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에서 최희연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태껏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근데 방금 아이라고 했는데 무슨 아이?최희연은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강해온에게 최희연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했다.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해온은 나와 최희연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내 핸드폰은 중간에 여러 번 바꿨었지만 최희연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이라 쉽게 그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도착했을 때 최희연은 이미 바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도 옆에 같이 깨져있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행히 아직 체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최희연은 한껏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의 옷자락을 잡고 울먹였다.“이제 없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났어...”그녀의 말에 나는 급히 되물었다.“누가?”“내 아이, 서준 씨 아이...”이때, 문밖에 웬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내 품에서 최희연을 안아가더니 방을 나갔다.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앞의 차를 바라보다가 강해온에게 물었다.“방금 유겸 씨, 저 사람 표정 봤어요? 희연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나요?”아까 두 사람의 뒤에서 나는 희미하게 진유겸이 최희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희연아, 걱정하지 마.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어.”곁에 자신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얼마나 달콤한 말인가.강해온이 답했다.“아까는 그래 보였습니다.”나랑 강해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희연이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서야 의사가 나왔는데 뱃속의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나는 최희연이 임신했는지도
나는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사실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죽으면 유서에 내 신장은 너에게 기증한다고 써놓을게.”“수아야, 넌 죽는 게 아깝지 않아?”아깝지 않냐고?아까우면 어떻고 안 아까우면 어떤데?그러다가 다시 나한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현성 씨는 너를 정말 사랑해. 내가 몰래 시험해 봤거든? 설령 나와 결혼하는 거로 널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야. 그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거지.”방금 뭐라고?나 대신에 고현성의 마음을 시험해 봤다고?나에 대한 복수 때문에 고현성과 결혼하려던 게 아니었어?그럼 진짜로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 했던 거야?내가 멍한 얼굴로 오혜원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운전에 집중해 줘. 난 오래 살고 싶거든.”그녀의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다시 운전에 몰두했는데 오혜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렸다.“수아야, 난 네가 행복하게, 그리고 오래 살길 바라.”오혜원이 내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나는 차리리 그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랐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변했을 리가 없다.분명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럼 여태껏 나만 복수심에 불타 오혜원을 미워하고 있었던 걸까?울음이 터져 나오려던 이때 오혜원이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아이가 날라리 같아 보였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사람이었지. 왠지 내가 다른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영웅처럼 구해줄 것 같았거든. 어둡고 외로웠던 내 삶에 한줄기의 찬란한 빛과 같았어. ”오혜원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그러다가 살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짝사랑했는지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난 고백할 용기조차 없었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내가 과연 그래도
고현성은 강제로 나를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 보았는데 역시나 당장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내가 거절하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수아야, 지금은 네 몸이 우선이지 그깟 머리카락은 빠져도 다시 자라나잖아.”그는 내가 대머리 되는 게 두려워서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제 병은 이제 치료해 봤자 똑같을 텐데 남은 시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고현성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나에게 물었다.“그렇게 손 놓고 죽길 기다리겠다는 거야?”그의 슬퍼하는 모습에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말했다.“사는 게 더 고통스러워요.”그러자 고현성은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수아야.”사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결국에는 오혜원을 찾아갈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하여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오혜원은 이제 원래 사이로 돌아가기 힘들어졌어요. 그러니깐 저 때문에 그 여자를 다시 찾아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현성 씨 앞에서 죽어버릴 거예요.”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오혜원한테 치료받기 싫었다.그러자 고현성은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집불통.”“현성 씨는 제 마음을 몰라요.”고현성 마지못해 나를 안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이미 그의 품에서 곤히 잠에 들었다.이튿날, 깨어나 보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고현성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그는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어 나는 그의 눈썹 사이에 손을 가져가 살짝 펴주었다.샤워를 마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는데 나는 살며시 그의 곁에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요.”그의 한결같은 다정함이 매우 고마웠다.여태껏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었고,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 함께 하려고 하니 이제는 병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유서정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우리 개인적 원한은 우리끼리 풀면 되지, 굳이 아버지한테 다 말할 필요까지 있었어요? 이게 밖에서 괴롭힘당하고 집에 와서 어른들한테 고자질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정말 너무 유치하고 기가 막히네요.”순간 나는 참을 수없는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유씨 가문의 명의로 저를 초대했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원한으로 되는 거죠?”이때, 유서정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정말 뻔뻔하네요!”“유서정 씨, 진정한 승패는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는 겁니다. 제 얼굴에 와인을 뿌린 것 외에 당신이 얻은 게 과연 뭐죠? 지금 두 가문의 총책임 자리에서 쫓겨나면 유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발 들일 틈도 없게 될 텐데요. 어차피 유씨 가문에는 다른 주주들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유씨 가문의 상속자라고 해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유서정의 정곡만 찌르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닥쳐! 그런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지금은 기세등등해 있겠지만 훗날 내가 유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날에 당신은 그길로 끝장이야!”“그 기회가 과연 당신께 주어질까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유서정 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상주 시의 조씨 가문, 동성 시의 반씨 가문과 운성 시의 고씨 가문 중에서 만약 어느 한 집이라도 유씨 가문을 제재하려 하면 당신네 가문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겁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은 현재 전부 제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도 알 텐데요.”유서정이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과연 그 남자들이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모든 이익을 마다하고 유씨 가문과 맞서 싸울까요? 과연 고현성 씨는
어제 고현성이 조민수에 대해 물어볼 때부터 이미 틀림없이 그는 운성에 와서 나를 상주 시로 데려갈 것이라 예상했다.“아니.”“근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조민수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고 나는 그에게 차분히 해명했다.“나 수술받은 지 몇 달 안 되잖아.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오빠, 내 병은 완치가 어렵대.”“그래서 이대로 포기한다고?”조민수는 의자를 돌려 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네가 이대로 죽어가는 꼴을 못 봐.”“오빠, 새언니한테나 더 신경 써 줘.”“...”“난 수술대 위에서 죽기 싫어.”그러자 조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건 널 살리려고 하는 거잖아.”“살 확률이 5%밖에 안 된대.”조민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그렇게 나의 설득 끝에 그는 운성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내 말을 들어줬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랐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와 고현성이 미리 짜놓은 계획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회사에 있다가 살짝 피곤함이 몰려온 나는 재빨리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죽을 끓여 먹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진통제를 먹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샤워를 끝낸 뒤 옅게 화장도 했다. 집이라도 언제나 이쁜 모습이고 싶었다.고현성이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소파에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불편해 살짝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안 피곤해요?”그는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사랑해요.”고현성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갑자기?”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해줬다.“현성 씨, 사랑해요.”가장 예쁜 시절에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야.내가 고현성의 품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놓은 상태였다. 하여 곧바로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제야 받았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어디예요?”“사모님, 저희는 지금 성당에 있습니다.”그는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3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나한테 주소 보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오혜원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네 병은 더 이상 시간 끌면 안 돼. 수아야, 내가 7,8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 항암제를 연구했고 마침내 만드는 데 성공해서 너를 구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이것 또한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이게 말로만 듣던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걸까?나는 그녀가 아주 독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아직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고 나를 제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자 나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살려주겠다고?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어!”저 여자의 호의 따위는 필요 없다.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신장도 다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그게 오혜원의 것이라면 더욱!내가 서둘러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대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하지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도 나는 문밖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신랑 고현성, 신부 유서정.]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현성은 내가 여태껏 했던 말들을 다 귓등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왜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걸까?이러면 내가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던 걸까?절대!오히려 내 화만 더 돋게 만든 격이다.그리고 내 뜻을 무시한 고현성이 너무 미웠다.나는 성당의 문을 힘껏 두드려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문밖에서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슬픔을 억누르다가 또다시 피를 토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의 문이 열리면서 조민수가 제일 먼저 보였다.이
석지훈은 나의 마지막 지푸라기와도 같은 사람이었다.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말이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기어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팔을 벌려 그를 최대한 다정하게 불렀다.혹시나 그마저도 나를 거절할까 봐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할 것 같았다.석지훈은 말끔한 얼굴로 내 앞까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는데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 결벽증이 있어.”지금의 난 온몸이 진흙투성인데 안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그 생각에 두 팔을 다시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그가 허리를 굽히고 나를 품에 안아주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윤아야.”그의 다정한 모습에 나는 더욱 서러워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저 너무 속상해요.”그렇게 나는 석지훈의 옷자락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품에 안겼다.그는 나를 안고 있다가 다시 눈앞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고고하던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하지만 고현성은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이때 유근수가 석지훈에게 다가오더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쁜 와중에 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유근수는 눈치도 빠르고 비즈니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힐끔 쳐다본 뒤 차갑게 답했다.“전 오늘 윤아 보러 왔는데 정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으니 여까지만 하시죠.”석지훈의 명령과도 같은 말투에 유근수는 살짝 놀랐는지 뭐라 말을 못 하다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윤아라고 하시면...”“수아요.”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내 신분을 어떻게 알고 마침 오늘 여기에 나타난 거지?설마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나?유근수가 냉큼 답했다.“아, 네네.”사실 나는 석지훈에 대해 잘 몰랐고 그저 반경우와 비서한테서 들은 게 전부였다.하지만 오늘 그 덕망 높은 유근수가 그의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였다.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이때, 유
이 꿈에는 오직 나만 있다.그렇게 나는 허무한 공간 속에 혼자 갇혀있었다.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아무 근심걱정도, 그리고 아주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나는 아주 즐겁게 달리다가 눈앞의 웬 건장해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누구세요?”내 물음에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뒷모습은 마치 수많은 별을 수놓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그의 눈빛마저 눈부시게 빛이 났다.이 사람은 단언컨대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잘생긴 남자였지만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았다.하여 웃으면서 다시 그에게 물었다.“누구세요?”그러자 그는 낮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윤아...그의 목소리에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인 것 같았다.나는 그의 말에 다시 답했다.“저는 수아인데요.”나의 대답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근데 방금 웃은 거야?...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옆에는 윤 비서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여기가 동성인가요?”윤 비서가 냉큼 답했다.“네, 수아 씨.”“혹시 제가 며칠을 누워있었나요?”“오늘까지 합쳐서 아흐레요.”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저 안 죽었어요?”그토록 상태가 안 좋았었는데도 안 죽었다고?내 모습을 보던 윤 비서가 재빨리 해명했다.“그날 수아 씨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하여 저희 대표님께서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다행히도 수아 씨한테 필요한 약이 마침 저희 석씨 가문에 남아 있었거든요.”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무슨 뜻이에요?”윤 비서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수아 씨, 축하해요! 수아 씨 병은 수술과 약물 치료로 많이 호전되어 이제 몸조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했어요!”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그럼 제 암은...”“수아 씨, 그날 우리 차를 막고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