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윤승민은 석지훈을 의식해 억지로 예의를 차린 것뿐이었다.이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나는 윤승민을 지나쳐 헬기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창백한 얼굴의 최희연이 진유겸의 품에 기대 있었다.진유겸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냉랭한 표정으로 내 뒤에서 막 들어온 석지훈을 노려보더니 불만스럽게 물었다.“내 여자는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됐는데 네 여자는 왜 이렇게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거야?”진유겸은 최희연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한 상태였다.나는 얼른 해명했다.“난 처음에 그 사람들이 희연이를 기절시키는 걸 보고 그다음에 그 사람들이 몽둥이를 나에게 휘두르자 바로 기절한 척했어요.”진유겸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바보들이 그걸 믿었단 말이에요?”석지훈은 진유겸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석지훈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추측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걸 알았을 수도 있지만 굳이 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간 것 같아요.”진유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아 씨는 운이 좋았네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지훈의 팔에 기댄 뒤 몰래 그의 얼굴을 살폈다.석지훈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있었다.한참 뒤 최희연은 간신히 힘을 내어 나에게 물었다.“수아야, 넌 괜찮아? 나는 머리가 좀 어지럽고 힘이 없어서 말하기도 힘들어.”나는 대답했다.“괜찮아. 다만 다리가 좀 아프고 피곤할 뿐이야.”최희연은 부드럽게 물었다.“왜?”“저택을 떠난 뒤에 걸어서 도시까지 왔어. 길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고 입은 옷이 너무 무거워서 더 춥고 피곤하네.”최희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나저나 너 지금 입고 있는 그 전통 드레스 정말 예쁘다. 그런데 네 머리 위에 있는 흰 꽃장식 많이 망가진 것 같네.”눈밭에서 여러 번 넘어졌기 때문에 작은 흰 꽃장식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하지만 최현욱이 매번 그것을 주워 내 머리에 다시 꽂아 주었다.
‘F국 왕실? 왜 러국에서 F국 왕실의 물건이 발견된 거지?’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었다. 결국 석지훈의 품에 기댄 채 금세 잠들어 버렸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헬리콥터는 석씨 가문의 별장, 석지훈이 전에 머물던 곳에 착륙했다.나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나를 안고 헬리콥터에서 내린 뒤 별장으로 들어갔다. 헬리콥터는 곧바로 잔디밭에서 이륙 준비를 했고 진유겸과 그 일행은 다시 운성시로 떠났다.석지훈은 별장에 들어선 뒤에도 나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후, 커다란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나는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끊겼고 인기척이 들려서 눈을 떠보니,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나온 석지훈이 보였다. 넓은 가슴팍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그를 불러보았다.“오빠...”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짝 꼬집듯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덮고 있던 코트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냈다.나는 그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고 조용히 지나간 상황을 설명했다.“누군가가 나를 구해준 것 같아요...”그는 담담히 대답했다.“알고 있어.”“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나는 그 사람이 최현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석지훈은 진유겸이 했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쑥스러웠다. 눈앞의 그를 마주하자, 마음이 뒤숭숭했다.8개월 만에 다시 만난 탓인지 어딘가 어색하고 서먹했다. 그런데 그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따뜻했다. 어떤 욕망이나 불순한 기색도 없었다. 그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어느새 내 옆에 몸을 기댄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깊었고,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숨결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나는 목이 타들어 갔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언제 자요?”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왜?”나는 그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그... 그냥요. 이제 좀 자고 싶어졌어요.”나의 대답에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스쳤다.“아가...”그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네?”“키스해 줘.”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그의 말투엔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분위기에 눌린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두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며 조용히 물었다.“하기 싫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의 입가에도 입술을 살짝 포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똑바로 마주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방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햇살에 물든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말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그 눈빛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격정이 가득 차 있었다....나는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있던 석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베개 옆에 낯익은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이걸 어디서 찾았지?’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자, 화면에는 부모님께서 걸어왔었던 부
나는 석지훈을 집에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먼저 청혼하지 않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만약 내가 그를 집에 데려간다면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그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테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결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나는 대충 둘러댔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급한 거 없어요. 제가 일정 잡으면 미리 알려드릴게요.”그러자 엄마는 만족한 듯 말했다.“이건 네 일만이 아니야. 시혁이도 있잖니. 나랑 네 아빠가 얘기를 좀 해봤는데, 시혁이도 연씨 가문의 자식이니까 네 아빠가 어른으로서 그 여자애랑 직접 얘기를 좀 해 보려고 해.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지 않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엄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돈 걱정은 하지 마. 연씨 가문이 운성시에서의 명망은 사라졌지만, 나랑 네 아빠가 몇억 원 정도 모아 놨단다. 그 돈으로 시혁이한테 운성시에 집을 마련해 주고, 예단도 준비해서 그 여자애랑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게 해 주고 싶어. 그래야 네 큰아버지한테도 체면이 서지 않겠니.”큰아버지는 그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부모님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아무래도 부모님은 송이연의 진짜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굳이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부모님은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하려는 게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연시혁도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에, 나 역시 내심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연시혁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자로서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는 결과가 어떻든 송이연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나는 언제까지나 승아의 고모로 남을 테니까...“시혁 오빠가 자존심이
석지훈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막지 않았다.항상 그랬다. 그는 나를 제지하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가슴이 드러났고, 그곳엔 상처들이 가득했다.아침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잠옷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 볼 틈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상처들은 각기 다른 깊이와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얕은 상처는 세월의 흔적으로 이미 희미해졌지만, 깊은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상처는 그의 복부에 있었다.길게 그어진 흉터는 그의 단단한 복부 근육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거친 흉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상처가 전해주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먹먹해졌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오빠, 안 아파요?”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익숙해졌어.”‘익숙해졌다고?’그의 말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익숙해졌다고 해도,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잖아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나는 그의 허리와 복부 위로 몸을 기울여 얼굴을 살짝 댔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내 마음은 더욱 아려왔다.나의 위로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작은 강아지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위험이 닥칠 거야. 나와 함께하기 두렵지 않아?”그가 자신이 사는 세상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오빠의 세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머릿속에 불현듯 최현욱의 말이 떠올랐다.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의 세계는... 어떤 곳이에요?”내 손끝은 그의 허리띠에 닿아 있는 금속 부분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
별장 문 앞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 중 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 아가씨도 여기 있었어요?”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옆에 있던 원태웅이나 한 번 게임을 같이했던 유진, 그리고 나에게 늘 차갑게 대했던 한민영보다는 훨씬 나았다.문제는 지금 내가 석지훈의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상태라는 점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난처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석지훈의 친구들이자,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그런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결국 한민수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석지훈에게 말했다.“오빠, 나 먼저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나는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와 2층 방으로 올라갔다.침대에 앉자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석지훈의 SNS에 등장하는 사람 중 나를 반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그 사실이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괜한 생각은 그만하자.’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옷장으로 가서 은빛이 도는 몸에 딱 붙는 미니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어차피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높은 구두는 신지 않았다.가볍게 화장을 마친 뒤 침대를 정리하려 돌아섰을 때, 아침에 석지훈이 벗겨 준 궁전 스타일의 드레스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윤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 드레스는 F국 왕실의 것이었다.F국 왕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예전에 석만호가 해 준 이야기뿐이었다.그는 내 친모가 F국의 공작과 결혼했다고 말했다.‘날 납치한 사람들이 왜 F국 왕실의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 왜 나한테 그 옷을 입히려 했을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친모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석만호가 준 연락처가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다투는 소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한민영의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석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민영아.”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민영은 순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왜?”석지훈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내가 아직 한씨 가문에 빚진 게 뭐가 있지?”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였다.한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자, 한민수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전환하려 애쓰며 얼른 말을 꺼냈다.“자,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 경쟁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자. 그들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세력까지 강탈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한 건 골치 아프잖아.”하지만 석지훈은 한민수의 중재를 무시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네가 수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한씨 가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그는 한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한민영, 나라는 사람은 마음먹으면 항상 독하게 행동에 옮기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앞에서 감히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영역에서 내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고...”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심한 어조로 마무리했다.“설령 그 대상이 한씨 가문이든, 한씨 가문의 미래 후계자든... 난 봐줄 마음이 없어.”나도 그의 입에서 ‘독하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민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석지훈,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내가 말실수했다는 것도, 네 여자를 괴롭혔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 그래도 나는 네 오랜 친구야. 그리고 한씨 가문은 너를 키
“사랑? 그딴 걸로 날 한씨 가문에 묶어두려는 거야?”석지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차가운 눈빛은 한민영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냉혹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너의 사랑은 나에게 짐일 뿐이야.”그 말에 한민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체념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맘대로 해. 한씨 가문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이젠 상관없어. 어차피 민수가 나보다 더 적합하겠지. 하지만 기억해.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신경 쓰는 건 한씨 가문이 아니야. 네가 뭘 하든, 나도 이제 신경 안 써.”그녀의 말은 모든 걸 끝내려는 듯했지만, 석지훈의 냉담한 표정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 그녀의 사랑도, 분노도, 깊은 슬픔도 그의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몸짓으로만 비칠 뿐이었다.석지훈은 감정을 억누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민수, 앞으로 한민영을 내 앞에 데려오지 마. 그리고 그녀가 동성시에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한민영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정말 매정한 남자였구나.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뱉고는, 석지훈의 어두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나고 나자 별장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침묵을 깬 것은 한민수였다.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그렇게까지 대립할 필요는 없잖아. 너도 한민영의 성격이 어떤지 알면서...”석지훈은 경멸이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아.”한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 먼저 와서 사과할 거야.”그러나 석지훈은 차갑게 반문했다.“내가 한 말이 언제 농담으로 들린 건가?”한민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설마 방금 한 말, 진심인 거야?”석지훈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한민영은 한씨 가문을 이끌 만한 그릇이 아니야. 그녀가 가문을 이끈다면, 가문은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