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를 뿜어내며 헛소리를 해대는 석지훈에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남자친구는 없는데 우리가 아직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연락처를 못 줄 것 같아요.”남자가 머쓱하게 자리를 뜨자 석지훈의 품 안에서 나온 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우리도 친한 사이는 아니죠.”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나시 아래로 드러난 내 타투를 보던 석지훈은 하려던 말을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그런데 내가 뒤돌아 걸어가려 할 때, 그가 다시 내 손목을 잡아 오며 물었다.“윤아야, 나랑은 아는 척도 하기 싫은 거야?”8개월 전의 나는 그를 무척이나 원했었다.임신 후에도 두 번이나 핀란드를 찾아갔고, 심지어 그가 감옥에 있을 때까지 더하면 총 세 번을 그 먼 곳으로 그를 찾아갔었는데 석지훈은 단 한 번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었다.그래도 그 모든 건 내가 자초한 일이었기에 나에게는 그를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그리고 아이들도 내가 고집스럽게 낳겠다 한 것이었기에 그 또한 석지훈의 탓은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울먹이며 그의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쪽 몰라요.”내 말에 석지훈은 두 눈을 내 얼굴에 고정한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 시선을 버티기 어려웠던 나는 빠르게 차에 올라타서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빤히 바라보았다.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팔이었다.그가 너무 보고 싶었고 또 그의 품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서운했다고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그에게 줬던 상처들이 떠올라 나는 다시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게 됐다.나와 그의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애석한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함승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때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보고를 들었다.“가주님, 그 주치의가 자살했답니다. 자식과 남편만 남겨두고 혼자 자살했대요. 그 이유는 다들 몰라서 실마리가 여기서 끊긴 것 같습니다.”“그럼 고현
“춤출래?”웃는 내 모습을 보던 반경우가 입을 춤을 제안하자 나는 자연스레 그와 처음 췄던 춤을 떠올리게 되었다.그때도 클럽에서 춤을 췄었는데 그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첫 순간이었다.그날에 담배가 어떤 맛인지 알려준다고 반경우가 입으로 나한테 전해줬었는데 그게 어떻게 또 보면 내 첫 키스였을 것이다.하지만 그건 그냥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감정이 섞인 건 절대 아니었다.내가 고민하며 답을 못하자 그는 나를 끌고 무대 위로 올라가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반경우의 리듬에 맞춰 나도 가볍게 몸을 흔들자 그는 나에게로 다가오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자기야, 오늘 너무 섹시한 거 아니야?”“떨어져, 내일 기사에 얼굴 박히고 싶어? 그럼 또 나만 욕먹잖아 꽃뱀이라고.”“그런 말을 뭐하러 신경 써.”내가 정색하며 말하자 반경우가 볼멘소리를 잠시 하던 반경우는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내 허리를 잡아 왔다.“적당히 하라고.”내가 다시 한번 경고를 하자 그제야 나를 놓아준 그는 한 바퀴 돌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춤추는 건데 야박하게 진짜.”삐진 듯한 그를 달래기 위해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춤추는 건 괜찮은데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란 얘기잖아. 나 또 욕먹기 싫어.”“알았어, 네 말대로 하자.”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나를 품 안에 가두는 반경우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나는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그냥 술이나 먹자.”그렇게 한참을 마시다가 내가 거의 취해가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은 담현아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미안해요, 차가 너무 막혀서 좀 걸릴 것 같아요.”“언제 도착해?”“삼십 분은 있어야 도착할 것 같은데요...”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친 나는 소파에 기대에 고개를 젖히고 3층을 바라보았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 반경우를 향해 물었다.“저건 누구야?”“누구?”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던 반경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언제 또 저기까지 간 거야.”“누군데 그래?”“석지훈이잖아.”..
석지훈의 이름을 듣자마자 서둘러 눈을 감는 나를 보며 반경우는 속도 없는 사람이라고 혀를 찼지만 나는 그저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담현우와 담현아가 도착했고 나는 취할까 봐 천천히 마시는 담현우와 또 오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그렇게 한참 마시니 다시 어지러워진 나는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몸을 일으키자 반경우가 걱정스레 물어왔다.“혼자 갈 수 있겠어?”“당연하지.”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나는 한 발 내딛자마자 바로 담현아의 품속으로 고꾸라졌고 반경우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젓더니 나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의식이 없어 반항도 못 하는 나에게 반경우가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석지훈이 안 내려오면 걔는 진짜 남자도 아니야.”“뭐라고?”“내가 지금 일부러 너랑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어지러웠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가만히 그에게 안겨있었다.그런데 반경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는데 그 순간 등 뒤에서 한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저한테 주세요.”“제가 왜 그래야 하죠?”“제가 부축한다고요.”“이제야 좀 안달이 나셨나 봐요.”곧이어 나는 반경우 손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안겨버렸다.그 남자의 품이 더욱 포근해서 나는 자연스레 남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남자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몇 걸음 떼지도 않았을 때 누군가가 남자를 불러왔다.“형, 이대로 가면 어떡해, 위에 분들 형만 기다리고 있는데. 다들 형 국내 세력 약한 틈 타서 형 눌러놓으려고 기회만 보고 있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아예 틈을 보여주는 거잖아.”“이번 입찰은 포기할 거야.”남자의 대답에 다른 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형, 아직도 윤아 사랑해?”윤아가 누군지 남자는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다시 상처받는다 해도 계속 사랑할 거야?”“원태웅.”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지만
...창문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너무 눈 부셨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가리다가 불현듯 스쳐 가는 어젯밤의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어제 술에 취한 나를 반경우가 화장실로 데려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 것 같았다.그게 누구였을까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는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를 떠올렸다.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한 목소리였는데.나는 마침내 그 남자가 석지훈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하지만 통째로 사라져버린 어젯밤의 기억에 나는 혹시라도 그에게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했을까 봐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불안한 마음으로 욕실로 달려간 나는 일단 정신부터 차리기 위해 세수를 했다.세수를 마치고 문을 여니 거실에 앉아있는 석지훈이 보여 나는 1초 만에 다시 문을 닫아버리고는 또 금세 겁을 집어먹은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여 깊은숨을 내쉬며 석지훈 앞으로 다가갔다.다행히도 석지훈은 아직 자고 있었다.한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지탱한 채 자고 있는 석지훈의 자세는 한눈에 봐도 아주 불편해 보였다.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덮어주려 했는데 내가 담요를 놓기도 전에 석지훈이 먼저 내 팔을 잡아 왔다.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석지훈은 상대가 나라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그 모습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암살시도를 겪었기에 이 정도로 경계심이 강해졌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석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났어?”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저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석지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어제 술 많이 마셔서 속 울렁거리지 않아? 해장국 끓여줄게.”우리가 연인일 때나 하던 말을 내뱉는 석지훈에 나는 어젯밤 내가 실수한 건가 싶어 다시 불안해졌다.혹시 내가 이상한 말들을 해서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줄로 오해하는 걸까 봐 나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어제 내가 혹시 무슨 짓 했어요?”“묻고 싶은 게
하지만 곧이어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에 나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나는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그의 품에 안겨버렸고 석지훈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나를 가만히 받아주고 있었다.석지훈이 자세를 유지한 채 오피스텔로 나를 데려온 것까지 다 기억 난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했다.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재회가 이런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건데.정말 술은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원래도 그를 보면 요동쳤던 멘탈이 이젠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 나는 절망적인 얼굴로 천천히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창문을 마주 향한 채 서서 통화를 하는 석지훈에 나는 조용히 집을 나가려고 했는데 인기척을 어떻게 느낀 건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돌아선 그가 살짝 언짢은 듯한 말투로 나를 보며 물었다.“어디가?”차가운 그 표정에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이 몰려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현아 만나러요.”“담현아 씨 운성으로 돌아갔어 이미.”“그럼 운성 가서 만나면 돼요.”내 말이 끝나자 석지훈은 한숨과 함께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언제까지 나 피할 거야?”내가 고개를 떨군 채 침묵을 유지하자 석지훈은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났다.“운성에 비오니까 옷부터 갈아입고 가.”그제야 나는 여지껏 입고 있었던 검은색 나시를 떠올렸다.성향이 꽤 보수적인 편이라 내가 노출 있는 옷을 입는 걸 싫어하는 석지훈이었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 하고 싶었던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서려 했다.하지만 이내 석지훈에게 팔이 잡혀서는 다시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차가운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는 석지훈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그러자 석지훈이 낮지만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왔다.“우리 윤아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안 들었지? 응?”마지막으로 내뱉은 ‘응’자에 심장이 떨려온 나는 빨개진 얼굴로 손을 빼내려 애쓰며 소리쳤다.“이거 놔요!”석지훈은 당연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
내가 이렇게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석지훈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석지훈은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 없어. 그 두 아이... 우리가 부모가 될 인연이 없었던 것뿐이야. 게다가 넌 아직 젊잖아. 요즘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나중에 네가 아이를 원하면 시험관이라도 하면 되지. 아니면 네가 원치 않으면 안 가져도 돼.”나는 원래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석지훈의 말에 억눌러왔던 울음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석지훈의 품에 파묻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최근 느꼈던 억울함과 우울함 그리고 답답함이 이 순간 모두 눈물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나는 진심으로 석지훈에게 감사했다.석지훈이 나를 아무런 원망도 없이 받아주는 것에 감사했고 다시 내 곁에 다가와 준 것에 고마웠다.“윤아야, 내게는 네가 가장 소중해. 나머지는 모두 사소한 거야. 난 과거를 따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질 마음도 그럴 시간도 없어. 내가 예전에 한 말을 잊은 거야?”석지훈은 예전에 오해는 그가 나를 밀어낼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했었다. 이 말을 나는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핀란드에 세 번이나 갔는데도 석지훈을 만나지 못해 상처를 받았다.나는 울면서 물었다.“그럼 날 왜 만나주지 않은 거예요?”석지훈의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나약해졌고 기꺼이 단단한 껍질을 내려놓은 채 석지훈에게 의지하고 싶었다.이런 감정은 과거 고현성과 함께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평생을 의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석지훈은 왜 나를 만나주지 않았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침묵을 지키며 방금 했던 말을 끝으로 다시 예전에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갔다.나는 약간 화가 나 고개를 들어 석지훈의 이름을 불렀다.“석지훈.”석지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쪼그마한 게, 버릇없이.”예전에 내가 석지훈의 이름을
“됐어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현정우는 명령을 들은 뒤 나와 함께 우성으로 향했다.차가 고속도로에 막 진입했을 때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도심으로 갈수록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운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축축하고 추웠지만 이 도시에는 나의 많은 추억이 담겨 있었다.나는 이 도시에서 자랐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이 도시를 깊이 사랑하셨다.왜냐하면 나의 친어머니로 알려진 그분과 아버지가 바로 이곳에서 만나셨기 때문이다.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아마 친어머니를 매우 사랑하셨던 것 같다.하지만 왜 두 분이 함께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문득 운산이 생각났다.석만호는 운산이 내 아버지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었다.아마도 그것이 나의 친어머니와 관련된 것 아닐까 싶었다.나는 조수석에 앉아 현정우에게 말했다.“운성에서 떠나기 전에 운산에 꼭 가야 하니까 내가 까먹으면 알려줘요.”“알겠습니다, 가주님.”우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니 마침 엄마가 요리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너무 놀라셨다. 엄마는 얼른 내 손을 잡고 앉게 하더니 다정하게 말씀하셨다.“많이 힘들었지?”엄마의 말 속 의미를 알기에 나는 이 슬픈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엄마, 무슨 요리하는 거예요? 냄새가 너무 좋은데요?”“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네가 집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 그래서 네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치킨 커리하고 가리비 그리고 호주산 랍스타를 만들었는데 내 예감이 맞았네.”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미 만들어진 치킨 커리를 보고 나는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우리 엄마가 나를 제일 잘 알아.”“가서 네 아빠랑 얘기 좀 나누고 와. 음식이 다 되면 부를게. 맞다. 수아야, 오렌지 주스 마실래 아니면 망고 주스 마실래?”“달콤하게 오렌지 주스요.”엄마는 웃으며 말했다.“너 참 안 변했구나.”맞다.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
내가 말하길 꺼리는 듯 하자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와 석지훈이 가능성이 없다면 엄마도 굳이 너에게 현성이을 찾으러 가라고 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친구 아들의 연락처를 한번 알아봐 줄게.”“엄마, 저보고 맞선을 보라는 거예요?”내가 운성에 오기 전에 무심코 던진 말이 딱 들어맞았다.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씀하셨다.“너 혼자 그렇게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걸 보면 엄마는 너무 마음이 아파. 얼마 전에 네 아빠랑 얘기해 봤는데 네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이 너랑 집안 배경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사실 세상에 석씨 가문에 걸맞은 가문은 거의 없을 테니까.”“엄마는 그저 그 사람이 널 아끼고 사랑해 주면 돼. 네게 따듯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엄마는 더 이상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아이가 떠났을 때 수아,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엄마 마음도 너무 아팠지만 널 도울 수도 없었고 곁에서 지켜줄 수도 없었어.”엄마는 말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나는 얼른 손을 뻗어 엄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지훈 오빠하고 잘 지내고 있어요. 어쩌면 곧 결혼 얘기도 나올지 몰라요.”사실 지금 나와 석지훈은 결혼 얘기를 꺼낼 단계가 아니었지만 그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뿐이었다.엄마는 나의 말에 금세 기운을 차리시며 물었다.“정말이지?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정말이에요. 조만간 지훈 오빠와 상의해 볼게요.”옆에 있던 아빠가 거들며 말했다.“수아야, 언제 한번 데려와 봐. 그 사람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래도 내 딸의 남편을 고르는 데 아빠한테도 기준이 있단다.”나는 웃으며 말했다.“두 분은 왜 이렇게 성급하세요?”나는 서둘러 부엌을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옆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현정우를 보고 나는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현정우는 황급히 핸드폰을 치우며 말했다.“아무것도 아
운성에서 가장 좋고 비싼 별장 단지는 도시 외곽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어 너무나 조용했다.그리고 산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운성에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것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나는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고현성이 나를 데리고 하룻밤 묵었었다.현정우가 차를 몰고 한 별장을 지나갈 때 나는 현관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노란 고양이를 보았다. 짧은 털이 모두 젖어서 몹시 불쌍해 보였다.별장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누군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설마 고현성도 여기에 있는 건가?나는 함승윤에게 지시했다.“저 집의 상황을 알아봐 줘요.”함승윤은 전화를 걸어 주소와 호수를 알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게 말했다.“가주님, 저 집은 고현성의 소유이고 지금 유근수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유근수라고?”함승윤이 자세하게 설명했다.“네, 얼마 전 가주님 지시대로 유서정을... 그녀가 결국 미쳐버리면서 유씨 가문은 완전히 무너졌고 고씨 가문에 흡수합병됐습니다. 사실상 고현성 손에 넘어간 셈이죠. 고현성은 이 저택을 유근수 부부에게 넘겨줬고 그들은 유씨 가문의 몇몇 어린 후배들과 함께 여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서당에 남아있지만 유서정은 현재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얼마 전 반경우 누나의 약혼식에서 유서정을 만났는데 그녀는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나랑 싸우려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해서 유서정을 처리하라고 했다.그 후로 나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혔다니.이것도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나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손바닥으로 배를 쓰다듬었다.이곳은 이미 흉터가 생겨 더 이상 처음처럼 피투성이가 아니었다.그리고 그 칼은 정말 정확하게 바로 도라지 꽃 위에 꽂혔었다.곧 함승윤이 나를 위해 마련한 저택에 도착했다. 고현성의 저택 바로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여기에서는 고현성의 정원에서 일어
나는 계속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머릿속에서는 주마등처럼 인생 전체가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의식 속에 나타난 것은 부모님이었고 다음은 연시혁과 오혜원, 그리고 내 인생의 첫 번째 빛인 고정재였다. 그 뒤를 이어 나의 비참했던 결혼생활과 고현성, 마지막으로 내 삶에 나타난 것은 석지훈이었다.나는 살면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석지훈 덕분에 나는 소중히 여겨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그는 나를 과거의 수렁에서 끌어내어 확고부동한 사랑을 주었고 내게 신념을 주었다.아니, 그 자체가 나의 신념이 되었다.나는 그를 사랑했다. 마치 신념을 사랑하듯이.신념이란 무엇인가?바로 평생 유일하게 따르며 절대 모독할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석지훈의 칼날과 차가운 말들은 내 신념을 무너뜨렸다.결국 그의 어머니는 그를 파멸로 끌어내린 마지막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그가 전에 이 일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장담했음에도 말이다.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러웠고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다.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어머니, 의사 말로는 수아가 스스로 깨어나려 하지 않는다고 해요. 지금 석씨 가문 사람들이 그들의 가주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어요.”온화한 목소리가 결정하듯 말했다.“수아를 그들에게 보내. 어쨌든 이 아이는 그들의 가주이니 계속 여기에 있으면 성이 조용하지 않을 거야. 그건 수아의 병세에 좋지 않아!”나는 누군가에게 옮겨지는 것 같았지만 눈을 떠서 상황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머릿속에 7~8개월 된 아기 둘이 기어 들어왔다. 그들은 그 남자와 많이 닮았다. 나는 무서워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그들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석지훈의 모습으로 변했다.“함 집사님, 가주의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정합니다.”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악몽을 꾸는 건가? 어서 의사를 불러.”나는 내 심장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쿵쿵, 마치 귓가에서
최욱현이었다.‘그가 어떻게 내 곁에 오게 된 걸까?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그인 걸까? 왜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 사람이 아닌 거야? 아니,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나는 석지훈이 미웠다. 나에게 이토록 무심한 그가 싫었다.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찢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기지의 높은 단상 위, 석지훈의 시선은 눈밭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뜬 채 눈송이가 눈 속으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고 눈은 점차 그녀의 눈빛을 덮어갔다.그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했던 말만 맴돌았다.“나 곧 죽을 것 같아요!”그는... 그녀가 죽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고 그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는 자신이 이런 행동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주변에 언제든 발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기관총들을 보면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눈밭에 누워있는 저 여자는 기관총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그는 확신했다. 자신에게 적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법을 가르쳤던 그 남자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리라는 것을 말이다.그가 계속 그곳에 서 있자 크리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놀리듯 말했다.“생각도 못 했지? 떠난 후로 다시는 안 온다더니 어젯밤에 내게 붙잡혀 죄수 신세가 될 줄은.”몇 년 동안 크리스는 계속해서 석지훈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번번이 당하기만 했다.어젯밤, 그는 석지훈이 귀국하면서 주변에 사람을 많이 데리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용하여 중간에 그의 헬리콥터를 가로막았다.사실 석지훈은 연수아를 핀란드로 데려오기 위해 직접 금운시로 갔던 것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기쁨으로 시작했던 일은 상처를 주는 재앙이 돼버렸다.다 그의 탓이었다. 어젯밤은 너무 방심했다.지금 그는 이곳에 혼자였으니 상관없었고 두렵지도 않았다.다만 크리스가 자신의 별장에서 연수아를 기다렸다가 잡아 올 줄은 정말 생각 밖이었다.그리고 송 어르신도
감옥 안은 너무 어두워 눈앞의 남자 얼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 어둠 속에서 내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고 마음은 쓸쓸하고 절망적인 슬픔에 잠겼다.“그래, 인연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야.”이별을 고하는 순간에도 석지훈은 참 시적이었다.‘그는 왜 갑자기 나와 헤어지려 하는 걸까? 한때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아픔 하나 주지 않았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복부의 상처를 감싼 손을 풀고 그의 소매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낯선 사람처럼, 조금의 연민도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복부의 상처에서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으며 물었다.“오빠,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이건 꿈이 틀림없어요. 꿈에서 깨면 다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오빠로 돌아올 거죠! 응, 꿈이야. 이런 악몽은 꿈일 수밖에 없어!”“꿈이라면 이렇게 아프겠어?”남자는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복부의 깊은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목숨을 앗아갈 듯 깊은 상처였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나는 헛된 희망을 품고 물었다.“오빠, 뭐 힘든 일 있어요?”그때 크리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얘 구역에서 누가 감히 위협할 수 있겠어?”‘그래. 여기는 석지훈의 구역이었지. 그가 멈추라면 멈춰야 하는 곳인데 그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차갑게 대답했다.“없어.”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과 체념으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내 인생은 어째서 한 번도 순탄치 않았을까?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항상 나에게 상처만 줄까?어렵게 용기를 내어 누군가를 다시 믿으려 할 때마다 왜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걸까?그것도 내가 가장 신뢰했던 석지훈에게서 배신당하다니.그는 내 생애 나를 가장 아껴줄 거라 믿었던 사람이었는데.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리며 침묵했다. 석지훈은 허리를 굽혀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몸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깼어?”이 목소리는...크리스였다.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지훈 씨는 어디 있어?”“아직도 걔를 걱정해?”“지훈 씨는 어디 있냐고? 난 지훈 씨를 만나야겠어.”나는 계속 석지훈을 찾았고 그는 의아한 듯 내게 말했다.“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는데 아직도 그를 걱정해?”나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무슨 말이야?”“지훈이가 방금 너를 칼로 찔렀다고!”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믿을 수 없었지만 복부의 통증은 너무나도 확실했다.크리스는 나를 감방 밖으로 끌어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석지훈과 주름투성이 얼굴의 외국인 노인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크리스가 소개했다.“저분은 송 어르신이야.”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군데?”크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송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저 아시아 여자와 무슨 관계냐?”석지훈이 답했다.“아무 관계도 아닙니다.”“크리스는 네 여자라고 하던데.”석지훈이 대답했다.“한낱 여자일 뿐입니다.”그의 말투는 가볍고 무심했다.송 어르신이 담담하게 물었다.“저 여자를 사랑해?”“그런 적 없습니다.”이것은 석지훈의 익숙한 말투였다.그런 적 없다...석지훈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예전에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했었지만 나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내가 그저 혼자 착각했던 것일까?“그렇다면 내다 버려라.”크리스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왜 울어?”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나는 그에게 물었다.“송 어르신은 누구지?”“왜? 지훈이가 그에게 협박당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믿지 못하겠다면, 곧 지훈이가 올 테니 직접 물어봐.”크리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덧붙였다.“벌써 왔네.”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마치 무협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나에게 쫄쫄이를 입히고 머리를 땋아 올리고는 검은 마스크까지 씌웠다.그러고는 시간이 급했는지 내 팔을 끌고 차로 달려가 나를 안에 밀어 넣고는 자신도 따라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본부로 돌아가.”그가 분부했다.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렸고 나는 그들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석씨 가문 사람들이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밤이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석지훈을 보았다.나는 2층에, 그는 1층에 있었다.1층은 경기장이었다.그는 마치 악마처럼 사람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었다.수십 명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면서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마치 자신의 안방인 양 상대하고 있었다.나는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이 메스꺼워졌고 석지훈의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그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 마음은 찢어질 것같이 아플 것이었다.크리스는 의자에 앉아 나에게 말했다.“여기는 나와 지훈이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지.”나는 숨을 죽이고 물었다.“벗어날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무슨 말인지 모르겠어?”그는 흘끗 나를 보며 말했다.“벗어날 수 없다는 건 평생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이야! 나든 지훈이든 마찬가지지!”석지훈처럼 강하고 화려한 사람에게도 이런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인가?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럼 그는 여기에 자발적으로 있는 거야, 아니면...”“당연히 자발적이지. 여기는 그의 것이니까.”여기가 석지훈의 것이라니...그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지훈이는 널 사랑해?”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우리 테스트 한번 해볼까?”나는 차갑게 물었다.“무슨 테스트?”그가 옆 사람을 보고 말했다.“밀어.”그의 부하가 물었다.“입을 막을까요?”크리스가 웃으며 말했다.“막아.”그들은 나를 경기장 안
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 나는 한민수와 원태웅에게도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다.마음속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몇 시간 후 헬리콥터는 에르크에 착륙했다. 별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현정우는 위험을 감지하고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고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나를 둘러싸고 보호하라고 지시했다.이때 별장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우리는 폭풍에 휩쓸렸고 나는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이때 현정우가 재빨리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일으켜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살아남은 경호원들은 우리를 엄호하며 남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하나둘씩 눈앞에서 쓰러져 갔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속이 뒤틀렸다. 이토록 잔혹한 광경은 처음이었다.현정우에게 끌려 한참을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멈추자 구토가 치밀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숲으로 끌어당겨 숨겼다. 핀란드의 눈 때문에 숲에는 눈이 깊이 쌓여 있었고 우리는 눈 속에 완전히 묻혔다. 멀리서 기관총을 든 서양인들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현정우는 갑자기 일어서서 그들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은 현정우를 쫓아갔다. 나는 눈 속에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숨이 막힐 즈음에야 눈밭에서 기어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는 순간, 짙은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는 마치 뱀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마치 내가 그의 사냥감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누구야?”“누구? 네 남자의 형제랄까?”그는 외국인이었지만 우리나라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나는 마음속의 공포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지훈과 무슨 관계지? 왜 나를 죽이려는 거야?!”예전에는 석지훈이 나를 구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로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마음속 공포가 점점 강해지는 가
석지훈의 어머니는 두 번이나 내가 그녀와 닮았다고 했다. 그녀의 전체 얼굴을 마주하자 나는 마치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몇십 년 후면 나도 그녀와 똑같아질 것이다.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최욱현은 눈치껏 자리를 뜨며 말했다.“어머니, 약속대로 수아를 데려왔습니다! 두 분 먼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최욱현이 자리를 뜨자 내 곁에는 현정우 몇몇만 남았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이 사람들 일단 물리렴.”나는 현정우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나에게서 10미터 정도 떨어졌다.그들이 멀어지자 앞에 앉은 귀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너를 만나는구나.”‘그렇다면 나에게 신장을 기증했을 때도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나는 네가 보고 싶었고 내가 직접 키우고 싶었어. 하지만 네 아빠를 생각하면... 그는 나를 속이고 내 사랑을 짓밟았어. 난 그를 증오해. 그래서 네가 곁에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 미안하구나.”그녀는 내 아버지를 증오한다고 말할 때도, 나를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도 매우 차분했다. 아주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었다.나는 입을 열었다“괜찮아요.”“수아야, 너는 나를 만나도 차분하구나.”나는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그 말을 듣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너는 나와 많이 닮았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이었다.“욱현이에게 널 데려오라 한 건, 운성에 있는 내 재산과 F 국에 있는 것을 모두 너에게 주려고 그랬어.”나는 웃으며 물었다.“그렇게나 후하세요?”그녀는 말했다.“너는 내 유일한 딸이니까.”“욱현이도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던데요.”내가 갑자기 최욱현을 언급하자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욱현이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내가 키웠어. 날 어머니라 부르는 건 그냥 친근함의 표시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