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유서정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우리 개인적 원한은 우리끼리 풀면 되지, 굳이 아버지한테 다 말할 필요까지 있었어요? 이게 밖에서 괴롭힘당하고 집에 와서 어른들한테 고자질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정말 너무 유치하고 기가 막히네요.”순간 나는 참을 수없는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유씨 가문의 명의로 저를 초대했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원한으로 되는 거죠?”이때, 유서정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정말 뻔뻔하네요!”“유서정 씨, 진정한 승패는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는 겁니다. 제 얼굴에 와인을 뿌린 것 외에 당신이 얻은 게 과연 뭐죠? 지금 두 가문의 총책임 자리에서 쫓겨나면 유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발 들일 틈도 없게 될 텐데요. 어차피 유씨 가문에는 다른 주주들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유씨 가문의 상속자라고 해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유서정의 정곡만 찌르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닥쳐! 그런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지금은 기세등등해 있겠지만 훗날 내가 유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날에 당신은 그길로 끝장이야!”“그 기회가 과연 당신께 주어질까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유서정 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상주 시의 조씨 가문, 동성 시의 반씨 가문과 운성 시의 고씨 가문 중에서 만약 어느 한 집이라도 유씨 가문을 제재하려 하면 당신네 가문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겁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은 현재 전부 제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도 알 텐데요.”유서정이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과연 그 남자들이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모든 이익을 마다하고 유씨 가문과 맞서 싸울까요? 과연 고현성 씨는
어제 고현성이 조민수에 대해 물어볼 때부터 이미 틀림없이 그는 운성에 와서 나를 상주 시로 데려갈 것이라 예상했다.“아니.”“근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조민수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고 나는 그에게 차분히 해명했다.“나 수술받은 지 몇 달 안 되잖아.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오빠, 내 병은 완치가 어렵대.”“그래서 이대로 포기한다고?”조민수는 의자를 돌려 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네가 이대로 죽어가는 꼴을 못 봐.”“오빠, 새언니한테나 더 신경 써 줘.”“...”“난 수술대 위에서 죽기 싫어.”그러자 조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건 널 살리려고 하는 거잖아.”“살 확률이 5%밖에 안 된대.”조민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그렇게 나의 설득 끝에 그는 운성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내 말을 들어줬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랐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와 고현성이 미리 짜놓은 계획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회사에 있다가 살짝 피곤함이 몰려온 나는 재빨리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죽을 끓여 먹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진통제를 먹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샤워를 끝낸 뒤 옅게 화장도 했다. 집이라도 언제나 이쁜 모습이고 싶었다.고현성이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소파에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불편해 살짝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안 피곤해요?”그는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사랑해요.”고현성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갑자기?”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해줬다.“현성 씨, 사랑해요.”가장 예쁜 시절에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야.내가 고현성의 품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놓은 상태였다. 하여 곧바로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제야 받았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어디예요?”“사모님, 저희는 지금 성당에 있습니다.”그는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3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나한테 주소 보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오혜원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네 병은 더 이상 시간 끌면 안 돼. 수아야, 내가 7,8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 항암제를 연구했고 마침내 만드는 데 성공해서 너를 구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이것 또한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이게 말로만 듣던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걸까?나는 그녀가 아주 독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아직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고 나를 제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자 나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살려주겠다고?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어!”저 여자의 호의 따위는 필요 없다.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신장도 다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그게 오혜원의 것이라면 더욱!내가 서둘러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대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하지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도 나는 문밖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신랑 고현성, 신부 유서정.]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현성은 내가 여태껏 했던 말들을 다 귓등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왜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걸까?이러면 내가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던 걸까?절대!오히려 내 화만 더 돋게 만든 격이다.그리고 내 뜻을 무시한 고현성이 너무 미웠다.나는 성당의 문을 힘껏 두드려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문밖에서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슬픔을 억누르다가 또다시 피를 토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의 문이 열리면서 조민수가 제일 먼저 보였다.이
석지훈은 나의 마지막 지푸라기와도 같은 사람이었다.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말이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기어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팔을 벌려 그를 최대한 다정하게 불렀다.혹시나 그마저도 나를 거절할까 봐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할 것 같았다.석지훈은 말끔한 얼굴로 내 앞까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는데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 결벽증이 있어.”지금의 난 온몸이 진흙투성인데 안아주지 않을 게 뻔했다.그 생각에 두 팔을 다시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그가 허리를 굽히고 나를 품에 안아주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윤아야.”그의 다정한 모습에 나는 더욱 서러워져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저 너무 속상해요.”그렇게 나는 석지훈의 옷자락을 손에 꼭 쥔 채 그의 품에 안겼다.그는 나를 안고 있다가 다시 눈앞의 상류층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고고하던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하지만 고현성은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이때 유근수가 석지훈에게 다가오더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바쁜 와중에 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유근수는 눈치도 빠르고 비즈니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힐끔 쳐다본 뒤 차갑게 답했다.“전 오늘 윤아 보러 왔는데 정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으니 여까지만 하시죠.”석지훈의 명령과도 같은 말투에 유근수는 살짝 놀랐는지 뭐라 말을 못 하다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윤아라고 하시면...”“수아요.”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내 신분을 어떻게 알고 마침 오늘 여기에 나타난 거지?설마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나?유근수가 냉큼 답했다.“아, 네네.”사실 나는 석지훈에 대해 잘 몰랐고 그저 반경우와 비서한테서 들은 게 전부였다.하지만 오늘 그 덕망 높은 유근수가 그의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였다.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이때, 유
이 꿈에는 오직 나만 있다.그렇게 나는 허무한 공간 속에 혼자 갇혀있었다.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아무 근심걱정도, 그리고 아주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것 같았다.나는 아주 즐겁게 달리다가 눈앞의 웬 건장해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누구세요?”내 물음에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뒷모습은 마치 수많은 별을 수놓은 것처럼 반짝거렸고 그의 눈빛마저 눈부시게 빛이 났다.이 사람은 단언컨대 내가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잘생긴 남자였지만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았다.하여 웃으면서 다시 그에게 물었다.“누구세요?”그러자 그는 낮은 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윤아...그의 목소리에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인 것 같았다.나는 그의 말에 다시 답했다.“저는 수아인데요.”나의 대답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근데 방금 웃은 거야?...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옆에는 윤 비서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여기가 동성인가요?”윤 비서가 냉큼 답했다.“네, 수아 씨.”“혹시 제가 며칠을 누워있었나요?”“오늘까지 합쳐서 아흐레요.”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저 안 죽었어요?”그토록 상태가 안 좋았었는데도 안 죽었다고?내 모습을 보던 윤 비서가 재빨리 해명했다.“그날 수아 씨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하여 저희 대표님께서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다행히도 수아 씨한테 필요한 약이 마침 저희 석씨 가문에 남아 있었거든요.”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무슨 뜻이에요?”윤 비서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수아 씨, 축하해요! 수아 씨 병은 수술과 약물 치료로 많이 호전되어 이제 몸조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했어요!”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그럼 제 암은...”“수아 씨, 그날 우리 차를 막고
윤 비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답했다. “대표님께서 무슨 계획이었는지 저희 아랫사람들은 알기 힘든데요.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직접 여쭤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난 그저 두 사람이 그날 거기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 물어봤을 뿐이다.윤 비서가 떠나간 뒤에도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문득 오혜원이 그날 했던 말들이 떠올라 신장 쪽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만약 내 몸속에 진짜 오혜원의 신장이 있는 거라면 지금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의사를 찾아가 검진을 받아 보았다.“제가 확인해 봤을 때 환자분께서는 12년 전에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회복이 아주 좋아 거의 정상인과 다름없이 살 수 있고요.”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 나더니 머릿속에 갑자기 오혜원의 창백하고 부어 보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분명 내 신장과 바뀌었기 때문에 그토록 병든 기색이 역력했다고 볼 수 있다.게다가 미성년자는 신장을 기증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수술시켰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이제 내 몸은 호전되고 있지만 그녀는 생사가 위태롭다...나는 고민 끝에 의사한테 물었다.“지금 제 상황에서 다른 사람한테 신장 이식해 주는 건 불가능하죠?”순간 의사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설명해 줬다.“지금 환자분께는 신장이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기증합니까? 그리고 신장 이식이라고 해서 100% 다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보통 신장 이식을 하고 대략 10~30년 정도 살 수 있지만 제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고 구체적으로 환자분의 몸속에서 이식받은 신장이 잘 작동하는지 지켜봐야겠죠. 근데 만약 이 상태에서 또 신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이식하는 건 고사하고 성공 확률이 확 떨어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의사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별장 밖에 나가 햇볕 좀 쬐려고 했는데 너무 뜨거워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지난 두 달간 카톡 메시지를 한 번도 확인하지 않은 나는 마침 생각나서 들어가 봤는데 이미 빨간색으로 999+로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나한테 보낸 건지 알 수 없지만 당분간은 그쪽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연예 뉴스도 재미없는 것 같아 나는 석지훈의 서재에 가서 읽을 책이 있나 구경하려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에 서예와 산수화가 잔뜩 걸려있었다.그리고 그림 위에 글귀도 씌어 있었는데 필체가 아주 정갈해 보였다.사실 예전에도 서재에 와봤었는데 그때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세히 구경도 못했기에 오늘 마침 그가 없는 틈에 제대로 구경하리라 다짐했다.그림 위에는 저마다 ‘석’이라고 된 도장이 찍혀져 있었는데 아마도 석지훈네 집안 어르신이 물려준 것 같았다.서재에 있는 책들은 모두 연대감이 있는 옛날 책이었는데 나는 도저히 볼만한 책을 찾지 못해 결국에는 “봄과 같은 당신”이란 책을 골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한창 열심히 읽고 있는데 진아가 밥 먹으라고 불렀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테이블에는 어느새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그녀더러 같이 먹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진아는 한사코 거절하면서 다급히 나에게 말했다.“수아 씨, 이러면 안 돼요. 혼자 맛있게 드세요.”그녀의 간절한 한마디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왜요? 같이 먹으면 안 돼요?”“석씨 가문의 규칙이라...”진아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고택 쪽에서 일하던 사람이라 석씨 가문의 규칙이 얼마나 엄한지 어느 정도 알고 있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밥 한 끼 같이 먹는 걸로 왜 이렇게 유난이야?더구나 난 석씨 가문의 사람도 아닌데.예전에 강해온이 말해줬는데 석씨 가문은 매우 특별한 가문이라고 했었다. 근데 그 특별하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하지만 규칙이 엄하다는 건 진짜인 것 같다.하
갑작스레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잠이 안 와서요. 날도 밝은 것 같은데 내려가서 아침밥 준비할게요.”말을 마친 뒤 나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아래층에 내려온 나는 연신 뜨거워진 얼굴을 매만지다가 오늘 밤에는 내가 소파에서 자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게 소파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주방에 갔는데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 흰쌀죽을 끓였다.먼저 한 그릇을 먹고 난 뒤에 다시 소파에 앉아 있는데 석지훈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오전에 그는 외출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책만 보다가 점심때가 되자 직접 주방에서 요리했다.오늘 진아가 오지 않아 나는 석지훈이 해 준 밥을 먹게 되었다. 그렇게 오후에도 그는 서재에서 책만 봤는데 곧 저녁이 될 때쯤, 나는 서재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그에게 물었다.“오빠, 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석지훈은 한창 붓으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하얀색 선지 위에 어느새 글씨가 빼곡히 차 있었다. 그러다가 담담하게 붓을 내려놓고 나에게 되물었다.“넌 뭐 먹고 싶은데?”어차피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것과 흰쌀죽밖에 없었다.“전 배가 안 고파서요.”즉, 석지훈더러 요리하라는 뜻이다.창밖에서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서재 안으로 들어가 그가 베껴 쓴 유명한 작품의 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필체마저 석지훈답게 정갈하고 예뻤는데 벽에 걸려있는 것과 글씨체가 똑같아 보였다.설마 벽에 걸린 이것들도 다 석지훈의 작품인가?나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실력을 칭찬했다.“오빠, 필체가 너무 예뻐요. 한눈에 봐도 실력자인 것 같은데요?”이때, 석지훈이 나에게 물었다.“너도 쓸 줄 알아?”사실 아버지가 붓글씨를 아주 잘 써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배웠었는데 여태껏 실력이 늘지 않아 이제 아버지마저 포기한 상태였다.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어렸을 때부터 배우긴 했는데 실력이 너무 엉망이라 남한테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