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가 말했다.“당시 우리는 모두 있었어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기도 잠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꺼졌단 말이에요. 이따가 또 써야 하는데, 누가 전원을 끊어버리겠어요?”정은은 이미 대충 그 이유를 추측해냈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가자, 맞은편 실험실로.”민지는 영문을 몰랐다.“거긴 왜요? 그것은 다른 전문적인 실험실인 것 같은데. 저희와는 상관이 없어요...”서준도 수상함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얼른 따라갔다.“가라면 그냥 가, 넌 왜 문제가 그렇게 많아?”‘이 자식이, 이젠 간이 부었구나!’세 사람이 맞은편 실험실에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 모퉁이에 이미 소방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아니...” 민지는 놀라서 아연실색했다.“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세 사람은 또 다른 몇 개의 실험실을 확인했다. 모두 예외 없이 부족했던 기자재는 이미 보충되었고, 전에 없었던 것도 지금은 전부 갖추게 되었다.민지는 오싹하기만 했다.“이, 이건 우리를 겨냥한 것 같은데?”전 실험실은 모두 소방설비를 갖추었지만 오직 그들의 실험실만 배제되었다. 그전에 민지는 줄곧 우연이라고 여겼다.우연히 그들이 당첨되었고, 또 우연히 붙잡혔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부총장 사무실로 갔다.백두강은 한눈에 그들이 오미선이 올해 새로 모집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특히 정은은 올해 신입생 중 처음으로 학술지 에 논문을 발표한 천재로서, 그날 정기회의에서 만장이 들끓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정은 학생,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얼마 전 현빈과 재석의 연이은 타격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부학장님, 저희 실험실이 강제로 시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백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지?”“문제라면 정말 많죠. 우선 왜 다른 실험실의 소방 기자재가 완전한데, 유
송지혜는 가슴을 안으며 싸늘하게 대답했다.“무슨 제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시치미 떼지 마! 소방점검에서 왜 다른 실험실은 괜찮은데 유독 정은이 그들만 시정지시서를 받은 거야? 정말 송 교수와 관계가 없는 거야? 맹세할 수 있어?”송지혜는 웃으며 대답했다.“저 바쁜 사람이에요. 매일 보고서를 내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굳이 학생들과 따질 필요가 있겠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걸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나한테 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가끔 소정은 그들이 꼴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이잖아?’“넌 지금 갈수록 겁이 없어진 것 같아.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날 안중에 두지도 않은 모양이지?!”송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예요? 왜요? 오미선 교수를 대신해서 불평이라도 늘어놓으시게요? 허, 이건 부총장님 답지가 않은데.”백두강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짓을 한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멍청하기! 이번 소방점검은 학교 측이 시 소방대와 연합하여 전개한 거야.”“평소에 그들을 어떻게 배척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건 너희들 자신의 일이니 소문이 퍼질 리가 없으니까.”“그러나 이번에 시 소방대과 관련된 일에 제보 전화 한 통으로 학교를 연루시켰다니!”한 실험실이 시정지시서를 받으면 학교도 불찰이라는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특히 소방기자재는 일반적으로 미리 실험실에 배치된 것이었기에, 학생들에게 빌려주기 전, 학교는 검사를 진행할 의무가 있으며 착오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빌려줄 수 있었다.지금 시정지시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학교 측이 일을 소홀히 하고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아직도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나?” 백두강은 코웃음을 쳤다.“다른 부총장에게 알려지면...”송지혜의 안색이 변했다.“이번에는 내가 널 대신해서 처리해주지. 하지만 앞으로 이런 말썽 좀 일으키지 마!”송지혜는 더 이상 거들먹거리지 않았고 잠시 머뭇
“누가 들어오라고 했지? 우리 실험실은 짐승을 환영하지 않으니까 눈치 있으면 빨리 꺼져. 너희들은 우리랑 싸워도 못 이겨.”“너 지금 누굴 욕하고 있는 거야?!” 진호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서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누가 대답하면 누굴 욕하는 거겠지. 지금 네가 스스로 자신이 짐승이라고 인정하고 있잖아?”“너...”지예는 냉소를 지었다.“뭘 그렇게 우쭐대고 있는 거야? 전교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딱 너희 실험실만 시정을 해야 하다니. 정말 창피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그런데도 이렇게 나대고 있어?”“시정을 하면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쯧쯧... 정말 아쉽다. 그동안 너희들은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잖아. 에 논문을 올리면 또 뭐가 어때서? 학교의 중시를 받지 못하잖아. 그런데도 잘났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원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 자존심에 영향을 줄까 봐 말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짐승에게 인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니 부담이 순식간에 사라지네.“그래, 난 는 내 논문을 올렸어. 하지만 넌 거기에 논문을 보낸 적조차 없잖아? 속으로 엄청 질투를 하겠지? 하지만 실력은 질투한다고 해서 느는 것이 아니라 안 되면 안 되는 거잖아.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어, 안 그래?”“야...”정은은 위아래로 지예를 훑어보았다.“사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처럼 온종일 빈둥거리며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 언제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쓸 시간이 있는 거지?”“조금의 성과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밤낮없이 실험실에 틀어박혀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넌 그중에서 가장 한가하잖아. 의심이 좀 가는데?”여기까지 말하자 정은은 잠시 멈추더니 지예의 표정을 눈여겨보았다.“그 논문들 정말 너 혼자 쓴 거 맞아?”“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가 뭔데?! 내가 한가하다고? 그럼 내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진행할 때...”“실험을 한 거야, 아니면 핸드
재석은 오늘 수업이 있었다.쉬는 시간에 그는 두 학생이 생명과학대학의 실험실에 시정지시서가 내려왔다며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재석은 원래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소정은'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자세히 물어본 후에야 그것이 정은의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는 바로 이쪽으로 달려왔고, 마침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교수님.” 정은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지와 서준도 분분히 재석에게 인사를 했다.“나도 다 전해들었어. 소방대에서 시정 절차를 엄격하게 진행한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먼저 내 실험실로 가. 이 기구들도 다 옮겨갈 수 있어.”이것도 좋은 방법이었다.민지와 서준은 먼저 대답하지 않고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어느새 그들의 리더로 되었다.문제에 부딪치거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정은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았다.더군다나 두 사람은 재석이 자신들을 돕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한 거라고 생각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완곡하게 거절했다....날씨가 추워지면서 날씨는 일찍 어두워졌다.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작은 식당에서.“왜 거절한 거야?” 재석은 눈앞의 정은을 보면서 줄곧 참았던 의문을 물었다.실험실을 떠난 후, 두 사람은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는데,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돌아가서 밥을 할 기분도 없었다.그래서 두 사람은 근처에서 인기가 많은 한 식당을 찾아갔다.재석이 말했다.“내가 살게.”정은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잘 먹을게요.”남자는 미소를 지었다.식당의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두 사람은 10여 분 동안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앉자마자 재석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은은 놀라지 않고 가볍게 숨을 쉬었다.“선배님은 이미 나를 여러 번 도와주었잖아요. 그러나 이런 일은 그래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평생 선배님의 도움에 기대할 순 없잖아요?
정은은 살짝 멍해졌다.“그럼 선배님은...”재석이 대답했다.“난 안 추워.”“고마워요.”골목에 도착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몸을 돌려 한쪽의 편의점에 들어갔다.1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는 마실 것 두 잔을 들고 나왔다.“자.”정은은 받으며 호기심에 냄새를 맡았다.“이게 뭐예요?”“홍차.”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 편의점에서 이걸 판다고요?”‘왜 난 전혀 기억이 없지?’“시즌 스페셜이라 최근에 금방 팔기 시작했어.”“선배님도 홍차예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메밀차야.”종이컵을 들고 있으니 정은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외투까지 걸치고 있어 춥지 않았고 볼도 약간 붉어졌다.계단을 오를 때, 정은은 외투를 벗고 재석에게 돌려주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잘 자요.”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잘 자.”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앉아서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니트 외투를 입고 있으니 온몸이 따뜻해졌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소진헌의 전화였다.“네, 아빠.”[자다 일어난 거야?]“아니요, 논문 보고 있었어요.”[날씨가 많이 추워졌으니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옷 많이 챙겨입어.]“알았어요. 여긴 난방이 있어서 실내가 그렇게 춥진 않아요. 엄마는요?”[글 쓰고 있어. 참, 장조림 좀 보냈는데, 5kg 좀 넘어.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이렇게 많이요? 제가 그걸 어떻게 다 먹어요?”[너한테만 주는 게 아니야. 조 교수에게 절반 나눠줘. 너희들 이웃이니 직접 가져다줄 수 있잖아.]다른 한편, 재석은 집에 들어간 후, 평소처럼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그러나 이때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옷을 가져왔다.위에는 아직도 여인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서 냄새를 맡았다.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응할 때, 재석은 흠칫 놀라더니 감전된 듯 외투를 소파에 버린 다음 욕실로 달려갔다.곧 물소리가 전해왔다.그러나 안에는 열기가 전혀
정은은 재석이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얼른 들어요, 재석 삼촌. 우리 아빠가 만든 장조림 정말 맛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은 돈을 줘도 못 먹어요.”“날 뭐라고 불렀지?” 재석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응?”정은은 물러설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애꿎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도 단지 우리 아빠가 하신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내가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선배님, 복도가 좁으니 뒤로 좀 물러서면 안 될까요?”재석은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 것을 떠올리며, 정은에게 옮길까 봐 가볍게 한숨을 쉬고 옆으로 물러났다.정은은 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것 같아. 매너도 있고.’재석이 장조림을 받자, 정은은 남은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뒤 사진을 찍어 소진헌에게 보냈다.저쪽은 곧 답장을 보냈다.[조 교수에게 가져다주었어?][그럼요! 아빠, 선배님에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나한테 많이 먹으라는 말씀조차 안 하셨잖아.’소진헌은 귀찮아서 직접 음성문자를 보냈다.[그럼! 친구를 대할 때는 대범해야지.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는 게 마땅해!]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선배님에게 이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아까 내가 함부로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화가 나서 날 벽으로 몰아붙이다니?’그리고 정은은 방금 남자가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순간, 재석의 냄새와 숨결이 정은을 단단히 에워쌌다.정은은 한심하게도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렸다.고등학교 때, 반의 남학생들도 이렇게 일부러 정은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정은도 매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도겸을 만나기 전, 정은은 이성의 접근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꼈다.그동안 연애와 이별을 통해 이 버릇을 고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니.정은은 자신의 이런 반응을 ‘고질병’으로 생각하며 다른 생각을
“우리 아빠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 엄청 많은데, 여태껏 남을 내쫓은 적이 있어도 남에게 쫓아낸 적이 없단 말이에요!”“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저희에게 낡은 방 하나 빌려주면서, CPRT도 없고 소방기자재도 없지만, 저희가 죽어라 낸 연구 성과는 결국 학교의 명의로 되어야 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딨어요? 정말 재수가 없어요...”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민지는 여태껏 이런 억울함을 당한 적이 없었다.“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낡은 방 한 칸일 뿐, 기기조차 저희가 스스로 산 거잖아요!”이 불 같은 성질은 정말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그녀가 한바탕 욕설을 퍼붓자, 서준과 정은은 아연실색했다.“어... 많이 놀랐어요?” 민지의 둥근 얼굴에 어색함이 드러났고, 그녀는 얼른 설명했다.“저 평소에 이렇진 않지만, 가끔 성질이 나면 멈출 수가 없네요... 에헴!”서준은 침을 삼켰다.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민지가 말한 것도 마침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가 계속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린다면, 영원히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학교에서 회수하고 싶으면 회수하고, 트집을 잡고 싶으면 트집을 잡고, 다른 팀에 주고 싶으면 줄 수 있으니까.그들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도살’당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더 이상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리지 말까요?” 민지가 떠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이 물었다.“그럼 어디에서 빌려야 하는 거죠?”“왜 빌려? 민지가 그날 말한 것처럼, 우리 혼자 실험실 하나를 지으면 되잖아?”‘실험실을 짓는다고?’이 말이 나오자, 서준은 멍해졌다.민지는 멈칫하다가 곧바로 흥분해지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저희가 실험실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편리해요!”그들만의 실험실이라면 남에게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남의 괴롭힘을 당할 일도 없었다.정은이 말했다.“내가 자료를 찾아보았는
두 사람은 일제히 서준을 바라보았다.서준은 머리를 긁적였다.“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쑥스럽게.”“쮼, 너희 부모님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셔?” 서준을 바라보는 민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의미심장해졌다.정은이 말했다.“지난번에 네가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공무원이라고 하지 않았어?”보아하니 서준의 부모님은 일반 공무원이 아닌 모양이었다.그녀도 눈치 있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민지는 보기에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눈치가 무척 빨랐다.‘정부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고 들었는데, 그럼 전에 서준이 말하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그렇게 민지도 이 일을 붙잡고 늘어놓지 않았다.서준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최선을 다해 해낼게요.”“좋아.”민지가 말했다.“실험실을 위하여.”“다시는 쫓겨나지 않기 위하여.”두 사람은 말을 마치고 일제히 정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받았다.“파이팅?”“파이팅!!!”...한다면 바로 한다고, 세 사람은 즉시 행동하기 시작했다.민지는 정은의 집을 나서자마자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그래, 우리 딸. 밥은 먹었어?]“아직이요...”민지는 순식간에 불쌍한 척했다.하정남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수상함을 알아차렸다. ‘우리 귀염둥이가 밥조차 먹지 않았다니.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해.’[아빠한테 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민지는 즉시 최근 실험실에서 발생한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다.“정말 열 받죠?!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탁.하정남은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정말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 학교는 관리해야 할 것을 상관하지 않고, 두둔해서는 안 될 일만 단단히 보호하고 있군. 명문대학이 뜻밖에도 이런 짓을 하다니! 사람을 뭘로 보고!]“그래요!” 민지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내가 그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실험실을 하나 짓는 게 낫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송지혜 교수의 두 학생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