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얻기 힘든 기회였다.“만약 관심이 있다면 이 논문 가져가서 자세히 읽어봐.”말하면서 재석은 USB를 하나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이 안에 상세한 실험 자료가 있어.”정은은 눈을 들더니 은근히 흥분해하고 있었다.“고마워요, 잘 생각해 볼게요.”10시, 정은은 집에 돌아가야 했다. 재석은 그녀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난 바로 이 맞은편에서 살고 있으니, 특별히 배웅할 필요가 없어요.”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 재석은 오히려 그녀가 무심코 드러낸 손가락을 힐끗 바라보며 주의를 주었다.“반창고를 너무 오래 붙이면 안 돼. 요오드 볼트로 소독한 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좋을 거야.”정은은 얼른 검지를 숨겼다.“고마워요, 그렇게 할게요.”재석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분홍색 다육식물 하나를 가져왔다.“이거 줄게.”정은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손바닥만 한 다육식물은 잎사귀가 통통했고, 초록색에서 점차 핑크로 변하니 또 무척 예뻤다.“이거 너무 귀여운데, 정말 나에게 주는 거예요?”“응, 며칠 전에 꽃집을 지나다가 이것만 하나 남았길래. 지난번에 매운탕을 대접한 답례라고 생각해.”정은은 입술을 구부렸다.“이번에는 그냥 받을게요. 하지만 친구 사이에 같이 밥을 먹었다고 굳이 선물을 살 필요가 있나요? 다음에 답례하지 마요.”그녀는 눈을 깜박였고, 맑은 눈동자는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빛이 났다.“응.” 재석은 마음이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병실에서. 이른 아침, 고동건과 전선우는 병문안을 오기로 약속했다.동건은 그럴듯하게 보온병까지 들고 왔다.“도겸아, 내가 널 얼마나 관심하는지 좀 봐. 이렇게 죽까지 챙겨왔잖아! 헤헤! 넌 위가 안 좋아서 담백한 것만 먹어야 하니가, 내가 특별히 우리 집 셰프에게 아침 일찍 죽을 끓이라고 했어. 이게 비록 많진 않지만, 재료가 다 비싼 거라서, 다 먹으면 바로 힘이 펄펄 날 거야!”선우는 향기가 그윽하고
정은은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한 다음, 베란다에 줄지어 늘어선 모양이 각기 다른 녹색 다육식물에 분홍색이 더 많아진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지로 살짝 눌렀는데, 말랑말랑한 식물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책상 위의 핸드폰이 윙윙거렸다. 선우의 번호인 것을 보고, 정은은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다.[선우야? 이 시간에 왜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요?”[그럭저럭이야. 너는?]기회다 싶은 선우는 바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난, 난 별로 좋지 않아요.”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왜?]“밤새 술을 마셔서인지 속이 안 좋네요. 정은 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딱 누나가 끓인 죽이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정말 너무 먹고 싶은데... 지금 시간 있어요?”도겸이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선우는 이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비록 정은은 도겸을 통해 선우를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선우와의 관계도 나름 좋았다.상대방이 위가 아프다고 하니 정은도 거절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시간 있어. 나 지금 장 보러 나갈 테니까 점심에 와서 가져가.]“네! 고마워요, 정은 누나! 누나밖에 없네요! 사랑해요, 누나! 그럼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선우는 내비게이션에 정은이 보낸 주소를 입력한 다음, 먼저 서비대학교에 도착했다. 그 후 또 여러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서야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다.길가에 차를 세우고 가로숫길을 건너자, 선우는 정은이 지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7층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니.’선우는 눈을 들어 아파트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5분 후, 그는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고, 마치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투성이로 되었다.정은은 문을 열어 선우를 들여보낸 다음, 얼른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괜찮
심현빈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것도 다 선우가 정은 씨에게 자기가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서 정은 씨가 끓여준 거야. 그러니 어떻게 병문안 하러 오겠어?”도겸은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고, 선우를 차갑게 쳐다보았다.“내가 언제 가라고 했어? 누가 시킨 거냐고?”선우는 목을 움츠리더니 가볍게 기침을 했다.“형 요 며칠 줄곧 밥을 먹지 않아서 나도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요. 정은 누나가 죽을 만들지 않았다면, 형은 아직도 굶고 있을 거예요.”도겸은 싸늘한 표정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참, 방금 정은 누나 집에 갔는데, 지금 지내는 곳이 얼마나 작고 낡은지, 심지어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거 있죠? 그렇게 매일 7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니, 딱 봐도 고생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게 분명해요.”선우는 말하면서 도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입으로는 싸다고 말했지만, 눈빛에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음, 마음에 아직도 정은 누나가 있는 모양이야.’선우가 계속 말을 하려 할 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오빠!”선우와 현빈은 징그러워서 몸서리를 쳤다.‘소름이 쫙 끼치네...’연희는 며칠간 도겸의 문자를 받지 못했고, 전화해도 그가 받지 않아 결국 동건에게 물어봤는데, 그제야 도겸이 위병으로 입원한 것을 알았다.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수업까지 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이때 도겸이 환자복을 입고, 안색까지 창백한 것을 보니, 연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빠, 미안해요. 저도 방금에야 오빠가 입원한 사실을 알았어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예요? 제가 의사 불러올까요?”그녀의 질문에 도겸은 짜증이 났다. 그리고 더욱 짜증 나는 것은 바로 오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겸뿐만 아니라 선우와 현빈도 시끄럽다고 생각했다.도겸은 미간을 비볐다.“지금은 이미 괜찮으니까 울지
도서관에 간 정은은 연속으로 두 장의 시험지를 풀었는데, 모두 마지막 문제에서 사로가 막혔다.정은은 한참이나 계산했지만, 줄곧 풀리지 않았다. 전에 어느 책에서 비슷한 문제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일어나서 관련 자료와 문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몇 분 만에 찾은 다음,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에 정은은 그 옆에 놓인 책에 시선을 빼앗겼다.책 제목은 『유전자 서열의 재조합과 융합』이었다. 그녀는 조재석이 한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그 책을 꺼냈다.간단하게 훑어보니, 뜻밖에도 이 책의 관점은 정은의 관점과 아주 비슷했다. 그녀는 계속 읽기 시작했고, 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예 그 속에 빠져들었다.이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는데, 조수민이었다.[나 지금 어디게?]정은은 그녀가 장난치고 있는 줄 알고 바로 답장을 하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너 학교에 왔어?!][빙고!]도서관 밖에서, 정은은 내려오자마자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수민을 보았다.“갑자기 학교에 왜 온 거야?”“마침 이 근처에 들렀는데, 너한테 맛있는 거 주고 싶어서.” 수민이 손을 들자, 향기가 넘쳤다.“배달 마쳤으니 가볼게.”“나랑 같이 먹지 않고 그냥 가려고?”수민은 손을 흔들었다.“원래 너에게 주려고 산 거야. 게다가 나 요즘 좀 바쁘거든.”여기까지 말하자, 수민은 한숨을 쉬었다.“최근에 새 프로젝트 하나 책임졌는데, 3일 동안 총 8시간밖에 자지 못했어.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우리 아빠가 날 집으로 부르셨고. 사는 게 정말 힘들다 힘들어!”수민은 디자이너였다. 1년에 대외적으로 몇 개의 큰 주문만 받았지만, 하나하나 무척 복잡했기에 바쁘면 휴식시간이 거의 없었다.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임명을 받은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프로 대신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참, 이번 일은 강씨 가문과 관계가 좀 있어.” 수민은 눈알을 굴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관심 있어?”“없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직접 끊어버렸고,
도겸은 꾹 참고 듣다가 결국 폭발했고, 전화를 끊은 다음 비행 모드를 켰다.이번에 차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집에 들어서자, 도겸은 그제야 마음이 평온해졌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위층으로 올라갈 때, 그는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니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기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눈앞에 정은이 바삐 움직이는 장면이 아른거렸다.그녀는 전날 저녁에 식재료를 깨끗이 씻고 물에 담가야 했기에, 죽을 끓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다시 식재료와 쌀을 함께 솥에 넣은 다음 삶았다.도겸은 힘드니까 정은에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음날 퇴근하고 돌아오면, 항상 따끈따끈한 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후에...’그는 더 이상 정은을 설득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그녀가 잘해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생각에 잠긴 사이, 밖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도련님?”왕순자는 서영숙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도겸이 병원을 떠나자,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은 서영숙은 도겸이 혼자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왕순자에게 전화를 했다.도겸은 담담하게 분부한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모님, 죽 좀 끓여줘요.”‘왜 또 죽을 끓이라는 거지? 정인 아가씨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정말 너무 힘들다 힘들어...’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왕순자는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죽을 다 끓이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도겸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잠들었어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왕순자는 죽을 내려놓은 다음, 주방에 가서 깨끗이 정리한 후, 조용히 떠났다.한밤중에 도겸은 위가 불에 타는 것만 같았고, 몸은 마치 땡볕을 쬐는 것처럼 무척 더웠다. 차가운 바늘이 혈관을 찌르며 액체를 수송하자, 그는 그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더웠다.서영숙은 침대 앞
외롭고 쓸쓸한 밤, 맞은편에서 가볍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 나 아파.”자세히 들어보니, 남자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렸다.그 순간, 정은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아팠다.도겸은 잘난 체하고 고집이 세서, 피를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 때문에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모두 흔한 일이었다.그동안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많은 방법을 고민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꼼꼼히 챙기고, 틈틈이 상태를 살피는 것은 물론, 한의원을 찾아가 안마법까지 배워왔다.엄청난 공을 들인 데다, 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겸의 위가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런 일이 귀찮았다. 가끔 짜증이 나면 심지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고 싫어하곤 했다.이미 잊혀져 가던 과거가 이 순간에 다시 떠올랐고, 방금 나타난 애틋한 감정도 곧 사라졌다.[난 의사가 아니야. 그렇게 아프면 그냥 병원에 가.]도겸은 정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네가 끓인 죽 마시고 싶단 말이야.”정은은 조용히 듣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마치 소리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국 정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도겸은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가 잠든 줄 알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지만, 도겸이 아직 깨어 있으며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도련님, 지금...”간호사는 약간 의아해했다.도겸은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피곤함에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이튿날, 정은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위 좀 어때? 괜찮아? 죽 더 먹을래?”선우는 한창 달콤하게 자고 있었는데,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정은 누나!][아, 정은 누나가 만든 죽이 너무 맛있어서, 몇 입
연희는 마음이 좀 찝찝해서 도겸의 팔을 흔들었다.“오빠, 왜 그래요?”도겸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나도 이제 다 나았으니, 너는 수업에 전념해. 더 이상 이쪽으로 찾아올 필요가 없어.”“앞으로 회사 일 때문에 나도 많이 바쁠 거야. 그래서 아마도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연희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별장을 나서자, 그녀는 웃음을 점차 거두더니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고. 눈빛도 많이 우울해졌다.‘방금 도겸 오빠는 분명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잖아.’한참 망설이다가, 연희는 핸드폰을 꺼내 동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겸의 절친들 중, 그녀는 오직 동건의 연락처밖에 없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연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동건 오빠, 저예요. 요 며칠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저 방금 별장에서 나왔는데, 도겸 오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혹시 정은 언니 때문에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요?”전화기 너머의 동건은 술집에서 어렵게 한 여자와 눈이 맞았는데, 두 사람 마침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희의 질문을 듣고, 그는 얼버무리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정은 씨는 오지 않았지만, 죽을 두 번 끓여줬지.]말을 마치자, 사정없이 전화를 끊었다.‘역시 그 여자였어...’연희는 이를 악물며 눈빛은 차가웠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가서 복습하고 있는 정은을 찾았다.“도겸 오빠는 지금 내 남자친구예요. 두 사람 이미 헤어졌으니 좀 깔끔하게 정리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에요. 두 사람 완전히 끝났다고요!”정은은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비록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대답했다.“걱정 마, 난 전 남자친구와 아예 화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남자를 빼앗을 리가 없어.”연희가 떠나는 것을 보며, 정은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
성준은 교수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비록 정은과 같은 전공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 때, 의외로 잘 맞았다.심오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꽤 즐거웠다.그녀는 아직 석사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록 대부분 내용은 이미 술술 외울 수 있었지만, 현재 전공의 연구방향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었기에, 대량의 논문을 읽으면서 천천히 지식을 쌓아 나가야지, 단번에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그리고 성준은 재학 중인 석사로서, 이미 학교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된 정은보다 이 방면이 훨씬 강했다.그들을 미행하고 있는 도겸은 두 사람이 매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렇게 모질게 대하더니, 다른 남자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웃어?’정은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한가득 차렸고, 양식이 무척 다양했다.성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풍부한 음식을 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에 너무 많지 않을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선배님, 날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연히 풍성한 요리로 고마움을 표시해야죠.”성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사실 나도 뭐 도와주지 못했어. 네가 복습하는 효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거든.”함께 복습할 때, 그는 정은의 진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나를 말하면 셋까지 알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아주 강해서, 한 번 가르치며 두 번 다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복습은 그중 하나일 뿐이죠. 나를 도와 논문 자료를 찾는 것 외에, 또 선배님 덕분에 내가 서비대학교 학생들만이 찾아볼 수 있는 원문 자원을 빌릴 수 있었잖아요.”성준은 의아해했다.“너 복습하는 동시에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니...”그는 마침내 오미선이 정은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다 먹은 후, 성준은 잠시 앉아 얘기를
여전히 서비대학교 근처의 그 식당이었다.정은과 재석이 도착했을 때, 현빈은 이미 안에 있었다.“정은아, 왔어...”그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은에게 집중했다.마치 재석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오래 기다렸죠, 심 대표님.”‘심 대표님’이란 호칭에 재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현빈은 그제야 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 교수님, 또 이렇게 만났네요.”재석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심 대표님과 꽤 인연이 있나 봐요.”“그럼 들어오세요.”말하면서 현빈은 재석을 자신의 옆자리로 인도한 후, 또 정은을 위해 다른 한쪽의 의자를 당겼다.이 순서대로 앉으면, 재석 옆에 현빈, 현빈 옆에 정은이었다.“저쪽은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사람들 드나들면, 바람이 세니 정은아, 넌 그냥 내 옆에 앉아.”말하면서 재석은 자기 옆의 의자를 당겼다.정은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앉았다.그렇게 정은 옆에 재석, 재석 옆에 현빈, 세 사람은 이런 순서로 앉았다.“좀 따뜻해졌어?” 재석은 현빈의 어두운 안색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쪽은 바람이 정말 세서 확실히 쌀쌀하네요. 그럼 나도 안쪽으로 앉을게요.”그리고 세 사람은 현빈, 정은, 재석의 순서대로 앉았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난 이미 주문했어. 모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야.”정은은 고맙다고 말했지만, 재석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님, 메뉴에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좀 봐요.”“아니야, 난 다 돼.”“그럼 절대로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어요.”“좋아.”현빈은 마음이 씁쓸했다.‘왜 나한테 메뉴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왜 나한테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라고 하지 않는 거냐고?’그러나 현빈은 자신이 요리를 주문했다는 것을 잊었다.정은은 자연히 현
물의 온도가 컵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정은은 방금 허리에 닿은 그 뜨거운 온도를 떠올렸다.똑똑-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 정은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재석이 밖에 서 있었다. “신발.”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뜻밖에도 개에게 물려간 그 신발을 되찾았던 것이다.“고마워요, 선배님.”“별 거 아닌데 뭘.”...오후에 정은은 한잠 잤다.그리고 2시에 일어나서 실험실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서준은 이미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아, 민지는 마실 거 사러 갔어요.”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민지는 밀크티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정은의 것도 있었다.이 실험실은 여전히 전처럼, 실험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그들이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수시로 간식과 물컵을 여기에 놓을 수 있었다.서준이 먼저 밀크티 한 잔을 받을 때, 정은은 깜짝 놀랐다.전에 민지가 아무리 말려도 서준은 한 번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가끔 한 번 마셔도 민지의 핍박을 받아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만 골랐고, 마지막에 태반이 남아 있었다.이번엔...“쮼, 어때? 새로 나온 밀크티 맛있어?”“...음.”“다음에 내 거 한 번 마셔 봐, 이것도 맛있어.”“응.”정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 지금 동쪽에 걸려 있는지 아니면 서쪽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세 사람은 실험실에서 오후 내내 실험을 했고, 밤이 되자, 민지와 서준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 언니, 안 가요?”“난 마무리 좀 하고. 이따가 갈게.”“그럼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요.”“응.”7시, 정은은 실험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다음 떠났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졌다.찬바람이 불자, 정은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걸어가는 뚱뚱한 공과 같았다.“정은아...”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선, 선배님...”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조금이요.”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재석이 또 물었다.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곧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재석이 교실에 들어섰다.“오늘 우리는 분자의 진화 및 시스템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수업 시작한지 10분, 민지는 풀이 죽은 채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요 며칠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야?”“그래!”민지는 화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준은 멈칫했다.“나도 엄청 야위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 다이어트는 정말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나도 결심했어.”“응?”“다이어트 포기할 거야! 죽어도 살 빠지 않겠다고!”“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이따가 수업 끝나면 내가 너랑 정은 언니한테 밥 사줄게, 응?”서준과 정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민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그래, 그럼 이렇게 정하자!”서준과 정은은 어리둥절해졌다.“스테이크를 먹을래, 아니면 샤브샤브 먹을래? 아니면 분식집? 아니면 뷔페? 아니면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과 콜라도 되는데! 아니면... 다 먹을까? 종류별로 시키면 되지! 이게 좋겠네!”민지는 배를 곯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준비...’재석은 강단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지는 정은과 서준을 끌고 교실을 뛰쳐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정은 학생은 좀 남아...”재석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한끼 배불리 먹은 민지는 만족스럽게 의자에 기대었고, 온몸에서 쾌적함을 발산했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내가 왜 살을 빼야 하는 건데? 누가 원하면 가서 빼라 그래, 어차피 난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호감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굶지 않을 거야.’태민에 대해서는...상대방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지는 더 이상 헛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의 남자친구에게 반하겠어?’오
하정남은 제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예전에는 남이 어떻게 말하든 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왜 갑자기 살을 빼겠다는 거야? 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난관적이어서 종래로 몸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뚱뚱해서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해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다이어트를 하겠다니?[민지는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을 빼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일에 부딪힌 거야?’하정남은 가슴이 떨렸다.민지는 하정남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뉴스에서 그러던데, 적당한 다이어트는 몸에 좋다고 했어요. 나도 이렇게 계속 뚱뚱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하정남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뉴스에서 들었다고? 이상해! 분명히 이상해!’그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는 먹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틱톡이 유행하는 요 몇 년 동안 민지는 영상 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다.그런데 뉴스 하나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다니.이때 하정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너 연애라도 한 거냐?”민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하정남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사랑을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아빠, 나 아직 수업이 있는데, 곧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반응이 이렇게 큰데 아직도 발뺌을 하는 거야?! 흥! 우리 딸 아직 어리니, 어느 남자가 감히 지금 내 딸을 빼앗아간다면, 난 그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민지는 아침을 사서 곧장 교실로 갔다.오늘은 재석의 수업이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정은과 서준은 이
정은은 민지의 식사량을 떠올리며 또 그녀 앞에 놓인 몇 가지 음식을 훑어보았다.‘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간식에 불과해. 두 시간 뒤면 배고프다고 야단을 칠 텐데.’그러나 뜻밖에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민지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어머...’정은은 깜짝 놀랐다.‘진짜 배가 안 고픈 거야?’만약 민지가 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울면서 반박했을 것이다. ‘배고파요, 곧 굶어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겠어요?’그렇다, 지금 민지는 벌써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고, 눈앞이 침침하며,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감자칩, 과자, 케이크, 닭발, 호떡 등 음식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아악! 먹고 싶어 죽겠어! 참아야 돼!’정은은 그런 괴로운 민지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그녀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 줄 알았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민지가 여전히 이렇게 조금밖에 먹지 않자, 정은은 그제야 깨달았다.“민지야, 너 지금 다이어트 하는 거니?”“네! 정은 언니, 이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분명히 언니랑 저랑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언니는 점심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잖아요. 저는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배가 고픈 거 있죠. 힝, 너무 불공평해요...”“왜 갑자기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건데?”이것은 정은이 알던 민지가 아니었다.그녀가 아는 민지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항상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정은은 눈빛이 깊어졌다.“너, 지금 연애하는 거 아니야?”이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서준이 고개를 홱 돌렸고, 검은 눈동자는 횃불처럼 빛났다.“누구랑?”민지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그런 거 아니야! 절대로!”정은이 물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한 여자가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지 시작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사람이
현빈이 대답했다.“넌 네 여자친구랑 춤추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우리한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거야?”그는 팔짱을 끼며 웃는 듯 마는 듯했다.도겸이 말했다.“그렇게 떠들썩하니 못 본 척하기가 더 어려워.”현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거절당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은이의 성격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니야.”도겸은 무표정하게 어두컴컴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고, 반쪽 얼굴은 그늘에 잠겼다.“내가 말했지, 너한테 기회가 없을 거라고.”현빈은 웃음을 지었다.“난 오히려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알잖아, 넘기 어려운 은 산일수록 나한테 승부욕이 더 생긴다는 거. 한 번 실패했다고 매번 지는 것은 아니잖아. 언젠가 난 산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볼 거야.”도겸은 피식 웃었다.“산꼭대기에 오르기 전에 넌 이미 산 중턱에서 떨어져 죽었을 거야.”“그래도 괜찮아. 노력을 할 때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건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아. 하지만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도겸은 현빈이 무슨 듣기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고 직감했다.“가장 슬픈 것은 거절당할 기회도 없이 소탈한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아쉽게도 아무리 몰입해서 연기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거든.”말을 마치고 현빈은 차 키를 꺼내 운전석에 앉았다.떠나기 전에 그는 특별히 차창을 내려 웃으며 말했다.“여자친구를 기숙사로 데려다주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아쉬운 척 뽀뽀도 해주고 그래. 이렇게 연기를 하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도겸은 멀어진 차가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혜가 찾아왔다.“왜 나왔어요? 안 추워요?”“맑은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오늘 활동 이미 끝났어요. 오늘 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응, 가자.”경혜는 멈칫했다.“가요, 어디로요?”“기숙사로 데려다줄게.”도겸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앞장섰다.경혜는 반응하더니 입가
태민은 은근히 놀랐다.“너도 그 가게의 단골이야?”“네! 거기 케이크가 꽤 괜찮거든요.”태민은 평소에 이런 키체인을 거의 달고 다니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서른이 넘은 자신이 이런 키체인을 하고 있다면 너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키체인은 태민이 새 핸드폰을 살 때부터 줄곧 걸려 있었고, 눈에 띄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놔둔 것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아가씨가 이것을 알아볼 줄이야.“몇 번 뽑았어요?”민지가 물었다.“앞뒤 합치면 아마... 세 번 정도?”민지는 이 말을 듣고 이가 깨질 뻔했다.‘왜 남들은 운이 이렇게 좋은데, 나만 재수가 없는 거지?’태민은 민지가 이를 가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괜찮다면 주소 하나 남겨줘. 집에 다른 하나 히든 키체인이 있거든. 너한테 줄게.”민지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은 태민의 눈빛을 마주했다. 태민의 모습은 마치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놀아줬던 이웃집 오빠와 흡사했다.태민은 키가 1미터 78센티미터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온화하고 우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부드럽고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물처럼 세상 만물을 감쌀 수 있었다.민지는 멍하니 태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열기가 솟구쳐 볼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심지어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정, 정말... 정말 저한테 주는 거예요?”태민은 영문을 몰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한 거지?’태민은 이 아가씨가 아주 귀엽다고 생각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교수님, 행사가 곧 끝날 거예요. 현장에서 회수한 재료를 체크하신 다음 사인해 주세요!”“알았어, 바로 갈게.”이때 태민은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돌아오더니 민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위에 내 번호 있으니까 나한테 주소 보내
재석은 떠나자, 수아도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저 집에 갈게요.”말을 마치자 태민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태민은 영문을 몰랐는데, 입을 벌리고 쫓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수아를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그러나 교수님 대표로서 오늘 밤 태민에게 다른 임무가 있었으니 그는 몸을 뺄 수가 없었다.수아는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태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태민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분명히 두 사람은 이미 사귀는 사이였지만, 태민은 항상 수아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수아의 마음을 알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두 사람은 여태껏 사귀면서 손을 잡는 것 외에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그는 실의에 빠져 고개를 떨구었다.이때 누군가 갑자기 태민과 부딪쳤다.“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민지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고, 안에 과자 5개 정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음료수를 들고 있었는데, 방금 태민과 부딪쳤기 때문에 좀 쏟아졌다.그녀는 빨리 사과했다.태민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괜찮아.”말하면서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좀 닦아, 음료수가 다 쏟아졌네.”“앗! 감사합니다!” 민지는 얼른 받으려 했지만, 자신의 두 손에 모두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난감해했다.태민은 민지의 궁핍함을 알아차렸다.“아니면 내가 접시 들어줄까?”“어? 괜찮으세요?”“그럼.” 태민이 접시를 받았다.민지는 손을 닦았다.“방금 정말 죄송해요. 전 성격이 너무 털털해서...”“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방금 딴 생각을 한 데다가 또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길을 주의하지 않았어.”“제가 사과로 간식 하나 드릴게요.”태민은 그제야 접시에 망고 무스, 두리안 케이크, 나폴레옹 케이크 등 여러 가지 디저트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좋아.” 그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그 두리안 케이크를 골랐다.민지는 아쉬움을 드러냈다.“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