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살짝 눈썹을 추켜세웠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서 앞으로 걸어가더니 무대 위로 올라갔다.고정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우아하게 연주를 시작했고 나는 다시 바람이 머무는 거리라는 곡을 들을 수 있었다.정말 오랜만이었다.고정재는 왜 또 이 곡을 연주하는 걸까?담현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말했다.“유치한 아저씨예요.”나는 놀라며 물었다.“왜?”담현아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한참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정재가 바람이 머무는 거리를 연주한 건 담현아를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서였다.고정재는 이 어린 소녀가 질투하길 바란 것이다.이전에 나와 고정재가 함께 찍힌 영상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적이 있었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고정재가 이 곡을 연주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단번에 고정재의 의도를 간파했다.담현안는 고정재가 이 곡을 자신에게 들려주려고 일부러 연주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지능이 높은 사람과 함께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심지어 작은 속마음까지 전부 들켜버리니 말이다.예를 들어 담현아가 방금 말했던 유치한 아저씨라는 말처럼 말이다.최희연이 도착했을 때 고정재의 솔로 연주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최희연은 내 옆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수아야, 네가 갑자기 고정재의 연주회를 보러 오다니. 웬일이야?”나는 낮은 목소리로 최희연에게 설명했다.“내 옆에 있는 소녀가 보고 싶어 해서. 현아는 고정재의 음악을 좋아해. 나름 충성한 팬이야.”최희연은 아무렇게나 추측하며 말했다.“저 소녀가 고정재를 좋아하나 보네?”담현아가 들을까 봐 나는 최희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아니야,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최희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너, 나한테 장난치는 거지?”나는 웃으며 말했
“어머나. 이건 완전 뜨거운 감자잖아. 윗선에선 우리한테 사람만 잡으라고 했지 누구를 잡는지는 말도 없었잖아. 윗선에서 이 두 여자만 데려가면 운성에는 우리만 남게 될 텐데. 이러다간 우리가 희생양이 되는 거 아니야?”귀 옆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빨리 사람들을 넘기자. 가는 길에 신호를 남기면 그 사람들이 따라올 거야. 안 그럼 두 남자가 사람을 못 찾으면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 거야. 윗선이 우리를 이용해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이용해야지.”“두 남자? 왜 갑자기 두 남자야?”한 남자가 대답했다.“석지훈과 진유겸.”나와 최희연은 순식간에 차로 옮겨졌다. 연주회는 한참 동안 끝나지 않을 테니 경호원들은 우리가 납치된 걸 금방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이 사람들이 가는 길에 신호를 남긴다고 했으니 희망은 있었다.게다가 내가 늘 사용하는 건 석씨 가문의 핸드폰이었다. 경호원들이 우리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면 금방 위치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몇 분 뒤 나는 헬기 소리를 들었다. 나와 최희연은 헬기로 옮겨졌고 잠시 후 누군가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하더니 내 핸드폰을 가져가는 것이 느껴졌다.“하, 위치 추적이 켜져 있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우리는 이미 들켰어.”“일단 국경으로 가자.”헬기는 그렇게 이륙했고 나는 차가운 손이 내 복부를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그 순간 싸늘한 혐오감이 들었다.나는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남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봐, 내가 이 여자가 기절한 척하는 거라고 말했지? 넌 안 믿더라?”내 앞에 있는 남자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잘생겼다. 느낌상 한민수보다 더 매력적이었다.그는 긴 눈꼬리가 특징인 한 쌍의 또렷한 눈매를 가졌는데 마치 영혼을 사로잡는 요정 같았다.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침착하게 물었다.“당신들은 누구죠?”지난 1년 반 동안 많은 일을 겪으며 나는 이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강철 같은 심장을
최현욱의 표정은 마치 나와 역할이 바뀐 것 같았고 오히려 내가 그를 납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침착하라고 경고했다.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서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는 최희연을 바라보았다. 최희연의 관자놀이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내 친구 괜찮겠지?”“걱정하지 마.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야.”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최현욱은 갑자기 일어나 앞으로 가더니 아까 그 사람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이 지나 우리는 러국 국경에 도착했다. 헬기에서 내린 나는 추위에 온몸이 떨렸다.기온이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이때 최현욱이 이를 눈치채고서는 자기가 입고 있던 안감이 부드러운 가죽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건 인정하지?”“최현욱, 또 아무 데서나 끼 부리지 마.”최현욱은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 곁으로 돌아갔다.우리는 약 5분 정도 걸었고 눈앞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20명에서 30명 정도의 무장한 외국인들이 서 있었다.최현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람을 데려왔습니다.”반대편에 있던 보스 격의 인물은 최현욱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농담을 건넸다.“그 유명한 최현욱이 이렇게 젊을 줄이야.”그는 외국인이었지만 완벽한 한국어를 사용했다.최현욱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칭찬할 거면 잘생겼다고 해줘.”“좋아, 여기 황금 두 상자다.”최현욱은 황금을 받은 뒤 떠나려 했다. 그는 내 옆을 지나가다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난 이제 떠나야 해. 우리 집 어르신 생일 파티에 가야 하거든. 걱정하지 마. 내가 석지훈에게 연락해서 너희를 구하러 오게 할 테니까.”최현욱은 정말 채찍질하고 나서 사탕을 주는 사람 같았다.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최현욱은 단호하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나는 마음속으로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꼬마 아가씨, 내가 구하러 왔지.”그는 해맑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날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임이 그인 것을 몰랐다면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나는 냉소적으로 말했다.“난 널 못 믿겠어.”창밖은 끝없이 펼쳐진 얼음과 눈의 세계가 펼쳐졌고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정원에는 몇 마리 고양이가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 옆에 미소를 띤 채 나를 올려다보는 최현욱이 서 있었다.최현욱은 내가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걸 보더니 분석하듯 설명했다.“나는 이런 일을 업으로 삼고 있어. 그들이 널 원했으니 어쩔 수 없이 잡아 왔지만 지금 이렇게 그 사람들이 없을 때 몰래 구해줄 수도 있잖아.”“그 사람들이 없다고?”최현욱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뒷마당에는 없지.”최현욱은 아까 나에게 코트를 벗어줬기에 지금은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최현욱이 계속 이어폰을 끼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콘서트 가수들이 이용하는 것처럼 핑크빛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려한 이어폰이었는데 최현욱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나는 걱정스레 물었다.“내 친구는 어딨어?”“네 친구는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있는 것 같아. 아까 또다시 기절했어. 그 사람들이 네 친구를 병원으로 따로 데려가려는 모양이야.”최현욱의 설명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의심이 드러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쪽은 어떻게 아는 거야?”최현욱은 솔직하게 말했다.“방금 엿들었지.”나는 말문이 막혔다.창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한 뒤 최현욱의 얇은 가죽 코트를 집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최현욱은 민첩하게 몇 발짝 움직여 코트를 받았다.최현욱은 코트를 입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랑 같이 떠날래? 병원에서 네 친구를 찾는 게 탈출하기 훨씬 쉬울 거야.”최현욱은 아무 두려움 없는 표정으로 위험한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의심스레 물었다.“왜 날 돕는 거야?”“너도 나처럼 예쁘
최현욱은 순순히 대답했다.“그러면 여기서 기다릴게.”최현욱은 아래에서 들킬까 봐 걱정도 안 하는 듯 여유롭게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잠시 후 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그녀가 창가로 다가오며 나를 부르려 하자 나는 다급히 그녀를 막으며 물었다.“내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나요?”“네, 이제 막 떠나려는 중이에요.”하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나는 일부러 무심한 척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여기서 시내까지 얼마나 멀어요?”하녀는 영어로 천천히 대답했다.“여긴 아주 외진 곳이에요. 시내까지는 70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될 거예요. 아마 더 멀지도 몰라요. 사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 저택을 떠난 적이 없거든요.”이 여자가 나를 부러워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나는 외부에서 온 사람이고 그녀는 이 안에 갇힌 사람이다. 이 저택은 마치 그녀를 평생 가둔 감옥 같았다.나는 궁금해서 물었다.“왜 여길 떠나지 않는 거예요?”“이 저택을 지키는 게 내 사명이에요.”그녀의 말에서 엄청난 신념이 느껴졌다. 그녀를 설득해 이곳을 떠나라고 하는 건 허황한 꿈일 것이다.나는 굳이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이 저택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만큼 아마 이곳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 많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최현욱을 알아요?”그녀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죠.”“그 사람은 누구예요?”그녀는 순진했기에 숨기지 않고 말했다.“우리 업계 사람들은 그를 최 사장님이라고 불러요. 최현욱은 나이가 많지 않지만 일 처리는 아주 냉혹하죠.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안젤리나, 보스가 널 찾는다.”밖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말을 멈추고서는 서둘러 떠났다.나는 창가로 가서 아래를 보았다. 최현욱은 여전히 고양이들과 놀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자 아까 헬기 안에서 최현욱의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최현욱, 너 또 착한 척하려고 그
나와 최현욱의 거리는 약 3미터 정도였다. 솔직히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입고 있는 복잡한 전통 드레스 때문에 움직이기도 불편했다.만약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라는 걸 깨달았다.석지훈이 떠난 8개월 동안 그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이해했다. 내가 그를 모른 척해선 안 됐다.실망과 죄책감에 휩싸여 그를 멀리했던 나의 잘못이었다.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나는 어떻게 토라질 수 있었던 걸까?내가 한숨을 쉬자 최현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뛰어내릴 거야, 말 거야?”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드디어 뛰어내렸다. 충격이 꽤 컸는지 최현욱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나를 안전하게 받아냈다.나는 순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두드렸다. 이를 보고 최현욱은 내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였다.“언제까지 내 품에 안겨 있을 거야?”나는 재빨리 최현욱의 품에서 뛰어나왔다. 최현욱은 옷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보기엔 마른 것 같더니 은근히 무겁네.”“나 몸무게 50킬로도 안 돼.”“몸무게 50킬로 안 넘는 애들은 대부분 가슴이 없거나 키가 작더라.”최현욱은 내가 입은 드레스를 힐끗 보며 말했다.“옷은 정말 예쁘네. 영화 속 디즈니 공주 같아. 근데 너 머리가 너무 길어.”내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나도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어 언젠가 잘라야겠다고 늘 마음먹었지만 매번 까먹었다.나는 최현욱을 흘겨보며 말했다.“그쪽 머리도 아닌데 왜 신경 써요?”“꼬마 아가씨가 입이 왜 이렇게 독해?”최현욱은 말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던 중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최현욱은 내 손목을 붙자고 화단 뒤로 날 숨었다.“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고양이들이 낸 소리겠지.”“그럼 가자. 너무 춥네.”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최현욱은 내 손목을 잡고 당
최현욱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최현욱을 노려보며 말했다.“아까 하녀한테 물어봤는데 여기서 도시까지 70에서 80킬로미터는 된다던데요. 우리 이렇게 걸어가면 며칠이나 걸려?”게다가 지금 날씨는 이렇게 춥고 언제든 눈이 내릴 것 같은 징조가 보였다.밤이 다가오면 기온이 더 떨어질 텐데 이런 얼어붙은 눈밭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됐다.순간 나는 저택을 떠나온 걸 후회했다. 차라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석지훈에게까지 피해를 줄까 봐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빨라 가자.”“꼬마 아가씨, 왜 이렇게 화를 내고 그래?”최현욱은 내 옆으로 다가오며 짓궂게 웃더니 말했다.“겨우 70에서 80킬로미터잖아. 난 걸어서 반나절이면 가. 그리고 마침 네 몸도 좀 단련할 수 있겠네.”나는 최현욱을 무시하고 무거운 유럽식 전통 드레스를 질질 끌며 앞으로 걸어갔다. 대략 30분쯤 걸었을 때 최현욱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참,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어.”나는 속으로 울분을 참으며 물었다.“뭔데?”“우리 길을 잘못 들었어.”최현욱의 말은 맑은 하늘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나는 귀가 멍해져서 최현욱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추위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꼬마 아가씨, 우리 원래 길로 돌아가야 해.”그런데 최현욱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로 귀엽게 말했다.이에 나는 돌아서서 최현욱의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손을 거둬들이고 속에서 울컥하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앞장서서 길 안내 좀 제대로 해.”이번에는 최현욱이 앞장섰다.최현욱은 내가 추워하는 걸 느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했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30분이면 돌아올게.”비록 최현욱이 답답하게 굴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 눈밭에 나 혼자 남겨질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최현욱을 바라보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가 떠나지
“난 너한테 기대한 적 없거든?”“네가 나한테 기대 안 하면 누구한테 기대할 건데?”최현욱은 잠시 멈추더니 물었다.“네 남편?”“나 남편 없어.”“석지훈이 네 남편 아니야?”“우린 아직 결혼 안 했어.”최현욱의 정교한 알굴이 밤하늘 아래에서 바로 내 앞에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나는 숨이 멎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 최현욱은 이내 매력적으로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에게도 기회가 있는 거네?”“네가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무슨 헛소리야.”최현욱은 추궁하듯 물었다.“설마 내가 널 좋아하면 기회가 있는 거야?”나는 살짝 두통이 오는 듯한 기분에 서둘러 설명했다.“내 뜻은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데 굳이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야. 게다가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난 널 안 좋아할 테니까.”최현욱은 비꼬듯이 말했다.“자기 잘난 멋에 사는구나.”나는 이 순간 우리 대화가 다소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몸이 추위에 너무 굳어버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결국 나는 최현욱이 나를 등에 업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가 나를 업자 내가 품에 안고 있던 사과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최현욱은 떨어진 사과를 주워 내게 건네며 말했다.“배고프면 먹어.”나는 배고프지 않았지만 그냥 지쳤을 뿐이다.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최현욱은 겉보기엔 연약해 보였지만 몸이 꽤 단단했다. 등에 업히니 최현욱의 옷 아래로 느껴지는 근육에 나는 무심코 그를 칭찬했다.“평소에 운동 많이 했나 보네.”최현욱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당연하지. 나 어릴 땐 몸이 약했지만 힘은 꽤 있었어. 커서는 운동을 더 열심히 했고.”나는 그냥 아하고 감탄하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최현욱은 갑자기 흥미로운 듯 물었다.“너랑 석지훈은 사이가 깊어?”나와 석지훈의 사이는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했다.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내가 지훈 오빠를 정말 사랑해. 가끔 무섭기도 하지만
그는 방금 일어난 소동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다정하게 물었다.“집에 갈래요?”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런데 먼저 친구랑 놀다가 저녁쯤에 돌아갈게요.”왕자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조심하고.”그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다.그녀가 무사하면 안심이 된 듯했다.최희연은 공항을 나가면서 차 안에서 걱정하듯 물었다.“왜 갑자기 아이스랜드에 왔어? 무슨 일이 있어?”나를 잘 아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최희연 역시 공감하며 말했다.“유겸 씨도 성격이 차갑고 말이 없는 편이잖아. 근데 지훈 씨는 성격이 차가울 뿐 절대로 널 배신하지 않을 거야. 아까도 봤지? 유겸 씨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상처 주잖아”최근 뭔가를 깨달은 듯 최희연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치유받는 기분이야.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어. 예전처럼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되 유겸 씨가 언제 나를 떠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왜냐하면 진유겸은 이미 그녀를 떠나버렸고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며 나를 위로했다.“지금은 지훈 씨 생각하지 마. 나랑 아이슬란드에서 재밌게 놀다 가자. 그리고 저녁에는 온천에 몸도 담그고, 그나저나 3월 초라 오로라를 보기에 딱 좋은 시기야.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오두막에서 자자.”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응, 네 말대로 하자.”그녀는 나를 시내로 데려가서 옷 한 벌을 선물해 줬다. 그리고 차를 렌트해 근처 온천회관으로 데려갔다.그녀는 옷을 벗자 내 배에 드러난 상처를 보고는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최희연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살며시 배의 흉터를 만졌다. 나는 조금 간지러워서 이내 뒤로 물러섰다.“자궁을 절제했어.”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언제 한 거야?”“반 달 전 일
나는 아파트로 돌아가 두툼한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원래는 직접 F국으로 가서 석윤민을 데려올 계획이었지만 결국 아이스랜드로 가서 최희연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어디를 가든 운성시를 떠나면 그만이었고 석지훈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났다. 비서에게도 비밀로 했고 비행기 티켓도 혼자서 예매했다. 비행기 탑승 전, 최희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녀는 놀라서 답장을 보내왔다.[공항에서 기다릴게!]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유겸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미간을 띠푸린 채 핸드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여자는 이제 안 챙길 거야?”전화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딘데?”“아이스랜드.”진유겸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스랜드에 도착한 순간 진유겸이 석지훈에게 내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석지훈의 말투를 듣는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은 게 분명했다. 나는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은 채 진유겸을 향해 소리쳤다.“왜 쓸데없이 간섭하고 그러세요?”그는 성격이 급해서인지 나를 쏘아보더니 곧바로 최희연을 향해 물었다.“희연아, 지금 너한테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나랑 순순히 따라갈래? 아니면 널 기절시켜서 데려갈까?” 이게 선택이라고? 협박이나 다름없지.그녀는 평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한마디를 뱉었다.“얼굴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지금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유겸 씨랑 떠날 일도 절대 없을 거예요.”그녀는 더없이 단호했다. 순간 진유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한 발짝 물러서며 침착하게 말했다.“유겸 씨가 왜 여기까지 와서 저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아직도 제가 유겸 씨만 순순히 따르던 최희연인 것 같으세요? 다시 절 유겸 씨 곁에 두고 싶은 거예요? 됐어요. 이제 상관없어요. 궁금하지도 않고. 앞으로 우리 사이
“그냥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혼란스러워졌을 뿐 최근 2년 간에 있었던 일만 잊었다고 했어요. 아마 한두 달 정도면 회복될 거예요.”즉 언제든지 기억이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인가?석지훈이 기억이 돌아온 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혹시 우리를 놀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나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석지훈이 절대 말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그는 기억을 회복한 게 틀림없었다.그렇다면 전날 밤 석지훈이 했던 말은...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나는 석지훈에게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민수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전화 너머로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가슴이 답답하며 조금씩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났다. 나는 그와 함께한 2년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완벽한 사람이었고 나를 배려하며 이해해 줬지만 내 곁에는 없었다.아무 설명도 없이 한두 달씩 떠났고 물어볼 때마다 항상 핀란드에서의 권력을 지켜야 한다고만 했다.그는 늘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항상 불안했다.그런데 그는?항상 태연하다 못해 하늘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마치 이 사랑의 게임에서 나만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리고 우리 아이에게는 차갑게 대하고 나에게는 침묵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다양한 핑계를 대며 나 자신을 속여왔다.그가 조금씩 변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감쌌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지쳐버렸다.게다가 그는 지금 기억을 회복했으면서 나를 놀리고 있었다.그는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내가 먼저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건 맞지만 내 마음속에는 풀지 못한 억울함이 쌓여 있었다.그냥 단순하게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특히 전날 밤 한성범을 그렇게까지 옹호하면서 내 반대편에 서는 게 너무 화가 났다.그때 이미 기억을 회복한 걸까?어쩌면 회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그리고 다들 장식품이라고도 해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죠.”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여자가 장식품인 게 장점인가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예쁜 건 장점이죠.”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혼한 여자에게도 이쁜 게 장점인가요? 누군가에게는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요. 어떡해요? 이혼한 여자랑 키스하다니, 제가 너무 죄송하네요.”그는 약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은 제가 실수했어요. 죄송합니다.”“괜찮아요. 그게 진심이었잖아요.”그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인내심 있는 그의 모습이 과연 기억을 잃은 석지훈일까?나는 혹시 또 농락당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그래도 지훈 씨가 저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걸로 이번에는 용서할게요. 하지만 다음은 없어요.”그는 평가하듯 말했다. “화가 좀 크신가 봐요.”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이 영어 문장은 무슨 뜻이에요?”그는 잠시 침묵한 뒤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너를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지게 될 줄 몰랐어. 나는 너의 유일한 사람이 아닐지 몰라도 다행히 너는 내게 유일한 사람이야. 나는 너에게 정복당할 수 있는 맹수처럼 단단한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너를 내 품에 안을 거야.”뜻은 알고 있었지만 석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속에 달콤함이 가득 차올랐다.하지만 예전의 석지훈이라면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이 남자는 너무 차갑다 못해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한 마디, 한 글자도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나에게 인내심 있게 번역을 해주고 있었다.뭔가 이상했다.나는 여전히 마음속 의문을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있어요?”그는 되레 반문했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 병실을 떠난 뒤 배가 고프다 못해 참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 깊은 밤에 영업하는 식당이 있을 리 없었다.인내심을 가지고 병실에서 기다리다 보니 약 30분 뒤에 석지훈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오른손에는 하늘색 도시락을, 왼손에는 우유 한 병을 들고 있었다.그는 먼저 우유를 내게 건네주었다. 우유를 받자 아직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내가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도시락을 열었다. 안에는 산약과 갈비로 만든 국과 흰 쌀밥 한 그릇이 있었다. 석지훈은 밥을 국에 말아 반 그릇을 내게 건넸다. 나는 마시다 남은 우유를 그에게 돌려준 뒤 그가 내준 밥을 금세 다 먹어버렸다.“그렇게 배고팠어요?”나는 그에게 그릇을 돌려주며 말했다. “네,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요. 점심에 우유 한 잔 마신 게 끝이에요. 저 한 그릇만 더 주세요.”석지훈은 다시 반 그릇 떠서 내게 건네주었다.그릇을 비우고 난 뒤 갈비 두 개를 더 뜯어 먹고서야 배가 불렀다. 입가에 기름이 묻자 석지훈이 티슈 두 장을 건네며 말했다.“닦으세요.”나는 웃으며 종이를 받아 입술을 닦았다.그는 이내 도시락을 치워 곁에 두었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자도 돼요. 내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눈앞에 그는 더없이 다정했다.적어도 어제보다는 다정해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혹시 기억을 되찾은 걸까? 2년 전, 고현성이 기억을 잃었다며 나를 속였던 일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소파에 다시 앉더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책 한 권을 들고 읽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책 제목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궁금한 마음을 애써 삼키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럼 전 잘게요.”눈을 감고 누운 채 한참을 뒤척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은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
최희연은 이곳에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문을 열고 나가자, 왕자현은 붉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컬러가 그에게는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매력적인 느낌을 더했다.그는 복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악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악기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재민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자현 씨, 악기 다룰 줄 아세요?”정원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고 온천에서는 여전히 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악기를 다루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그는 말 그대로 고귀함이 물씬 풍겼다.최희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왕자현은 정말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와도 같았다. 모든 게 완벽할뿐더러 온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진 느낌이었다.“자현 씨는 어릴 적부터 많은 걸 배우셨네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집안이 부유하다 보니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죠. 원하지 않는 걸 배울 이유도 없고 여유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악기를 배운 거죠.”부유한 집안에 대해 그는 마치 당연한 듯 말했다.그녀는 조금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말 부럽네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부러워하는 거죠?”“부유한 집안이요.”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더 이상 그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최희연은 그 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악기라고 배운 적이 없었기에 감상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률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었다.그녀는 왕자현 곁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진유겸이었다. 그녀는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여나 여기까지 찾아올까 봐 할 수없이 통화 버튼을 클릭했다.진유겸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해서 뭐 하려고요?”진유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수아 씨가 그러는데 네가 결혼했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VIP 병실이었고 나는 크고 부드러운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깨어났어요?”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네, 지금 몇 시예요?” 석지훈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3시예요.”“아, 그렇군요. 고마워요.”“별말씀을.”“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그는 가볍게 대답한 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유진이랑 태웅이는 수아 씨가 형수님이 되어주길 바라던데 전 아직 여자 친구 찾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수아 씨도 저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세요.”둘째 오빠...석지훈은 2년 전부터 자신을 둘째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었다.마치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일부러 물었다.“왜요?”그는 돌아서서 나를 향해 물었다.“원하는 게 뭐예요?”나는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말했다.“절 가지세요.”웃음이 피식 나오는 석지훈이었다.“전 수아 씨를 갖고 싶지 않아요.”“너무 단호하시네요. 저 되게 쉬운데, 한 번 해보세요.”그 역시 그날 밤처럼 대답했다.“흥미 없어요.”나는 웃으며 말했다.“마침 잘됐네요. 우리 그냥 이렇게 끝내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시나리오대로 안 가는 거예요?”나는 물었다.“뭔 시나리오죠?”“그날 술 취해서 비슷한 말을 했잖아요.”석지훈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전 이미 다 잊었어요. 그날 밤 술에 취했다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그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진짜 취했어요?”혹시 내가 취한 척하는 걸 눈치라도 챘나?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이었다.나는 그의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시크한 척은.비는 쏟아졌고 고현성은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원래 그를 무시하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 “협박하고 싶지 않아요.”협박하고 싶지 않다...이미 협박이었다.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죠?”“말했잖아, 민수가 수아 씨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석지훈의 말투는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오늘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도 나를 놓아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어쨌든 이 일은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고현성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비서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데려다줄게. 며칠 후에 다시 너랑 놀아주면 어때?”그의 눈빛엔 실망이 담겨 있었지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 말을 따랐다.“알겠어.”그 말을 듣고 비서는 즉시 차에 올라타더니 고현성을 집으로 데려다줬다.고현성이 떠난 뒤 나는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의 성격상 민수 씨 부탁으로 절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요? 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요?”석지훈은 내 말을 듣더니 차갑게 쏘아봤다.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죠?”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로 돌아갔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윤 비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수아 씨,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차에 타세요.”나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석지훈은 곁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몸이 계속해서 나른하고 불편해서 결국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차가 거의 도착할 즈음, 석지훈이 갑자기 물었다.“자주 연락하세요?”석지훈이 가리키는 건 고현성이었다.“지훈 씨랑 상관없을 텐데요.”“그래, 상관없지.”석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나는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힘없이 석지훈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저를 데려왔으
그의 촉촉한 눈망울을 마주하며 나는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어.”고현성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눈이 반짝였다. 비서는 그에게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사주었고 흰색 니트는 그의 몸에 딱 맞아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자.”나는 먼저 문을 나섰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 나섰다. 비서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서는 고현성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나는 혼자서 우산을 썼다. 그런데 고현성은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 했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했다.“말 들어.”고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우산을 쓰고 앞서갔고 고현성과 비서는 뒤에서 따랐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몸을 살짝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기억을 되찾은 건가?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태웅이가 그렇게 불렀죠?”괜히 설렜네.내가 답을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고현성이 급히 설명했다. “수아예요.”고현성은 내 앞에 서서 소유욕을 보이며 석지훈을 막아섰다.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은?”“전 수아의 남편, 고현성이라고 해요”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조금 망설였다. 마치 자기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계속해서 그를 현성이라고 부르자 석지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다시 물었다. “남편?”고현성은 확고하게 말했다.“네!”석지훈은 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태웅이가 어젯밤까지 전남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수아야, 전 남편이 뭐야?”석지훈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그는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물론 어젯밤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