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레드와인 한 잔이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진정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 진짜 요즘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파리 떼가 자꾸 꼬여서 정말 토할 것 같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크 한 접시를 집어 들어 유서정의 얼굴에 던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나이프와 포크에 이마가 찢어져 선홍색 피가 솟구쳐 흘렀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나는 손을 뻗어 얼굴을 닦으며 차갑게 경고했다.“내가 그쪽과 안 싸운다고 해서 정말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그쪽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으면 유 회장도 지켜주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쪽이 말하는 그 소위의 연수아를...”그녀는 내가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단지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지.하지만 마음속 죄책감이 그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나를 이길 수 없어요.”유서정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나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얼굴의 레드와인을 닦아내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너무 화가 나서 유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자는 우리 연 씨 가문과 협력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유근수는 내 전화에 놀라며 받자마자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연 대표님, 어쩐 일로 이 늙은이에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사람들 앞에서는 체면 때문에 나를 수아라고 부르지만, 개인적으로 유근수는 나를 존중하며 연 대표라고 불렀다.나는 바로 전화 목적을 밝혔다.“유 회장님, 지금부터 따님 유서정과의 모든 협력을 거부합니다.”유근수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따님께서 금융학 석사라고 들었습니다. 훌륭한 학력이지요. 하지만 학력과 교양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수아야, 나 신장이 하나 필요해.”이것이 바로 그녀의 목적이었다.그녀는 신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건 우리 연 씨 가문이 그녀의 신장 하나를 가져갔기 때문이다.나는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혜원의 맑은 목소리가 감정 없이 들려왔다.“나 신부전이야. 새로운 신장이 필요해. 수아야, 너희 연 씨 가문에서 내 신장 하나를 가져갔잖아.”나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한다.“미안해.”“수아야, 네가 아프다는 거 알아. 우리 거래를 하자. 내가 널 치료해 줄 테니 대신 네 신장 하나를 줘.”정말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으랴.하지만 오혜원은 그렇게 나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나는 물었다.“나를 원망하지 않아?”“원망해. 하지만 난 살고 싶어. 그리고 그때의 너는 무슨 잘못이 있었겠어? 수아야, 잘못은 항상 어른들이 저지른 거지.”그녀는 솔직하게 나를 원망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동시에 내 잘못은 없다고도 했다.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혜원아...”“수아야, 오늘 밤 공항에 나를 마중 나와 줄래?”오혜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오혜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나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걸까? 만약 아니라면 유서정과 임지혜는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았을까?설마 오혜원이 누명을 쓴 걸까?누명을 썼다면 왜 또 고현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까?오혜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너무 배척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럴게.”일단 그녀를 마중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오혜원은 고마워하며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나 시혁이랑 같이 마중 나갈게.”나는 오혜원을 혼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시혁을 부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가 있
수화기 너머에서 최희연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태껏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근데 방금 아이라고 했는데 무슨 아이?최희연은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강해온에게 최희연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했다.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해온은 나와 최희연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내 핸드폰은 중간에 여러 번 바꿨었지만 최희연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이라 쉽게 그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도착했을 때 최희연은 이미 바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도 옆에 같이 깨져있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행히 아직 체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최희연은 한껏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의 옷자락을 잡고 울먹였다.“이제 없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났어...”그녀의 말에 나는 급히 되물었다.“누가?”“내 아이, 서준 씨 아이...”이때, 문밖에 웬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내 품에서 최희연을 안아가더니 방을 나갔다.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앞의 차를 바라보다가 강해온에게 물었다.“방금 유겸 씨, 저 사람 표정 봤어요? 희연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나요?”아까 두 사람의 뒤에서 나는 희미하게 진유겸이 최희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희연아, 걱정하지 마.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어.”곁에 자신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얼마나 달콤한 말인가.강해온이 답했다.“아까는 그래 보였습니다.”나랑 강해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희연이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서야 의사가 나왔는데 뱃속의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나는 최희연이 임신했는지도
나는 애써 차분하게 답했다.“사실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죽으면 유서에 내 신장은 너에게 기증한다고 써놓을게.”“수아야, 넌 죽는 게 아깝지 않아?”아깝지 않냐고?아까우면 어떻고 안 아까우면 어떤데?그러다가 다시 나한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현성 씨는 너를 정말 사랑해. 내가 몰래 시험해 봤거든? 설령 나와 결혼하는 거로 널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야. 그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거지.”방금 뭐라고?나 대신에 고현성의 마음을 시험해 봤다고?나에 대한 복수 때문에 고현성과 결혼하려던 게 아니었어?그럼 진짜로 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 했던 거야?내가 멍한 얼굴로 오혜원을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운전에 집중해 줘. 난 오래 살고 싶거든.”그녀의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다시 운전에 몰두했는데 오혜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렸다.“수아야, 난 네가 행복하게, 그리고 오래 살길 바라.”오혜원이 내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나는 차리리 그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랐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변했을 리가 없다.분명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럼 여태껏 나만 복수심에 불타 오혜원을 미워하고 있었던 걸까?울음이 터져 나오려던 이때 오혜원이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아이가 날라리 같아 보였지만 내 눈에는 완벽한 사람이었지. 왠지 내가 다른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영웅처럼 구해줄 것 같았거든. 어둡고 외로웠던 내 삶에 한줄기의 찬란한 빛과 같았어. ”오혜원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그러다가 살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짝사랑했는지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난 고백할 용기조차 없었어.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내가 과연 그래도
고현성은 강제로 나를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해 보았는데 역시나 당장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내가 거절하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수아야, 지금은 네 몸이 우선이지 그깟 머리카락은 빠져도 다시 자라나잖아.”그는 내가 대머리 되는 게 두려워서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제 병은 이제 치료해 봤자 똑같을 텐데 남은 시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고현성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로 나에게 물었다.“그렇게 손 놓고 죽길 기다리겠다는 거야?”그의 슬퍼하는 모습에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말했다.“사는 게 더 고통스러워요.”그러자 고현성은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수아야.”사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결국에는 오혜원을 찾아갈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하여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저랑 오혜원은 이제 원래 사이로 돌아가기 힘들어졌어요. 그러니깐 저 때문에 그 여자를 다시 찾아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현성 씨 앞에서 죽어버릴 거예요.”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오혜원한테 치료받기 싫었다.그러자 고현성은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집불통.”“현성 씨는 제 마음을 몰라요.”고현성 마지못해 나를 안고 연씨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이미 그의 품에서 곤히 잠에 들었다.이튿날, 깨어나 보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고개를 돌렸는데 고현성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그는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어 나는 그의 눈썹 사이에 손을 가져가 살짝 펴주었다.샤워를 마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는데 나는 살며시 그의 곁에 다가가 볼에 입을 맞췄다.“고마워요.”그의 한결같은 다정함이 매우 고마웠다.여태껏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있었고,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 함께 하려고 하니 이제는 병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유서정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우리 개인적 원한은 우리끼리 풀면 되지, 굳이 아버지한테 다 말할 필요까지 있었어요? 이게 밖에서 괴롭힘당하고 집에 와서 어른들한테 고자질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정말 너무 유치하고 기가 막히네요.”순간 나는 참을 수없는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유씨 가문의 명의로 저를 초대했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원한으로 되는 거죠?”이때, 유서정이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정말 뻔뻔하네요!”“유서정 씨, 진정한 승패는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는 겁니다. 제 얼굴에 와인을 뿌린 것 외에 당신이 얻은 게 과연 뭐죠? 지금 두 가문의 총책임 자리에서 쫓겨나면 유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발 들일 틈도 없게 될 텐데요. 어차피 유씨 가문에는 다른 주주들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무리 유씨 가문의 상속자라고 해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유서정의 정곡만 찌르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닥쳐! 그런다고 내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지금은 기세등등해 있겠지만 훗날 내가 유씨 가문을 손에 넣게 되는 날에 당신은 그길로 끝장이야!”“그 기회가 과연 당신께 주어질까요?”“...”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유서정 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상주 시의 조씨 가문, 동성 시의 반씨 가문과 운성 시의 고씨 가문 중에서 만약 어느 한 집이라도 유씨 가문을 제재하려 하면 당신네 가문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겁니다. 게다가 이 가문들은 현재 전부 제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도 알 텐데요.”유서정이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애써 차분하게 물었다.“과연 그 남자들이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모든 이익을 마다하고 유씨 가문과 맞서 싸울까요? 과연 고현성 씨는
어제 고현성이 조민수에 대해 물어볼 때부터 이미 틀림없이 그는 운성에 와서 나를 상주 시로 데려갈 것이라 예상했다.“아니.”“근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조민수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고 나는 그에게 차분히 해명했다.“나 수술받은 지 몇 달 안 되잖아.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해도 살날이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오빠, 내 병은 완치가 어렵대.”“그래서 이대로 포기한다고?”조민수는 의자를 돌려 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난 네가 이대로 죽어가는 꼴을 못 봐.”“오빠, 새언니한테나 더 신경 써 줘.”“...”“난 수술대 위에서 죽기 싫어.”그러자 조민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그건 널 살리려고 하는 거잖아.”“살 확률이 5%밖에 안 된대.”조민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그렇게 나의 설득 끝에 그는 운성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내 말을 들어줬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랐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와 고현성이 미리 짜놓은 계획이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회사에 있다가 살짝 피곤함이 몰려온 나는 재빨리 연씨 별장으로 돌아와 죽을 끓여 먹었다.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진통제를 먹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아래쪽에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샤워를 끝낸 뒤 옅게 화장도 했다. 집이라도 언제나 이쁜 모습이고 싶었다.고현성이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소파에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불편해 살짝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안 피곤해요?”그는 한껏 힘없는 목소리로 싱긋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사랑해요.”고현성은 순간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갑자기?”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해줬다.“현성 씨, 사랑해요.”가장 예쁜 시절에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야.내가 고현성의 품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놓은 상태였다. 하여 곧바로 그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그제야 받았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어디예요?”“사모님, 저희는 지금 성당에 있습니다.”그는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3년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나한테 주소 보내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오혜원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네 병은 더 이상 시간 끌면 안 돼. 수아야, 내가 7,8년의 시간을 들여서 이 항암제를 연구했고 마침내 만드는 데 성공해서 너를 구해줄 수 있게 되었다고! 이것 또한 너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이게 말로만 듣던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걸까?나는 그녀가 아주 독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아직 우리 가문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고 나를 제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자 나에게 복수하려는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살려주겠다고?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어!”저 여자의 호의 따위는 필요 없다.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신장도 다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그게 오혜원의 것이라면 더욱!내가 서둘러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대문이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하지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도 나는 문밖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신랑 고현성, 신부 유서정.]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현성은 내가 여태껏 했던 말들을 다 귓등으로 흘려보낸 것이다. 왜 이리도 고집을 부리는 걸까?이러면 내가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던 걸까?절대!오히려 내 화만 더 돋게 만든 격이다.그리고 내 뜻을 무시한 고현성이 너무 미웠다.나는 성당의 문을 힘껏 두드려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문밖에서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슬픔을 억누르다가 또다시 피를 토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당의 문이 열리면서 조민수가 제일 먼저 보였다.이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