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웅은 석지훈을 상대할 때는 뻔뻔하게 그의 냉정한 거절도 두려워하지 말고 적당히 먼저 다가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이 방법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오직 나만이 석지훈의 관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때 나는 의아해하며 원태웅에게 물었다.“왜 하필 나예요?”원태웅은 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내가 설명까지 해줘야 해? 네가 석지훈을 알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석지훈이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거야?”나는 원태웅의 뜻을 이해했지만 석지훈이 나의 옆에 앉아 있으면 나도 마음속으로 여전히 두려웠다.석지훈이라는 사람을 나도 항상 긴장하며 상대했다. 석지훈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동시에 석지훈이 무서웠다. 이렇게 그의 차가운 꾸짖음에 나는 결국 그의 손을 놓고 얌전히 앉았다.차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담현우에게 담현아의 카톡을 달라고 해 추가했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담현아에게 흥미가 있었다.담현아는 정말 대단했다. 모든 일에 능숙했고 침착하면서도 노련했다.어린 소녀에게 침착하고 노련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며 상대를 제압하는 성격이 정말 매력적이었다.나는 그런 높은 지능과 담현아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좋았다.마치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담현아는 나의 추가 요청을 수락하자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 언니?]담현아는 거리낌 없이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어. 나 연수아야.][왜 추가했어요?”[너 언제 성인 돼?][내년 9월이요.]담현아의 대답은 굉장히 간결했다.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그럼 이제 막 17살이구나. 경찰 시험 보려면 아직 1년 남았네.]담현아는 전에 경찰이 되고 싶다며 말한 적이 있었다.담현아에게서 답장이 왔다.[상관없어요. 지금 박사 과정 밟고 있어요. 시간 날 때 반도체 칩 같은 것도 연구하고 있고요.]나는
담씨 가문에서는 담현아를 아주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다.적어도 세상 사람들에게 담현아의 존재는 노출되지 않았다.나도 최근에서야 담현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나는 마음속으로 감탄했지만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신의 은총을 받고 태어난 것이다. 게다가 담씨 가문 같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니 담현아의 성장과 발전에 매우 유리했을 테다.나는 담현아에게 장미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난 정말 너를 존경해. 완전히 감탄했어. 아, 그리고 내 스포츠카는 당분간 너에게 맡길게. 질릴 때가 되면 돌려줘. 네가 원하는 대로 경찰이 된다면 최신형 슈퍼카 한 대 선물로 줄게.]담현아는 단 한 글자만 보냈다.[네.]‘아휴, 정말 짧네.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다니.’차는 거의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반경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우리 자기 집에 도착했어?”‘자기라니.’나는 반경우의 장난기 많은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문제는 지금 내 옆에 석지훈이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나는 석지훈이 오해하는 걸 원치 않았다.더욱이 석지훈이 나와 다른 남자 사이의 이런 친밀한 대화를 듣고 나에게서 더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원태웅의 말에 의하면 석지훈은 자신에게 충실하고 스캔들이 없는 여자를 원한다고 했다.하지만 나는 온갖 스캔들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나와 얽힌 남자만 해도 셋 넷은 된다.나는 문득 한때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던 연수아의 남자들이라는 글이 떠올랐다.남자들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쿡 찔렀다.나는 화를 내며 반경우에게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왜? 내가 널 자기라고 부르면 안 돼? 우리 서로 사랑했을 때는 거절하지 않았잖아. 지금은 석지훈이 생겼다고 나를 멀리하는 거야? 이거 완전 배은망덕하네.”반경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목소리로 내게 따졌다. 이때 차가 아파트 앞에 도착했고 차가 멈추자마자 석지훈은 문을 열고 내렸다.마치 더 이상 나의 통
석지훈은 마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지만 냉담하게 물었다.“어제 내가 한 말 잊었어?”나는 대답했다.“기억해요.”이 순간 석지훈은 너무 차가웠다. 아마도 석지훈은 나를 구하려고 경찰서에 온 걸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석지훈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오빠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리고 나도 내가 오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요.”내가 말을 더 하려던 찰나 석지훈은 차갑게 내 말을 끊으며 아주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내가 물을게. 만약 고현성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해도 네가 지금 나에게 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석지훈은 고현성이 살아 있다는 가정을 했지만 이런 가정을 누가 생각할까?나는 어떻게 석지훈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지 몰랐지만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말했을 거예요.”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석지훈이었고 고현성은 이미 나의 과거였다.내 대답을 들은 석지훈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석지훈이 미소를 짓는 것을 처음 봤다.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내가 멍하니 석지훈의 손바닥을 쓰다듬고 있을 때 석지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너는 여전히 옛 감정 때문에 방황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명확해.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뜻에 따를 수 없어.”“오빠, 그럼 왜 나에게 그렇게.”석지훈은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내 말을 끊고 무심하게 말했다.“왜 내가 너에게 친절하게 대했는지 묻는 건 너무 유치한 질문이야. 수아야,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하기 전에 먼저 네가 뭘 원하는지 분명히 해. 고현성인지 아니면 난지.”석지훈은 계속 고현성을 언급하며 이상한 가정을 했다.나는 석지훈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고현성 얘기는 그만해요. 나도 딱 하나만 물을게요. 오빠는 날 좋아하긴 해요?”“어제 대답했잖아.”석지훈은 내가 쥐고 있는
그러나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그건 바로 석지훈이 나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석지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고현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석지훈은 내가 그에게 어떤 환상을 품고 있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석지훈은 내가 고현성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결국 고현성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나는 어떻게 고현성을 대해야 할까?나는 고현성과의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야만 석지훈과의 관계에 작은 가능성이라도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 석지훈과 고현성 사이에서 나는 석지훈을 선택했다.나는 챙김을 받는 걸 좋아했고 사랑받고 보호받는 것이 좋았다.이 모든 것을 오직 석지훈만이 내게 줄 수 있다.고현성과 나는 결국 과거의 인연으로 남을 운명이었다.나는 그때 고현성과의 문제만 잘 해결하면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마침 내가 몸을 돌려 아파트로 들어가려는 순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금운시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어디야?”나는 깜짝 놀랐다.“현성 씨.”“그래, 나야.”고현성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나 아직 살아 있어. 건강히 네 옆으로 돌아왔어. 지금 운전해서 운성에 도착했는데 지금 어디야?”나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기쁨과 당혹감이 교차했지만 고현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그러나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도망칠 수 없다면 차라리 담담히 맞이하기로 했다.나는 주소를 알려줬고 고현성은 가볍게 말했다.“지난 4개월 동안 난 계속 의식이 없었어. 미안해, 네 옆에 돌아오지 못해서. 널 힘들게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힘든 건 오히려 고현성이었을 것이다.고현성이 차 사고를 당했을 때
나는 고현성과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고현성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말했다.“일단 차에 타. 널 데리고 갈 곳이 있어.”고현성은 꽤 고집스러웠다.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내가 타자마자 고현성은 차의 문을 잠갔다.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동안 계속 금운에 있었어요? 언제 깨어난 거예요?”고현성은 간단하게 대답했다.“얼마 되지 않았어.”“그럼 몸은 괜찮아요?”“괜찮아.”내가 차에 타고 나서부터 고현성은 무척 차가워 보였다. 나와 대화할 마음이 없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고현성은 차를 몰아 해변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나는 계속 어떻게 지금 나의 마음을 고현성에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현성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해변에 도착하자 고현성은 차를 멈췄다. 고현성은 안전벨트를 풀더니 내게 음료수 한 병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바로 마셨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이런 느낌은 익숙했기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고현성은 차 문을 열고 내려 모래사장 위에 서 있었다. 그의 등은 쓸쓸해 보였다. 나도 그를 따라 내리려고 했는데 바로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고승철이었다.고승철이 왜 갑자기 나에게 전화했을까?나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버님.”고승철은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지금 어디 있니?”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현성이 지금 네 옆에 있니?”나는 처음에는 있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요즘 고승철이 나를 대했던 태도가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아니요.”고승철은 멈칫하더니 놀란 듯 말했다.“현성이가.”고승철은 차분히 설명했다.“현성이 죽지 않았어. 3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다가 깨어난 지는 한 달도 안 됐다.”‘깨어난 지 한 달이라고? 고현성은 방금 며칠 안 됐다고 했는데?’고승철은 잠시 말을
아직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고현성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가방에 숨기며 불안하게 말했다.“나 집에 가고 싶어요.”고현성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집에 가서 뭐 하려고?”“현성 씨, 뭔가 현성 씨가 좀 달라 보여요.”“응? 난 여전히 나야.”고현성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석지훈에게 건 전화가 연결됐을까?’만약 연결됐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내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려 했지만 고현성은 강제로 나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고현성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아니면 우리 지금 한 번 해볼까?”나는 두려움에 입술을 떨며 물었다.“무슨 뜻이에요?”나는 갑자기 고현성이 건네준 음료수가 떠올라 경악하며 물었다.“혹시 약을 탄 거예요?”“맞아.”고현성은 강한 힘으로 나를 차 밖으로 끌어냈고 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나는 다급하게 고현성을 노려보며 말했다.“이거 놔요.”“허. 네가 자초한 거 아니야? 내 형을 유혹하고 반경우를 유혹하더니 이제는 석지훈이야? 연수아, 넌 내가 너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네가 나한테 잘못한 거 아이야? 난 단지 네가 살아있길 바랐을 뿐이야. 근데 넌 나를 원망하면서도 한 번도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잖아.”고현성은 내 옷을 재빨리 벗겨냈고 나는 순식간에 그의 앞에 나체가 되었다. 나는 순간 공포에 휩싸여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제발 놔줘요.”만약 고현성이 오늘 밤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나는 석지훈과 다시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두려움이 밀려왔다.“고현성 씨, 제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하게 하지 마요. 당신의 이런 행동을 원망하지 않을게요. 차라리 나를 바다에 던져줘요. 날 건드리지 말고, 고현성.”고현성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몸은 아주 솔직한데? 이 약은 효과가 강해서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 네 몸이 견디지 못해 자궁에 손상을 줄 거야.”고현성은 악마처럼 웃었다.“이건 너를 위
석지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깊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감정 없는 킬러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듯했다. 나는 마음속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했다.“날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지 마요. 지훈 오빠, 난 정말 오빠를 많이 사랑해요. 제발 날 거절하지 말아줘요. 네?”나는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눈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석지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냉랭하게 명령했다.“주변 모든 차량과 CCTV를 치우고 두 시간 뒤에 나를 데리러 와.”“네, 대표님.”그 목소리는 아마도 윤승민이었다.그들이 떠난 뒤에야 석지훈은 몸을 굽혀 바닥에 있는 나를 안아 올렸다.석지훈의 입술은 차갑기만 했다. 내가 아무리 키스하고 깨물어도 석지훈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막지 않았을 뿐 내게 아무런 응답도 해주지 않았다. 석지훈은 나를 품에 안고 아주 단호하게 바닷가로 걸어갔다.나의 마음은 너무나 불안했다. 나는 석지훈의 얼굴을 감싸안고 그의 입술을 계속해서 빨아들였다.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석지훈의 숨결은 청량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마치 거대한 산처럼 내가 기댈 수 있는 존재 같았다.그러나 석지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나는 석지훈의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키스를 이어갔고 나의 립스틱은 석지훈의 뺨에 잔뜩 묻었다. 나는 석지훈의 뺨을 따라 그의 귓불까지 깨물었다. 그러다 선을 더 넘으려는 순간 몸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렸다.나는 물을 몇 번이나 들이마시며 거의 질식할 뻔했다. 그러던 중 차가운 느낌이 내 입술에 닿았고 곧이어 그의 숨결이 내 입술 사이로 전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숨결을 탐했다.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더니 나의 머리를 바닷물 속에서 꺼내줬다. 그러자 석지훈의 단정했던 정장이 이미 물에 젖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밤의 어둠 속에서 석지훈의 야성적인 매력이 더욱 돋보였다.석지
처음 석지훈을 만났을 때도 나는 그의 방에서 깨어났다. 그때도 발코니에 나가자 석지훈은 아래에서 여유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석지훈은 마치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남자처럼 너무나도 잘생겼다. 거의 모든 부분이 정교하고 완벽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기품을 나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하면서도 오만한 분위기가 마치 세상에 석지훈 혼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머지는 그저 보잘것없는 먼지에 불과한 듯했다.나는 난간을 잡고 그를 불렀다.“오빠.”석지훈은 눈을 들어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시선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내가 그에게 한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나는 석지훈에게 나를 책임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나는 이 일로 석지훈을 협박해 나와 함께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석지훈에게 기대고 싶었다.나는 부드럽게 그를 다시 불렀다.“오빠.”석지훈은 깊고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왜?”“어젯밤.”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멈췄다.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고 어젯밤의 일에 대해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갑자기 나는 어젯밤 우리가 겪었던 일이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먼저 다가갔고 모든 일은 내가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어젯밤 일로 오빠를 강요하거나 부담 주지 않을게요.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석지훈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오빠. 곧 떠날게요.”내 말을 듣고 석지훈의 눈빛은 완전히 어두워졌다.나는 방으로 달아와 내 가방이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 가방은 아마도 어젯밤 고현성이 떠나기 전에 차에서 던져 놓은 것 같았다.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석지훈과의 통화 기록이 약 3시간이나 이어져 있었다.즉 석지훈은 전화를 끊지 않았던 것이다.고현
그가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다정하게 물었다.“아직 졸려?”나는 그의 품에 기대며 물었다.“장례를 치르는 건가요?”“그래,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나는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지못해 옷을 갈아입은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석지훈과 함께 그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러 나섰다. 관을 덮는 순간, 석지훈의 눈가가 계속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장례는 아침 9시에 끝났다. 우리는 석씨 집안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동성시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아랫배는 계속 아팠고 목에서는 쇳맛이 점점 짙어졌다.우리는 오후 한두 시쯤 아파트에 도착했다. 석지훈은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 곧장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나는 그가 잠든 틈을 타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도착한 곳은 석씨 집안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병원장은 내가 온 것을 알고 급히 달려와 나를 친절히 안내하며 검사를 도왔다. 그러나 CT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의사는 내 암이 재발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나는 충격을 받은 채 물었다.“암이 완치됐다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재발할 수 있죠?”“가주님, 조금 전에 이전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전에 앓으셨던 자궁암이 말기였습니다. 말기라는 건... 완치된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현재 의료 기술로는 재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넉 달 전 난산을 겪으셨잖아요. 비록 치료가 제때 이루어졌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의 상태는 재발 초기 징후가 보이고 있으니 항암제를 다시 복용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재발 초기 징후라니... 언제든 병이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인가?나는 이미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는데 이번에도 과연 또 기회가 있을까?죽음이 이번에도 나를 비켜가 줄까?나는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항암제 효과는 얼마나 있나요?”“가주님께서 이전에 드셨던 항암제는 석씨 집안에서 만든 약입니다. 세계적으로도 치료 효과가 뛰어나 병세를
석지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영리한 사람이었다.내가 질문을 던지자 그의 눈동자가 순간 깊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방금 누가 뭐라고 했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석지훈이 단호하게 말했다.“넌 거짓말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눈빛이 흔들려서 날 똑바로 보지 못해. 윤아야, 어떤 소문을 들었든 한 가지만 믿어. 난 어떤 이유로도 널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네 손을 놓지 않을 거고.”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만 고집스럽게 물었다.“그럼 오빠가 나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예요?”이전 같았더라면 석지훈 어머니의 말을 들은 뒤 혼자 속앓이하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겠지만 석지훈과 함께하면서부터는 모든 걸 명확히 물어보고 싶어졌다.석지훈은 내가 진지하게 답을 원한다는 걸 알고 한참 생각한 뒤 차분히 대답했다.“전에 네 이름은 들어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네 얼굴도 몰랐어. 너한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건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였고 네가 연씨 집안의 대표이자 고현성의 전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어. 사실 네 신분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지만 난 네 신분조사에 관심이 없었거든. 네가 연윤아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었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시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석지훈이 우리가 민박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 때 나는 믿었다.그가 뭐라 하든 난 그의 말을 믿었으니까.게다가 그 시기 석지훈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는 내가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으니까. 만약 그가 그때 내 정체를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만남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다른 요인도 없었다.그가 내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둔 건 단지 내가 ‘연윤아’였기 때문이지 모두가 오해하는 그 ‘신장’ 때문이 아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오빠는 왜 그때 내가 접근하도록 둔 거예요?”왜 내 오빠가 되어
공식 자리에서 나는 석수아로만 불릴 수 있다.석씨 성은 내가 석씨 집안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석지훈의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말이 끝나자 한 중년 여성이 나섰다. 그녀는 뚱뚱한 청년의 팔을 붙잡아 끌어내며 담담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아이가 철없이 행동해 사모님을 언짢게 했네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그녀가 바로 석지훈이 석지윤일 것이다.정당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석씨 집안의 방계 식구들은 적지 않았다.석지윤은 청년이 석지훈을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석지훈이 나를 언급하자 그제야 가식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모욕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석지훈이 했던 ‘없앨 수도 있다’는 말은 석씨 집안의 방계들이 있는 곳에서 가주의 위엄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리고 이 뚱뚱한 청년은 본보기가 될 만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그에게 문제였던 건 단 하나, 자신의 입을 조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호랑이가 개에게 무시당한다 해도 여전히 호랑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청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씨 집안은 예로부터 규율과 존비귀천을 가장 중시했습니다. 상과 벌도 분명해야 하고요. 댁의 자제가 규율을 어겼으니 어쩔 수 없이 석씨 집안이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몇 달 전 함승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석씨 집안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부서가 있는데 처벌이 워낙 혹독해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석지윤은 내가 말한 ‘석씨 집안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가주님, 제 아이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는 비웃으며 답했다.“잘못을 저질렀으니 집안의 규율대로 가르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단...”잠시 멈춘 뒤 나는 말했다.“단, 당신의 아이가 석씨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지죠.”정당에 모인 방계 식구들의 안색이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때 지훈이는 날 친어머니라고 믿었기에 나를 많이 그리워했어. 하지만 나는... 나는 지훈이한테 늘 차갑게 대했지. 생일날에만 잠깐씩 만났고. 지훈이가 네 곁에 나타난 이유는 네 몸속의 신장이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자를 멀리하던 남자가 유독 너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쏟겠니?”‘석지훈이 나를 그렇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니!’나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석지훈이 정말 널 사랑한다고 믿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 넌 지훈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석지훈은 예전에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어떤 건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정작 그의 행동은 내가 느끼기에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지훈이는 석씨 집안에서 자란 아이야. 고독 속에서 자라 강인하고 잔인하고 냉혹해. 그런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니?”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음속으로는 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남자들은 다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 그런데 만약 지훈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유가 단지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라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녀가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수아야, 지훈이의 또 다른 비밀을 알고 있니? 그 아인 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한때 너를 죽이고 싶어 했어.’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며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함승윤이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가주님, 그분이 뭐라고 하셨나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답했다.“아니에요.”함승윤과 함께 정당으로 향하자 석지훈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