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제 겨우 그의 여자가 되어 이런 자격이 생겼다.“재밌어?”내가 다쳐서인지 석지훈은 유달리 나를 배려했고 내가 물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리 분위기는 점점 더 미묘해졌고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나는 그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나의 변화를 눈치챈 듯 그는 고개를 떨구어 내 볼에 키스하며 내 입에서 그의 손가락을 뽑은 후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좀 자. 이따가 저녁에 의사가 약 바꿔주러 올 거야.”“오빠.”내가 억울한 듯 애교를 부리가 그는 부드럽게 타일렀다.“말 들어.”나는 여전히 억울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불렀다.“석지훈...”“버릇없이...”석지훈은 버릇없다고 꾸짖으려다가 우리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생각났는지 말을 삼켰다.“착하지, 말들어.”나는 울적해서 눈을 감았다. 아마 상처를 입어 정신적으로 피곤한 탓인지 나는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싱긋한 향기가 항상 콧구멍에서 감돌자 나는 그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대표님.”석지훈은 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깊이 잠들지 못한 나는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눈 뜨기 싫어 잠자코 누워있었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나는 그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다.“연수아 씨의 CT 검사 결과가 방금 나왔어요. 이번 교통사고로 인해 연수아 씨는 척추를 심하게 다쳐 당분간 회복할 수 없어요.”석지훈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어떤 영향이 있어요?”그 사람은 한결 긴장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수아 씨의 건강에는 큰 영향이 없으나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몸도 허약해 보일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면 중추신경을 심하게 압박할 수 있어 위험해요.”‘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나는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 뜨지 못했고 그저 석지훈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었다.“알았어요. 내일 약 바꿔주러 오세요.”“네. 대표님.”밖은 다시 조용해졌고
“아니, 내일 약 바꾸러 올 거야.”나는 의문스러워 물었다.“저녁에 온다면서요?”“비가 너무 커서 올 수 없다고 했어.”그의 담담한 말투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악몽을 꿨어요.”석지훈이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다.“무슨 악몽?”“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제가 임신해도 낳을 수 없다고 했어요.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나는 아직도 두려운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한의사가 약을 꾸준히 먹으면 엄마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어요.”신석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대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는 송이연이 부러워요. 비록 목숨을 걸고 조산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부러워요. 저는 엄마가 되고 싶고 오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아까 그 악몽은 너무 무서웠어요.”석지훈은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헛생각하지 마.”나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정말 무서웠다고요.”그는 화제를 돌렸다.“알았어. 배 안 고파?”계속 나에게 배고픈지 묻는 그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제가 잠에서 깨면 먹을 것을 찾는 사람인가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그런 줄 알았어.”나는 말문이 막혔다.석지훈은 일어나서 그 검은색 롱코트를 입었지만 마비가 되어 침대에 누운 채로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된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울해졌다.나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던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나가서 놀고 싶어?”“네. 누워만 있었더니 퇴폐해졌어요.”이 말을 들은 석지훈은 문을 나서더니 얼마 안 되어 자동 휠체어를 끌고 들어왔다. 나는 기뻐서 물었다.“어디서 가져왔어요?”“윤 비서가 아침에 가져왔어.”나는 옷을 입지 않아 석지훈은 옷장에서 그의 옷을 꺼내 입혀줬다. 흰색 스웨터였다.그는 키가 크기 때문에 그의 옷은 내게 헐렁했다.석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너무 말랐어.”나는 입을 삐죽거렸다.“여자들은 뚱뚱한 것을 싫어해요.”석지훈은 대꾸하지 않고 나를 휠체
나는 마음속으로 기쁨을 숨기며 말했다.“네.”그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현재의 삶을 포기하게 하면 넌 분명히 그럴 수 없을 거야. 윤아야, 언젠가 너의 인생이 환하게 빛날 날이 올 거야. 내가 반드시 너를 평생 지켜줄게.”사실 석지훈은 내가 그의 곁에서 세상일에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 능력이 있었지만, 석지훈은 나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그에게는 그의 사명이 있었다. 예를 들면, 석씨 가문을 지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나의 사명이 있었다. 이를테면, 연씨 가문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었다.우리는 각자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나는 손을 뻗어 석지훈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고마워요. 오빠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안정감을 줘요. 지훈 오빠, 앞으로도 날 배신하지 말아요.”석지훈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응.”“만약 오빠가 날 배신하면 난 평생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빗소리가 점점 잦아들 무렵 석지훈은 차가운 말투로 내게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만약 네가 날 배신하면?”나는 멈칫하며 대답했다.“그럼 오빠도 평생 날 용서하지 마요.”“연수아, 지금 네가 한 말 기억할게.”석지훈이 나를 연수아라고 부른 것은 내 말을 약속으로 여기겠다는 뜻이었다.석지훈은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네. 나도 기억할게요.”그날 저녁은 석지훈이 매우 담백한 음식들로 준비해 줬다. 식사를 끝낸 뒤 우리는 침대에 누워 함께 책을 봤다.석지훈은 「고독」을 읽고 있었는데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독은 거대한 정신적 힘을 숨기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너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책의 내용은 하나같이 가슴을 파고들었다.한 페이지를 읽고 있는데 석지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서 온 문자였다.문자 내용은 이랬다.[어디에 있어?]석지훈은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동성에 없어요.]석지훈이 핸드폰을
석지훈의 어머니가 한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내 신분이 불확실해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그런 지금 이미연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녀가 나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해 마음이 초조해졌다.진실이 알고 싶어 석지훈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머리를 기울였을 때, 전화기 너머로 이미연은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숨을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고현성의 전처야. 그런 몸으로 어떻게 내 아들이랑 어울릴 수 있겠어?”이미연이 말하려는 게, 내가 고현성의 전처라는 사실이었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미연의 우아한 목소리를 들었다.“지훈아, 내가 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네 엄마야. 적어도 며느리에 대한 요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니? 네가 그 여자와 잤을 때 그 여자가 피를 흘리기라도 했니? 그 여자는 그렇게 순수하지 않아. 그런데도 감히 내 아들을 넘보다니. 너 설마 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 건 아니지? 지훈아, 넌 결벽증이 누구보다 심하잖아.”이미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찔렀다. 나는 순간 마음속에서 열등감이 한없이 커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석지훈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석지훈은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자 따스한 위로가 전해졌다.그 순간 내 마음속의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졌고 방금 생겨난 열등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석지훈은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전화 너머의 이미연에게 말했다.“어머니,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날 친아들처럼 여기는 게 습관이 되셨나 봐요?”‘석지훈의 말은 무슨 뜻일까? 설마 석지훈이 석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일까?’전화기 너머에서 이미연이 놀라며 말했다.“너 그걸 알고 있었구나.”석지훈은 이미연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그쪽하고 그 여자가 벌인 게임 따위에 나는
그 문자를 보니 나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연시혁이 언제 이렇게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지?’하지만 이번엔 분명히 연시혁이 잘못한 일이었다.나는 송이연이 아니기에 연시혁을 대신 용서할 수도 없었지만 연시혁은 나의 가족이기에 나는 두 사람이 잘되길 바랐다.내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연시혁에서 다시 메시가 도착했다.[내가 지금 너한테 말한 건 네가 날 좀 도와주길 바라서요.]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미안해, 시혁아. 이연 씨의 행방은 나도 몰라. 이연 씨도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지만 이연 씨는 송씨 가문의 대표야. 너를 만나지 않을 방법은 이연 씨에게 얼마든지 있어.]연시혁은 짧게 답장을 보내왔다.[나도 알아.]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연시혁에게 물었다.[아이들은?][이연이가 데려갔어.]나는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몰라 핸드폰을 내려놓았지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이때 석지훈이 몸을 돌려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응? 잠이 안 와?”석지훈의 목소리는 막 잠에서 깬 듯 살짝 거칠었다.“그냥 별로 졸리지 않아요.”나는 대답한 뒤 살짝 몸을 돌려 석지훈의 목을 끌어안았다.그러자 석지훈은 나의 머리를 다독이며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나를 달랬다.“좀 더 자. 내일은 우리 동성으로 돌아가야 해.”나는 조금 실망하며 말했다.“며칠 더 있다가 가는 거 아니었어?”내 말을 들은 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들었어?”석지훈이 묻는 건 아침에 그와 비서가 나눴던 대화를 내가 들었냐는 것이었다.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조금 들었어요.”석지훈은 손바닥으로 나의 귀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남은 시간이 몇 달도 안 될 거야. 내가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라 곁에 있어야 해.”유일한 아들이라는 단어가 석지훈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석씨 가문의 이번 대에는 자식이 오빠 혼자인 거예요?”윤승민의 말로는 석지훈에게 세
“전부 석씨 가문 묘지에 있어.”“전부 돌아가셨어요?”“응.”“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자살했어.”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은 이미 곁에 없었다. 손을 뻗어 창문을 열어 보니 윤승민이 정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지훈 오빠는 어디 갔어요?”내가 찡그리며 묻자 윤승민은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석씨 가문의 사립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아가씨를 동성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어요.”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윤승민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아가씨, 기분이 안 좋으세요?”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사실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석지훈이 곁에 없으니 마음이 허전했다.윤승민은 나를 아파트로 데려다주었고 나는 집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와서 약을 바꿔주었다.다리의 상처는 내가 직접 확인해서 사실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문제는 등 쪽의 상처였다.등에 큰 압력을 받아 자주 통증이 찾아왔다.의사가 떠난 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스스로 한약을 끌여 마시고 나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언제 집에 와요?]석지훈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이번 달 말쯤.]이제 겨우 월초였다.석지훈은 혹시라도 내가 복잡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곧바로 메시지 하나를 더 보내왔다.[며칠 뒤 비아드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비아드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한민영이 떠올랐다.한씨 가문은 석지훈과 특별한 관계였다. 한민영이 석지훈을 화나게 했음에도 석지훈은 한민영을 용서한 적이 있었다. 석지훈 같은 남자는 좀처럼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비록 석지훈이 한민영에게 한 차례 교훈을 주었지만 한민영이 나를 해친 일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에 나는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나는 더 이상 석지훈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 뒤로 한 달 동안 석지훈은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꺼져 있었다
“어제 막 동성에 돌아왔어요.”담현아의 말에 나는 예의상 물었다.“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언니가 롤스로이스 최신 모델을 가지고 있다면서요?”담현아의 목적은 아주 명확했다.“회사에 세워뒀으니까 네가 와서 가져가.”나는 이런 것에 대해 별로 인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타이밍이 딱 좋게도 내가 퇴근하려던 참에 담현아가 도착했다.차 키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니 담현아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언니, 내가 선물을 갖고 왔어요.”담현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나에게 천 가방 하나를 건넸다.가방을 열어보니 안에는 치즈 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담현아는 웃으며 설명했다.“베스니의 특산품이에요. 언니한테만 주는 거니까 싫어하지 마요. 내가 너무 가난해서 비싼 걸 살 수 없었어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담씨 가문의 딸인데 어떻게 가난할 수 있어? 근데 너 아직 운전면허도 못 땄지?”담현아는 아직 만 18세도 되지 않았으니 내가 괜히 물은 것이었다.“몰래 몰고 다니려고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담현아의 대담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차 키를 건넸다. 그녀는 차 키를 건네받고서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그 모습을 보니 담현아가 이전의 냉랭함과는 달리 요즘 유난히 친절한 것 같았다.혹시 차를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미안해서 이러는 걸까?담현아가 차 키를 가지고 떠나자 마침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저녁에 갑작스럽게 파티가 잡혔습니다.]나는 메시지로 물었다.[무슨 파티요?][담현우의 생일 파티입니다.]연씨 가문은 최근 담씨 가문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더구나 반경우가 소개해 준 친구였기에 이번 파티는 반드시 참가해야 했다. 역시 담현아가 오늘 동성으로 돌아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나는 비서에게 물었다.[장소는 어디죠?][크루즈 위입니다.]비서는 나를 데리러 내려왔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정교한 메이크업을 받고 비서와 함께
고정재는 나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눈에는 짙은 소유욕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크루즈 난간에 서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웃었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 비서를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눈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그중 한 명이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연 대표님, 고 대표님께서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거절한다면요?”경호원은 차갑게 말했다.“연 대표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실 겁니다.”그 모습을 보니 나를 강제로 크루즈에 태울 것 같았지만 나는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고현성이나 고정재와 어떤 접점도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나는 더 이상 그들과 엮여 스캔들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가 그들에게 가벼운 경고를 날렸다.“저쪽에 우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아서 물러나세요.”그러나 경호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비서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상황을 지켜보다 결국 고개를 돌려 고현성에게 말했다.“날 보내줘.”나와 고현성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기에 그는 나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그런데도 고현성은 손짓으로 경호원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나는 비서와 함께 바닷가를 떠나 차에 오르려는 순간 크루즈에서 피아노곡 [바람이 머무는 거리]가 들려왔다.나는 멈춰 서서 비서에게 물었다.“고정재가 연주하는 건가요?”고현성이 있는 자리라면 고정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그 형제는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법은 없었지만 담현우가 분명 고정재를 초대했다고 했다.비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고정재 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나는 고정재의 연주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다른 사람과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이 곡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기술이며 감정 모두 고정재의 연주와 똑같았기에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고정재가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