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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Author: 십일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

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

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

“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

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

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

“선, 선배님...”

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

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

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 조금이요.”

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

“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

재석이 또 물었다.

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

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

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

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

“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

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

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

“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

“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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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온도가 컵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정은은 방금 허리에 닿은 그 뜨거운 온도를 떠올렸다.똑똑-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 정은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재석이 밖에 서 있었다. “신발.”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뜻밖에도 개에게 물려간 그 신발을 되찾았던 것이다.“고마워요, 선배님.”“별 거 아닌데 뭘.”...오후에 정은은 한잠 잤다.그리고 2시에 일어나서 실험실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서준은 이미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아, 민지는 마실 거 사러 갔어요.”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민지는 밀크티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정은의 것도 있었다.이 실험실은 여전히 전처럼, 실험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그들이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수시로 간식과 물컵을 여기에 놓을 수 있었다.서준이 먼저 밀크티 한 잔을 받을 때, 정은은 깜짝 놀랐다.전에 민지가 아무리 말려도 서준은 한 번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가끔 한 번 마셔도 민지의 핍박을 받아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만 골랐고, 마지막에 태반이 남아 있었다.이번엔...“쮼, 어때? 새로 나온 밀크티 맛있어?”“...음.”“다음에 내 거 한 번 마셔 봐, 이것도 맛있어.”“응.”정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 지금 동쪽에 걸려 있는지 아니면 서쪽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세 사람은 실험실에서 오후 내내 실험을 했고, 밤이 되자, 민지와 서준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 언니, 안 가요?”“난 마무리 좀 하고. 이따가 갈게.”“그럼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요.”“응.”7시, 정은은 실험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다음 떠났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졌다.찬바람이 불자, 정은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걸어가는 뚱뚱한 공과 같았다.“정은아...”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7화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선, 선배님...”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조금이요.”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재석이 또 물었다.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6화

    곧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재석이 교실에 들어섰다.“오늘 우리는 분자의 진화 및 시스템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수업 시작한지 10분, 민지는 풀이 죽은 채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요 며칠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야?”“그래!”민지는 화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준은 멈칫했다.“나도 엄청 야위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 다이어트는 정말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나도 결심했어.”“응?”“다이어트 포기할 거야! 죽어도 살 빠지 않겠다고!”“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이따가 수업 끝나면 내가 너랑 정은 언니한테 밥 사줄게, 응?”서준과 정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민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그래, 그럼 이렇게 정하자!”서준과 정은은 어리둥절해졌다.“스테이크를 먹을래, 아니면 샤브샤브 먹을래? 아니면 분식집? 아니면 뷔페? 아니면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과 콜라도 되는데! 아니면... 다 먹을까? 종류별로 시키면 되지! 이게 좋겠네!”민지는 배를 곯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준비...’재석은 강단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지는 정은과 서준을 끌고 교실을 뛰쳐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정은 학생은 좀 남아...”재석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한끼 배불리 먹은 민지는 만족스럽게 의자에 기대었고, 온몸에서 쾌적함을 발산했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내가 왜 살을 빼야 하는 건데? 누가 원하면 가서 빼라 그래, 어차피 난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호감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굶지 않을 거야.’태민에 대해서는...상대방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지는 더 이상 헛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의 남자친구에게 반하겠어?’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5화

    하정남은 제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예전에는 남이 어떻게 말하든 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왜 갑자기 살을 빼겠다는 거야? 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난관적이어서 종래로 몸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뚱뚱해서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해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다이어트를 하겠다니?[민지는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을 빼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일에 부딪힌 거야?’하정남은 가슴이 떨렸다.민지는 하정남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뉴스에서 그러던데, 적당한 다이어트는 몸에 좋다고 했어요. 나도 이렇게 계속 뚱뚱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하정남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뉴스에서 들었다고? 이상해! 분명히 이상해!’그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는 먹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틱톡이 유행하는 요 몇 년 동안 민지는 영상 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다.그런데 뉴스 하나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다니.이때 하정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너 연애라도 한 거냐?”민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하정남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사랑을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아빠, 나 아직 수업이 있는데, 곧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반응이 이렇게 큰데 아직도 발뺌을 하는 거야?! 흥! 우리 딸 아직 어리니, 어느 남자가 감히 지금 내 딸을 빼앗아간다면, 난 그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민지는 아침을 사서 곧장 교실로 갔다.오늘은 재석의 수업이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정은과 서준은 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4화

    정은은 민지의 식사량을 떠올리며 또 그녀 앞에 놓인 몇 가지 음식을 훑어보았다.‘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간식에 불과해. 두 시간 뒤면 배고프다고 야단을 칠 텐데.’그러나 뜻밖에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민지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어머...’정은은 깜짝 놀랐다.‘진짜 배가 안 고픈 거야?’만약 민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울면서 반박했을 것이다. ‘배고파요, 곧 굶어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렇다, 지금 민지는 벌써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눈앞이 침침하며,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감자칩, 과자, 케이크, 닭발, 호떡 등 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아악! 먹고 싶어 죽겠어! 참아야 돼!’정은은 그런 괴로운 민지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 줄 알았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민지가 여전히 이렇게 조금밖에 먹지 않자, 정은은 그제야 깨달았다.“민지야, 너 지금 다이어트 하는 거니?”“네! 정은 언니, 이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분명히 언니랑 저랑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언니는 점심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잖아요. 저는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배가 고픈 거 있죠. 힝, 너무 불공평해요...”“왜 갑자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건데?”이것은 정은이 알던 민지가 아니었다.그녀가 아는 민지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항상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정은은 눈빛이 깊어졌다.“너, 지금 연애하는 거 아니야?”이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서준이 고개를 홱 돌렸고, 검은 눈동자는 횃불처럼 빛났다.“누구랑?”민지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야! 절대로!”정은이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한 여자가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지 시작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3화

    현빈이 대답했다.“넌 네 여자친구랑 춤추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우리한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거야?”그는 팔짱을 끼며 웃는 듯 마는 듯했다.도겸이 말했다.“그렇게 떠들썩하니 못 본 척하기가 더 어려워.”현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거절당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은이의 성격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도겸은 무표정하게 어두컴컴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고, 반쪽 얼굴은 그늘에 잠겼다.“내가 말했지, 너한테 기회가 없을 거라고.”현빈은 웃음을 지었다.“난 오히려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알잖아, 넘기 어려운 은 산일수록 나한테 승부욕이 더 생긴다는 거. 한 번 실패했다고 매번 지는 것은 아니잖아. 언젠가 난 산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거야.”도겸은 피식 웃었다.“산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넌 이미 산 중턱에서 떨어져 죽었을 거야.”“그래도 괜찮아. 노력을 할 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건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아. 하지만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도겸은 현빈이 무슨 듣기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직감했다.“가장 슬픈 것은 거절당할 기회도 없이 소탈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아쉽게도 아무리 몰입해서 연기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거든.”말을 마치고 현빈은 차 키를 꺼내 운전석에 앉았다.떠나기 전에 그는 특별히 차창을 내려 웃으며 말했다.“여자친구를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아쉬운 척 뽀뽀도 해주고 그래. 이렇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도겸은 멀어진 차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혜가 찾아왔다.“왜 나왔어요? 안 추워요?”“맑은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오늘 활동 이미 끝났어요. 오늘 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응, 가자.”경혜는 멈칫했다.“가요, 어디로요?”“기숙사로 데려다줄게.”도겸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앞장섰다.경혜는 반응하더니 입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2화

    태민은 은근히 놀랐다.“너도 그 가게의 단골이야?”“네! 거기 케이크가 꽤 괜찮거든요.”태민은 평소에 이런 키체인을 거의 달고 다니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서른이 넘은 자신이 이런 키체인을 하고 있다면 너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키체인은 태민이 새 핸드폰을 살 때부터 줄곧 걸려 있었고, 눈에 띄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놔둔 것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아가씨가 이것을 알아볼 줄이야.“몇 번 뽑았어요?”민지가 물었다.“앞뒤 합치면 아마... 세 번 정도?”민지는 이 말을 듣고 이가 깨질 뻔했다.‘왜 남들은 운이 이렇게 좋은데, 나만 재수가 없는 거지?’태민은 민지가 이를 가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괜찮다면 주소 하나 남겨줘. 집에 다른 하나 히든 키체인이 있거든. 너한테 줄게.”민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은 태민의 눈빛을 마주했다. 태민의 모습은 마치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놀아줬던 이웃집 오빠와 흡사했다.태민은 키가 1미터 78센티미터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온화하고 우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부드럽고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물처럼 세상 만물을 감쌀 수 있었다.민지는 멍하니 태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열기가 솟구쳐 볼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심지어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정, 정말... 정말 저한테 주는 거예요?”태민은 영문을 몰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한 거지?’태민은 이 아가씨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교수님, 행사가 곧 끝날 거예요. 현장에서 회수한 재료를 체크하신 다음 사인해 주세요!”“알았어, 바로 갈게.”이때 태민은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돌아오더니 민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위에 내 번호 있으니까 나한테 주소 보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581화

    재석은 떠나자, 수아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저 집에 갈게요.”말을 마치자 태민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태민은 영문을 몰랐는데, 입을 벌리고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수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그러나 교수님 대표로서 오늘 밤 태민에게 다른 임무가 있었으니 그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수아는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태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태민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분명히 두 사람은 이미 사귀는 사이였지만, 태민은 항상 수아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수아의 마음을 알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두 사람은 여태껏 사귀면서 손을 잡는 것 외에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그는 실의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이때 누군가 갑자기 태민과 부딪쳤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민지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고, 안에 과자 5개 정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었는데, 방금 태민과 부딪쳤기 때문에 좀 쏟아졌다.그녀는 빨리 사과했다.태민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괜찮아.”말하면서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좀 닦아, 음료수가 다 쏟아졌네.”“앗! 감사합니다!” 민지는 얼른 받으려 했지만, 자신의 두 손에 모두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난감해했다.태민은 민지의 궁핍함을 알아차렸다.“아니면 내가 접시 들어줄까?”“어? 괜찮으세요?”“그럼.” 태민이 접시를 받았다.민지는 손을 닦았다.“방금 정말 죄송해요. 전 성격이 너무 털털해서...”“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방금 딴 생각을 한 데다가 또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길을 주의하지 않았어.”“제가 사과로 간식 하나 드릴게요.”태민은 그제야 접시에 망고 무스, 두리안 케이크, 나폴레옹 케이크 등 여러 가지 디저트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좋아.” 그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그 두리안 케이크를 골랐다.민지는 아쉬움을 드러냈다.“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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