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출래?”웃는 내 모습을 보던 반경우가 입을 춤을 제안하자 나는 자연스레 그와 처음 췄던 춤을 떠올리게 되었다.그때도 클럽에서 춤을 췄었는데 그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첫 순간이었다.그날에 담배가 어떤 맛인지 알려준다고 반경우가 입으로 나한테 전해줬었는데 그게 어떻게 또 보면 내 첫 키스였을 것이다.하지만 그건 그냥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감정이 섞인 건 절대 아니었다.내가 고민하며 답을 못하자 그는 나를 끌고 무대 위로 올라가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반경우의 리듬에 맞춰 나도 가볍게 몸을 흔들자 그는 나에게로 다가오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자기야, 오늘 너무 섹시한 거 아니야?”“떨어져, 내일 기사에 얼굴 박히고 싶어? 그럼 또 나만 욕먹잖아 꽃뱀이라고.”“그런 말을 뭐하러 신경 써.”내가 정색하며 말하자 반경우가 볼멘소리를 잠시 하던 반경우는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내 허리를 잡아 왔다.“적당히 하라고.”내가 다시 한번 경고를 하자 그제야 나를 놓아준 그는 한 바퀴 돌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춤추는 건데 야박하게 진짜.”삐진 듯한 그를 달래기 위해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춤추는 건 괜찮은데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란 얘기잖아. 나 또 욕먹기 싫어.”“알았어, 네 말대로 하자.”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나를 품 안에 가두는 반경우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나는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그냥 술이나 먹자.”그렇게 한참을 마시다가 내가 거의 취해가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은 담현아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미안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 좀 걸릴 것 같아요.”“언제 도착해?”“삼십 분은 있어야 도착할 것 같은데요...”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나는 소파에 기대에 고개를 젖히고 3층을 바라보았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 반경우를 향해 물었다.“저건 누구야?”“누구?”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던 반경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언제 또 저기까지 간 거야.”“누군데 그래?”“석지훈이잖아.”..
석지훈의 이름을 듣자마자 서둘러 눈을 감는 나를 보며 반경우는 속도 없는 사람이라고 혀를 찼지만 나는 그저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담현우와 담현아가 도착했고 나는 취할까 봐 천천히 마시는 담현우와 또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그렇게 한참 마시니 다시 어지러워진 나는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몸을 일으키자 반경우가 걱정스레 물어왔다.“혼자 갈 수 있겠어?”“당연하지.”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나는 한 발 내딛자마자 바로 담현아의 품속으로 고꾸라졌고 반경우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젓더니 나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의식이 없어 반항도 못 하는 나에게 반경우가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석지훈이 안 내려오면 걔는 진짜 남자도 아니야.”“뭐라고?”“내가 지금 일부러 너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어지러웠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가만히 그에게 안겨있었다.그런데 반경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는데 그 순간 등 뒤에서 한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저한테 주세요.”“제가 왜 그래야 하죠?”“제가 부축한다고요.”“이제야 좀 안달이 나셨나 봐요.”곧이어 나는 반경우 손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안겨버렸다.그 남자의 품이 더욱 포근해서 나는 자연스레 남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남자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몇 걸음 떼지도 않았을 때 누군가가 남자를 불러왔다.“형, 이대로 가면 어떡해, 위에 분들 형만 기다리고 있는데. 다들 형 국내 세력 약한 틈 타서 형 눌러놓으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아예 틈을 보여주는 거잖아.”“이번 입찰은 포기할 거야.”남자의 대답에 다른 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형, 아직도 윤아 사랑해?”윤아가 누군지 남자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다시 상처받는다 해도 계속 사랑할 거야?”“원태웅.”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지만
...창문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너무 눈 부셨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가리다가 불현듯 스쳐 가는 어젯밤의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어제 술에 취한 나를 반경우가 화장실로 데려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 것 같았다.그게 누구였을까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는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를 떠올렸다.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한 목소리였는데.나는 마침내 그 남자가 석지훈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하지만 통째로 사라져버린 어젯밤의 기억에 나는 혹시라도 그에게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했을까 봐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불안한 마음으로 욕실로 달려간 나는 일단 정신부터 차리기 위해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문을 여니 거실에 앉아있는 석지훈이 보여 나는 1초 만에 다시 문을 닫아버리고는 또 금세 겁을 집어먹은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여 깊은숨을 내쉬며 석지훈 앞으로 다가갔다.다행히도 석지훈은 아직 자고 있었다.한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지탱한 채 자고 있는 석지훈의 자세는 한눈에 봐도 아주 불편해 보였다.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려 했는데 내가 담요를 놓기도 전에 석지훈이 먼저 내 팔을 잡아 왔다.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석지훈은 상대가 나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그 모습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암살시도를 겪었기에 이 정도로 경계심이 강해졌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석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났어?”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저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석지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어제 술 많이 마셔서 속 울렁거리지 않아? 해장국 끓여줄게.”우리가 연인일 때나 하던 말을 내뱉는 석지훈에 나는 어젯밤 내가 실수한 건가 싶어 다시 불안해졌다.혹시 내가 이상한 말들을 해서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줄로 오해하는 걸까 봐 나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어제 내가 혹시 무슨 짓 했어요?”“묻고 싶은 게
하지만 곧이어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에 나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나는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그의 품에 안겨버렸고 석지훈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나를 가만히 받아주고 있었다.석지훈이 자세를 유지한 채 오피스텔로 나를 데려온 것까지 다 기억 난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재회가 이런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건데.정말 술은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원래도 그를 보면 요동쳤던 멘탈이 이젠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천천히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창문을 마주 향한 채 서서 통화를 하는 석지훈에 나는 조용히 집을 나가려고 했는데 인기척을 어떻게 느낀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돌아선 그가 살짝 언짢은 듯한 말투로 나를 보며 물었다.“어디가?”차가운 그 표정에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이 몰려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현아 만나러요.”“담현아 씨 운성으로 돌아갔어 이미.”“그럼 운성 가서 만나면 돼요.”내 말이 끝나자 석지훈은 한숨과 함께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언제까지 나 피할 거야?”내가 고개를 떨군 채 침묵을 유지하자 석지훈은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났다.“운성에 비오니까 옷부터 갈아입고 가.”그제야 나는 여지껏 입고 있었던 검은색 나시를 떠올렸다.성향이 꽤 보수적인 편이라 내가 노출 있는 옷을 입는 걸 싫어하는 석지훈이었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 하고 싶었던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서려 했다.하지만 이내 석지훈에게 팔이 잡혀서는 다시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차가운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는 석지훈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그러자 석지훈이 낮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왔다.“우리 윤아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안 들었지? 응?”마지막으로 내뱉은 ‘응’자에 심장이 떨려온 나는 빨개진 얼굴로 손을 빼내려 애쓰며 소리쳤다.“이거 놔요!”석지훈은 당연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
내가 이렇게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석지훈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석지훈은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 없어. 그 두 아이... 우리가 부모가 될 인연이 없었던 것뿐이야. 게다가 넌 아직 젊잖아. 요즘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나중에 네가 아이를 원하면 시험관이라도 하면 되지. 아니면 네가 원치 않으면 안 가져도 돼.”나는 원래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석지훈의 말에 억눌러왔던 울음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석지훈의 품에 파묻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최근 느꼈던 억울함과 우울함 그리고 답답함이 이 순간 모두 눈물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나는 진심으로 석지훈에게 감사했다.석지훈이 나를 아무런 원망도 없이 받아주는 것에 감사했고 다시 내 곁에 다가와 준 것에 고마웠다.“윤아야, 내게는 네가 가장 소중해. 나머지는 모두 사소한 거야. 난 과거를 따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마음도 그럴 시간도 없어. 내가 예전에 한 말을 잊은 거야?”석지훈은 예전에 오해는 그가 나를 밀어낼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했었다. 이 말을 나는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핀란드에 세 번이나 갔는데도 석지훈을 만나지 못해 상처를 받았다.나는 울면서 물었다.“그럼 날 왜 만나주지 않은 거예요?”석지훈의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나약해졌고 기꺼이 단단한 껍질을 내려놓은 채 석지훈에게 의지하고 싶었다.이런 감정은 과거 고현성과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평생을 의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석지훈은 왜 나를 만나주지 않았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침묵을 지키며 방금 했던 말을 끝으로 다시 예전에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갔다.나는 약간 화가 나 고개를 들어 석지훈의 이름을 불렀다.“석지훈.”석지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쪼그마한 게, 버릇없이.”예전에 내가 석지훈의 이름을
“됐어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현정우는 명령을 들은 뒤 나와 함께 우성으로 향했다.차가 고속도로에 막 진입했을 때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도심으로 갈수록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운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축축하고 추웠지만 이 도시에는 나의 많은 추억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 도시에서 자랐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이 도시를 깊이 사랑하셨다.왜냐하면 나의 친어머니로 알려진 그분과 아버지가 바로 이곳에서 만나셨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아마 친어머니를 매우 사랑하셨던 것 같다.하지만 왜 두 분이 함께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문득 운산이 생각났다.석만호는 운산이 내 아버지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었다.아마도 그것이 나의 친어머니와 관련된 것 아닐까 싶었다.나는 조수석에 앉아 현정우에게 말했다.“운성에서 떠나기 전에 운산에 꼭 가야 하니까 내가 까먹으면 알려줘요.”“알겠습니다, 가주님.”우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니 마침 엄마가 요리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너무 놀라셨다. 엄마는 얼른 내 손을 잡고 앉게 하더니 다정하게 말씀하셨다.“많이 힘들었지?”엄마의 말 속 의미를 알기에 나는 이 슬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엄마, 무슨 요리하는 거예요? 냄새가 너무 좋은데요?”“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네가 집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 그래서 네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치킨 커리하고 가리비 그리고 호주산 랍스타를 만들었는데 내 예감이 맞았네.”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미 만들어진 치킨 커리를 보고 나는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우리 엄마가 나를 제일 잘 알아.”“가서 네 아빠랑 얘기 좀 나누고 와. 음식이 다 되면 부를게. 맞다. 수아야, 오렌지 주스 마실래 아니면 망고 주스 마실래?”“달콤하게 오렌지 주스요.”엄마는 웃으며 말했다.“너 참 안 변했구나.”맞다.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
내가 말하길 꺼리는 듯 하자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와 석지훈이 가능성이 없다면 엄마도 굳이 너에게 현성이을 찾으러 가라고 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친구 아들의 연락처를 한번 알아봐 줄게.”“엄마, 저보고 맞선을 보라는 거예요?”내가 운성에 오기 전에 무심코 던진 말이 딱 들어맞았다.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씀하셨다.“너 혼자 그렇게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걸 보면 엄마는 너무 마음이 아파. 얼마 전에 네 아빠랑 얘기해 봤는데 네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이 너랑 집안 배경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사실 세상에 석씨 가문에 걸맞은 가문은 거의 없을 테니까.”“엄마는 그저 그 사람이 널 아끼고 사랑해 주면 돼. 네게 따듯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엄마는 더 이상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아이가 떠났을 때 수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엄마 마음도 너무 아팠지만 널 도울 수도 없었고 곁에서 지켜줄 수도 없었어.”엄마는 말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나는 얼른 손을 뻗어 엄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지훈 오빠하고 잘 지내고 있어요. 어쩌면 곧 결혼 얘기도 나올지 몰라요.”사실 지금 나와 석지훈은 결혼 얘기를 꺼낼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뿐이었다.엄마는 나의 말에 금세 기운을 차리시며 물었다.“정말이지?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정말이에요. 조만간 지훈 오빠와 상의해 볼게요.”옆에 있던 아빠가 거들며 말했다.“수아야, 언제 한번 데려와 봐. 그 사람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래도 내 딸의 남편을 고르는 데 아빠한테도 기준이 있단다.”나는 웃으며 말했다.“두 분은 왜 이렇게 성급하세요?”나는 서둘러 부엌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옆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현정우를 보고 나는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현정우는 황급히 핸드폰을 치우며 말했다.“아무것도 아
오후 두 시쯤 되니 운성에 내리던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 나는 부모님이 또다시 석지훈의 얘기나 결혼 얘기를 꺼낼까 봐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했다.“저 옷 몇 벌 사러 다녀올게요. 저 기다리지 마시고 저녁 드세요.”아빠가 물었다.“이번에는 운성에 며칠 머무를 거야?”“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녁에는 집에 돌아올 거예요.”아빠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혹시 또 석지훈을 언제 한 번 집에 데려와 보라는 말을 꺼낼까 봐 나는 서둘러 현정우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현정우는 우산을 나에게 씌워주었고 나는 차에 오른 뒤 담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어디야?]담현아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나 지금 운성이에요.]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나도 운성에 있어.]내가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현아는 위치 하나를 공유해줬다.그곳은 운성에서 가장 큰 콘서트홀이었다.예전에 최희연이 이 근처에서 고양이 카페를 열었었는데 어느새 1년이 지나버렸고 최희연을 볼 기회도 거의 없었다.나는 문득 최희연이 생각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희연아, 어디야?”“나 운성에 있어.”“나도 운성에 왔어.”“그럼 내가 수업 끝나고 너 보러 갈게.”나는 호기심에 물었다.“무슨 수업 듣고 있어?”“미술 수업. 요즘 너무 할 일이 없어서 대학에 들어가 교수님께 그림을 배우고 있어.”“그래. 끝나면 연락해.”전화를 끊고 우리는 담현아가 있는 콘서트홀에 도착했다.나는 경호원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가 담현아를 찾았다.담현아는 맨 뒷줄에 앉아 있었다.나는 담현아의 옆으로 가 물었다.“왜 앞에 안 앉고 뒤에 있어?”담현아는 나를 끌어당겨 옆자리에 앉히며 무덤덤하게 설명했다.“고정재에게 내가 귀국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요.”“그런데 왜 굳이 운성까지 왔어?”나는 일부러 고정재에 대한 담현아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물었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정재의 음악이 좋아서요.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딱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