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을 나서며 4층을 둘러보았지만 고정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혹시 이미 떠난 걸까?멀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이유가 단지 윤다은을 한 번 보기 위해서란 말인가?1층으로 내려가 병원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는 고정재가 눈에 들어왔다. 비가 많이 잦아들어 가랑비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고정재는 얇은 정장을 입고 그 안에는 연한 아이보리색 셔츠를 매치했다. 손목에는 롤렉스 시계가 빛났다. 그는 키가 굉장히 컸고, 앞머리를 올려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색 대나무 손잡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맑고 반짝였으며 마치 수많은 별빛이 담긴 듯했다.그 눈 속의 광활한 별빛은 내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순수한 세계였다. 이제는 감히 가질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그의 얼굴을 닮은, 하지만 그와는 다른 남자를.나는 나에게 있었던 집착을, 순수한 사랑을 배신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에 고현성을 만났으니 그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정재 씨.”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다가가서 그를 불렀다.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같이 걸을래?”내 차가 병원 앞 계단 아래에 있었으니 바로 떠나도 됐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무정해 보일 것 같았다.“그래요.”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이며 내 옆에서 걸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근처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고정재는 거절하지 않았다.카페에 들어가자 마침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가장 앞쪽 무대에서 누군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궁금해하자 직원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저희 카페에서는 매일 피아노 연주를 하는데요, 잘 치는 분께는 커피가 무료예요. 지금 저분은 많은 상대를 이겨내고 무대를 지키고 계세요.”나는 호기
바람이 사는 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애의 곡이었다. 이 곡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력은 여기에 있었다.관객들은 내게 표를 주었다. 내 연주가 인정받았다.직원이 마지막으로 도전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을 때 아까 그 정통 검은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손을 천천히 들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분과 한번 겨뤄보고 싶어요.”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이 카페의 주인이었고 마지막 우승자를 기다리며 직접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나는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무엇보다 고정재가 이곳에 있으니까.피아노에 있어서는 그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다시 현대 피아노곡을 한 곡 연주했고 그 중년 남자는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했다. 그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고 나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그가 이기자 나는 고정재에게 무력하게 웃어 보였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미소로 내 곁에 다가와 말했다.“내가 한번 해볼게.”고정재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상대의 격식 있는 예복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그는 고결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고정재는 감정 없는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는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내가 방금 연주했던 곡을 선택했다. 같은 곡으로 그 중년 남자를 이겨내려는 듯했다.고정재의 손놀림은 빠르고 연주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연주를 볼 때마다 그에게 사로잡히곤 했다.그 중년 남자는 고정재가 한 소절을 치기도 전에 이미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관객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정재는 완벽하게 승리했고 우리는 무료 커피를 얻었다. 잠시 카페에서 쉬다 나왔을 때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중년 남자가 우리를 따라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 앞에 다가와 손을 내밀며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이 카페의 주인입
고현성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나한테 말했으면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을 왜 그렇게 했어?”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요?”고현성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참, 바보 같긴.”나는 고현성의 무릎 위에 앉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웃었다.“바보 아니거든요.”방금도 카페 사장님을 한눈에 알아봤잖아.내 말을 듣고 나서 고현성은 코를 킁킁거리며 뭔가 물어보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고정재 만났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너한테서 고정재 냄새가 나.”고현성의 표정은 이미 싸늘해졌다. 도저히 카페에서 고정재를 만났다고 말할 수 없어 나는 얼른 거짓말을 했다.“돌아오기 전에 다은이를 보러 갔거든요. 마침 정재 씨도 병원에 와 있길래 잠깐 얘기했어요. 그다음엔 바로 비서랑 같이 돌아왔어요.”고현성을 속이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화를 내는 건 원치 않았다.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고정재가 다은이를 만나러 갔다고?”나는 슬쩍 둘러댔다.“네, 결국 마음이 약해진 거겠죠?”그러자 고현성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정재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그래요?”나는 대화를 돌리듯 물었다.“그런데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요?”“짜증 나는 남자의 냄새.”“...”나는 그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그래도 그 사람 현성 씨 형이잖아요.”고현성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은 채로 2층으로 올라가서 침대에 눕혔다.그가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얼른 일어나 그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나 피곤해요.”고현성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는 힘이 넘치더니.”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부기는 가라앉았어? 화장해도 괜찮아?”“부기 다 빠졌어요.”“밥은 먹었어?”고현성의 태도가 갑자기 무척 부드러워졌다.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내가 먼저 유혹했지만, 고현성은 결국 나를 갖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말 안 듣네.”나는 씩 웃었다. 그는 나를 안고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너 수술한 지 겨우 두 달밖에 안 됐잖아.”고현성은 내 몸을 걱정했다.그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따스해졌지만, 내 병세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주방을 떠나 방으로 돌아와 항암제를 삼켰다.병이 좋아지길 바라며, 내게 너무 큰 시련이 오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약을 먹고 나니 오혜원의 일이 떠올랐다. 비서는 연 씨 가문에서 오래 일했으니, 그가 이 일을 조사하면 분명히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내일 출근하면 오혜원이 예전에 떠난 일을 조사해 줘요. 그리고 오혜원의 현재 행방도 알아봐 주세요.]문자를 보낸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고현성은 이미 스테이크를 만들어 놓았다. 식탁에 앉으니 접시 옆에 장미 꽃잎 몇 개가 놓여 있었다.“어머, 이거 어디서 났어요?”장미 꽃잎은 아주 작았는데 막 피려는 꽃봉오리를 딴 것 같았다.고현성은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건네며 말했다.“방금 뒤뜰에서 따온 거야.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예뻐 보여서 따 왔어.”나는 웃으며 물었다.“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예쁘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현성 씨는 꽃 꺾는 취미가 있었네요?”내가 놀리자 고현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얼른 밥 먹어.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일찍 쉬어야지.”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식사했고 고현성은 노트북을 켜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그의 옆에 앉아 물었다.“회사 일이 많아요? 다은 씨까지 다 국내로 불러들이고.”고현성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파에 기대어 설명했다.“고씨 가문은 최근 몇 년 동안 너무 빠르게 성장했어. 규모가 작았을 때는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잡다한 일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관리할 수 없어. 게다가 믿을 만한 사람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하다가 답했다.“신경 쓸게요.”“그래, 일찍 쉬어.”고현성은 나한테 축객령을 내렸다.나는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그럼 현성 씨는요?”“난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았어.”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뒤척이다가 새벽 3시가 되었을 때쯤, 고현성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는 천장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의아하게 물었다.“방금 깬 거야, 아니면 아직 못 잔 거야?”나는 고개를 저으며 칭얼거렸다.“잠이 안 와요.”고현성은 셔츠를 벗고 구릿빛의 단단한 가슴을 드러냈다. 그는 다가와 나를 껴안으며 물었다.“자주 그래?”“네. 요즘 계속 잠이 안 와요.”이 말에 고현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내가 여기 있을게.”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숨결이 느껴져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아침에 일어나 보니 고현성은 없었지만, 침대 옆에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약 챙겨 먹어.’나는 일어나 세수하고 약을 먹은 후, 화장하고 화사한 봄 원피스로 갈아입고는 차를 몰고 회사로 갔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강해온과 마주쳤다.그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왔다.“대표님.”나는 궁금해서 물었다.“어디 가는 길이에요?”“진씨 가문과 몇 가지 협력 사업을 논의하러요.”진서준이 죽기 전에 연 씨 가문은 진씨 가문과 계약 몇 건을 체결했었다. 그것도 연 씨 가문에서 아주 중요한 계약들이었다.하지만 진서준이 죽고 나서 나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취소하세요.”진씨 가문과의 협력을 취소할 것이다.위약금을 물더라도 상관없었다.강해온은 주저하며 말했다.“대표님, 사실 이 건에 대해 저도 여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최희연 씨가 이 계약들을 직접 맡고 싶다고 하셔서요!”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희연이가 진씨 가문과
최희연이 진씨 가문과 계속 협력하고 싶다고 하니 나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강해온에게 일단 가서 진씨 가문과 관련 사항을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강해온이 가고 난 뒤, 나는 어젯밤 고현성의 말이 떠올랐다.나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나는 비서 실장에게 최근 연 씨 가문의 자금 흐름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다.자료를 펼쳐 보니, 일부 자금의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았다. 재무팀에서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범할 리 없었다.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기에 그들은 자금 사용처를 명확히 표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연 씨 가문에서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은 나와 비서 강해온뿐이었다.강해온은 9년 동안 나와 함께 일했고 연 씨 가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나는 그를 항상 신뢰했기 때문에 연 씨 가문의 크고 작은 일들은 대부분 그에게 맡겨왔다.특히 내가 고현성과 결혼한 후 회사 운영을 멀리하게 되면서, 연 씨 가문은 사실상 강해온의 손에 있었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는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어젯밤 고현성이 얘기해주기 전까지는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속의 의심은 점점 커져 절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나는 사무실에 오랫동안 앉아 생각했다. 의심이 들면 쓰지 말고, 쓰기로 했으면 의심하지 말라라는 말을 잘 알면서도 나는 망설였다. 그때 강해온이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요.”나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무슨 일이죠?”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방금 고 대표님께 전화가 왔어요.”그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그는 태연하게 말했다.“제가 회사 자금에 손을 댔습니다.”나는 차분하게 물었다.“그 돈으로 뭘 했죠?”이 질문에 강해온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전화로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말했다.“돌아와서 얘기해요.”그리고 덧붙였다.“강 비서가 무슨 말을 하든 난 믿을 거예요.”
최희연을 만났을 때 그녀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아래층에서 임지혜를 만난 일을 이야기해주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듯 말했다.“나도 요즘 병원에서 자주 봐.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의사를 붙잡고 뭔가 자꾸 요구하는데, 정말 정신 나간 것 같더라고.”정신병?!설마 고현성에게 차이고 나서 미쳐버린 건 아니겠지?나는 호기심에 물었다.“병원에서 소란 피우기도 해?”“그건 아닌데, 입으로‘혜원이는 날 속일 리 없어’ 이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더라고.”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혜원이?”임지혜가 어떻게 혜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어. 나도 누군지 모르겠어.”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그 여자 진짜 꼴 보기 싫어. 예전에도 짜증 났는데, 저렇게 미쳐 날뛰는 꼴을 보니 또 불쌍하기도 해! 그런데 저 여자가 예전에 차로 서준을 쳤던 거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도 싹 사라져.”최희연도 나처럼 지금의 임지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역시 우리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 같다.나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그 여자 얘긴 그만하고, 너 퇴원은 언제 해?”“곧 할 거야. 유겸 씨가 데리러 온대.”진유겸 얘기가 나오자 최희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병원에 보러 왔었어?”내가 물었다.“어. 내가 누군지도 알더라.”최희연은 약간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사실 난 서준과의 관계를 숨기려고 했거든. 그런데 어제 그 사람이 병문안을 왔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나와 서준의 관계를 얘기하더라.”나는 호기심에 물었다.“그가 뭐라고 했는데?”“나는 서준의 작은아버지야. 너도 나를 그렇게 불러도 돼! 넌 서준의 생전 유일한 여인이니 우리 반쪽은 같은 식구라고 봐야지. 앞으로 너의 남은 여생, 내가 책임질게.”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이게 그 사람이 한 말이야. 난 거부할 틈도 없었어.”진유겸이 그녀의 여생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했다니,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물었다.“뭘 그렇게 거부하고 싶었던 거야?”혹시 그에게
나는 고현성이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누구에게 말했든지 간에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은 분명했다.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쩔 줄 몰랐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그와의 거리가 갑자기 너무 멀어져 버린 것 같았고 최근 며칠 간의 모든 기쁨과 행복이 거짓말 같았다.“너 언제 돌아와?”나는 고현성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을 느꼈다. 전화 너머에 있는 여자가 그에게 특별히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나는 슬픔과 억울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나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았고 그와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왜 그와 다시 시작한 거지?“그래. 며칠 후에 데리러 갈게.”고현성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회사로 돌아왔다.사무실에 앉아있으니 머리가 멍해지고 마치 세상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강해온이 돌아왔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괜찮으세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괜찮아요.”많은 일을 겪으며 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법을 익혔다.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은 너무나 선명했다.“대표님, 죄송해요.”강해온은 사과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이유를 말해보세요.”그가 공금을 횡령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내가 지나치게 차분한 것을 보고 강해온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그 돈은 스위스로 보내졌어요.”“그걸로 뭘 했나요?”“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줄곧 모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일은 7년 전, 심 비서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시킨 일로 그때 그는 이건 대표님 부모님의 뜻이라고 하셨죠.”심 비서는 아빠의 비서였다.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매년 이렇게 큰 금액이 스위스로 흘러갔는데 왜 나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의심도 안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
석지훈은 공적인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SNS라니.나는 태블릿을 들고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되던 그의 계정이 순식간에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오빠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함 집사는 내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의 명성은 항상 높았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대표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며, 그의 연락처를 얻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SNS 계정을 개설하셨으니 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약혼 소식을 발표했으니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겠지요.”함 집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드물게 자신의 직책을 넘어선 말을 덧붙였다.“대표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주님 한 분뿐일 겁니다. 가주님, 제가 몇 년 동안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평생 믿으셔도 될 사람입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제가 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태블릿을 함 집사에게 건네고 휴대폰을 꺼내 계정 이름을 ‘연수아’로 변경했다.그리고 계정과 비밀번호를 함 집사에게 알려주며 인증을 부탁했다.함 집사는 빠르게 나를 석씨 가문의 대표로 인증했다.나는 이 계정으로 석지훈의 게시글을 다시 리트윗하려 했지만 인기 댓글 중 하나를 보고 놀랐다.어떤 사용자가 ‘원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흑흑, 드디어 석 대표님과 연수아 씨가 인연을 맺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팬으로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이 귀여운 댓글을 보니 원태웅이 떠올랐다.우리가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우리가 화해하지 않았던가.댓글 아래에는 나와 석지훈의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나도 여전히 아름답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