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이 대답했다.“넌 네 여자친구랑 춤추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우리한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거야?”그는 팔짱을 끼며 웃는 듯 마는 듯했다.도겸이 말했다.“그렇게 떠들썩하니 못 본 척하기가 더 어려워.”현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거절당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은이의 성격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도겸은 무표정하게 어두컴컴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고, 반쪽 얼굴은 그늘에 잠겼다.“내가 말했지, 너한테 기회가 없을 거라고.”현빈은 웃음을 지었다.“난 오히려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알잖아, 넘기 어려운 은 산일수록 나한테 승부욕이 더 생긴다는 거. 한 번 실패했다고 매번 지는 것은 아니잖아. 언젠가 난 산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거야.”도겸은 피식 웃었다.“산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넌 이미 산 중턱에서 떨어져 죽었을 거야.”“그래도 괜찮아. 노력을 할 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건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아. 하지만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도겸은 현빈이 무슨 듣기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직감했다.“가장 슬픈 것은 거절당할 기회도 없이 소탈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아쉽게도 아무리 몰입해서 연기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거든.”말을 마치고 현빈은 차 키를 꺼내 운전석에 앉았다.떠나기 전에 그는 특별히 차창을 내려 웃으며 말했다.“여자친구를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아쉬운 척 뽀뽀도 해주고 그래. 이렇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도겸은 멀어진 차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혜가 찾아왔다.“왜 나왔어요? 안 추워요?”“맑은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오늘 활동 이미 끝났어요. 오늘 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응, 가자.”경혜는 멈칫했다.“가요, 어디로요?”“기숙사로 데려다줄게.”도겸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앞장섰다.경혜는 반응하더니 입가
정은은 민지의 식사량을 떠올리며 또 그녀 앞에 놓인 몇 가지 음식을 훑어보았다.‘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간식에 불과해. 두 시간 뒤면 배고프다고 야단을 칠 텐데.’그러나 뜻밖에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민지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어머...’정은은 깜짝 놀랐다.‘진짜 배가 안 고픈 거야?’만약 민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울면서 반박했을 것이다. ‘배고파요, 곧 굶어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렇다, 지금 민지는 벌써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눈앞이 침침하며,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감자칩, 과자, 케이크, 닭발, 호떡 등 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아악! 먹고 싶어 죽겠어! 참아야 돼!’정은은 그런 괴로운 민지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 줄 알았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민지가 여전히 이렇게 조금밖에 먹지 않자, 정은은 그제야 깨달았다.“민지야, 너 지금 다이어트 하는 거니?”“네! 정은 언니, 이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분명히 언니랑 저랑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언니는 점심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잖아요. 저는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배가 고픈 거 있죠. 힝, 너무 불공평해요...”“왜 갑자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건데?”이것은 정은이 알던 민지가 아니었다.그녀가 아는 민지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항상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정은은 눈빛이 깊어졌다.“너, 지금 연애하는 거 아니야?”이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서준이 고개를 홱 돌렸고, 검은 눈동자는 횃불처럼 빛났다.“누구랑?”민지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야! 절대로!”정은이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한 여자가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지 시작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이
하정남은 제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예전에는 남이 어떻게 말하든 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왜 갑자기 살을 빼겠다는 거야? 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난관적이어서 종래로 몸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뚱뚱해서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해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다이어트를 하겠다니?[민지는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을 빼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일에 부딪힌 거야?’하정남은 가슴이 떨렸다.민지는 하정남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뉴스에서 그러던데, 적당한 다이어트는 몸에 좋다고 했어요. 나도 이렇게 계속 뚱뚱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하정남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뉴스에서 들었다고? 이상해! 분명히 이상해!’그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는 먹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틱톡이 유행하는 요 몇 년 동안 민지는 영상 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다.그런데 뉴스 하나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다니.이때 하정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너 연애라도 한 거냐?”민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하정남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사랑을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아빠, 나 아직 수업이 있는데, 곧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반응이 이렇게 큰데 아직도 발뺌을 하는 거야?! 흥! 우리 딸 아직 어리니, 어느 남자가 감히 지금 내 딸을 빼앗아간다면, 난 그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민지는 아침을 사서 곧장 교실로 갔다.오늘은 재석의 수업이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정은과 서준은 이
곧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재석이 교실에 들어섰다.“오늘 우리는 분자의 진화 및 시스템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수업 시작한지 10분, 민지는 풀이 죽은 채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요 며칠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야?”“그래!”민지는 화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준은 멈칫했다.“나도 엄청 야위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 다이어트는 정말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나도 결심했어.”“응?”“다이어트 포기할 거야! 죽어도 살 빠지 않겠다고!”“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이따가 수업 끝나면 내가 너랑 정은 언니한테 밥 사줄게, 응?”서준과 정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민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그래, 그럼 이렇게 정하자!”서준과 정은은 어리둥절해졌다.“스테이크를 먹을래, 아니면 샤브샤브 먹을래? 아니면 분식집? 아니면 뷔페? 아니면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과 콜라도 되는데! 아니면... 다 먹을까? 종류별로 시키면 되지! 이게 좋겠네!”민지는 배를 곯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준비...’재석은 강단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지는 정은과 서준을 끌고 교실을 뛰쳐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정은 학생은 좀 남아...”재석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한끼 배불리 먹은 민지는 만족스럽게 의자에 기대었고, 온몸에서 쾌적함을 발산했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내가 왜 살을 빼야 하는 건데? 누가 원하면 가서 빼라 그래, 어차피 난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호감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굶지 않을 거야.’태민에 대해서는...상대방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지는 더 이상 헛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의 남자친구에게 반하겠어?’오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선, 선배님...”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조금이요.”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재석이 또 물었다.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물의 온도가 컵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정은은 방금 허리에 닿은 그 뜨거운 온도를 떠올렸다.똑똑-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 정은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재석이 밖에 서 있었다. “신발.”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뜻밖에도 개에게 물려간 그 신발을 되찾았던 것이다.“고마워요, 선배님.”“별 거 아닌데 뭘.”...오후에 정은은 한잠 잤다.그리고 2시에 일어나서 실험실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서준은 이미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아, 민지는 마실 거 사러 갔어요.”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민지는 밀크티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정은의 것도 있었다.이 실험실은 여전히 전처럼, 실험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그들이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수시로 간식과 물컵을 여기에 놓을 수 있었다.서준이 먼저 밀크티 한 잔을 받을 때, 정은은 깜짝 놀랐다.전에 민지가 아무리 말려도 서준은 한 번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가끔 한 번 마셔도 민지의 핍박을 받아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만 골랐고, 마지막에 태반이 남아 있었다.이번엔...“쮼, 어때? 새로 나온 밀크티 맛있어?”“...음.”“다음에 내 거 한 번 마셔 봐, 이것도 맛있어.”“응.”정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 지금 동쪽에 걸려 있는지 아니면 서쪽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세 사람은 실험실에서 오후 내내 실험을 했고, 밤이 되자, 민지와 서준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 언니, 안 가요?”“난 마무리 좀 하고. 이따가 갈게.”“그럼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요.”“응.”7시, 정은은 실험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다음 떠났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졌다.찬바람이 불자, 정은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걸어가는 뚱뚱한 공과 같았다.“정은아...”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
여전히 서비대학교 근처의 그 식당이었다.정은과 재석이 도착했을 때, 현빈은 이미 안에 있었다.“정은아, 왔어...”그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은에게 집중했다.마치 재석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오래 기다렸죠, 심 대표님.”‘심 대표님’이란 호칭에 재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현빈은 그제야 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 교수님, 또 이렇게 만났네요.”재석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심 대표님과 꽤 인연이 있나 봐요.”“그럼 들어오세요.”말하면서 현빈은 재석을 자신의 옆자리로 인도한 후, 또 정은을 위해 다른 한쪽의 의자를 당겼다.이 순서대로 앉으면, 재석 옆에 현빈, 현빈 옆에 정은이었다.“저쪽은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사람들 드나들면, 바람이 세니 정은아, 넌 그냥 내 옆에 앉아.”말하면서 재석은 자기 옆의 의자를 당겼다.정은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앉았다.그렇게 정은 옆에 재석, 재석 옆에 현빈, 세 사람은 이런 순서로 앉았다.“좀 따뜻해졌어?” 재석은 현빈의 어두운 안색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쪽은 바람이 정말 세서 확실히 쌀쌀하네요. 그럼 나도 안쪽으로 앉을게요.”그리고 세 사람은 현빈, 정은, 재석의 순서대로 앉았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난 이미 주문했어. 모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야.”정은은 고맙다고 말했지만, 재석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님, 메뉴에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좀 봐요.”“아니야, 난 다 돼.”“그럼 절대로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어요.”“좋아.”현빈은 마음이 씁쓸했다.‘왜 나한테 메뉴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왜 나한테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라고 하지 않는 거냐고?’그러나 현빈은 자신이 요리를 주문했다는 것을 잊었다.정은은 자연히 현
현빈이 말했다. “이번 주는 주로 주체의 구조를 짓기 시작했고, 현재 진도는...”현빈이 본론을 얘기하자, 정은은 열심히 듣기 시작했고 씹는 동작도 느려졌다.마침 치킨이 올라왔는데, 재석은 하나 집어서 정은의 그릇에 넣으려 했다. 같은 시간, 현빈도 생선 고기를 집어주었다.두 사람은 멈칫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교수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심 대표님보다 못하죠.”정은은 앞에 있는 치킨과 생선을 바라보았다.“고마워요. 다 이리 줘요.”두 남자는 그제야 눈을 돌렸다.“물고기는 고단백이라서 많이 먹어.”“치킨이 엄청 바삭바삭해. 네가 좋아하는 맛이야.”“감사합니다, 심 대표님, 선배님.”정은은 두 사람을 공정하게 대했다.“얼른 먹어요, 나한테 집어줄 필요 없고요.”분위기는 방금 전처럼 싸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쾌하지도 않았다.바로 이때, 문이 열리더니 인훈이 찬바람을 맞으며 들어왔다.“미안 정은아, 길이 막혀서.”“오빠? 왜 왔어? 이번엔 안 온다며?” 정은은 질문을 하며 얼른 앉으라고 했다.5일 전, 세 사람은 단톡방에서 약속 시간을 잡았는데, 인훈은 출장을 가야 하는 바람에 이번 주에 올 수 없다고 했고, 현빈에게 위탁하여 공사 진도를 정은에게 보고하라고 했다.그래서 음식이 올라오자, 그들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기 시작했다.인훈은 맞은편에 앉아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이번에 아주 순조로웠어. 국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주문했기에, 어젯밤에 바로 돌아왔어. 오늘 공사장에 다녀왔는데 큰 문제도 없더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것이니, 그래도 직접 와서 소통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정은은 재빨리 종업원에게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했고, 또 요리 두 개를 더 추가했다.인훈은 정말 배가 고팠다.젓가락을 들자마자 먹기 시작하더니, 배를 조금 채우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그의 눈빛은 먼저 정은에게 떨어졌고, 이어서 재석에게 떨어졌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고, 지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전하고 있는데!’선우는 또 다른 한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도겸은 한 잔 한 잔 이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공도 치지 않았으며 여자가 다가오면 더욱 멀리 피했다.다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우리 도겸이 형 지금 정말 침울해진 것 같아.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네!”“꺼져, 오글거려 죽겠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우리 도겸이는 사랑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니, 이건 일편단심이라고!”“그래도 여자는 다 똑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를 살 수 없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선우는 그들이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을 듣고 즉시 호통을 쳤다.“이제 그만 좀 해. 그딴 말 좀 적게 하고. 너희들은 뭐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아!”그들 중에는 심지어 ‘소정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선우는 가슴이 떨렸다.그것은 절대로 도겸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는 이름이었고, 도겸은 듣자마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동건은 연속 몇 판 지자, 카드를 던졌다.“재미없네. 너 무슨 속임수 썼지? 어떻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거야?”“형은 운이 나쁜 데다가 머리도 좋지 않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야! 전선우, 너 많이 컸다?”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칭찬으로 들을게요.”동건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놀아.”그가 가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자연히 흩어졌다.선우는 카드놀이를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술을 마실 흥미도 없었다. 무대 아래는 분위기가 막 뜨거워졌기에, 춤을 춰도 재미가 없어 아예 소파 구석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보았다.그렇게 선우는 현빈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모임? 누구랑 가족 모임에 참가한 거야?” 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사진을 클릭하며 맛있는 것이 참 많다고 감탄하려 하다가, 갑자기 사
현빈은 미소가 굳어졌다.계속 사진을 뒤지니, 다음 사진이 바로 그가 방금 찍은 음식 사진이었다.그는 마음이 움직여 SNS를 클릭해 이 사진을 올렸다.[가족 모임.]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고, 일부 사람들은 댓글을 달며 소란을 피웠다.[집잔치야?][현빈이 형 또 새 애인 생겼어!][모처럼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드디어 금융 뉴스가 아니네.][우리 형님 몰래 큰일을 해냈네요][이야, 전에 같이 솔로로 지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여자 친구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간 거야?][쯧쯧,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이제 결혼하려는 거야?]현빈은 사진을 클릭하며 쳐다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사진을 확대한 뒤,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서 정은의 반쪽 얼굴을 발견했다.비록 턱과 입술밖에 안 보이지만, 현빈의 친구들은 저마다 홈즈로 변신하여 이 실마리를 발견했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하려 했고, 생각하다 또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아무튼 모두들 농담이었으니, 만약 특별히 해석한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았다.이때, 현빈은 갑자기 문자 한 통을 받았다.대학 동창인데 지난번에 그 샤브샤브 가게 사장님이었다.[축하한다, 친구야.][다음에 샤브샤브 먹으러 오면 무료야!]‘됐어, 답장하기 귀찮아.’...밤의 장막이 내리자, 등불이 켜졌다.전선우는 모이자며 동건과 도겸을 불렀다.동건은 처음에 퇴근한 수민을 데리러 가야 한다며 거절했다.그러나 5분 후에 동건은 다시 전화를 했다.[지금 시간 생겼어. 곧 도착할 거야.]선우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아, 수민이가 임시로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거든.]그리고 잠시 후 다시 덧붙였다.[오늘 밤을 새워야 한데.]선우는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수민, 수민, 그놈의 수민...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은? 진짜 여친도 아닌데.’“형 진짜 조수민에게 반한 거 아니지?”맞은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곧 버럭 했다.[꺼져! 내가 그
현빈이 말했다.“이렇게 푸짐한 밥상에, 정은이는 또 이원이 처음이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이 제안에 두 노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아직 손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이춘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확실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현빈아, 너 좀 잘 찍어. 나중에 프린트해서 앨범에 넣을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저 말고 이모님에게 찍어달라고 해야죠.”“허허, 나 좀 봐, 너도 들어와야 한단 걸 깜빡했네...”현빈은 가정부를 불었다.정은은 얌전하게 봉수진의 곁에 서서 웃으며 그녀의 팔을 껴안았고, 옆에는 현빈이 서 있었으며, 가장 왼쪽에는 이춘재였다.“준비되셨나요?” 가정부가 물었다.봉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찰칵.셔터를 누르면서 이 순간이 고정되었다.두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정은은 방긋 웃고 있었으며, 현빈도 담담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가정부는 잘 못 찍었을까 봐 몇 장 더 찍었다.두 노인은 사진을 보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가정부는 핸드폰을 현빈한테 돌려줬다.봉수진은 사진을 꼭 프린트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안심하세요. 저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봉수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현빈은 사진을 보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모님의 월급을 좀 올려도 될 것 같은데.’그리고 핸드폰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몇 장 찍어서야 앉아서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 정은은 봉수진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이춘재는 수십 년 된 이웃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멀리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찾았어! L시에서, 이미 결혼을 했더군...”“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아, 소설을 쓰는 작가야. 미스터리 소설... 참, 꼭 을 읽어봐. 내 딸이 쓴 거야... 들어봤다고? 그럼 잘 됐네! 꼭 봐야 돼!”“오늘 온 그 아이는 내 손녀인데 서비대학교의 대학원생이야. 학술 때문에 바빠서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어...”“하하... 그래, 하늘이
현빈은 정은에게 문을 열라고 표시했다.정은은 손을 들어 손잡이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그는 줄곧 현빈의 품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여전히 정은의 상상을 초월했다.청아한 디퓨저 냄새가 전해져 왔는데, 정은이 좋아하는 박하향으로 신선하고 쾌적했다.방 배치는 전체적으로 연한 색깔이었다.벽은 베이지색이었고, 나무로 된 바닥에는 부드러운 긴 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밟으면 편하고 가뿐했다.아마도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벽쪽에 특별히 책장을 몇 개 더 추가했다. 책장 앞의 창문 옆에 의자 하나까지 있었다.부드러운 햇빛이 큰 창문을 비추며 책장에 떨어졌고, 생각만 해도 편안했다.뿐만 아니라 방에는 작은 탁자, 정교하고 나른한 작은 소파, 심지어 작은 다탁까지 있었다.커튼을 열면 바깥은 독립된 베란다였다. 멀리 바라보면 하늘, 산, 숲, 풀밭이 있어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이 상쾌했다.“마음에 들어?”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말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지금의 모든 것이 너무 환상적이네요.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처럼, 신데렐라는 공주가 되어 그녀만의 성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정은은 말투가 가벼웠고, 표정이 평온했다.그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지만, 결코 빠져들지 않았다.현빈은 고개를 돌려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신데렐라가 아니야.”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신데렐라는 영원히 연약하잖아. 왕자가 자신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넌 아니야. 넌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주동적으로 어려움을 파헤치며 자신을 구할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너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겨울 왕국의 여왕 엘사야. 용감하고 지혜롭지.”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빠가 날 이렇게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요?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거예요?”남자는 웃음을
“좋아요. 방금 들어왔을 때 힐끗 보았을 뿐,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거든요.”봉수진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불편했기에, 정은은 원래 그녀를 모시고 정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잘됐다 생각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하늘은 흐렸고, 햇빛은 구름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가느다란 빛을 비추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겨울의 J시에서 푸른 식물을 보기 어렵고, 대개 앙상한 가지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원의 화원은 예외였다.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만발했고, 겨울에 가장 선명한 색채를 이루고 있었다. 봉수진은 특별한 취미가 없어 그저 꽃과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원래 이런 일에도 흥미가 없었지만, 이춘재가 봉수진이 점차 침울해진 모습을 보고는 주의를 좀 돌리라고 권한 것이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봉수진은 장갑을 끼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작은 화원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정은도 꽃가지를 다듬고 새 흙으로 덮어주는 것을 도왔다. 봉수진은 힐끗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식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식물은 물을 많이 주고, 어떤 식물은 적게 주어야 하는지, 어떤 식물은 아예 물을 주면 안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봐도 평소에 화초를 다듬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우리 정은이는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화초 가꾸는 솜씨도 대단하구나.” 봉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화초를 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할머니께서 너무 잘 가꾸셔서 저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에요.”정은은 발밑에 자란 말리꽃을 바라보았다. 작은 떨기로 자라난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더 무성하게 자랄 것이었다.봉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듣기 좋은 말로 나를 달래는구나.”“아니에요, 진짜예요. 이 장미도 정말 예쁘잖아요.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이상한데, 마치 배추 같아요.”
“골치 아픈 아이라고요? 왜요?” 이미숙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처음 들은 정은은 호기심이 자자했다.“네 엄마는 지금 얌전하고 책 보기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 나무에 올라가 새를 잡거나 강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정말이에요?”“이곳의 복도에 총 68 세트의 가드레일이 있어. 원래는 없었는데, 나중에야 추가한 거야.”“저희 엄마 때문에요?”이춘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 엄마가 연못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어때? 상상 안 가지?”정은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상상할 수가 없네요.”“하하... 이따가 네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보여줄게. 다 증거로 남아 있어.”“지금 갈까요?”정은은 두 눈에 빛이 났다.이춘재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심지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전화를 받고 돌아온 현빈은 거실에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1층을 낱낱이 뒤졌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고, 주방으로 걸어갔다.“할머니, 할아버지와 정은이는요?”“방금까지 거실에 있었는데?”“지금은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봉수진이 말했다.“그럼 분명히 다른 데에 놀러 갔을 거야. 그냥 내버려둬. 참, 너도 오늘 야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회사로 돌아가.”“저 안 가요. 하나도 안 바쁘단 말이에요.”‘아니, 방금 집사가 그러던데. 회사 전화가 집에까지 걸려왔다고.’현빈이 다시 찾기도 전에 이춘재는 이미 사진첩을 든 채로 정은과 함께 위층에서 내려왔다.마침 봉수진도 요리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왔다.온 가족이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뒤적였다.“이건 네 엄마가 금방 태어났을 때야. 3kg넘는 하얗고 뚱뚱한 아기였지... 이것은 세 살 때 네 고모 할머니가 네 엄마에게 사준 생애 첫 하이힐이고... 이건...”두 노인은 딸을 아주 귀여워했는데, 이미숙이 태어날 때부터 실종될 때까지 수많은 사진을 남긴 뒤, 사진첩으로 만들어 기록했다.그
재석은 계속 입을 열었다. “이거... 옥수수 같은데요?”현빈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몇 번 먹어 봐서 딱 보면 알죠.”‘내가 언제 물어봤다고? 그냥 설명해 버리네. 정말 자기 자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재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은이는 정말 세심하고 자상하죠. 모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니까요.”현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들 조 교수님이 과묵하다고 하던데, 말이 꽤 많으시네요?”“말 많고 적음은 상대에 따라 다르죠. 심 대표님도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은 꽤 말을 많이 하네요. 오고 가는 말이 있어야 예의 아니겠어요?”현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자, 이제 가요.” 정은은 남은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고 찻잔까지 깨끗이 씻은 후 나왔다.고개를 들자 마침 재석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선배님, 오늘도 집에 있었어요?”“응.” 정은을 바라보는 재석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심 대표님과 함께 외출하려고?”“네, 우리...”“얼른 가자.” 현빈은 자연스럽게 정은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골목에 차를 오랫동안 세우면 또 누가 뭐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아, 네! 선배님,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재석은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귀에 거슬렸다.그는 속으로 피어오르는 의심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언제 돌아오셨어요?”현빈은 앞을 똑바로 보며 짧게 대답했다. “저번 주 금요일.”“잠깐 마트에 들러서 과일 좀 살게요.”“누구에게 줄 건데?”“당연히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 드리는 거죠.”“그럴 필요 없어. 남도 아닌 가족인데, 뭘 사? 빈손으로 가도 괜찮아.”“그래도 처음 찾아뵙는 건데 그냥 가면 좀 실례인 것 같아서요.”“그게 두 분께 더 거리감을 줄 수도 있어. 내 말 들어.”“알겠어요.”이씨 가문 본가는 유서 깊은 곳으로 호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정은은 멍해졌다.남자는 잘 재단된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몸에 꼭 맞는 핏이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얼굴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살짝 움푹 패여 두 눈은 더욱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현빈은 살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온기가 잔을 타고 손바닥에 전해졌다.“난 차 가리지 않아. 고마워.”“먼저 좀 앉아 있어요. 안에 가서 물건 좀 챙겨야 해서야. 그리고 바로 출발해요.”“알았어.”현빈은 정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맑은 차를 응시했다.예전에 현빈은 농담으로 정은에게 몇 번이나 위층에서 차 한 잔을 대접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외 없이 거절당했다.그런데 지금은 버젓이 집 안에 들어와 정은이 직접 끓인 차를 받아들고 있다니. 손 닿을 거리에서 건네받은 이 상황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현빈이 수없이 바라왔던 장면이 현실이 되었지만,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이 아니라... 남매처럼 변했기 때문이었다.‘참 아이러니하네.’혀끝에 감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현빈은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영하 3도. 정은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핑크색 패딩에 카키색 캐시미어 니트와 울 스커트를 매치했다. 스커트 길이와 패딩 길이가 비슷해 전체적인 실루엣이 단정하면서도 발랄했다.거기에 롱부츠까지 신으니 젊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어제 충분히 쉰 덕분인지 혈색도 좋아 보였다.“다 됐어요, 오빠. 가요.”정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현빈의 심장을 파고들어갔다.간지럽고 짜릿했다.“오빠?”현빈은 정신이 번쩍 들더니 다소 급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응, 가자.”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몸을 돌리는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옆에 늘어진 손은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현빈은 감정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정은은 그 뒤를 따르다가 식탁 위에
정은은 전화를 받으며 약간 멍해졌다.저쪽에서는 조용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만나기 망설여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걸 받아들이기 싫은 거야? 그때 했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어?]“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내려갈게요.” 정은은 단번에 대답했다.현빈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저쪽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현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랑 할머니가 L시에서 돌아오셨어. 네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끝냈으니 시간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너 데리고 본가에 가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이춘재와 봉수진은 L시에 머물면서 점점 그곳에 정이 들었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일 딸을 볼 수 있는 데다 소진헌과 같은 자상하고 든든한 사위가 곁에서 돌봐주니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만족스러웠다.그러다 이미숙은 출판사의 초청을 받아 G시에서 사인회를 열게 되었고, 이어서 S시로 날아가 독자와의 사인회에 참가해야 했다.물론 소진헌도 함께 가기로 했다. 출판사에서는 이미 이미숙 가족의 숙박, 식사, 항공권까지 전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경험을 보장해 이미숙이 앞으로 더 많은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출판사는 이미숙을 행사에 초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두 어르신은 가고 싶어 하면서도 긴 여행에 노쇠한 몸이 무리일까 걱정했다. 결국 이민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원래 이미숙은 혼자 G시로 가고 소진헌은 집에 남아 이춘재와 봉수진을 모시기로 했었다.소진헌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두 어르신은 그가 함께 가서 이미숙을 돌봐주길 원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였다.소진헌은 꽤 흐뭇했다. 평생 강단에 서는 것 외에는 자신이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결국 이미숙도 두 어르신의 뜻을 꺾지 못했고, 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