 있어 살짝 부드러운 인상을 더해주었지만 지금의 그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나는 석지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석지훈에게 달려가 품에 뛰어들었다.그리고 석지훈의 목을 꽉 껴안으며 외쳤다.“지훈 오빠.”“왜? 이제 나한테 화 안 나?”석지훈의 목소리는 어딘가 너그럽고 다정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나는 석지훈의 어깨에 턱을 대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오빠에게 화난 게 아니에요. 그냥 나 자신한테 화가 났던 거예요.”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미안해요. 분명 내 잘못인데 괜히 오빠에게 화풀이했어요.”석지훈은 한 손을 들어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윤 비서 말로는 여자들이 가끔 그러는 건 정상이래.”석지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하지만 석지훈은 서운한 적이 없었을까?석지훈도 분명 서운하고 힘든 적이 있었을 것이다.“미안해요, 지훈 오빠.”“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해.”석지훈은 손을 내 목덜미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날 모른 척하지 마.”석지훈은 언제나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엄청났다.석지훈이 언제나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지금까지 폭풍우 같은 인생을 헤쳐나온 남자이기 때문일까?석지훈의 눈빛은 항상
사실 윤승민은 석지훈을 의식해 억지로 예의를 차린 것뿐이었다.이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나는 윤승민을 지나쳐 헬기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창백한 얼굴의 최희연이 진유겸의 품에 기대 있었다.진유겸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냉랭한 표정으로 내 뒤에서 막 들어온 석지훈을 노려보더니 불만스럽게 물었다.“내 여자는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됐는데 네 여자는 왜 이렇게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거야?”진유겸은 최희연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한 상태였다.나는 얼른 해명했다.“난 처음에 그 사람들이 희연이를 기절시키는 걸 보고 그다음에 그 사람들이 몽둥이를 나에게 휘두르자 바로 기절한 척했어요.”진유겸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바보들이 그걸 믿었단 말이에요?”석지훈은 진유겸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석지훈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추측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걸 알았을 수도 있지만 굳이 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간 것 같아요.”진유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아 씨는 운이 좋았네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지훈의 팔에 기댄 뒤 몰래 그의 얼굴을 살폈다.석지훈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있었다.한참 뒤 최희연은 간신히 힘을 내어 나에게 물었다.“수아야, 넌 괜찮아? 나는 머리가 좀 어지럽고 힘이 없어서 말하기도 힘들어.”나는 대답했다.“괜찮아. 다만 다리가 좀 아프고 피곤할 뿐이야.”최희연은 부드럽게 물었다.“왜?”“저택을 떠난 뒤에 걸어서 도시까지 왔어. 길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고 입은 옷이 너무 무거워서 더 춥고 피곤하네.”최희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나저나 너 지금 입고 있는 그 전통 드레스 정말 예쁘다. 그런데 네 머리 위에 있는 흰 꽃장식 많이 망가진 것 같네.”눈밭에서 여러 번 넘어졌기 때문에 작은 흰 꽃장식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하지만 최현욱이 매번 그것을 주워 내 머리에 다시 꽂아 주었다.
‘F국 왕실? 왜 러국에서 F국 왕실의 물건이 발견된 거지?’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었다. 결국 석지훈의 품에 기댄 채 금세 잠들어 버렸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헬리콥터는 석씨 가문의 별장, 석지훈이 전에 머물던 곳에 착륙했다.나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나를 안고 헬리콥터에서 내린 뒤 별장으로 들어갔다. 헬리콥터는 곧바로 잔디밭에서 이륙 준비를 했고 진유겸과 그 일행은 다시 운성시로 떠났다.석지훈은 별장에 들어선 뒤에도 나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후, 커다란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나는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끊겼고 인기척이 들려서 눈을 떠보니,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나온 석지훈이 보였다. 넓은 가슴팍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그를 불러보았다.“오빠...”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짝 꼬집듯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덮고 있던 코트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냈다.나는 그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고 조용히 지나간 상황을 설명했다.“누군가가 나를 구해준 것 같아요...”그는 담담히 대답했다.“알고 있어.”“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나는 그 사람이 최현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석지훈은 진유겸이 했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쑥스러웠다. 눈앞의 그를 마주하자, 마음이 뒤숭숭했다.8개월 만에 다시 만난 탓인지 어딘가 어색하고 서먹했다. 그런데 그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따뜻했다. 어떤 욕망이나 불순한 기색도 없었다. 그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어느새 내 옆에 몸을 기댄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깊었고,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숨결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나는 목이 타들어 갔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언제 자요?”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왜?”나는 그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그... 그냥요. 이제 좀 자고 싶어졌어요.”나의 대답에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스쳤다.“아가...”그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네?”“키스해 줘.”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그의 말투엔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분위기에 눌린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두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며 조용히 물었다.“하기 싫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의 입가에도 입술을 살짝 포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똑바로 마주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방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햇살에 물든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말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그 눈빛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격정이 가득 차 있었다....나는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있던 석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베개 옆에 낯익은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이걸 어디서 찾았지?’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자, 화면에는 부모님께서 걸어왔었던 부
나는 석지훈을 집에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먼저 청혼하지 않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만약 내가 그를 집에 데려간다면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그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테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결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나는 대충 둘러댔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급한 거 없어요. 제가 일정 잡으면 미리 알려드릴게요.”그러자 엄마는 만족한 듯 말했다.“이건 네 일만이 아니야. 시혁이도 있잖니. 나랑 네 아빠가 얘기를 좀 해봤는데, 시혁이도 연씨 가문의 자식이니까 네 아빠가 어른으로서 그 여자애랑 직접 얘기를 좀 해 보려고 해.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지 않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엄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돈 걱정은 하지 마. 연씨 가문이 운성시에서의 명망은 사라졌지만, 나랑 네 아빠가 몇억 원 정도 모아 놨단다. 그 돈으로 시혁이한테 운성시에 집을 마련해 주고, 예단도 준비해서 그 여자애랑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게 해 주고 싶어. 그래야 네 큰아버지한테도 체면이 서지 않겠니.”큰아버지는 그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부모님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아무래도 부모님은 송이연의 진짜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굳이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부모님은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하려는 게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연시혁도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에, 나 역시 내심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연시혁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자로서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는 결과가 어떻든 송이연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나는 언제까지나 승아의 고모로 남을 테니까...“시혁 오빠가 자존심이
석지훈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막지 않았다.항상 그랬다. 그는 나를 제지하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가슴이 드러났고, 그곳엔 상처들이 가득했다.아침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잠옷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 볼 틈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상처들은 각기 다른 깊이와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얕은 상처는 세월의 흔적으로 이미 희미해졌지만, 깊은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상처는 그의 복부에 있었다.길게 그어진 흉터는 그의 단단한 복부 근육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거친 흉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상처가 전해주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먹먹해졌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오빠, 안 아파요?”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익숙해졌어.”‘익숙해졌다고?’그의 말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익숙해졌다고 해도,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잖아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나는 그의 허리와 복부 위로 몸을 기울여 얼굴을 살짝 댔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내 마음은 더욱 아려왔다.나의 위로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작은 강아지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위험이 닥칠 거야. 나와 함께하기 두렵지 않아?”그가 자신이 사는 세상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오빠의 세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머릿속에 불현듯 최현욱의 말이 떠올랐다.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의 세계는... 어떤 곳이에요?”내 손끝은 그의 허리띠에 닿아 있는 금속 부분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
별장 문 앞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 중 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 아가씨도 여기 있었어요?”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옆에 있던 원태웅이나 한 번 게임을 같이했던 유진, 그리고 나에게 늘 차갑게 대했던 한민영보다는 훨씬 나았다.문제는 지금 내가 석지훈의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상태라는 점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난처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석지훈의 친구들이자,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그런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결국 한민수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석지훈에게 말했다.“오빠, 나 먼저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나는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와 2층 방으로 올라갔다.침대에 앉자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석지훈의 SNS에 등장하는 사람 중 나를 반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그 사실이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괜한 생각은 그만하자.’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옷장으로 가서 은빛이 도는 몸에 딱 붙는 미니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어차피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높은 구두는 신지 않았다.가볍게 화장을 마친 뒤 침대를 정리하려 돌아섰을 때, 아침에 석지훈이 벗겨 준 궁전 스타일의 드레스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윤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 드레스는 F국 왕실의 것이었다.F국 왕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예전에 석만호가 해 준 이야기뿐이었다.그는 내 친모가 F국의 공작과 결혼했다고 말했다.‘날 납치한 사람들이 왜 F국 왕실의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 왜 나한테 그 옷을 입히려 했을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친모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석만호가 준 연락처가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다투는 소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한민영의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석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민영아.”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민영은 순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왜?”석지훈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내가 아직 한씨 가문에 빚진 게 뭐가 있지?”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였다.한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자, 한민수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전환하려 애쓰며 얼른 말을 꺼냈다.“자,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 경쟁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자. 그들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세력까지 강탈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한 건 골치 아프잖아.”하지만 석지훈은 한민수의 중재를 무시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네가 수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한씨 가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그는 한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한민영, 나라는 사람은 마음먹으면 항상 독하게 행동에 옮기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앞에서 감히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영역에서 내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고...”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심한 어조로 마무리했다.“설령 그 대상이 한씨 가문이든, 한씨 가문의 미래 후계자든... 난 봐줄 마음이 없어.”나도 그의 입에서 ‘독하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민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석지훈,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내가 말실수했다는 것도, 네 여자를 괴롭혔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 그래도 나는 네 오랜 친구야. 그리고 한씨 가문은 너를 키
나는 이해했다. 누구보다 그의 고통을 이해했다.석지훈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아들을 협박하는 것이 나 역시 혐오스러웠다.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한쪽에는 사랑이, 다른 한쪽에는 가족이라는 굴레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그건 마치 어느 쪽으로도 기울일 수 없는 천칭 같았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차가운 입술로 내 손바닥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나와 결혼해 줄래? 석지훈의 아내가 되어 줘. 그리고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줘. 나중에 꼭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려 줄 테니 지금은 잠시만 억울해도 참아줘.”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물었다.“괜찮겠어?”괜찮겠냐고?마음이 갑자기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 그의 어머니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그때의 결말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나는 갑자기 딜레마에 빠졌다.석지훈과 나는 결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예유진이 했던 말도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석지훈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굳어졌다.“왜 아무 말도 안 해?”그는 조용히 물었다.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았다. 내 모습을 본 석지훈의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왜 그래?”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조심스러웠다.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석지훈은 나를 품에 꼭 안았다. 그 순간, 나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어머니의 협박 때문에 망설이겠지만 그는 말과 행동이 매우 단호한 남자였다. 결혼하자고 하면 정말 결혼할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석지훈은 누군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성범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내가 전부였으니까.하지만 나는 그런 그가 두려웠다.나는 석지훈의 어머니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
석지훈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확실한 태도를 보고 싶었다.나는 그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격을 원했다.하지만 그건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그의 친어머니가 목숨을 담보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나는 갑작스러운 무력감에 휩싸여 석지훈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는 내 마음속 거부감을 읽었는지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나는 그의 품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짧고 얇은 시폰 원피스가 앉은 자세에서 더 올라가 새하얗고 곧은 긴 다리가 석지훈의 시선에 고스란히 드러났다.남자는 매혹된 듯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 무릎을 감싸 쥐었다.“아직도 화났어?”마치 설명을 들었으니 이제 용서해야 하지 않겠냐는 듯한 말투였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야, 그날 밤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야. 그리고 기억이 돌아온 걸 바로 말하지 않은 것도 잘못했어. 사과할게.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 줄 거야?”이렇게 거듭해서 사과하는 석지훈에게 어떻게 매정하게 굴 수 있겠는가?나는 입술을 깨물며 서글프게 말했다.“화내려는 게 아니에요.”나는 그의 세계에서 무력감을 느꼈다.나는 결코 그의 진정한 아내가 될 수 없었다.예유진도 나를 '둘째 형수'라고 부르면서도 늘 남처럼 대하지 않았던가.그가 다시 물었다.“그럼 용서해 줄 거지?”내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석지훈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지훈 씨.”오빠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사랑하는 남자에게 나는 언제나 이랬다.마음이 약해서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석지훈은 몸을 숙여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나는 그를 무시하고 그의 몸을 밀쳐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단숨에 품에 안아 버렸다.“놔요!”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침묵으로 일관하며 내가 마음이 약해지고 다시 그에게 의지하기를 기다렸다.나는 그의 품 안에서 계속 버둥거렸다. 그때, 석지훈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아가야, 가만히 있어 봐.”순간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결국 나는 그에게 진정으로 화를 낼 수 없었고 그를 향한 분노를 쏟아낼 수 없었다.나는 석지훈을 사랑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나는 언제나 너무나 쉽게 그를 용서했다.그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 응어리는 더욱 깊어졌다.그가 기억상실증 연기를 해서도, 그가 했던 말 때문도 아니었다.나는 그저 그의 세계를 공유하고 싶었다.아주 단순한 바람이었다.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고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예유진에게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곁에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 싶었다.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그것뿐이었다.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마음속에 천근 무거운 돌덩이가 얹힌 듯 숨이 막혔다. 그때 석지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야, 그날 밤에 했던 말, 미안해.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이혼한 여자가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나는 무심히 물었다.“답은요?”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있어.”“지훈 씨, 그런 감언이설은 그만둬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못을 만회하는 중이야.”“하지만 진심이었잖아요.”내가 말했다.“그래. 내가 한 말이니까.”석지훈은 부드러운 입술로 내 따뜻한 뺨을 스치며 나직이 속삭였다.“하지만 그건 다른 여자에게 한 말이야. 우리 윤아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윤아야, 난 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나는 수건을 두르고 온천을 나와 방으로 향했다. 남자는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왔다. 진유겸이 그에게 전화를 건 지 두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스랜드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으로 놀랐다.그건 진유겸이 그에게 전화했을 때 이미 아이스랜드로 오는 중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나의 행적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기억상실인 척하는 것인가?!내가 아직 그가 기억상실인 척하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계속 기억상실인 척할 셈인가?나는 방에 들어가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남녀가 한 방에 있는 건 안 좋아요.”석지훈이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그는 나타난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듯 했다.나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낫지 않은 감기 때문인지 정신은 계속해서 몽롱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문득 석지훈이 떠올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얇은 종이로 된 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비쳤다. 크고 단단한 그의 실루엣은 마치 나를 지켜주는 굳건한 산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그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태도는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그는 내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안겨주었다.현정우의 말대로 석지훈의 세계는 영광과 재난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걸 이해하지만 나는 그 세계에서 배척당하는 기분이었다.나는 한 번도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고 그도 나를 자신의 세계로 이끌어 준 적이 없었다.게다가 우리 사이에는...아이가 있었다. 즉, 가정이 생겼다는 뜻이다.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내가 꿈꿔왔던 가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그는 여전히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한 후에야 겨우 자신의
나는 머리를 흔들며 더 이상 그 짜증 나는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순간적으로 편안함이 느껴졌다. 잠시 후, 최희연이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오더니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나 흉터 제거 수술을 하면서 몸도 같이 받았어. 그래서 온천에는 못 들어가겠다.”나는 농담을 던졌다.“그럼 넌 내가 즐기는 걸 구경만 해야겠네.”최희연은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 근데 나 먼저 통나무 집에 가서 자현 씨 만나고 싶어. 두 시간 후에 다시 올게. 괜찮겠지?”나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물었다.“그 사람은 왜?”내 표정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최희연은 입술을 깨물며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좀 전에 그가 유겸 씨를 봤거든. 내가 이혼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에게 설명하고 싶어. 수아야, 난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여.”나는 솔직하게 물었다.“뭘 설명하려는 건데? 이혼 안 했다고 설명하려고? 희연아, 네가 그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건... 이 기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이번에 최희연은 재빨리 부인했다.“그를 사랑하지 않아. 유겸 씨를 미워하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그가 남아 있어. 그래서 더 괴로운 거야.”나는 제안했다.“그럼 자현 씨에게 설명할 필요 없어. 설명하면 오히려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최희연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무슨 착각?”“네가 그를 신경 쓰고 있고 그가 힘들어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착각. 하지만 네 마음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착각을 심어주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어.”최희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상처?”“그가 너와 결혼한 게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한 거라고 생각해?”이런 일은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이 더 잘 알았다.최희연은 불안한 듯이 물었다.“그럼 그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뭐라는 거야?”나는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대담한 추측을 했다. 지금의 왕자현은 꼭 예전의 나 같았다.그렇지 않고서야 집안도 크고
그는 방금 일어난 소동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집에 갈래요?”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런데 먼저 친구랑 놀다가 저녁쯤에 돌아갈게요.”왕자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조심하고.”그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다.그녀가 무사하면 안심이 된 듯했다.최희연은 공항을 나가면서 차 안에서 걱정하듯 물었다.“왜 갑자기 아이스랜드에 왔어? 무슨 일이 있어?”나를 잘 아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최희연 역시 공감하며 말했다.“유겸 씨도 성격이 차갑고 말이 없는 편이잖아. 근데 지훈 씨는 성격이 차가울 뿐 절대로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 아까도 봤지? 유겸 씨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상처 주잖아”최근 뭔가를 깨달은 듯 최희연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치유받는 기분이야.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어. 예전처럼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되 유겸 씨가 언제 나를 떠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왜냐하면 진유겸은 이미 그녀를 떠나버렸고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며 나를 위로했다.“지금은 지훈 씨 생각하지 마. 나랑 아이슬란드에서 재밌게 놀다 가자. 그리고 저녁에는 온천에 몸도 담그고, 그나저나 3월 초라 오로라를 보기에 딱 좋은 시기야.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오두막에서 자자.”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응, 네 말대로 하자.”그녀는 나를 시내로 데려가서 옷 한 벌을 선물해 줬다. 그리고 차를 렌트해 근처 온천회관으로 데려갔다.그녀는 옷을 벗자 내 배에 드러난 상처를 보고는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최희연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살며시 배의 흉터를 만졌다. 나는 조금 간지러워서 이내 뒤로 물러섰다.“자궁을 절제했어.”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언제 한 거야?”“반 달 전 일
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두툼한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원래는 직접 F국으로 가서 석윤민을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결국 아이스랜드로 가서 최희연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어디를 가든 운성시를 떠나면 그만이었고 석지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다. 비서에게도 비밀로 했고 비행기 티켓도 혼자서 예매했다. 비행기 탑승 전, 최희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녀는 놀라서 답장을 보내왔다.[공항에서 기다릴게!]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유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미간을 띠푸린 채 핸드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여자는 이제 안 챙길 거야?”전화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딘데?”“아이스랜드.”진유겸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스랜드에 도착한 순간 진유겸이 석지훈에게 내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석지훈의 말투를 듣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게 분명했다. 나는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은 채 진유겸을 향해 소리쳤다.“왜 쓸데없이 간섭하고 그러세요?”그는 성격이 급해서인지 나를 쏘아보더니 곧바로 최희연을 향해 물었다.“희연아, 지금 너한테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나랑 순순히 따라갈래? 아니면 널 기절시켜서 데려갈까?” 이게 선택이라고? 협박이나 다름없지.그녀는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한마디를 뱉었다.“얼굴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지금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유겸 씨랑 떠날 일도 절대 없을 거예요.”그녀는 더없이 단호했다. 순간 진유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한 발짝 물러서며 침착하게 말했다.“유겸 씨가 왜 여기까지 와서 저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제가 유겸 씨만 순순히 따르던 최희연인 것 같으세요? 다시 절 유겸 씨 곁에 두고 싶은 거예요? 됐어요. 이제 상관없어요. 궁금하지도 않고. 앞으로 우리 사이
“그냥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혼란스러워졌을 뿐 최근 2년 간에 있었던 일만 잊었다고 했어요. 아마 한두 달 정도면 회복될 거예요.”즉 언제든지 기억이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인가?석지훈이 기억이 돌아온 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혹시 우리를 놀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석지훈이 절대 말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그는 기억을 회복한 게 틀림없었다.그렇다면 전날 밤 석지훈이 했던 말은...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나는 석지훈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민수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화 너머로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이 답답하며 조금씩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나는 그와 함께한 2년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완벽한 사람이었고 나를 배려하며 이해해 줬지만 내 곁에는 없었다.아무 설명도 없이 한두 달씩 떠났고 물어볼 때마다 항상 핀란드에서의 권력을 지켜야 한다고만 했다.그는 늘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항상 불안했다.그런데 그는?항상 태연하다 못해 하늘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마치 이 사랑의 게임에서 나만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우리 아이에게는 차갑게 대하고 나에게는 침묵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다양한 핑계를 대며 나 자신을 속여왔다.그가 조금씩 변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감쌌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지쳐버렸다.게다가 그는 지금 기억을 회복했으면서 나를 놀리고 있었다.그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내가 먼저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건 맞지만 내 마음속에는 풀지 못한 억울함이 쌓여 있었다.그냥 단순하게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특히 전날 밤 한성범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면서 내 반대편에 서는 게 너무 화가 났다.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어쩌면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그리고 다들 장식품이라고도 해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죠.”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여자가 장식품인 게 장점인가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예쁜 건 장점이죠.”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혼한 여자에게도 이쁜 게 장점인가요? 누군가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어떡해요? 이혼한 여자랑 키스하다니, 제가 너무 죄송하네요.”그는 약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은 제가 실수했어요. 죄송합니다.”“괜찮아요. 그게 진심이었잖아요.”그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인내심 있는 그의 모습이 과연 기억을 잃은 석지훈일까?나는 혹시 또 농락당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래도 지훈 씨가 저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걸로 이번에는 용서할게요. 하지만 다음은 없어요.”그는 평가하듯 말했다. “화가 좀 크신가 봐요.”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영어 문장은 무슨 뜻이에요?”그는 잠시 침묵한 뒤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너를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지게 될 줄 몰랐어. 나는 너의 유일한 사람이 아닐지 몰라도 다행히 너는 내게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너에게 정복당할 수 있는 맹수처럼 단단한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너를 내 품에 안을 거야.”뜻은 알고 있었지만 석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속에 달콤함이 가득 차올랐다.하지만 예전의 석지훈이라면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이 남자는 너무 차갑다 못해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한 마디, 한 글자도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인내심 있게 번역을 해주고 있었다.뭔가 이상했다.나는 여전히 마음속 의문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있어요?”그는 되레 반문했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