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시간에 고정재가 전화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을줄은...그는 내가 고현성과 싸운 걸 알고 있었던 걸까?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고정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두 사람 일을 현성이가 다은에게 말했고 다은이가 또 나한테 얘기해 줬어...”내가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정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지막이 물었다.“지금 울고 있는 거야?”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일어나 차가 멈춰진 곳으로 갔다. 원래는 연 씨 별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곳에는 고현성과 함께했던 이틀간의 추억이 가득했다.내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여전히 고정재였다.내가 가장 힘들 때, 심지어 전화를 끊었는데도 그는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따스한 위로와 곁을 지켜줄 누군가였다.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와 엮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를 마치 스페어처럼 대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게다가 윤다은도 있지 않은가...우리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나는 고정재의 전화를 받지 않고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깊은 한숨과 함께 몸이 너무 괴로웠다. 항암제를 꺼내 먹고 나니 한참 후에야 몸의 불편함이 조금 가라앉았다.나는 눈을 감고 모든 생각을 비웠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창 밖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떠보니, 운성에 오랜만에 해가 떴다.차창을 내린 나는 길 건너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그는 고현성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고정재에게서는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편안한 분위기가 풍겼다.고정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걸까? 그리고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나는 차 안에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배 안 고파?”나는
“정재 씨,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고현성 얘기는 꺼내지 않고 다른 질문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고정재도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그는 항상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세계 여행도 하고, 유력 인사들도 만났어.”이것이 고정재가 내게 준 답변이었다.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나는 그의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뭐 먹고 싶어요? 내가 살게요.”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고정재는 나를 근처 죽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내게 따뜻한 죽을 주문해 주었다. 죽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에게 물었다.“어머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제 아버님께서 금운으로 가시던데.”고정재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표정했다.“어. 어젯밤에 수술하셨는데, 경과를 봐야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그럼 정재 씨는 왜 금운으로 안 갔어요?”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고정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아빠와는 어릴 때부터 거의 만나지 못해서 정이 없어. 이번에 금운에 가지 않은 것도 엄마가 곤란해질까 봐 그랬어.”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머님이 왜 곤란해하세요? 아버님이랑 같이 있으면 싸우기라도 하세요?”고정재는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내가 싸울 사람으로 보여?”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빠는 날 싫어해서 항상 흠을 잡으셔. 아마 우린 천성적으로 안 맞는 사이인가 보지.”고승철은 아들의 흠을 잡을 만큼 유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내 생각이 진실이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사실 고정재는 어젯밤 이미 금운에 돌아갔고 어머니의 수술 병실 앞을 지켰다. 그러다 새벽에 윤다은의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우린 둘 다 말주변이 없었다. 다행히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말 없이 밥만 먹었다.고정재는 몇 술 뜨더니 숟가락을 내려놨다.내가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건 네가 슬퍼하는 모습이야.이것은 고정재가 내게 건넨 가장 애틋하고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때 고정재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든 현성은 너에게 상처 주기를 가장 원치 않는 사람일 거야. 혹시 그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사정이라...고현성 역시 자신에게 사정이 있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운성에 오면 결혼할 거라고 했다.그러니 그에게 사정이 있든 없든 아무 의미 없었다.내가 고개를 젓자 고정재가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억지로 말하게 하고 싶진 않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말했다.“하지만 난 네 곁에 있고 싶어.”그의 말에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미안해요,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나는 서둘러 죽집을 나와 차를 찾아 몰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강해온에게 새로운 아파트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연 씨 별장에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회사에 돌아왔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정재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던 것이다.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그와 함께할 수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고현성과 고정재 사이에서 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배신당했다고 그에게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이건 고정재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었고 내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나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넋이 나간 듯 시간을 보냈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서 이대로라면 조만간 병이 날 것 같았다.그래서 당분간 운성을 떠나 있기로 결정했다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강해온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새로 구입한 롤스로이스를 운전하고 동성시로 향했다.하지만 동성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입구에서 가벼운 접촉 사고가 발생했다. 일반 승용차 한 대가 내 차를 추돌한
창가로 가서 밖을 보니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여기로 가려고요?”그는 말이 없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얼굴에 흉터가 보기 흉하네.”나: “...”나는 동성에 온 뒤 화장을 지웠기에 매끈한 얼굴에 드러난 흉터는 당연히 보기 흉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것도 방금 내가 살려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싫은 소리를 듣게 되다니, 참으로 의외였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켰다.그가 갑자기 물었다.“이름이 뭐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매우 거칠었다.그와 친분이 없으니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묻기에 답하지 않을 수도 없어 거짓으로 답했다.“연윤아요.”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창밖의 강은 고요했지만, 그가 여기서 나가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바로 이때 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경고했다.“나랑 같이 안 나가면 고문당할 거야.”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누구한테요?”그는 차갑게 말했다.“날 죽이려는 자한테.”“지금 문 두드리는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는 자들이라는 거예요?”“그래. 그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거 알아.”그를 찾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나는 거절했다.“난 안 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문이 열리고 맨 앞에 선 자가 이유도 묻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나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으니까.창가의 남자는 바로 나를 끌어당겨 창밖으로 뛰어내렸지만 뛰어내리는 순간 내 어깨는 칼에 베였다.나는 신음을 뱉었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가운 강물 속으로 빠졌다.숨을 쉴 틈도 없이 물을 몇 모금 마셨고 고개를 내밀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바닥에 눌렸다.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고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만약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몸에 힘을 빼고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
“나는 동성에 볼일이 있어. 나중에 연락할게.”나는 반경우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지난번에 내가 널 불편하게 했나?”나는 고개를 숙이고 부정했다.“아니.”“난 너한테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 오해하지 마”반경우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의 직설적인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내 소중한 친구잖아. 우리 사이의 선은 분명히 있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진짜 내가 오바한 건가?!“나 그렇게 잘난 사람 아니야.”내가 대답했다.“어.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그래. 알았어.”반경우의 통화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문 앞에는 끈질기게 들러붙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나는 다가가서 물었다.“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지 알았어?”나는 반경우의 전 여자친구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사람을 둘이나 데려왔다. 딱 봐도 내가 열세에 처한 걸 보자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알았을까?”나는 어이가 없었다.“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나와 반경우의 전 여자친구는 털끝만큼도 상관없는데 왜 날 오해하는 것인지 진짜 알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그녀와 반경우는 이미 헤어진 사이이니 설령 내가 그와 뭐가 있다고 해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는 막무가내로 말했다.“동성에서 꺼져.”그 말을 듣고 나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어디 있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사람의 의사는 전혀 상관 않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반경우의 전 여자친구는 더 이상 나와 말할 의향이 없었던지, 미간을 찡그리며 명령을 내렸다.“저년의 휴대폰과 주민증을 빼앗아.”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자 위협적으로 말했다.“가져가. 아무것도 없으면 경우를 찾아가면 되지. 너도 그걸 원하지는...”그녀는 내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후에 그에게 구출되어 석 씨 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정말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네. 대표님의 존함은 석지훈입니다.”윤승민이 떠난 후 나는 욕실로 돌아가 몸을 닦았다. 깨끗이 닦고 나온 뒤, 나는 가정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하여 약을 먹었다.항암제를 먹고 나니 몸이 한결 편해졌다. 이때 가정부가 식사를 가져왔다.내가 물었다.“대표님은 계신가요?”“대표님은 서재에 계세요.”나는 응수하고는 식사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몇 입 먹고 말았고 휴대폰도 없어 심심했다.나는 그 헐렁한 흰 셔츠를 입고 뒤뜰로 나갔다. 밖은 좀 추웠지만 견딜 만했다. 가정부는 눈치 빠르게 짙은 검은색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코트를 입으니 발목까지 내려와 나를 더 작고 왜소해 보이게 했다.하지만 사실 내 키는 172cm였다.키는 컸지만, 몸매 비율이 완벽했고 길고 흰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고 완벽한 외모에 머리숱도 많고 길고 윤기 있었다. 절대 석지훈이 말한 것처럼 못생기지는 않았다.가정부는 옷이 큰 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대표님의 옷이에요. 집에 다른 사람 옷은 없고 제 옷은 아가씨께 드리기엔 적합하지 않아서 조금만 이해해주세요!”석지훈의 사람들은 나에게 매우 깍듯했다. 내가 고맙다고 하니 가정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뭐든 필요하면 부르세요. 저는 저녁 준비하러 갈게요.”가정부가 떠난 후 나는 혼자 정원을 거닐었다. 3월의 따뜻한 봄날, 온갖 꽃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시기였다.석지훈의 정원은 그 사람처럼 삭막하지 않았고 매화꽃, 철쭉, 복숭아꽃 모두 있었다.매화꽃은 이미 시들어 꽃을 거의 볼 수 없었지만, 복숭아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낮게 핀 복숭아꽃 가지 하나를 꺾었다. 쉽게 꺾였다.나는 크고 아름다운 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코끝에 가져다 대고 복숭아꽃 향기를 맡았다.복숭아꽃 향기는 은은하고 달콤했다.문득 고현성이
반경우는 내게 귀띔 같은 건 해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석지훈에 대해서는 드물게 경고를 했다.“수아야, 석지훈은 빈손으로 시작해서 지금 이 규모를 이룬 강력한 남자야. 그의 수단, 잔인함 그리고 냉혹함은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수준이야! 그러니 그 사람에게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반경우가 석지훈에 대한 평가는 만회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내가 아는 석지훈은 냉혹했지만, 반경우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나도 석씨 가문에 대해서 잘 몰라. 많은 이야기는 아빠한테 들은 거지. 아빠는 석씨 가문이 잔인한 집안이라 했거든. 석지훈과 같은 세대에는 원래 아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석지훈 한 명뿐이야. 듣기로는 다들 패배해서 탈락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나는 놀라서 물었다.“가문의 음모론 같은 건가?”반경우는 부정하며 말했다.“아니, 석씨 가문에는 음모론 같은 건 없었어.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지만, 석지훈 그 남자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결국 너만 힘들어질 테니까! 수아야, 그는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어야 하는 남자야. 난 그가... 전 여자친구가 그러는데 어젯밤 그가 널 구했다더라.”“맞아. 어젯밤 석지훈이 나를 구해줬어.”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반경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결코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가 아니야. 우리 동성 사람들의 평가로 말하자면, 냉혹하고 무정한 존재지. 그가 너를 구했다는 것은 너에게 마음을 줬다는 뜻이고 나는 네가 결국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돼.”반경우가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석지훈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석 씨 별장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그도 나와 대화를 나누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반경우에게 석지훈과 나의
“나랑은 상관없어. 그리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다만 혜원이는 절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연시혁이 너무나 진지하게 말해서 나는 호시심에 물었다.“혜원이가 전화로 다른 말을 더 한 거지?”“혜원이가 자기는 지금 의사고 너를 상대할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연시혁이 설명했다.전화를 끊은 후, 나는 한참 동안 기분이 진정되지 않았다. 혜원이가 말하는 나를 상대할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는데 단숨에 나를 죽일 수 있는 것 같았다.나는 결과가 안 보이는 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저었는데 오혜원이 무슨 짓을 하든 다 받아주고 그녀가 더 상처를 받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하고 나왔는데 왠지 소파에 버려진 휴대폰이 석지훈 것과 똑같았다.윤 비서가 얘기하기를 커플 모델처럼 보이는 이것은 석씨 가문에서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한 거고 현재 두 대만 사용하고 있는데 그 사용자가 바로 나와 석지훈이라는 것이다.위챗에 수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열어보지 않고 배달을 시켜 한바탕 먹은 다음 밖에 나가 산책했다.나는 한적한 곳으로 걸어가서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클릭해 보니 최희연, 윤다은 그리고 고현성까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제일 먼저 최희연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나 어제 용기 내서 진유겸에게 뽀뽀했어.]그녀는 결국 진유겸을 이번 복수극에 끌어들이고 진유겸의 감정을 이용하려는 것이다.나는 물었다.[무슨 반응이었어?][수아야, 그의 입술이 너무 차가웠어.][...]나는 최희연이 이토록 빨리 답장이 올 줄을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마치 휴대폰을 계속 들고 있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내가 답변했다.[너 설마 유겸 씨를 좋아하니?]최희연은 대답 대신 줄임표를 연달아 보냈는데 아마 그녀도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나 역시도 개인적으로 감정이 복잡했는데 최희연이 상대하는 남자가 다름 아닌 진유겸인데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
석지훈은 공적인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SNS라니.나는 태블릿을 들고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되던 그의 계정이 순식간에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오빠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함 집사는 내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의 명성은 항상 높았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대표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며, 그의 연락처를 얻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SNS 계정을 개설하셨으니 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약혼 소식을 발표했으니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겠지요.”함 집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드물게 자신의 직책을 넘어선 말을 덧붙였다.“대표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주님 한 분뿐일 겁니다. 가주님, 제가 몇 년 동안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평생 믿으셔도 될 사람입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제가 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태블릿을 함 집사에게 건네고 휴대폰을 꺼내 계정 이름을 ‘연수아’로 변경했다.그리고 계정과 비밀번호를 함 집사에게 알려주며 인증을 부탁했다.함 집사는 빠르게 나를 석씨 가문의 대표로 인증했다.나는 이 계정으로 석지훈의 게시글을 다시 리트윗하려 했지만 인기 댓글 중 하나를 보고 놀랐다.어떤 사용자가 ‘원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흑흑, 드디어 석 대표님과 연수아 씨가 인연을 맺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팬으로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이 귀여운 댓글을 보니 원태웅이 떠올랐다.우리가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우리가 화해하지 않았던가.댓글 아래에는 나와 석지훈의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나도 여전히 아름답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