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차는 어느덧 석지훈 아파트 아래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다음 택시를 타고 떠나려고 했지만, 기사가 지켜보고 있어서 도망칠 기회조차 없었다.하는 수 없이 나는 기사와 같이 건물 맨 위층으로 올라갔고 기사는 비번을 누른 후, 공손한 손짓으로 나를 들어가라고 했다.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신속하게 문을 닫았는데 마치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것 같았다.집안을 둘러보았지만,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유씨 가문에 있을 것이다.나는 아무 방이나 찾아 들어가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창백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오늘 얼굴이 망가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야.”특히 흉터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이제 많이 얕아져서 석지훈의 말처럼 그렇게 흉하지 않은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살짝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거실에 있는 창가로 가서 끝없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지금 마침 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기에 사람들도 유난히 많았다.내가 돌아서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가지고 놀 때 고현성이 전화해서 관심했다.“지금 어디에 있어?”나는 거짓말을 했다.“호텔에 있어요.”“주소를 보내줘. 지금 그쪽으로 갈게.”“그럴 필요 없어요. 나 내일 바로 운성시로 돌아갈 거예요.”내가 거절하자, 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애걸하는 듯 말했다.“수아야, 네가 너무 보고 싶고 옆에 있고 싶어.”고현성의 말에 감동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하지만 난 정말로 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렵고 게다가 병이 악화하면...나는 이제 아무 사람에게도 짐이 되기 싫어서 전화를 끊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혜원이 돌아오기 전까지라도 나에게 시간을 줘요.”오혜원이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손을 신장 부위에 올려놓자마자 갑자기 어제 연시혁과 통화할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만약 너의 신장으로 혜원이의 목숨을 살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신장을 줄 수 있어?”솔직히 말하
석지훈이 더 이상 답변이 안 와서, 강해온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아직 A시를 떠나지 않았다.결국 강해온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뒷좌석에 어두운 표정을 한 고현성도 있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요?”강해온이 서둘러 설명했다.“고 대표님은 어젯밤에 저와 같은 호텔에 투숙했어요. 마침, 항공편도 같아서 아침에 같은 시간에 내려왔는데 제가 대표님과 전화하는 것을 들으시고 동행하게 되었어요.”“...”내가 하는 수 없이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고현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여기에 집이 있는 거야?”내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눈치챈 강해온이 서둘러 말했다.“고 대표님, 저희 여기에 두 곳 있어요.”“...”강해온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는데 왠지 강해온이 고현성에게 너무 순종적인 것 같다.우리가 운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늦었고 게다가 어젯밤에 휴식을 제대로 못 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싶었는데 고현성이 계속 따라다녔다.나는 고현성이 나의 새로운 오피스텔을 아는 것이 싫어서 강해온에게 연씨 가문의 별장으로 가라고 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구현성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잠이 거의 들 때 누군가 어깨의 상처를 만지는 것을 느꼈는데 눈을 뜨지 않았다.잠에서 깨보니 때는 거의 해가 지고 있었는데 최근의 운성시 하늘은 너무 아름다운 것 같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에 가서 씻고 치마를 바꿔 입었다.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고현성이 이미 떠난 후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지금 오혜원이 돌아왔을 때 나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고현성이 그녀를 선택할까 봐 두렵다.나는 나를 위한다는 명의로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싫다.주방에 가서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원태웅이 전화가 와서 물었다.“윤아야, 둘째 형은 어디에 있어?”최근에 석지훈을 찾지 못하면 나에게 연락하는데 왜 내가 석지훈의 행적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
내가 병원으로 가려고 하자 석지훈이 안 된다고 했다.“윤아야, 병원에 가면 그들이 쫓아올 수 있어.”하지만 상처가 꽤 심해 보여서 걱정하며 물었다.“그럼, 호텔은요?”“카메라를 피하면 돼.”호텔은 대부분 도시 중심에 있기에 카메라가 적지 않을 것이다.병원에도 갈 수 없고 호텔에도 못 가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연씨 가문의 별장에는 데려가기 싫어서 결국 나의 오피스텔에 가기로 했다.나는 작은 길로 카메라를 피하며 시내에 들어왔고 아파트 쪽에는 카메라가 많았지만, 다행히 나의 자산이기에 괜찮았다.나는 차를 운전해서 곧바로 나의 개인 차고지에 갔는데 그곳에는 강해온이 준비해 준 다양한 고급 차들이 가득했다.빈자리에 주차하고 고개를 돌려 석지훈을 봤더니 눈빛이 맑고 정신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사실 나는 그를 상관하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석지훈이 자기 맘대로 나를 자기의 가족이라고 하며 나를 평생 지켜주겠다는 한 것 때문에 무시할 수 없었다.비록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거부를 했지만, 왠지 그의 보호가 싫지 않았다.나중에 연씨 가문이 석지훈과 협력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하지만 그때는 여전히 그를 마음속으로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차에서 내려 석지훈을 부축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강해온에게 전화를 해서 남자 옷 한 벌 보내달라고 하며 아무도 아파트의 카메라 내용을 못 보게 하라고 지시했다.강해온이 물었다.“고 대표님의 사이즈로 하면 될까요?”석지훈이 나의 옆에서 강해온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네.”석지훈의 체구는 고현성과 비슷했는데 부축해서 침대로 가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소파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워있는 것이 더 편할 거예요. 침대에 누워서 쉬어요.”석지훈이 무심하게 말했다.“나 결벽증이 있어.”“...”그럼 내가 누웠던 자리가 역겹다는 건가?“저 여기에 이사 온 지 하루밖에 안 됐어
석지훈은 마음속으로 나를 이미 여러 남자를 가지고 노는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이 모두 나의 스폰서인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나는 설명할 방법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았다.“아직 없어요.”잠깐 침묵 후 나는 말을 계속했다.“아직 고정 남자는 없는데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살려고요. 언젠가는 적당한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않겠어요.”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돈이 부족하면 원태웅을 찾아가.”나는 순간 왜 거짓말을 했는지 후회했지만, 석지훈은 아주 담담하게 나의 행동을 질책하지 않고 믿는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로 나를 따로 조사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자랐는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그의 눈에 나는 그저 연윤아고,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연윤아일 뿐이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나도 돈 있어요.”석지훈은 더 말하지 않았는데 눈빛이 조금 피곤해 보여서 나는 그가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게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로 갔다.소파에 앉아 발을 소파에 올리려고 하는 순간 발에 온통 모래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제야 구두가 아직 해변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나는 거실 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발을 씻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누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윤다은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수아 언니, 나 이제 정재 오빠와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였어요. 오빠는 언니와 함께 할 수 없고 남은 생을 혼자 지내더라도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우리가 잘못된 시간에 만나서 오빠를 나에게 한눈에 빠지지 못하게 한 내 잘못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이제 포기하고 오빠를 놔주려고요. 남은 생에서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남자를 못 만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던 이제 정재 오빠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윤다은이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고정재를 포기할 거라고 했을 때 내가 왜 그러는지 물었었는데 이제야 그 답변을 보낸 것이다.그런데
석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야.”그는 내가 왜 피를 토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그냥 몸을 돌려 길을 비켜주었다.나는 소파에 앉아 계속해서 약을 먹었는데 다행히 메스꺼운 느낌이 아까보다는 강하지 않아서 억지로 참으며 약을 모두 들이켰다.약을 다 먹고 고개를 돌려보니 석지훈이 방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이 보여 망설이다가 물었다.“내일 동성시로 돌아갈 거예요? 제가 직접 운전해서 모셔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태웅이가 데리러 올 거야.”석지훈의 거절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헤어지면 오랫동안 볼 수 없을 것이다.내가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 할 때 석지훈이 갑자기 나의 옆에 나타나서 깜짝 놀라며 물었다.“안 자요?”그가 설명했다.“안 졸려. 그리고 태웅이가 금방 도착할 거야.”원태웅이 지금 오고 있다고?“그럼 저는 들어가서 쉴게요.”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요?”“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석지훈의 목소리에 나는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웃으며 말했다.“뭐든 다 해결할 수 있어요?”그는 아주 긍정적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말해봐.”내가 말만 하면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그런데 석지훈이 아무리 못 하는 게 없다고 해도 나의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지금 상황에서 정말로 고현성의 말대로 오혜원만이 나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금은 없어요.”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침실에 돌아가서 누웠는데 침대에는 온통 석지훈의 냄새가 가득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날이 밝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피곤한 몸을 일으켜 나가보니 석지훈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곧바로 씻은 다음 운전해서 회사로 나갔다.아침부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어 강해온이 들어왔다.“대표님, 유서정 씨가 운성시에 왔는데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해요.”유서정이 운성에 나를 찾
차가운 레드와인 한 잔이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진정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 진짜 요즘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파리 떼가 자꾸 꼬여서 정말 토할 것 같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크 한 접시를 집어 들어 유서정의 얼굴에 던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나이프와 포크에 이마가 찢어져 선홍색 피가 솟구쳐 흘렀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나는 손을 뻗어 얼굴을 닦으며 차갑게 경고했다.“내가 그쪽과 안 싸운다고 해서 정말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그쪽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으면 유 회장도 지켜주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그쪽이 말하는 그 소위의 연수아를...”그녀는 내가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단지 죄책감을 느낄 뿐이었지.하지만 마음속 죄책감이 그녀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그녀는 나를 이길 수 없어요.”유서정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져가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나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얼굴의 레드와인을 닦아내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유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너무 화가 나서 유서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자는 우리 연 씨 가문과 협력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유근수는 내 전화에 놀라며 받자마자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연 대표님, 어쩐 일로 이 늙은이에게 전화를 다 주셨어요?”사람들 앞에서는 체면 때문에 나를 수아라고 부르지만, 개인적으로 유근수는 나를 존중하며 연 대표라고 불렀다.나는 바로 전화 목적을 밝혔다.“유 회장님, 지금부터 따님 유서정과의 모든 협력을 거부합니다.”유근수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따님께서 금융학 석사라고 들었습니다. 훌륭한 학력이지요. 하지만 학력과 교양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수아야, 나 신장이 하나 필요해.”이것이 바로 그녀의 목적이었다.그녀는 신장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건 우리 연 씨 가문이 그녀의 신장 하나를 가져갔기 때문이다.나는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혜원의 맑은 목소리가 감정 없이 들려왔다.“나 신부전이야. 새로운 신장이 필요해. 수아야, 너희 연 씨 가문에서 내 신장 하나를 가져갔잖아.”나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한다.“미안해.”“수아야, 네가 아프다는 거 알아. 우리 거래를 하자. 내가 널 치료해 줄 테니 대신 네 신장 하나를 줘.”정말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좋으랴.하지만 오혜원은 그렇게 나를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나는 물었다.“나를 원망하지 않아?”“원망해. 하지만 난 살고 싶어. 그리고 그때의 너는 무슨 잘못이 있었겠어? 수아야, 잘못은 항상 어른들이 저지른 거지.”그녀는 솔직하게 나를 원망한다고 말했다.하지만 동시에 내 잘못은 없다고도 했다.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혜원아...”“수아야, 오늘 밤 공항에 나를 마중 나와 줄래?”오혜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오혜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나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는 걸까? 만약 아니라면 유서정과 임지혜는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았을까?설마 오혜원이 누명을 쓴 걸까?누명을 썼다면 왜 또 고현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을까?오혜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너무 배척하는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럴게.”일단 그녀를 마중하고 나서 생각해 볼 것이다.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오혜원은 고마워하며 말했다.“고마워, 수아야.”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나 시혁이랑 같이 마중 나갈게.”나는 오혜원을 혼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연시혁을 부르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가 있
수화기 너머에서 최희연은 한껏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여태껏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근데 방금 아이라고 했는데 무슨 아이?최희연은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강해온에게 최희연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했다.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강해온은 나와 최희연의 핸드폰에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설치해 줬다.내 핸드폰은 중간에 여러 번 바꿨었지만 최희연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이라 쉽게 그녀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도착했을 때 최희연은 이미 바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유리 파편들도 옆에 같이 깨져있었는데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다행히 아직 체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더니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최희연은 한껏 고통스러운 얼굴로 나의 옷자락을 잡고 울먹였다.“이제 없어...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났어...”그녀의 말에 나는 급히 되물었다.“누가?”“내 아이, 서준 씨 아이...”이때, 문밖에 웬 어두운 얼굴을 한 남자가 다가와 내 품에서 최희연을 안아가더니 방을 나갔다.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앞의 차를 바라보다가 강해온에게 물었다.“방금 유겸 씨, 저 사람 표정 봤어요? 희연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나요?”아까 두 사람의 뒤에서 나는 희미하게 진유겸이 최희연의 귓가에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희연아, 걱정하지 마.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어.”곁에 자신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얼마나 달콤한 말인가.강해온이 답했다.“아까는 그래 보였습니다.”나랑 강해온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희연이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리고 대략 3시간이 지나서야 의사가 나왔는데 뱃속의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나는 최희연이 임신했는지도
그녀가 당시 아기였던 석지훈을 거두어 키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석지훈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어느 정도 그녀가 고마웠고 그녀가 석지훈을 내 곁으로 데려와 준 것에 감사했다.이때 김윤정이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석지훈의 것처럼 차가웠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석지훈의 손바닥은 차가워도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독사 같았다. 나는 서둘러 한 걸음 물러났고 이를 본 그녀가 내게 물었다.“왜 이렇게 무서워하지?”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남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흥, 도도하네.” 그녀는 자신의 팔에 있는 상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이 한 어머니는 이미 너 때문에 돌아가셨어. 네가 지훈이 또 다른 어머니마저 잃게 하고 싶지 않다면 지훈이랑 더 이상 얽히지 마!”이렇게 잔인한 협박을 하다니!나는 주먹을 꽉 쥐고 침착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훈 오빠가 당신을 존중하는 건 당신이 오빠 어머니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제 당신이 오빠의 또 다른 어머니를 해치셨으니 당신은 이미 당신에 대한 오빠의 존경심과 인내심을 모두 깎아내렸어요. 이대로 계속하시면... 오빠가 당신과 인연을 끊을까 봐 두렵지도 않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협박 때문에 지훈 오빠랑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오빠는 남의 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그녀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뭐 죽는 것보다 더하겠어? 누가 더 독한지 한번 보자. 지훈이가 두 어머니를 모두 포기할 수 있다면 내가 인정하지!”눈앞의 여자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을 상대하는 건 정말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석지훈의 어머니이자 내 친아버지가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우울한 마음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를 왜 이렇게 증오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젯밤, 석지훈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슬프기는 했지만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의 슬픔을 보며 나도 점점 그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었다.그가 방금 말했던 어머니 김혜정과 나를 증오하는 김윤정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혜정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다.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여겼고 그녀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석지훈만 있었다.그녀는 단지 그가 건강하고 평온하길 바랐다.심지어 석지훈이 나와 결혼하려 할 때 그녀는 이를 찬성하기까지 했다.석지훈은 방금 그녀가 늘 쉽게 양보했다고 말했다.문득, 내가 두 번째로 석씨 가문에 갔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온화한 태도가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는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늘 한복 차림으로 석지훈만 바라보던 부드러운 여인은 결국 시들어버렸다.그녀는 분명 석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그녀가 언니 김윤정에게 몰려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그녀가 죽기 전에 느꼈을 절망과 고통의 깊이를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심지어 그녀는 석지훈에게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이것 또한 석지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이 아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분명히 그도 슬펐지만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 했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힘을 주어 말했다.“내가 오빠 곁에 있어 줄게요.”석지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난 먼저 가서 빈소를 지킬게.”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옷 갈아입고 바로 따라갈게요.”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떠났다.나는 함 집사에게 상복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그에게서 상복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갈아입고 방을 나서자 함 집사가 내 팔에 검은 완장을 채워주었다.함 집사와 함께 정원을 나서려던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앞쪽에 검은 상복을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불렀다.“지훈 오빠.”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은 사람은 나의 어머니야. 평생 다른 신분으로 석씨 가문에서 살아가며 나를 아들처럼 키워준 분이야.”석지훈의 말투는 차분했고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들렸다.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있는 늘어진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나는 아홉 살 때 석씨 가문을 떠났어.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그 당시 나를 입양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건 알지 못했어. 그 아홉 해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정말 잘 돌봐주셨어.”“그때 나는 후계자가 아니었고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어.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 작은 사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어머니가 제일 먼저 나를 지켜주셨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석씨 가문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던 11년 동안 어머니는 항상 내게 편지를 보내주시며 버티라고 하셨어. 석씨 가문에서도 내 몫을 항상 챙겨주셨지.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해서 석씨 가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야.”석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선 벗어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나는 어머니를 정말 존경했어. 어머니 역시 나를 매우 존중해주셨지. 내 평생 어머니가 반대했던 유일한 일은 너와 나의 관계였어. 하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하자 결국 허락하셨어.”“어머니는 나를 위해 언제나 쉽게 양보하셨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악한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었어. 얼마 전에도 너를 며느리로 잘 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어.”석지훈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의 내면은 산산조각 난 듯 보였다.나는 그의 허리를 가만히 안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도 오빠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미안해요...혹시 우리의 약혼 때문일까요?”그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했다.“잘못은 너에
석지훈 어머니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단호히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잘 모르겠어요.”우울한 마음에 나는 석만호에게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장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나무 위로 올라가 담현아 옆에 누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번 일은 지훈 오빠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담현아는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정이 있으니 당연하지 않을까요?”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현아야, 우리 동성시에 돌아가자.”담현아가 대답했다.“정재 아저씨가 내일 지인들과 같이 캠핑한다면서 초대했어요. 나는 곧 운성시로 가야 해요.”‘고정재 씨가 운성시에 친구가 있다고?’아마도 담현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돌아갈게.”말을 마친 뒤,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차 키를 들고 별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1시였다.나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어요. 걱정 말고 일 보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응, 잘 자.]석지훈은 아직 깨어 있는 것 같았고 아마도 여전히 바쁜 모양이었다.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나는 시간을 내어 석씨 가문 회사에 들렀다.석씨 가문의 업무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반년간 배운 경험 덕분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함 집사가 세심하게 가르쳐 주어서 모르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저녁 무렵, 함 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안주인께서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석씨 가문의 다른 계파들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나는 놀라며 물었다.“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