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이 멀리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표정은 어둡고 온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뒤에서는 누군가가 우산을 받쳐 들고 그를 따르고 있었다. 석지훈이 내 옆에 멈춰 서더니, 나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냉랭하게 쳐다봤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다. 석지훈은 두 손가락으로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나는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더니 차갑게 명령했다. “방금 때린 그대로 갚아요.”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지훈아, 지금 이게 무슨 뜻이니?”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석지훈의 옷자락을 살짝 당기며, 굳이 나 때문에 가족과 다툴 필요는 없다고 눈치 줬다. 하지만 그는 내 작은 행동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네가 석씨 집안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이 집안을 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네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 이 집안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어!” 그러나 석지훈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삼 초 줄게요.” 그 후의 결과가 어떨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온몸을 떨며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미안해.” 석지훈은 냉정하게 말했다. “1초 남았습니다.” 짝!여인은 갑자기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녀의 모습은 몹시 초라해 보였다. 나는 석지훈이 나를 위해 나섰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 여인은 석지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석지훈의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멀리 복도 모퉁이에 서 있던 또 다른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짙은 색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고 무심한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 무릎을 꿇은 여
뿐만 아니라 나는 몇 세트의 속옷과 스킨케어 제품을 챙겨 넣었다.그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티켓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비행기를 탔고 창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밖을 바라보았다.나는 한 번도 비아드에 가본 적이 없었다. 오로라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헬스투 반탑에 도착한 것은 비아드 시간으로 오후 6시였기에 나는 공항에서 약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나는 윤 비서가 보낸 메시지대로 주차장 동쪽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지훈이 혼자 공항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밖으로 나온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차분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내 손에서 캐리어를 조용히 가져갔다.석지훈은 내 앞에서 캐리어를 끌며 걸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는 어떤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에 올랐다.운전기사는 우리를 데리고 교외 별장으로 갔다.지금은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며칠 전에 비아드에 내렸던 눈이 아직 녹지 않았기에 아직까지도 눈이 쌓여있었다.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별장으로 들어갔다.나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고 그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방 안은 아주 따뜻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 뒤를 따랐다.석지훈은 2층으로 올라가더니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나는 서둘러 그의 옷소매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오빠, 화났어요? 화내지 마요.”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화 안 났어.”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그럼 왜 저 무시해요? 저는 오빠가 다친 게 걱정됐을 뿐이에요.”석지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아야, 너무 가까이 오지 마. 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익숙하지 않아. 이건 오랫동안 길러온 습관이야.”‘오랫동안 길러온 습관이라니...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던 걸까?’나는 석지훈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방 안은 내가
윗몸이 드러낸 채로 흰색 붕대를 감고 있는 그의 몸은 아주 탄탄해 보였다. 그는 다리를 쭉 뻗더니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석지훈이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같이 느껴졌다.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렸다.“오빠, 정말 멋있어요.”내가 그 앞에서 여러 번 했던 말이었다.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일부러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멋있는 남자는 어떤 여자든 좋아할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오빠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제가 선 넘지 않게 신경 쓸게요!”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만 봐주는 거다?”‘정말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라니까.’석지훈은 주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우동을 만들더니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를 떠나서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나 먹으라고 만들어준 건가?’나는 젓가락으로 우동을 먹기 시작했다. 국물은 매우 구수했고 파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것 같았다. 우동을 다 먹고 나서 나는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돌아왔다.나는 문을 열고 석지훈에게 물었다.“오빠, 배 안 고파요?”그는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나도 읽어본 적 있는 책이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수필이었는데 복잡한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나는 석지훈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왜냐하면 내가 아는 석지훈은 항상 차갑고 냉정하며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윤 비서의 말에 의하면 그는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었다.이렇게 보면 석지훈은 클래식한 것들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그 시대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들이었다.석지훈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배 안 고파.”천장에 달린 조명은 약간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디 가요?”“아래층.”‘소파에서 잘 생각인가?’그가 방을 나간 후 나는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내가 자꾸 석지훈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정말 신기한 감정이었다.‘내가 진짜 오빠를 좋아하게 된 걸까?’그는 교회에서 나를 데리고 떠나줬고 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를 지켜줬다.사람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직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고현성이 남아 있었다.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네 달 전, 나는 고집을 부리며 그를 용서하지 않았었다.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그런 일을 당할 때까지 말이다.조민수의 말이 맞았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현성을 살릴 것이었다. 그가 나를 평생 미워해도 상관없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나는 다 잃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어떻게 그토록 젊고 멋진 남자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지?’마음이 조여오는 것처럼 아파졌다. 나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바닥에 엎드렸다.그 하룻밤 동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인지 아침에 거울을 보자 얼굴이 너무 창백했다.나는 가볍게 화장을 하고 하얀색 패딩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역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감고 있었는데 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준비해. 좀 있으면 헬스투로 갈 거야. 그리고 오후에는 동성시로 돌아갈 거야.”나는 호기심에 물었다.“그럼 여긴 어디예요? 전 여기가 헬스투인 줄 알았는데요?”석지훈이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더니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우리는 어젯밤 공항에서 떠나 에르크로 왔어. 방으로 가서 좀 더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와.”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비아드 날씨가 아직 그렇게 춥지 않아. 낮에는 좀 얇은
헬스투의 거리에서 납치당했을 때, 나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시야 속에는 가장 강력한 남자가 있었고 그는 언제나 나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침착하고 여유 있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두려워하지 마.”나는 석지훈이 구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내 입을 막고 있던 사람이 나를 풀어주더니 차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기는 운전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하려던 찰나, 무기를 든 남자 몇 명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뛰어올랐다. 사람마다 손에 캐리어를 들고 있었는데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들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총기와 같은 무기들이 가득했다.‘테러리스트들인가? 아니면 오빠의 적들인가?그렇다, 이들은 아마 석지훈의 적들일 것이었다. 아까 석지훈의 이름을 불렀으니 말이다.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석지훈은 몸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그 순간, 내 마음속은 석지훈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차 안에 있던 몇몇 외국인 남자들은 무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렸고 그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이번에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어.”“혼자인 데다가 우리한테는 인질도 있잖아.”차를 몰던 사람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였는데 그가 놀라운 말투로 말했다.“석지훈 옆에서 여자를 본 건 처음이네. 민영 씨의 말에 의하면 석지훈 말이야. 고자라고 하던데... 다 헛소문이었나 보네!”‘한민영?’뒤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이 여자 진짜 예쁘네. 허리도 가늘고 다리도 하얗고.”그들은 영어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에 영어에 능숙해서 그들이 하는 불쾌한 농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나는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한편, 차는 계속 북쪽을 향해 달렸다.목적지는 알
그는 세상 사람들 눈에 악귀와도 같았다.하지만 석지훈은 또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여자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는 정말 너무 완벽한 존재라서 사람들은 감히 그를 더럽힐 수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여 석지훈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그저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무것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키스를 하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석지훈과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내가 고개를 돌려 빠져나가려던 순간, 석지훈이 갑자기 눈을 떴다. 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쳤고 서로를 응시했다.순간, 내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입을 맞추려고 했던 걸 석지훈도 눈치챈 것 같았다. 내가 이 상황을 모면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 석지훈이 담담하게 물었다.“윤아야, 그렇게 나랑 키스하고 싶어?”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나는 그런 석지훈의 모습에 끌리기 시작했다.내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어?”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그와 키스를 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그 어떤 경계선이 깨질 것이란 걸 말이다.두 사람은 더 이상 가족 같은 사이라고 칭할 수 없는 관계로 될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아직 서로의 마음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나는 자신이 석지훈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분명 그는 나한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기자 석지훈이 깊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 뒤통수를 가볍게 어루만지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의 얇은 입술이 나에게로 다가왔다.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제서야 달콤한
석지훈은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를 무심하게 한 번 쳐다보고는 창밖의 희미한 달빛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그는 정말 너무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나는 실망한 채로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지난밤 최희연과 석지훈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전자는 나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지만 후자는 나더러 감정에 충실히 하라고 했다.나는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아팠다. 가슴 왼쪽엔 고현성이 있고 오른쪽엔 석지훈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현성이 세상을 떠난 그 몇 개월 동안,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석지훈을...석지훈에 대한 내 감정은 정확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인 여성으로서 나는 그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인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고현성은 과거에 있는 사람이고 석지훈은 내 눈앞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나를 보호해 줬고 나를 잘 챙겨줬다.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었고 그런 생활이야말로 지금 내 나이에 딱 맞는 생활이었다. 과하게 세련되고 피곤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다.그렇다, 석지훈 앞이라면 나는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할 수 있었다. 머리도 귀엽게 꾸밀 수 있었으며 아침부터 일어나서 화장하지 않아도 되었다.석지훈 앞이라면 나는 나대로 있을 수 있었다.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두렵지 않았고 전적으로 그한테 의지할 수 있었다.그는 나를 실망하게 한 적도 없었다. 이런 남자라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이 떠다니는 바람에 나는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두 날 연속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었다.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얼굴은 뻣뻣하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약을 바르러 1층으로 내려갔지만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약을 바르고 밖으로 나가도 여전히 석지훈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절망에 가득 찬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원태웅은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나를 위로했다.“비록 나는 너랑 형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네가 나한테 책임을 떠넘겼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널 팔아넘겼겠어?”원태웅은 그래도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마움을 표했다.“고마워요.”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형을 떠보려고 했던 거지?”원태웅은 경험이 풍부했기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금방 눈치챘다.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물었다.“너 설마 형을 좋아하는 거야?”‘내가 지훈 오빠를 좋아한다고?’나는 어젯밤 최희연에게 말했었다. 석지훈에게 졌다고 말이다. 나는 확실히 그에게 깊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게다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밤새도록 생각했다.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과거는 여전히 내게 발목을 잡았다.최희연이 말한 대로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나는 누군가가 나한테 조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태웅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아마 좋아하는 것 같아요.”“아마 좋아한다는 건 무슨 의미야?”원태웅은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왜 ‘아마’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데? 네가 그렇게 확신이 없으니까 형도 떠난 거야.”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물었다.“셋째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원태웅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능숙하게 말했다. “어떤 남자든 확신을 주지 않고 계속 망설이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특히 둘째 형 같은 사람은 더 그렇고 말이야.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요구가 꽤 높아. 더군다나 너는 이미 결혼을 했었잖아.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네가 싫어서도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해주는 거야. 둘째 형은 완벽주의자라서 그 형 마음의 벽을 넘는 건 좀 어려울 거야. 그러니까 둘째 형이 진짜 좋다면 너 각오해야 해. 윤아야, 네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어.”원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