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어느새 내 옆에 몸을 기댄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깊었고,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숨결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나는 목이 타들어 갔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언제 자요?”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왜?”나는 그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그... 그냥요. 이제 좀 자고 싶어졌어요.”나의 대답에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스쳤다.“아가...”그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네?”“키스해 줘.”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그의 말투엔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분위기에 눌린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두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며 조용히 물었다.“하기 싫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의 입가에도 입술을 살짝 포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똑바로 마주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방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햇살에 물든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말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그 눈빛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격정이 가득 차 있었다....나는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있던 석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베개 옆에 낯익은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이걸 어디서 찾았지?’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자, 화면에는 부모님께서 걸어왔었던 부
나는 석지훈을 집에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먼저 청혼하지 않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만약 내가 그를 집에 데려간다면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그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테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결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나는 대충 둘러댔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급한 거 없어요. 제가 일정 잡으면 미리 알려드릴게요.”그러자 엄마는 만족한 듯 말했다.“이건 네 일만이 아니야. 시혁이도 있잖니. 나랑 네 아빠가 얘기를 좀 해봤는데, 시혁이도 연씨 가문의 자식이니까 네 아빠가 어른으로서 그 여자애랑 직접 얘기를 좀 해 보려고 해.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지 않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엄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돈 걱정은 하지 마. 연씨 가문이 운성시에서의 명망은 사라졌지만, 나랑 네 아빠가 몇억 원 정도 모아 놨단다. 그 돈으로 시혁이한테 운성시에 집을 마련해 주고, 예단도 준비해서 그 여자애랑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게 해 주고 싶어. 그래야 네 큰아버지한테도 체면이 서지 않겠니.”큰아버지는 그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부모님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아무래도 부모님은 송이연의 진짜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굳이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부모님은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하려는 게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연시혁도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에, 나 역시 내심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연시혁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자로서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는 결과가 어떻든 송이연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나는 언제까지나 승아의 고모로 남을 테니까...“시혁 오빠가 자존심이
석지훈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막지 않았다.항상 그랬다. 그는 나를 제지하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가슴이 드러났고, 그곳엔 상처들이 가득했다.아침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잠옷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 볼 틈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상처들은 각기 다른 깊이와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얕은 상처는 세월의 흔적으로 이미 희미해졌지만, 깊은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상처는 그의 복부에 있었다.길게 그어진 흉터는 그의 단단한 복부 근육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거친 흉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상처가 전해주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먹먹해졌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오빠, 안 아파요?”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익숙해졌어.”‘익숙해졌다고?’그의 말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익숙해졌다고 해도,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잖아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나는 그의 허리와 복부 위로 몸을 기울여 얼굴을 살짝 댔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내 마음은 더욱 아려왔다.나의 위로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작은 강아지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위험이 닥칠 거야. 나와 함께하기 두렵지 않아?”그가 자신이 사는 세상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오빠의 세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머릿속에 불현듯 최현욱의 말이 떠올랐다.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의 세계는... 어떤 곳이에요?”내 손끝은 그의 허리띠에 닿아 있는 금속 부분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
별장 문 앞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 중 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 아가씨도 여기 있었어요?”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옆에 있던 원태웅이나 한 번 게임을 같이했던 유진, 그리고 나에게 늘 차갑게 대했던 한민영보다는 훨씬 나았다.문제는 지금 내가 석지훈의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상태라는 점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난처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석지훈의 친구들이자,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그런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결국 한민수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석지훈에게 말했다.“오빠, 나 먼저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나는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와 2층 방으로 올라갔다.침대에 앉자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석지훈의 SNS에 등장하는 사람 중 나를 반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그 사실이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괜한 생각은 그만하자.’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옷장으로 가서 은빛이 도는 몸에 딱 붙는 미니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어차피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높은 구두는 신지 않았다.가볍게 화장을 마친 뒤 침대를 정리하려 돌아섰을 때, 아침에 석지훈이 벗겨 준 궁전 스타일의 드레스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윤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 드레스는 F국 왕실의 것이었다.F국 왕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예전에 석만호가 해 준 이야기뿐이었다.그는 내 친모가 F국의 공작과 결혼했다고 말했다.‘날 납치한 사람들이 왜 F국 왕실의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 왜 나한테 그 옷을 입히려 했을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친모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석만호가 준 연락처가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다투는 소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한민영의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석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민영아.”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민영은 순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왜?”석지훈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내가 아직 한씨 가문에 빚진 게 뭐가 있지?”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였다.한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자, 한민수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전환하려 애쓰며 얼른 말을 꺼냈다.“자,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 경쟁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자. 그들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세력까지 강탈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한 건 골치 아프잖아.”하지만 석지훈은 한민수의 중재를 무시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네가 수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한씨 가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그는 한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한민영, 나라는 사람은 마음먹으면 항상 독하게 행동에 옮기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앞에서 감히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영역에서 내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고...”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심한 어조로 마무리했다.“설령 그 대상이 한씨 가문이든, 한씨 가문의 미래 후계자든... 난 봐줄 마음이 없어.”나도 그의 입에서 ‘독하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민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석지훈,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내가 말실수했다는 것도, 네 여자를 괴롭혔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 그래도 나는 네 오랜 친구야. 그리고 한씨 가문은 너를 키
“사랑? 그딴 걸로 날 한씨 가문에 묶어두려는 거야?”석지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차가운 눈빛은 한민영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냉혹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너의 사랑은 나에게 짐일 뿐이야.”그 말에 한민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체념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맘대로 해. 한씨 가문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이젠 상관없어. 어차피 민수가 나보다 더 적합하겠지. 하지만 기억해.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신경 쓰는 건 한씨 가문이 아니야. 네가 뭘 하든, 나도 이제 신경 안 써.”그녀의 말은 모든 걸 끝내려는 듯했지만, 석지훈의 냉담한 표정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 그녀의 사랑도, 분노도, 깊은 슬픔도 그의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몸짓으로만 비칠 뿐이었다.석지훈은 감정을 억누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민수, 앞으로 한민영을 내 앞에 데려오지 마. 그리고 그녀가 동성시에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한민영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정말 매정한 남자였구나.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뱉고는, 석지훈의 어두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나고 나자 별장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침묵을 깬 것은 한민수였다.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그렇게까지 대립할 필요는 없잖아. 너도 한민영의 성격이 어떤지 알면서...”석지훈은 경멸이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아.”한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 먼저 와서 사과할 거야.”그러나 석지훈은 차갑게 반문했다.“내가 한 말이 언제 농담으로 들린 건가?”한민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설마 방금 한 말, 진심인 거야?”석지훈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한민영은 한씨 가문을 이끌 만한 그릇이 아니야. 그녀가 가문을 이끈다면, 가문은
석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익숙하게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을 텐데... 괜찮겠어?”‘피곤하지. 하지만 오빠 곁에 더 있고 싶어. 오빠가 어디를 가든 항상 함께 있고 싶으니까.’나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옆에 있고 싶어요.”내 말을 들은 석지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의 미소는 평소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과는 정반대였고, 가벼운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그는 이런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나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장난치지 마.”그 한마디에는 끝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오빠, 싫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대신했다.나는 그의 반응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그리고 있어요? 연꽃인가요? 그런데 꽃잎이 너무 적어서 안 닮은 것 같은데요.”그가 짧게 대답했다.“리시안셔스야.”나는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말했다.“오빠는 진짜 다재다능하네요.”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붓을 들고 그림에 집중했다.한 시간쯤 지나 한 다발의 리시안셔스 그림이 완성되었다.그는 붓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한민수한테 가 봐.”그의 말에서 내가 운성시에 가는 걸 허락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내가 입고 있는 은빛 타이트한 원피스는 과하게 노출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차림이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이 옷이 왜요? 노출이 과한 것도 아닌데요?”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무슨 뜻인지 알잖아.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저녁에 같이 갈 데가 있어.”나는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어딘데요? 꼭 편한 옷을 입어야 하는 곳이에요?”그는 시선을 피하며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옷 갈아입어. 저녁에 연락할게.”석지
별장 문을 나서자 끝없이 펼쳐진 리시안셔스 밭이 눈앞에 들어왔다.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며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어 마음이 평온해졌다.한민수가 차 문을 열며 나를 향해 타라는 손짓을 했다.나는 길가에 핀 연분홍빛 리시안셔스 한 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았다.그 모습을 본 한민수가 웃으며 말했다.“그 모습이 담유미랑 참 닮았네요. 허세 부리는 느낌까지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저는 담유미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담유미 이야기를 꺼내세요?”한민수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담유미 집안이 평범한 건 알죠?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우리 무리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순진한 척 물었다.“왜요? 어떻게 들어왔는데요?”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담유미가 지훈이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석지훈이 담유미가 우리 모임에 드나드는 걸 묵인한 거예요. 게다가 담유미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져서, 얼마 안 돼 민영이와 가까워지게 됐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들 친해진 거예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도 오빠는 담유미 씨를 마음에 두지 않잖아요.”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제가 지훈이가 그녀를 마음에 뒀다고 했나요? 그냥 수아 씨한테 조심하라고 한마디 하는 거예요.”한민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의로 덧붙였다.“우리 모두 알아요. 담유미가 를 좋아한다는 걸요.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것 같아도, 수아 씨랑 지훈이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그땐 수아 씨가 피해를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미리 경고하는 겁니다.”나는 순간 당황해 물었다.“결혼이라니요? 그런 얘기가 나온 적 있나요?”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아 씨, 그게 요점이에요?”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담유미가 저한테 해코지할 수는 없을 거예요.”지금 내 곁에는 보디가드도 있고, 무엇보다 석지훈이 나를 지키고 있다.석씨
“윤아야, 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건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당부야. 더군다나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 아버지 눈에는 언제나 소중한 딸이고 나한테도 네 과거가 어떻든 간에 너는 내 인생에서 단 하나,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여자야.”석지훈이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내가 멍하니 웃고 있을 동안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가문이나 외모는 더더욱. 사랑은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야.”‘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나는 마음이 벅차올라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오빠는 사랑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니! 언제부터 사랑하게 된 거예요? 혹시 우리 아버지랑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예요? 오빠는 결혼 얘기는 했으면서 왜 아직도 나한테 청혼하지 않는 거죠?”석지훈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내 코끝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결혼하고 싶어?”나는 결혼하고 싶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뭐가 중요해!’‘내가 부인해도 내 마음을 꿰뚫어 볼 텐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네. 오빠랑 결혼해서 아내가 되고 싶어요.”그는 가볍게 웃으며 약속했다.“우리 동성시로 돌아가면 약혼하자.”그 약속은 현실감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에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있던 장미꽃을 그의 품에 안겨주며 달콤하게 말했다.“자, 이 장미는 오빠한테 줄게!”석지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그는 장미를 손에 쥐고 내 손을 꼭 잡고 별장으로 돌아갔다.나는 그의 곁을 따라가며 물었다.“오늘 내게 편한 옷을 입으라고 한 건 여기 데려오려고 했던 거야?”“이따 운산에 같이 가려고.”‘운산이라...’나는 이 지명이 낯익었고 적어도 처음 듣는 건 아니어서 망설이며 물었다.“
운성시의 오늘 밤은 유난히 맑았다.늘 이어지던 비도 그치고, 공기 중의 습한 기운도 사라진 상태였다.맑은 달빛이 부드럽게 비추고, 살랑거리는 선선한 바람까지 더해져 데이트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데이트... 이걸 데이트라고 할 수 있을까?’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차를 타고 30분쯤 지나 꽃집 하나가 보였다.나는 차를 멈추고 내려, 탐스럽게 피어난 붉은 장미 아홉 송이를 골랐다.검은색 카드지로 직접 꽃다발을 포장한 뒤, 차에 다시 올랐다.꽃다발을 품에 안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석지훈이 보낸 위치 정보대로 해변 근처였다.내려다보니 검은색 캐주얼 코트를 걸친 남자가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그 차분한 자세를 보고 한눈에 그가 석지훈임을 알 수 있었다.오늘따라 서류 가방과 정장을 벗어 던지고 캐주얼한 차림을 한 그가 조금 색다르게 보였다.나는 현정우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며 살금살금 그의 뒤로 다가갔다.그와의 거리가 반 미터쯤 되었을 때, 장난기가 발동해 튀어 오르듯 그의 등에 매달렸다.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안 떨어질 자신 있어?”나는 그의 목을 꼭 안고 웃으며 대답했다.“오빠가 있으니까 무서울 게 없죠.”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저녁은 먹었어?”“아니요. 우리 석 대표님이 해 주실 건가요?”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현정우의 말처럼 이곳은 석지훈의 자택이었다.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절벽 위에 호화로운 별장이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가 해 주시는 건 뭐든 다 좋아요.”석지훈은 나를 등에 업고 해안선을 따라 별장을 향해 걸었다.그의 등에서 나는 조용히 마음속의 질문을 꺼냈다.“엄마가 오빠 만나고 왔다고 말해줬어요... 뭐 안 좋은 말씀 하신 건 아니죠?”그는 무심히 물었다.“응?”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부모님이 오빠를 힘들게 하신 건 아니죠?”내가 아는 아빠의 성격이라면 그 자리
석지훈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운성시에 머물 곳이 없다고 생각해 우리 집에서 묵으라고 제안했었다.‘그때 왜 운성시에 집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 걸까? 설마 그때부터 나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걸까?’생각에 잠기다 나는 현정우에게 물었다.“석지훈 대표님이 특히 좋아하는 게 있어요?”현정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리시안셔스가 맞을까요?”나는 웃으며 물었다.“대표님, 여자에게서 장미꽃을 받아본 적은 있나요?”현정우는 짧게 대답했다.“없습니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정우 씨, 지나가는 길에 꽃집이 보이면 알려 주세요.”...낮, 석씨 가문 별장의 서재.한민수가 경쟁사를 상대할 방법에 대해 설명하던 중, 석지훈의 휴대폰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평소 같았으면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았겠지만, 발신지가 운성시라는 걸 보고 잠시 망설였다.운성시는 연수아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였다.그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누구십니까?”“석지훈 씨, 저는 수아의 엄마입니다.”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석지훈은 통화의 목적을 짐작했다.그의 얼굴에 잠시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어머님, 안녕하십니까...”서재에 있던 한민수는 그가 ‘어머님’이라는 말을 꺼내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그의 기억 속에서 석지훈이 누구를 ‘어머님’이라 부른 적은 없었다.심지어 아버지의 첩들이나 한민영의 어머니조차도 ‘작은방 사모님’이나 ‘사모님’이라고 불렀을 뿐이었다.게다가 ‘안녕하십니까’라니, 이런 정중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더욱 낯설었다.‘석지훈이 이렇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다니?’과거 석지훈이 연수아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어도, 한민수는 단순히 그것이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번 순간, 한민수는 깨달았다.석지훈은 연수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을 자기 가족보다 더 소중히 여길 정도로.“석지훈 씨,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야 석지훈 씨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연시혁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나는 최희연과 서둘러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별장은 마치 특별한 날을 위해 준비된 듯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정원의 꽃과 나무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 단번에 특별한 날임을 알 수 있었다.나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거실에서는 부모님이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돌아온 걸 본 두 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며 물었다.“이 시간에 웬일로 왔니?”나는 연시혁의 말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려고, 서둘러 거짓말을 지어냈다.“낮에 전화했잖아요. 오늘 저녁에 온다고요.”“그래, 어서 와. 얘기 좀 하자.”별장 안에 석지훈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부모님이 이미 그를 만났음이 분명했다.‘그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혹시 아빠가 첫 만남부터 기선 제압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불안한 마음을 안고 엄마 옆에 앉았다.엄마는 내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약간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 수아도 이제 다 컸구나. 엄마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너는 열네 살쯤 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사실 엄마는 많이 아쉬워. 네가 크는 동안 옆에서 함께하지 못했던 게.”그들이 떠났던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그 이유 역시 내가 준 재앙 때문이었다.만약 그들이 나를 입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고립된 생활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나는 엄마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엄마랑 아빠께 정말 감사해요.”그들이 내게 준 사랑과 무탈한 성장 환경에 늘 고마웠다.그때 아빠가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수아야, 우리 아까 석지훈을 만났어.”나는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무슨 얘기를 하셨어요?”“너에 대해서 얘기 좀 나눴지. 결혼 얘기는 꺼내지 않았어.”아빠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가 먼저 결
“맞아. 우리 먹으라고 준비한 거야.”최희연은 내가 건넨 케이크를 받아 식탁 위에 올리고 포장을 풀었다.내가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내가 온다고 일부러 나간 건 아니지?”최희연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야. 그냥 좀 어색할까 봐 잠깐 나갔던 거야.”“그럼 내가 너희 둘만의 시간을 방해한 거네?”그 말을 하고 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최희연은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내게 건네며 웃었다.“우리 둘 사이에 방해라니.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너희 집에 갔어도 석지훈이 우리한테 자리를 내줬겠지. 아니면 뭐, 그 큰 남자가 우리 대화 엿듣기라도 했겠어?”나도 케이크를 받으며 피식 웃었다.“그러게. 그럴 리가 없지.”최희연이 물었다.“근데 갑자기 운성시에 무슨 일로 온 거야?”“지훈 오빠가 이쪽으로 온대. 연락이 오면 같이 갈 데가 있다는데,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어.”‘이게 약속이라 할 수 있을까?’문득 생각해 보니, 나와 석지훈은 정식으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다.그때 최희연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진서준 일 말인데... 수아야, 아직 그 사람한테 복수를 못 했어. 하지만 진씨 가문 사람들은 결국 진유겸의 가족이잖아.”나는 그녀의 심정을 짐작하며 물었다.“그래서 마음이 약해진 거야?”“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진유겸이 네 복수를 싫어할까 봐 그런 거야?”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아니야. 진유겸은 날 원망하지 않을 거야.”“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는 진심으로 말했다.최희연은 고개를 떨군 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수아야, 내가 복수를 망설이는 건 그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야. 진유겸이 내가 진서준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다고 오해할까 봐... 사실 그 일로 우리 둘이 몇 번 싸우기도 했어.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특히 내가 그의 조카랑 얽혔었다는 게...”그녀는 말을 멈췄다.나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최희연과
별장 문을 나서자 끝없이 펼쳐진 리시안셔스 밭이 눈앞에 들어왔다.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며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어 마음이 평온해졌다.한민수가 차 문을 열며 나를 향해 타라는 손짓을 했다.나는 길가에 핀 연분홍빛 리시안셔스 한 송이를 꺾어 머리에 꽂았다.그 모습을 본 한민수가 웃으며 말했다.“그 모습이 담유미랑 참 닮았네요. 허세 부리는 느낌까지요.”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저는 담유미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담유미 이야기를 꺼내세요?”한민수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담유미 집안이 평범한 건 알죠?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우리 무리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순진한 척 물었다.“왜요? 어떻게 들어왔는데요?”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담유미가 지훈이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석지훈이 담유미가 우리 모임에 드나드는 걸 묵인한 거예요. 게다가 담유미는 사람들과 쉽게 친해져서, 얼마 안 돼 민영이와 가까워지게 됐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들 친해진 거예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도 오빠는 담유미 씨를 마음에 두지 않잖아요.”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제가 지훈이가 그녀를 마음에 뒀다고 했나요? 그냥 수아 씨한테 조심하라고 한마디 하는 거예요.”한민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선의로 덧붙였다.“우리 모두 알아요. 담유미가 를 좋아한다는 걸요.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것 같아도, 수아 씨랑 지훈이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그땐 수아 씨가 피해를 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미리 경고하는 겁니다.”나는 순간 당황해 물었다.“결혼이라니요? 그런 얘기가 나온 적 있나요?”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아 씨, 그게 요점이에요?”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담유미가 저한테 해코지할 수는 없을 거예요.”지금 내 곁에는 보디가드도 있고, 무엇보다 석지훈이 나를 지키고 있다.석씨
석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익숙하게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했을 텐데... 괜찮겠어?”‘피곤하지. 하지만 오빠 곁에 더 있고 싶어. 오빠가 어디를 가든 항상 함께 있고 싶으니까.’나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옆에 있고 싶어요.”내 말을 들은 석지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의 미소는 평소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과는 정반대였고, 가벼운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가에 살짝 입을 맞췄다.그는 이런 갑작스러운 친밀함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지만, 나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장난치지 마.”그 한마디에는 끝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나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오빠, 싫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침묵으로 대신했다.나는 그의 반응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그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그리고 있어요? 연꽃인가요? 그런데 꽃잎이 너무 적어서 안 닮은 것 같은데요.”그가 짧게 대답했다.“리시안셔스야.”나는 진심 어린 감탄을 담아 말했다.“오빠는 진짜 다재다능하네요.”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붓을 들고 그림에 집중했다.한 시간쯤 지나 한 다발의 리시안셔스 그림이 완성되었다.그는 붓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한민수한테 가 봐.”그의 말에서 내가 운성시에 가는 걸 허락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은 조금 당황스러웠다.내가 입고 있는 은빛 타이트한 원피스는 과하게 노출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차림이었다.나는 장난스럽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이 옷이 왜요? 노출이 과한 것도 아닌데요?”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무슨 뜻인지 알잖아.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저녁에 같이 갈 데가 있어.”나는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어딘데요? 꼭 편한 옷을 입어야 하는 곳이에요?”그는 시선을 피하며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옷 갈아입어. 저녁에 연락할게.”석지
“사랑? 그딴 걸로 날 한씨 가문에 묶어두려는 거야?”석지훈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차가운 눈빛은 한민영을 얼어붙게 했다.그는 냉혹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너의 사랑은 나에게 짐일 뿐이야.”그 말에 한민영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체념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맘대로 해. 한씨 가문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이젠 상관없어. 어차피 민수가 나보다 더 적합하겠지. 하지만 기억해.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신경 쓰는 건 한씨 가문이 아니야. 네가 뭘 하든, 나도 이제 신경 안 써.”그녀의 말은 모든 걸 끝내려는 듯했지만, 석지훈의 냉담한 표정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 그녀의 사랑도, 분노도, 깊은 슬픔도 그의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몸짓으로만 비칠 뿐이었다.석지훈은 감정을 억누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민수, 앞으로 한민영을 내 앞에 데려오지 마. 그리고 그녀가 동성시에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한민영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비웃으며 말했다.“정말 매정한 남자였구나. 걱정하지 마. 나도 이제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뱉고는, 석지훈의 어두운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나고 나자 별장은 다시 고요 속에 잠겼다.침묵을 깬 것은 한민수였다.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그렇게까지 대립할 필요는 없잖아. 너도 한민영의 성격이 어떤지 알면서...”석지훈은 경멸이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아.”한민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 먼저 와서 사과할 거야.”그러나 석지훈은 차갑게 반문했다.“내가 한 말이 언제 농담으로 들린 건가?”한민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설마 방금 한 말, 진심인 거야?”석지훈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한민영은 한씨 가문을 이끌 만한 그릇이 아니야. 그녀가 가문을 이끈다면, 가문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한민영의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석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민영아.”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민영은 순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왜?”석지훈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내가 아직 한씨 가문에 빚진 게 뭐가 있지?”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였다.한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자, 한민수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전환하려 애쓰며 얼른 말을 꺼냈다.“자,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 경쟁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자. 그들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세력까지 강탈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한 건 골치 아프잖아.”하지만 석지훈은 한민수의 중재를 무시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네가 수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한씨 가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그는 한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한민영, 나라는 사람은 마음먹으면 항상 독하게 행동에 옮기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앞에서 감히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영역에서 내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고...”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심한 어조로 마무리했다.“설령 그 대상이 한씨 가문이든, 한씨 가문의 미래 후계자든... 난 봐줄 마음이 없어.”나도 그의 입에서 ‘독하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민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석지훈,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내가 말실수했다는 것도, 네 여자를 괴롭혔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 그래도 나는 네 오랜 친구야. 그리고 한씨 가문은 너를 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