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야, 나 신장이 하나 필요해.”이것이 바로 그녀의 목적이었다.그녀는 신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건 우리 연 씨 가문이 그녀의 신장 하나를 가져갔기 때문이다.나는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혜원의 맑은 목소리가 감정 없이 들려왔다.“나 신부전이야. 새로운 신장이 필요해. 수아야, 너희 연 씨 가문에서 내 신장 하나를 가져갔잖아.”나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한다.“미안해.”“수아야, 네가 아프다는 거 알아. 우리 거래를 하자. 내가 널 치료해 줄 테니 대신 네 신장 하나를 줘.”정말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으랴.하지만 오혜원은 그렇게 나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나는 물었다.“나를 원망하지 않아?”“원망해. 하지만 난 살고 싶어. 그리고 그때의 너는 무슨 잘못이 있었겠어? 수아야, 잘못은 항상 어른들이 저지른 거지.”그녀는 솔직하게 나를 원망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동시에 내 잘못은 없다고도 했다.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혜원아...”“수아야, 오늘 밤 공항에 나를 마중 나와 줄래?”오혜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오혜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나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걸까? 만약 아니라면 유서정과 임지혜는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았을까?설마 오혜원이 누명을 쓴 걸까?누명을 썼다면 왜 또 고현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까?오혜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너무 배척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럴게.”일단 그녀를 마중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오혜원은 고마워하며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나 시혁이랑 같이 마중 나갈게.”나는 오혜원을 혼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시혁을 부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가 있
수화기 너머에서 최희연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태껏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근데 방금 아이라고 했는데 무슨 아이?최희연은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강해온에게 최희연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했다.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해온은 나와 최희연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내 핸드폰은 중간에 여러 번 바꿨었지만 최희연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이라 쉽게 그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도착했을 때 최희연은 이미 바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도 옆에 같이 깨져있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행히 아직 체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최희연은 한껏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의 옷자락을 잡고 울먹였다.“이제 없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났어...”그녀의 말에 나는 급히 되물었다.“누가?”“내 아이, 서준 씨 아이...”이때, 문밖에 웬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내 품에서 최희연을 안아가더니 방을 나갔다.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앞의 차를 바라보다가 강해온에게 물었다.“방금 유겸 씨, 저 사람 표정 봤어요? 희연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나요?”아까 두 사람의 뒤에서 나는 희미하게 진유겸이 최희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희연아, 걱정하지 마.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어.”곁에 자신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얼마나 달콤한 말인가.강해온이 답했다.“아까는 그래 보였습니다.”나랑 강해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희연이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서야 의사가 나왔는데 뱃속의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나는 최희연이 임신했는지도
나는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사실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죽으면 유서에 내 신장은 너에게 기증한다고 써놓을게.”“수아야, 넌 죽는 게 아깝지 않아?”아깝지 않냐고?아까우면 어떻고 안 아까우면 어떤데?그러다가 다시 나한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현성 씨는 너를 정말 사랑해. 내가 몰래 시험해 봤거든? 설령 나와 결혼하는 거로 널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야. 그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거지.”방금 뭐라고?나 대신에 고현성의 마음을 시험해 봤다고?나에 대한 복수 때문에 고현성과 결혼하려던 게 아니었어?그럼 진짜로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 했던 거야?내가 멍한 얼굴로 오혜원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운전에 집중해 줘. 난 오래 살고 싶거든.”그녀의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다시 운전에 몰두했는데 오혜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렸다.“수아야, 난 네가 행복하게, 그리고 오래 살길 바라.”오혜원이 내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나는 차리리 그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랐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변했을 리가 없다.분명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럼 여태껏 나만 복수심에 불타 오혜원을 미워하고 있었던 걸까?울음이 터져 나오려던 이때 오혜원이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아이가 날라리 같아 보였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사람이었지. 왠지 내가 다른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영웅처럼 구해줄 것 같았거든. 어둡고 외로웠던 내 삶에 한줄기의 찬란한 빛과 같았어. ”오혜원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그러다가 살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짝사랑했는지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난 고백할 용기조차 없었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내가 과연 그래도
고현성은 강제로 나를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 보았는데 역시나 당장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내가 거절하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수아야, 지금은 네 몸이 우선이지 그깟 머리카락은 빠져도 다시 자라나잖아.”그는 내가 대머리 되는 게 두려워서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제 병은 이제 치료해 봤자 똑같을 텐데 남은 시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고현성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나에게 물었다.“그렇게 손 놓고 죽길 기다리겠다는 거야?”그의 슬퍼하는 모습에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말했다.“사는 게 더 고통스러워요.”그러자 고현성은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수아야.”사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결국에는 오혜원을 찾아갈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하여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오혜원은 이제 원래 사이로 돌아가기 힘들어졌어요. 그러니깐 저 때문에 그 여자를 다시 찾아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현성 씨 앞에서 죽어버릴 거예요.”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오혜원한테 치료받기 싫었다.그러자 고현성은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집불통.”“현성 씨는 제 마음을 몰라요.”고현성 마지못해 나를 안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이미 그의 품에서 곤히 잠에 들었다.이튿날, 깨어나 보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고현성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그는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어 나는 그의 눈썹 사이에 손을 가져가 살짝 펴주었다.샤워를 마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는데 나는 살며시 그의 곁에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요.”그의 한결같은 다정함이 매우 고마웠다.여태껏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었고,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 함께 하려고 하니 이제는 병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유서정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우리 개인적 원한은 우리끼리 풀면 되지, 굳이 아버지한테 다 말할 필요까지 있었어요? 이게 밖에서 괴롭힘당하고 집에 와서 어른들한테 고자질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정말 너무 유치하고 기가 막히네요.”순간 나는 참을 수없는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유씨 가문의 명의로 저를 초대했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원한으로 되는 거죠?”이때, 유서정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정말 뻔뻔하네요!”“유서정 씨, 진정한 승패는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는 겁니다. 제 얼굴에 와인을 뿌린 것 외에 당신이 얻은 게 과연 뭐죠? 지금 두 가문의 총책임 자리에서 쫓겨나면 유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발 들일 틈도 없게 될 텐데요. 어차피 유씨 가문에는 다른 주주들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유씨 가문의 상속자라고 해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유서정의 정곡만 찌르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닥쳐! 그런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지금은 기세등등해 있겠지만 훗날 내가 유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날에 당신은 그길로 끝장이야!”“그 기회가 과연 당신께 주어질까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유서정 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상주 시의 조씨 가문, 동성 시의 반씨 가문과 운성 시의 고씨 가문 중에서 만약 어느 한 집이라도 유씨 가문을 제재하려 하면 당신네 가문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겁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은 현재 전부 제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도 알 텐데요.”유서정이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과연 그 남자들이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모든 이익을 마다하고 유씨 가문과 맞서 싸울까요? 과연 고현성 씨는
어제 고현성이 조민수에 대해 물어볼 때부터 이미 틀림없이 그는 운성에 와서 나를 상주 시로 데려갈 것이라 예상했다.“아니.”“근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조민수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고 나는 그에게 차분히 해명했다.“나 수술받은 지 몇 달 안 되잖아.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오빠, 내 병은 완치가 어렵대.”“그래서 이대로 포기한다고?”조민수는 의자를 돌려 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네가 이대로 죽어가는 꼴을 못 봐.”“오빠, 새언니한테나 더 신경 써 줘.”“...”“난 수술대 위에서 죽기 싫어.”그러자 조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건 널 살리려고 하는 거잖아.”“살 확률이 5%밖에 안 된대.”조민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그렇게 나의 설득 끝에 그는 운성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내 말을 들어줬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랐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와 고현성이 미리 짜놓은 계획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회사에 있다가 살짝 피곤함이 몰려온 나는 재빨리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죽을 끓여 먹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진통제를 먹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샤워를 끝낸 뒤 옅게 화장도 했다. 집이라도 언제나 이쁜 모습이고 싶었다.고현성이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소파에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불편해 살짝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안 피곤해요?”그는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사랑해요.”고현성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갑자기?”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해줬다.“현성 씨, 사랑해요.”가장 예쁜 시절에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야.내가 고현성의 품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놓은 상태였다. 하여 곧바로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제야 받았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어디예요?”“사모님, 저희는 지금 성당에 있습니다.”그는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3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나한테 주소 보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오혜원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네 병은 더 이상 시간 끌면 안 돼. 수아야, 내가 7,8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 항암제를 연구했고 마침내 만드는 데 성공해서 너를 구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이것 또한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이게 말로만 듣던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걸까?나는 그녀가 아주 독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아직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고 나를 제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자 나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살려주겠다고?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어!”저 여자의 호의 따위는 필요 없다.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신장도 다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그게 오혜원의 것이라면 더욱!내가 서둘러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대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하지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도 나는 문밖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신랑 고현성, 신부 유서정.]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현성은 내가 여태껏 했던 말들을 다 귓등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왜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걸까?이러면 내가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던 걸까?절대!오히려 내 화만 더 돋게 만든 격이다.그리고 내 뜻을 무시한 고현성이 너무 미웠다.나는 성당의 문을 힘껏 두드려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문밖에서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슬픔을 억누르다가 또다시 피를 토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의 문이 열리면서 조민수가 제일 먼저 보였다.이
석지훈은 나의 마지막 지푸라기와도 같은 사람이었다.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말이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기어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팔을 벌려 그를 최대한 다정하게 불렀다.혹시나 그마저도 나를 거절할까 봐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할 것 같았다.석지훈은 말끔한 얼굴로 내 앞까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는데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 결벽증이 있어.”지금의 난 온몸이 진흙투성인데 안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그 생각에 두 팔을 다시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그가 허리를 굽히고 나를 품에 안아주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윤아야.”그의 다정한 모습에 나는 더욱 서러워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저 너무 속상해요.”그렇게 나는 석지훈의 옷자락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품에 안겼다.그는 나를 안고 있다가 다시 눈앞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고고하던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하지만 고현성은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이때 유근수가 석지훈에게 다가오더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쁜 와중에 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유근수는 눈치도 빠르고 비즈니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힐끔 쳐다본 뒤 차갑게 답했다.“전 오늘 윤아 보러 왔는데 정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으니 여까지만 하시죠.”석지훈의 명령과도 같은 말투에 유근수는 살짝 놀랐는지 뭐라 말을 못 하다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윤아라고 하시면...”“수아요.”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내 신분을 어떻게 알고 마침 오늘 여기에 나타난 거지?설마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나?유근수가 냉큼 답했다.“아, 네네.”사실 나는 석지훈에 대해 잘 몰랐고 그저 반경우와 비서한테서 들은 게 전부였다.하지만 오늘 그 덕망 높은 유근수가 그의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였다.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이때, 유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