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차는 어느덧 석지훈 아파트 아래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다음 택시를 타고 떠나려고 했지만, 기사가 지켜보고 있어서 도망칠 기회조차 없었다.하는 수 없이 나는 기사와 같이 건물 맨 위층으로 올라갔고 기사는 비번을 누른 후, 공손한 손짓으로 나를 들어가라고 했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신속하게 문을 닫았는데 마치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것 같았다.집안을 둘러보았지만,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유씨 가문에 있을 것이다.나는 아무 방이나 찾아 들어가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오늘 얼굴이 망가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특히 흉터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제 많이 얕아져서 석지훈의 말처럼 그렇게 흉하지 않은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살짝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거실에 있는 창가로 가서 끝없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지금 마침 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기에 사람들도 유난히 많았다.내가 돌아서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가지고 놀 때 고현성이 전화해서 관심했다.“지금 어디에 있어?”나는 거짓말을 했다.“호텔에 있어요.”“주소를 보내줘. 지금 그쪽으로 갈게.”“그럴 필요 없어요. 나 내일 바로 운성시로 돌아갈 거예요.”내가 거절하자, 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애걸하는 듯 말했다.“수아야, 네가 너무 보고 싶고 옆에 있고 싶어.”고현성의 말에 감동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하지만 난 정말로 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렵고 게다가 병이 악화하면...나는 이제 아무 사람에게도 짐이 되기 싫어서 전화를 끊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혜원이 돌아오기 전까지라도 나에게 시간을 줘요.”오혜원이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손을 신장 부위에 올려놓자마자 갑자기 어제 연시혁과 통화할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만약 너의 신장으로 혜원이의 목숨을 살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신장을 줄 수 있어?”솔직히 말하
석지훈이 더 이상 답변이 안 와서, 강해온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아직 A시를 떠나지 않았다.결국 강해온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뒷좌석에 어두운 표정을 한 고현성도 있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요?”강해온이 서둘러 설명했다.“고 대표님은 어젯밤에 저와 같은 호텔에 투숙했어요. 마침, 항공편도 같아서 아침에 같은 시간에 내려왔는데 제가 대표님과 전화하는 것을 들으시고 동행하게 되었어요.”“...”내가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고현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여기에 집이 있는 거야?”내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눈치챈 강해온이 서둘러 말했다.“고 대표님, 저희 여기에 두 곳 있어요.”“...”강해온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는데 왠지 강해온이 고현성에게 너무 순종적인 것 같다.우리가 운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늦었고 게다가 어젯밤에 휴식을 제대로 못 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싶었는데 고현성이 계속 따라다녔다.나는 고현성이 나의 새로운 오피스텔을 아는 것이 싫어서 강해온에게 연씨 가문의 별장으로 가라고 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구현성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잠이 거의 들 때 누군가 어깨의 상처를 만지는 것을 느꼈는데 눈을 뜨지 않았다.잠에서 깨보니 때는 거의 해가 지고 있었는데 최근의 운성시 하늘은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에 가서 씻고 치마를 바꿔 입었다.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고현성이 이미 떠난 후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지금 오혜원이 돌아왔을 때 나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고현성이 그녀를 선택할까 봐 두렵다.나는 나를 위한다는 명의로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싫다.주방에 가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원태웅이 전화가 와서 물었다.“윤아야, 둘째 형은 어디에 있어?”최근에 석지훈을 찾지 못하면 나에게 연락하는데 왜 내가 석지훈의 행적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
내가 병원으로 가려고 하자 석지훈이 안 된다고 했다.“윤아야, 병원에 가면 그들이 쫓아올 수 있어.”하지만 상처가 꽤 심해 보여서 걱정하며 물었다.“그럼, 호텔은요?”“카메라를 피하면 돼.”호텔은 대부분 도시 중심에 있기에 카메라가 적지 않을 것이다.병원에도 갈 수 없고 호텔에도 못 가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연씨 가문의 별장에는 데려가기 싫어서 결국 나의 오피스텔에 가기로 했다.나는 작은 길로 카메라를 피하며 시내에 들어왔고 아파트 쪽에는 카메라가 많았지만, 다행히 나의 자산이기에 괜찮았다.나는 차를 운전해서 곧바로 나의 개인 차고지에 갔는데 그곳에는 강해온이 준비해 준 다양한 고급 차들이 가득했다.빈자리에 주차하고 고개를 돌려 석지훈을 봤더니 눈빛이 맑고 정신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사실 나는 그를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석지훈이 자기 맘대로 나를 자기의 가족이라고 하며 나를 평생 지켜주겠다는 한 것 때문에 무시할 수 없었다.비록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거부를 했지만, 왠지 그의 보호가 싫지 않았다.나중에 연씨 가문이 석지훈과 협력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하지만 그때는 여전히 그를 마음속으로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차에서 내려 석지훈을 부축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강해온에게 전화를 해서 남자 옷 한 벌 보내달라고 하며 아무도 아파트의 카메라 내용을 못 보게 하라고 지시했다.강해온이 물었다.“고 대표님의 사이즈로 하면 될까요?”석지훈이 나의 옆에서 강해온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네.”석지훈의 체구는 고현성과 비슷했는데 부축해서 침대로 가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소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워있는 것이 더 편할 거예요. 침대에 누워서 쉬어요.”석지훈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결벽증이 있어.”“...”그럼 내가 누웠던 자리가 역겹다는 건가?“저 여기에 이사 온 지 하루밖에 안 됐어
석지훈은 마음속으로 나를 이미 여러 남자를 가지고 노는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이 모두 나의 스폰서인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나는 설명할 방법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았다.“아직 없어요.”잠깐 침묵 후 나는 말을 계속했다.“아직 고정 남자는 없는데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살려고요. 언젠가는 적당한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돈이 부족하면 원태웅을 찾아가.”나는 순간 왜 거짓말을 했는지 후회했지만, 석지훈은 아주 담담하게 나의 행동을 질책하지 않고 믿는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로 나를 따로 조사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자랐는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그의 눈에 나는 그저 연윤아고,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연윤아일 뿐이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나도 돈 있어요.”석지훈은 더 말하지 않았는데 눈빛이 조금 피곤해 보여서 나는 그가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게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로 갔다.소파에 앉아 발을 소파에 올리려고 하는 순간 발에 온통 모래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제야 구두가 아직 해변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나는 거실 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발을 씻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윤다은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수아 언니, 나 이제 정재 오빠와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였어요. 오빠는 언니와 함께 할 수 없고 남은 생을 혼자 지내더라도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우리가 잘못된 시간에 만나서 오빠를 나에게 한눈에 빠지지 못하게 한 내 잘못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이제 포기하고 오빠를 놔주려고요. 남은 생에서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남자를 못 만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던 이제 정재 오빠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윤다은이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고정재를 포기할 거라고 했을 때 내가 왜 그러는지 물었었는데 이제야 그 답변을 보낸 것이다.그런데
석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야.”그는 내가 왜 피를 토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그냥 몸을 돌려 길을 비켜주었다.나는 소파에 앉아 계속해서 약을 먹었는데 다행히 메스꺼운 느낌이 아까보다는 강하지 않아서 억지로 참으며 약을 모두 들이켰다.약을 다 먹고 고개를 돌려보니 석지훈이 방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이 보여 망설이다가 물었다.“내일 동성시로 돌아갈 거예요? 제가 직접 운전해서 모셔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태웅이가 데리러 올 거야.”석지훈의 거절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헤어지면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것이다.내가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 할 때 석지훈이 갑자기 나의 옆에 나타나서 깜짝 놀라며 물었다.“안 자요?”그가 설명했다.“안 졸려. 그리고 태웅이가 금방 도착할 거야.”원태웅이 지금 오고 있다고?“그럼 저는 들어가서 쉴게요.”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요?”“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석지훈의 목소리에 나는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웃으며 말했다.“뭐든 다 해결할 수 있어요?”그는 아주 긍정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말해봐.”내가 말만 하면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그런데 석지훈이 아무리 못 하는 게 없다고 해도 나의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지금 상황에서 정말로 고현성의 말대로 오혜원만이 나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금은 없어요.”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침실에 돌아가서 누웠는데 침대에는 온통 석지훈의 냄새가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날이 밝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피곤한 몸을 일으켜 나가보니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곧바로 씻은 다음 운전해서 회사로 나갔다.아침부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어 강해온이 들어왔다.“대표님, 유서정 씨가 운성시에 왔는데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요.”유서정이 운성에 나를 찾
차가운 레드와인 한 잔이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진정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 진짜 요즘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파리 떼가 자꾸 꼬여서 정말 토할 것 같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크 한 접시를 집어 들어 유서정의 얼굴에 던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나이프와 포크에 이마가 찢어져 선홍색 피가 솟구쳐 흘렀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나는 손을 뻗어 얼굴을 닦으며 차갑게 경고했다.“내가 그쪽과 안 싸운다고 해서 정말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그쪽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으면 유 회장도 지켜주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쪽이 말하는 그 소위의 연수아를...”그녀는 내가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단지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지.하지만 마음속 죄책감이 그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나를 이길 수 없어요.”유서정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나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얼굴의 레드와인을 닦아내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너무 화가 나서 유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자는 우리 연 씨 가문과 협력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유근수는 내 전화에 놀라며 받자마자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연 대표님, 어쩐 일로 이 늙은이에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사람들 앞에서는 체면 때문에 나를 수아라고 부르지만, 개인적으로 유근수는 나를 존중하며 연 대표라고 불렀다.나는 바로 전화 목적을 밝혔다.“유 회장님, 지금부터 따님 유서정과의 모든 협력을 거부합니다.”유근수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따님께서 금융학 석사라고 들었습니다. 훌륭한 학력이지요. 하지만 학력과 교양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수아야, 나 신장이 하나 필요해.”이것이 바로 그녀의 목적이었다.그녀는 신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건 우리 연 씨 가문이 그녀의 신장 하나를 가져갔기 때문이다.나는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혜원의 맑은 목소리가 감정 없이 들려왔다.“나 신부전이야. 새로운 신장이 필요해. 수아야, 너희 연 씨 가문에서 내 신장 하나를 가져갔잖아.”나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한다.“미안해.”“수아야, 네가 아프다는 거 알아. 우리 거래를 하자. 내가 널 치료해 줄 테니 대신 네 신장 하나를 줘.”정말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으랴.하지만 오혜원은 그렇게 나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나는 물었다.“나를 원망하지 않아?”“원망해. 하지만 난 살고 싶어. 그리고 그때의 너는 무슨 잘못이 있었겠어? 수아야, 잘못은 항상 어른들이 저지른 거지.”그녀는 솔직하게 나를 원망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동시에 내 잘못은 없다고도 했다.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혜원아...”“수아야, 오늘 밤 공항에 나를 마중 나와 줄래?”오혜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오혜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나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걸까? 만약 아니라면 유서정과 임지혜는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았을까?설마 오혜원이 누명을 쓴 걸까?누명을 썼다면 왜 또 고현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까?오혜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너무 배척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럴게.”일단 그녀를 마중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오혜원은 고마워하며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나 시혁이랑 같이 마중 나갈게.”나는 오혜원을 혼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시혁을 부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가 있
수화기 너머에서 최희연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태껏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근데 방금 아이라고 했는데 무슨 아이?최희연은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강해온에게 최희연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했다.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해온은 나와 최희연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내 핸드폰은 중간에 여러 번 바꿨었지만 최희연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이라 쉽게 그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도착했을 때 최희연은 이미 바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도 옆에 같이 깨져있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행히 아직 체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최희연은 한껏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의 옷자락을 잡고 울먹였다.“이제 없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났어...”그녀의 말에 나는 급히 되물었다.“누가?”“내 아이, 서준 씨 아이...”이때, 문밖에 웬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내 품에서 최희연을 안아가더니 방을 나갔다.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앞의 차를 바라보다가 강해온에게 물었다.“방금 유겸 씨, 저 사람 표정 봤어요? 희연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나요?”아까 두 사람의 뒤에서 나는 희미하게 진유겸이 최희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희연아, 걱정하지 마.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어.”곁에 자신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얼마나 달콤한 말인가.강해온이 답했다.“아까는 그래 보였습니다.”나랑 강해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희연이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서야 의사가 나왔는데 뱃속의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나는 최희연이 임신했는지도
석지훈의 성격상 그는 절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몇 걸음 빠르게 걸어 그들을 앞질러 갔다. 복도에서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나는 갑자기 밝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수 씨, 이따가 고양이 카페에서 만나요. 내가 커피 살게요~”한민수는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 말했다.“수아 씨, 본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래요? 나한테 웃지 말아요. 정신 못 차리겠잖아요!”내 아름다움은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석지훈도 예전에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일부러 석지훈의 시선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 남자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하지만 괜찮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와 고양이 카페로 갔다. 한창 손님들을 맞느라 정신없던 예하나는 나를 보자 바쁘게 말했다.“혼자 알아서 해요. 나는 좀 바빠서!”최희연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영업을 시작했다.과연 참을성이 없었다.나는 직접 최고급 작설을 꺼내 차를 우리고 창가에 앉았다. 벌써 8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카페는 운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었는데 주변은 유럽풍의 복고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화려하게 눈부셨다. 그리고 창밖에는 차들과 다양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이런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예하나가 왜 여기서 2년 동안이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차를 따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한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어디에요? 차를 몰고 갈 건데.]나는 바로 그에게 위치를 공유했다.카페에 도착한 한민수는 바쁘게 일하는 예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예하나도 그를 보자마자 숨으려 했지만 한민수는 거침없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말했다.“유진이가 2년 동안이나 너를 찾았는데 여기에 숨어 있었던 거야! 지한이 너 숨는 실력 하나는
한민수는 내게 연회에 참석하라는 뜻이었다.“갈게요.”전화로 그렇게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지훈 씨는 왜 운성에 돌아와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전에도 나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이 점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하지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이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저녁에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한민수가 말한 연회장으로 갔다. 내가 한민수를 찾았을 때 석지훈은 2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민수는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교한 디자인의 정장은 그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냈고 흰 셔츠 소매의 금색 단추는 그에게 고귀한 분위기를 더했다.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말이다.지금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얼마나 더 이야기할 거예요?”내 목소리를 듣고 석지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지훈 씨.”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내 옆에 있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한민수는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야.”한민수의 말은 마치 날벼락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석지훈을 바라보았다.나는 충격에 빠진 채 물었다.“이게 무슨 말이에요?”한민수는 황급히 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한민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기억상실이에요. 지난 2년간의 기억을 모두 잃었어요. 의사 말로는 일시적이고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는데 한두 달 안에 회복될 가능성이 높대요. 하지만 한성범은 그 한두 달 사이에 민영과 지훈의 결혼을 서두르려고 할 거예요! 기정사실을 만들어서 지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거죠.”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다.“그가 나를 잊었다고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온몸에 붕대를 감은 한민수가 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물었다.“그 사람 걱정하느라 속이 타 죽겠죠?”당연한 거 아닌가?!나는 먼저 물었다.“상태는 어때요?”“괜찮아요. 지훈은 왜 안 물어봐요?”나는 가볍게 말했다.“민수 씨 안부부터 물어야 덜 외로울 거 아니에요.”한민수는 한 씨 가문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한민영이 병원에 온 것도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었다.한민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마음도 착하셔라.”나는 그제야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는?”“나도 아직 잘 몰라요.”그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한민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초조해서 말했다.“난 지훈 씨가 걱정돼요. 그러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요. 내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볼 테니까!”한민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말했다.“우리는 습격을 당했어요. 그리고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 줬지요.”나는 서둘러 캐물었다.“누군데요?”“한성범.”자신의 할아버지를 한성범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현재 한민수와 한씨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로 데려갔는지 알아요?”“생명에는 지장 없을 거예요.”석지훈은 한성범이 점찍은 손녀 사윗감이었으니 그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를 빨리 에르크로 데려오고 싶었다.서둘러 병실을 나와 보니 한민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네 할아버지한테 있지?”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그저 그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하지만 한민영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정말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함승윤을 데리고 곧장 한씨 가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한성범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하게 했다.한성범은 전화를 받고 웃으며 물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