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 정은이 입을 열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마치 억울함을 당한 아이가 마침내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았다.민지는 바로 달려왔고, 말을 하기도 전에 눈시울이 빨개졌다.서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팽팽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정은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앉아 있어?”“정은 언니...”민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눈물이 이미 눈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흘러내리지 못하게 했다.“이제 실험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못 들어간다니?” 정은은 깜짝 놀랐다.“어제 학교의 검사팀과 소방대가 갑자기 실험실에 찾아와서 검사하겠다고 했는데...”소방점검을 정상적인 검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문을 열고 협조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은 들어온 후에 이리저리 만져보고 몇 바퀴 돌아보더니 그들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을 알려주었다.“소방 점검이 불합격이니 일주일 내로 실험실에서 나가세요!”말을 마치자, 그들은 두 사람에게 설명과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직접 문에 붉은 딱지를 붙였다.민지는 계속 말했다.“그때 저와 서준이는 모두 어리둥절해졌어요. 지난주에 맞은편 실험실에서도 소방점검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은 들어와서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바로 떠났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검사를 받을 때 불합격이라니? 심지어 실험실에서 나가야 한다잖아요!”방금 정리된 실험실에 새로 산 CPRT, 그들은 실험실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가라니?정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럼 너희들 왜 문 앞에 앉아 있는 거야? 일주일안으로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얼른 들어가지 않고 뭐 하고 있어?”서준이 대답했다.“이번에는 시 소방대에서 점검을 진행했는데, 백 부총장님은 학교에서도 검사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실험실 열쇠를 가져가셨어요.”그러나 정은에게 다른 열쇠가 하나 있었다.그녀는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
민지가 말했다.“당시 우리는 모두 있었어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기도 잠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꺼졌단 말이에요. 이따가 또 써야 하는데, 누가 전원을 끊어버리겠어요?”정은은 이미 대충 그 이유를 추측해냈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가자, 맞은편 실험실로.”민지는 영문을 몰랐다.“거긴 왜요? 그것은 다른 전문적인 실험실인 것 같은데. 저희와는 상관이 없어요...”서준도 수상함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얼른 따라갔다.“가라면 그냥 가, 넌 왜 문제가 그렇게 많아?”‘이 자식이, 이젠 간이 부었구나!’세 사람이 맞은편 실험실에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 모퉁이에 이미 소방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아니...” 민지는 놀라서 아연실색했다.“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세 사람은 또 다른 몇 개의 실험실을 확인했다. 모두 예외 없이 부족했던 기자재는 이미 보충되었고, 전에 없었던 것도 지금은 전부 갖추게 되었다.민지는 오싹하기만 했다.“이, 이건 우리를 겨냥한 것 같은데?”전 실험실은 모두 소방설비를 갖추었지만 오직 그들의 실험실만 배제되었다. 그전에 민지는 줄곧 우연이라고 여겼다.우연히 그들이 당첨되었고, 또 우연히 붙잡혔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부총장 사무실로 갔다.백두강은 한눈에 그들이 오미선이 올해 새로 모집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특히 정은은 올해 신입생 중 처음으로 학술지 에 논문을 발표한 천재로서, 그날 정기회의에서 만장이 들끓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정은 학생,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얼마 전 현빈과 재석의 연이은 타격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부학장님, 저희 실험실이 강제로 시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백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지?”“문제라면 정말 많죠. 우선 왜 다른 실험실의 소방 기자재가 완전한데, 유
송지혜는 가슴을 안으며 싸늘하게 대답했다.“무슨 제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시치미 떼지 마! 소방점검에서 왜 다른 실험실은 괜찮은데 유독 정은이 그들만 시정지시서를 받은 거야? 정말 송 교수와 관계가 없는 거야? 맹세할 수 있어?”송지혜는 웃으며 대답했다.“저 바쁜 사람이에요. 매일 보고서를 내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굳이 학생들과 따질 필요가 있겠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걸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나한테 학생이 얼마나 많은데. 가끔 소정은 그들이 꼴보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정상이잖아?’“넌 지금 갈수록 겁이 없어진 것 같아.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날 안중에 두지도 않은 모양이지?!”송지혜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예요? 왜요? 오미선 교수를 대신해서 불평이라도 늘어놓으시게요? 허, 이건 부총장님 답지가 않은데.”백두강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짓을 한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멍청하기! 이번 소방점검은 학교 측이 시 소방대와 연합하여 전개한 거야.”“평소에 그들을 어떻게 배척하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건 너희들 자신의 일이니 소문이 퍼질 리가 없으니까.”“그러나 이번에 시 소방대과 관련된 일에 제보 전화 한 통으로 학교를 연루시켰다니!”한 실험실이 시정지시서를 받으면 학교도 불찰이라는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특히 소방기자재는 일반적으로 미리 실험실에 배치된 것이었기에, 학생들에게 빌려주기 전, 학교는 검사를 진행할 의무가 있으며 착오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빌려줄 수 있었다.지금 시정지시서를 받았으니, 이것은 학교 측이 일을 소홀히 하고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아직도 네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나?” 백두강은 코웃음을 쳤다.“다른 부총장에게 알려지면...”송지혜의 안색이 변했다.“이번에는 내가 널 대신해서 처리해주지. 하지만 앞으로 이런 말썽 좀 일으키지 마!”송지혜는 더 이상 거들먹거리지 않았고 잠시 머뭇
“누가 들어오라고 했지? 우리 실험실은 짐승을 환영하지 않으니까 눈치 있으면 빨리 꺼져. 너희들은 우리랑 싸워도 못 이겨.”“너 지금 누굴 욕하고 있는 거야?!” 진호는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서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누가 대답하면 누굴 욕하는 거겠지. 지금 네가 스스로 자신이 짐승이라고 인정하고 있잖아?”“너...”지예는 냉소를 지었다.“뭘 그렇게 우쭐대고 있는 거야? 전교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딱 너희 실험실만 시정을 해야 하다니. 정말 창피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그런데도 이렇게 나대고 있어?”“시정을 하면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쯧쯧... 정말 아쉽다. 그동안 너희들은 실험실을 사용할 수 없잖아. 에 논문을 올리면 또 뭐가 어때서? 학교의 중시를 받지 못하잖아. 그런데도 잘났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원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 자존심에 영향을 줄까 봐 말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짐승에게 인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니 부담이 순식간에 사라지네.“그래, 난 는 내 논문을 올렸어. 하지만 넌 거기에 논문을 보낸 적조차 없잖아? 속으로 엄청 질투를 하겠지? 하지만 실력은 질투한다고 해서 느는 것이 아니라 안 되면 안 되는 거잖아. 말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어, 안 그래?”“야...”정은은 위아래로 지예를 훑어보았다.“사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처럼 온종일 빈둥거리며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 언제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쓸 시간이 있는 거지?”“조금의 성과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밤낮없이 실험실에 틀어박혀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넌 그중에서 가장 한가하잖아. 의심이 좀 가는데?”여기까지 말하자 정은은 잠시 멈추더니 지예의 표정을 눈여겨보았다.“그 논문들 정말 너 혼자 쓴 거 맞아?”“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네가 뭔데?! 내가 한가하다고? 그럼 내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진행할 때...”“실험을 한 거야, 아니면 핸드
재석은 오늘 수업이 있었다.쉬는 시간에 그는 두 학생이 생명과학대학의 실험실에 시정지시서가 내려왔다며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재석은 원래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소정은'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자세히 물어본 후에야 그것이 정은의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는 바로 이쪽으로 달려왔고, 마침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교수님.” 정은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지와 서준도 분분히 재석에게 인사를 했다.“나도 다 전해들었어. 소방대에서 시정 절차를 엄격하게 진행한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먼저 내 실험실로 가. 이 기구들도 다 옮겨갈 수 있어.”이것도 좋은 방법이었다.민지와 서준은 먼저 대답하지 않고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어느새 그들의 리더로 되었다.문제에 부딪치거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정은의 의견을 먼저 물어보았다.더군다나 두 사람은 재석이 자신들을 돕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한 거라고 생각할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완곡하게 거절했다....날씨가 추워지면서 날씨는 일찍 어두워졌다.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작은 식당에서.“왜 거절한 거야?” 재석은 눈앞의 정은을 보면서 줄곧 참았던 의문을 물었다.실험실을 떠난 후, 두 사람은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점심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는데,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돌아가서 밥을 할 기분도 없었다.그래서 두 사람은 근처에서 인기가 많은 한 식당을 찾아갔다.재석이 말했다.“내가 살게.”정은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잘 먹을게요.”남자는 미소를 지었다.식당의 장사가 너무 잘 되어서, 두 사람은 10여 분 동안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앉자마자 재석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은은 놀라지 않고 가볍게 숨을 쉬었다.“선배님은 이미 나를 여러 번 도와주었잖아요. 그러나 이런 일은 그래도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평생 선배님의 도움에 기대할 순 없잖아요?
정은은 살짝 멍해졌다.“그럼 선배님은...”재석이 대답했다.“난 안 추워.”“고마워요.”골목에 도착하자, 재석은 정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몸을 돌려 한쪽의 편의점에 들어갔다.1분도 안 되는 시간에 그는 마실 것 두 잔을 들고 나왔다.“자.”정은은 받으며 호기심에 냄새를 맡았다.“이게 뭐예요?”“홍차.”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 편의점에서 이걸 판다고요?”‘왜 난 전혀 기억이 없지?’“시즌 스페셜이라 최근에 금방 팔기 시작했어.”“선배님도 홍차예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메밀차야.”종이컵을 들고 있으니 정은은 손바닥이 따뜻했다. 외투까지 걸치고 있어 춥지 않았고 볼도 약간 붉어졌다.계단을 오를 때, 정은은 외투를 벗고 재석에게 돌려주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잘 자요.”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잘 자.”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앉아서 논문을 보기 시작했다. 니트 외투를 입고 있으니 온몸이 따뜻해졌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소진헌의 전화였다.“네, 아빠.”[자다 일어난 거야?]“아니요, 논문 보고 있었어요.”[날씨가 많이 추워졌으니 너무 늦게 자지 말고, 옷 많이 챙겨입어.]“알았어요. 여긴 난방이 있어서 실내가 그렇게 춥진 않아요. 엄마는요?”[글 쓰고 있어. 참, 장조림 좀 보냈는데, 5kg 좀 넘어.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이렇게 많이요? 제가 그걸 어떻게 다 먹어요?”[너한테만 주는 게 아니야. 조 교수에게 절반 나눠줘. 너희들 이웃이니 직접 가져다줄 수 있잖아.]다른 한편, 재석은 집에 들어간 후, 평소처럼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그러나 이때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옷을 가져왔다.위에는 아직도 여인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재석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서 냄새를 맡았다.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응할 때, 재석은 흠칫 놀라더니 감전된 듯 외투를 소파에 버린 다음 욕실로 달려갔다.곧 물소리가 전해왔다.그러나 안에는 열기가 전혀
정은은 재석이 어이없어 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얼른 들어요, 재석 삼촌. 우리 아빠가 만든 장조림 정말 맛있단 말이에요. 사람들은 돈을 줘도 못 먹어요.”“날 뭐라고 불렀지?” 재석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응?”정은은 물러설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애꿎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도 단지 우리 아빠가 하신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내가 말한 것도 아니잖아요.”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선배님, 복도가 좁으니 뒤로 좀 물러서면 안 될까요?”재석은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 것을 떠올리며, 정은에게 옮길까 봐 가볍게 한숨을 쉬고 옆으로 물러났다.정은은 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 것 같아. 매너도 있고.’재석이 장조림을 받자, 정은은 남은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뒤 사진을 찍어 소진헌에게 보냈다.저쪽은 곧 답장을 보냈다.[조 교수에게 가져다주었어?][그럼요! 아빠, 선배님에게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나한테 많이 먹으라는 말씀조차 안 하셨잖아.’소진헌은 귀찮아서 직접 음성문자를 보냈다.[그럼! 친구를 대할 때는 대범해야지.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는 게 마땅해!]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선배님에게 이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아까 내가 함부로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화가 나서 날 벽으로 몰아붙이다니?’그리고 정은은 방금 남자가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몸을 기울인 순간, 재석의 냄새와 숨결이 정은을 단단히 에워쌌다.정은은 한심하게도 얼굴을 붉히며 심장이 두근거렸다.고등학교 때, 반의 남학생들도 이렇게 일부러 정은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정은도 매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도겸을 만나기 전, 정은은 이성의 접근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꼈다.그동안 연애와 이별을 통해 이 버릇을 고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니.정은은 자신의 이런 반응을 ‘고질병’으로 생각하며 다른 생각을
“우리 아빠의 명의로 된 부동산이 엄청 많은데, 여태껏 남을 내쫓은 적이 있어도 남에게 쫓아낸 적이 없단 말이에요!”“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저희에게 낡은 방 하나 빌려주면서, CPRT도 없고 소방기자재도 없지만, 저희가 죽어라 낸 연구 성과는 결국 학교의 명의로 되어야 하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딨어요? 정말 재수가 없어요...”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민지는 여태껏 이런 억울함을 당한 적이 없었다.“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낡은 방 한 칸일 뿐, 기기조차 저희가 스스로 산 거잖아요!”이 불 같은 성질은 정말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그녀가 한바탕 욕설을 퍼붓자, 서준과 정은은 아연실색했다.“어... 많이 놀랐어요?” 민지의 둥근 얼굴에 어색함이 드러났고, 그녀는 얼른 설명했다.“저 평소에 이렇진 않지만, 가끔 성질이 나면 멈출 수가 없네요... 에헴!”서준은 침을 삼켰다.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민지가 말한 것도 마침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가 계속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린다면, 영원히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학교에서 회수하고 싶으면 회수하고, 트집을 잡고 싶으면 트집을 잡고, 다른 팀에 주고 싶으면 줄 수 있으니까.그들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도살’당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더 이상 학교에서 실험실을 빌리지 말까요?” 민지가 떠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준이 물었다.“그럼 어디에서 빌려야 하는 거죠?”“왜 빌려? 민지가 그날 말한 것처럼, 우리 혼자 실험실 하나를 지으면 되잖아?”‘실험실을 짓는다고?’이 말이 나오자, 서준은 멍해졌다.민지는 멈칫하다가 곧바로 흥분해지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래요! 저희가 실험실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편리해요!”그들만의 실험실이라면 남에게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남의 괴롭힘을 당할 일도 없었다.정은이 말했다.“내가 자료를 찾아보았는
정은은 우선 비를 피할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천둥 날씨에 나무 밑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상식이었다.번개가 치는 순간, 하늘이 밝아졌고, 정은은 멀지 않은 곳에 1미터 정도 되는 암석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 움푹 들어간 부분은 천연적인 구멍을 형성했다.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비는 점점 더 크게 쏟아졌고, 콩알만 한 빗방울이 몸에 떨어지니 정은은 심지어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대체적인 방위를 향해 달려갔다.곧 도착할 때, 정은은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더니 몸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였다.이곳은 마침 비탈길이었다. 정은은 넘어진 후 또 앞으로 구르면서 전혀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유일하게 다행스러운 것은 경사면에 어떤 식물을 심었기 때문에 촉감이 잔디밭과 유사하여 일정한 완충 작용을 했다. 게다가 비에 젖은 흙도 상대적으로 푹신했다.그렇게 정은은 언덕 밑으로 떨어져서야 마침내 멈출 수 있었다.그녀는 온몸이 아프고 눈빛은 초점을 잃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반응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때,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온통 어둠뿐인 곳에 있으니, 정은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망연함을 느꼈다.그러나 정은은 곧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냉정해지려 했다.정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옆의 잡초와 나무줄기를 잡고 몸을 받쳤다. 그러나 일어나자마자 발목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왔다.그녀는 얼른 쪼그리고 앉아 검사했다. 휴대폰 스크린의 미약한 빛을 빌어 정은은 엄청 부은 자신의 복사뼈를 보았다.다행히 피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또 한번 움직여 보았다. 비록 아프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었다.‘골절은 아닌데. 아마도 좀 삔 것 같아.’정은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이어서 그녀는 또 가방속의 씨앗을 검사했다. 배낭은 이미 진흙으로 가득했고, 안의 물품은 모두 어느 정도 파손되었지만 다행히 씨앗은 무사했다.그녀는 한숨을 돌리
그것은 넓은 합등숲이었다.“너희들 얼른 와 봐, 앞에 아주 큰 합등숲이 있어!”정은은 신이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민지와 서준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왔다.합등은 매우 유명한 콩류로, 원산지는 W국이며, 후에 이곳으로 도입되어 별명이 강을 건너는 용, 소 눈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계곡이나 산비탈의 혼합 삼림에서 자라며, 큰 교목에 의거하여 생존한다.서준은 고개를 들어 이 합등숲을 바라보았다. 굵은 가지와 줄기가 감겨 있었고, 뿌리와 줄기는 50미터 떨어진 수원까지 뻗을 수 있었다. 이 숲을 가로지르니 마치 거대한 구렁이와 같았다.그는 먼저 감탄을 한 다음 바로 기뻐했다.“합등의 과실은 길이가 1미터에 달해 약으로 쓸 수 있고, 소장도 할 수 있어요. 시중에서도 가격이 싸지 않아 희귀식물이라고 할 수 있죠.”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이 합등숲은 아주 커서, 그 과실을 찾기에 쉽지 않을 거야. 해가 곧 질 것 같으니 우리 세 사람 따로 찾아보자. 6시 정각에 여기서 합류할까?”민지와 서준은 모두 이의가 없었다.밀림이 커서 길을 잃을까 봐 정은은 미리 기호를 표시했고, 십자 모양을 세 사람의 기호로 정했다.그 후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갈림길로 들어가 과실을 찾았다.합등 과실은 외형이 납작하고 씨앗이 안에 싸여 있으며, 원형에 가까운 암갈색 식물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정은은 수원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숲속의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마침내 씨앗 하나를 찾았다.그러나 아쉽게도 씨앗을 품은 과실은 아주 완전하고 아름다웠지만, 너무 크고 길어 대충 봐도 1미터 남짓했다. 그러니 정은은 전혀 옮길 수가 없었다.시중에 있는 합등 과실은 소장품으로 거래되는데, 그 가격은 씨앗보다 훨씬 비쌌다.그러니 자연히 더욱 희귀했다.날이 이미 어두워지자, 정은은 기호를 따라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중도에 두 개의 연결된 밀림을 지나가며, 그녀는 기호가 뜻밖에도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아무리 믿고 싶지 않더라도 지
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정은이 말했다.“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희귀 식물을 한번 찾아보자.”만점 받기 싫은 사람이 또 어딨겠는가?“그래요! 사실 100점이든 80점이든 상관없어요. 난 언니와 쮼과 함께 놀러 가고 싶거든요.”세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했다.희귀식물은 고정된 리스트가 없어, 주관 문제에 해당하며 공인된 흔하지 않은 식물이면 된다.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다.어둠의 장막이 내리자, 민지는 피곤해서 숨을 헐떡였다.“우리... 거의 십여 개의 구역을 돌아다니지 않았어? 희귀식물의 잎조차 보지 못했잖아. 대체 언제까지 찾아야 하지? 나 너무 배고파, 밥 먹고 싶어...”최근 서준은 민지를 끌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했다. 칼로리를 많이 소모해서인지 아니면 기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민지는 자신이 툭하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발견했다.지금 두 다리가 나른해져서 정말 걸을 수가 없었다.정은도 힘들었다.그러나 앞의 두 작은 구역만 더 탐색하면, 이 큰 구역을 끝낼 수 있었기에, 내일이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했다.“우리 좀만 더 버티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A구역의 마지막 두 구역을 다 탐색할 수 있을 거야. 자, 승리가 바로 코앞에 있어.”“두 개밖에 안 남았어요?”“응.”“그럼 저 쉬지 않을래요. 같이 가요! 이제 딱 마지막 한걸음밖에 안 남았으니, 이때 포기하면 저 정말 후회할지도 몰라요. 얼른 가요!”말하면서 민지는 일어나려고 했다.“급하지 않아.”정은은 얼른 민지를 붙잡았다.“2분만 더 쉬자. 그리고 물 마시고 음식 좀 더 챙겨 먹어.”“네!” 민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정은 언니밖에 없는 것 같아요.”말하면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정은과 서준은 그런 민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러나 잠시 앉아 있다가, 민지는 수상함을 발견했다.“점점 더워지는 것 같지 않아요?”정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확실히 이상함을 감지했다.여기의 식물은 작황이 보
옆에는 까불고 있는 신진호가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큰 가방을 든 탁재운이 있었다.정은은 시선을 뗐다.그녀는 경혜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정은 언니!” 민지가 멀리서 달려오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민지는 큰 여행용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불룩해서 보기만 해도 무거웠다.선크림, 모기약, 모자, 물...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간식도 있었다.“엄청 많이 준비했으니까 이따가 같이 먹어요.”“그래.”“어? 서준이는요? 아직 안 왔어요?”지각할까 봐 민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왔고, 겨우 5분 앞당겨 도착했다.그녀보다 일찍 도착한 서준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너보다 더 늦을 것 같아? 그게 말이 돼?”민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보다 2분 일찍 도착한 게 뭐가 대단하다고? 난 다시 잠들었을 뿐이야. 그런데... 두 사람 가방은 왜 다 그렇게 작지?”정은은 말할 것도 없고, 서준조차도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메고 있었다. 그것도 안이 텅 빈 것 같아 전혀 무게가 없어 보였다.“이번에 갈 그 식물기지는 시설 같은 게 잘 갖춰져 있다고 해서 필수품만 챙겨왔어.”정은이 설명했다.서준도 마찬가지였다.‘그래서 나만 큰 가방을 멘 거야? 거의 간식만 담은 가방을?’8시, 교수님은 인원수를 체크했고, 모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일일이 줄을 서서 버스에 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교외에 위치한 식물기지로서 약 100킬로미터였고, 운전만 해도 3시간이 걸렸다.차에서, 민지는 정은과 함께 앉았고 서준은 뒤쪽에 있었다.도중에 반산길을 지나야 하는데 신호가 좋지 않아 핸드폰을 놀지 못했다. 그래서 서준은 아예 킨들을 꺼내 논문을 보았다.민지는 성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정은은 별다른 일이 없어 턱을 짚은 채 길가의 풍경을 감상했다.이른 아침, 들쑥날쑥한 산봉우리가 하나둘씩 이어져 있었고, 겨울은 날이 매우 늦게 밝아서, 출발한지 한참 되어서야 날이 밝아졌
잠든 추억이 다시 깨어났다.조각난 기억이 스치자, 이미윤은 절망적이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떠올렸고, 그것은 여러 차례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그녀는 목이 쉬었다.“이미숙이 납치된 것은 우리 가문을 겨냥한 나쁜 사람들 때문인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내가 이미숙과 같이 외출해서?” “그 여자가 실종된 것을 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해? 진작에 이럴 줄 알았다면, 난 차라리 내가 납치를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 날 엄청 그리워하시겠지?”이미윤은 마치 어떤 추억에 잠긴 듯 멍을 때리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까지 했다.현빈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봉수진이 최근 에 푹 빠진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미윤에게 말했다.“할머니는 최근 이라는 추리 소설을 엄청 좋아하셔요. 작가의 사인, 특히 인사말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이미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현빈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시 주의를 주었다.“할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사인 받은 책을 구하신 다음, 먼저 저에게 통지하세요. 그때 가서 제가 다 안배할 테니까...”그렇지 않으면 이미윤은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그래, 알았어.” ‘그냥 책 하나일 뿐이잖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문제도 아니지.’현빈은 희망을 잔뜩 품은 이미윤을 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건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때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리해야 할 긴급서류가 있다고 해서 현빈은 회사로 달려갔다.이미윤은 집사를 찾아와 신신당부했다.“작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책 제목을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최근에 새로 나온 추리 소설이니, 얼마를 쓰든, 무슨 방법을 쓰든 꼭 구해야 해요!”“방금 도련님께서는 작가님의 인사말을 받는 게 더 좋을 거라고 하셨는
젊었을 때 사고를 안 쳐본 재벌 2세가 어디 있을까?그러나 놀아도 되지만 절대로 여자에게 빠질 수는 없었다.이미윤도 말을 직설적으로 하기가 불편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더욱 말이 안 됐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일깨워줄 수밖에 없었다.“남녀 방면의 일은 너도 좀 주의해.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 그러나 제대로 다칠지도 몰라.”현빈은 영문을 몰랐다.“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죠?”이미윤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내가 닥터 성에게 연락했는데, 네 할머니의 눈과 몸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하더라. 시간 좀 잡아줘. 나도 어르신들 만나고 싶으니까.”닥터 성은 심씨 가문이 투자한 병원의 유명한 안과 과장이며 봉수진을 다년간 치료해온 주치의이기도 했다.이미윤은 미리 병원에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봉수진의 몸이 호전되면 즉시 전화로 자신에게 통지하라 했다.“전에 네 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며 당분간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지금 의사도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으니 날 막을 이유가 또 뭐가 있어?”이미윤은 현빈을 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현빈은 말이 막혔지만 그래도 완곡하게 주의를 주었다.“할머니는 호전되셨지만 정신상태는 여전히 매우 안 좋지 않아요. 일단 자극을 받으시면 쉽게 악화될 수 있으니 될수록 방해를 하지 않는 게...”“자신의 딸을 만나는 것일 뿐, 무슨 자극을 받을 수 있겠어?”현빈은 이미 조심스럽게 표현을 했지만, 이미윤은 여전히 노발대발했다.“나는 네 할머니의 딸, 유일한 딸이라고!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 두 분은 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지?!”“어머니...”“내가 보기에, 네 할머니는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었어! 그동안 누가 곁에서 두 분 챙겨줬는데? 또 누가 두 분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을 찾아줬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이미윤은 이를 갈며
“어머니!” 재석은 강서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고려할 마음이 없다고.”강서원은 꾹 참더니 잠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여자친구 생겼지?”재석은 멈칫하다가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정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강서원은 믿지 않았다.“그럼 네 손에 들고 있는 그 양복은 어떻게 된 거야? 너 혼자 사러 갔어?”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쇼핑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이게 양복인 줄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강서원은 가슴이 찔렸다.“그 로고가 얼마나 선명한데. 그 집은 양복만 만들었으니 또 뭐 다른 게 있겠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니?”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친구와 함께 골랐어요.”“친구? 남자야 여자야? 어떤 친구인데?” 강서원은 계속해서 물었다.“어머니, 오늘 단지 이런 걸 물어보기 위해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일 없으면 저 먼저 실험실로 돌아갈게요.”강서원은 한참 동안 재석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표정관리를 완벽하게 하여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서원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조기봉은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았다.“당신도 이제 그만 좀 해. 재석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래도 당신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바로 달려왔잖아. 그런데 또 뭐가 불만인 거야?”강서원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그 얄미운 계집애가 계속 뻔뻔하게 우리 재석이 곁에 남게 할 수는 없잖아? 정말 안달이 나네!’...심씨 가문에서.이미윤 역시 아들을 집으로 불렀는데, 강서원에 비해 그녀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완곡하게 떠볼 필요 없이 이미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요즘 만나는 애 바꿨어?”‘여자친구’가 아닌 아무런 호칭도 없는 ‘만나는 애’였다.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
이때 정은은 다른 진열대에 놓인 케이크에 매료되어, 두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재석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정은이 한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5층으로 된 케이크에 한층마다 정교한 피규어를 놓았다.“예뻐?”“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정교하게 잘 만들었어요.”그리고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선배님, 이 안경 쓰고 눈살을 찌푸리는 피규어 말이에요, 선배님과 닮지 않았나요?”재석은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아니. 내가 언제 자주 눈살을 찌푸렸지?”“눈살을 찌푸렸지만, 선배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지금이요.”재석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장난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핍하고 마음이 찔렸다.“하하...”정은은 웃음을 터뜨렸다.“선배님 정말 귀엽네요.”세 사람이 케이크 가게를 막 나서자, 재석의 핸드폰이 울렸다.“네, 어머니.”[재석아, 집에 한번 돌아와.]강서원의 목소리는 심각하고 엄숙했다.“무슨 일이세요?”[돌아와서 얘기하자.]“네.”통화를 마치자, 재석은 집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했다.“미안,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고, 마침 현빈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 현빈은 재석을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도 일이 좀 생겼네요. 하지만 그전에 전 먼저 정은을 집에 데려다줄 테니, 교수님은 얼른 일 보러 가세요.”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두 분 다 얼른 가서 일 봐요!”재석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정은은 재빨리 말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텐데, 아무도 데려다줄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현빈을 보았다.“심 대표님도 빨리 가요. 중요한 일 그르치면 안 되잖아요.”현빈과 재석은 눈을 마주치며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다.결국 정은의 재촉으로
다 먹은 뒤, 이미윤은 계산하러 갔다.두 사람 모두 얼마 먹지 않아서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았다.이쪽의 두 어머니는 수심이 가득했지만, 그쪽의 현빈과 재석은 각기 수확을 얻었다.하나는 양복을, 하나는 구두를 샀기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현빈이 말했다.“앞에 밀크티 가게 있는데, 뭐 마실래?”재석도 같은 시간에 입을 열었다.“그 케이크 가게가 엄청 유명한데...”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적의를 드러냈다.“정은아, 우리 같이 밀크티 사러 갈래?”“들어가서 한번 볼래?”두 남자는 모두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뭐야, 왜 또 이래!’“그냥 각자 사러 가세요. 난 화장실에 가고 싶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리고 재석을 바라보며 물었다.“교수님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지 않으시겠죠?”“만약 심 대표님이 사는 거라면 한 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래요.” 현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를 갈고 있었다.“그리고 보답으로 내가 심 대표님에게 케이크를 사줄게요.”이 말을 듣자, 현빈은 더욱 화가 났다.두 사람은 각자 줄을 섰다.정은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현빈은 양손에 밀크티 한 잔씩 들고 있었고, 탁자 위에 한 잔 남아 혼자 들 수 없었다.그는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들게요.”두 사람은 말하면서 케이크 가게로 갔다.“서원아? 서원아?!”“응? 뭐라고?”“뭘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거야?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다니.” 이미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는데 케이크 가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강서원은 손을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그 여자아이, 뜻밖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니. 심지어 웃고 떠들며 함께 밀크티까지 마시면서 쇼핑을 하고 있어! 그건 커플끼리 하는 일 아니야?!’비록 그 남자의 뒷모습만 밖에 보지 못했지만, 옷차림과 기질만 보아도 조건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