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했네, 소정은.”“남자들이 하나둘씩 끊이질 않구나.”도겸의 말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방금 그 남자는 누구야? 너희들 위에서 무슨 짓 했지?”정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손목이 아파 벗어나려 했지만, 도겸의 힘은 더 강해졌다. 정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칠수록 도겸은 더욱 세게 그녀를 움켜쥐었다.“강도겸, 이거 놔!”“먼저 대답해!”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픔을 참고 말했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전 남자친구로서 전 여자친구의 감정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니잖아?”정은은 웃으며 담담하게 눈을 들었다.“당신도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내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도겸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지나가던 길이었어, 왜? 안 돼?”말이 끝나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으며 골목으로 들어왔다.“누가 차를 골목 앞에 세운 거야? 도로가 이렇게 좁은데, 딱 출구를 막고 있다니. 자기가 스포츠카 차주면 다야? 교양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지나가라는 거야...”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정은은 한눈에 그 눈에 차가 바로 도겸의 포르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도 그가 도대체 왜 왔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쓰레기를 버린 다음 돌아섰다.“나한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든 말든, 그게 한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모두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 우린 이미 헤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내가 설명해줘?”“당신의 미래는 나와 상관이 없으니, 당신도 나의 현재와 미래에 끼어들지 마. 우리 그냥...”정은은 잠시 멈추었다.“낯선 사람처럼 지내자.”“그리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마. 당신 여자친구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그때 서연희에게 명분을 주기로 선택한 이상, 당신이 약속한 것처럼, 일편단심으로 그 여자를 대했으면 좋겠어.”정은은 도겸 때문에 상처를 입었기에, 연희도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꽃다운 나이에 남자 때문에 인
방에 들어서자, 도겸은 미친 듯이 옷장을 열더니 또 정은의 옷방에 들어갔다. 명품가방, 옷,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준 손목시계며 팔찌까지 전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앵두 팔찌에 시선이 떨어진 순간, 도겸은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빛도 어두워졌다.이것은 정은과 사귄 지 3년 되었을 때, 그가 외국에서 산 정은의 생일 선물이었다.앵두는 영어로 cherry였고, 발음은 cherish와 비슷하며,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팔찌는 그녀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그때 정은은 줄곧 끼고 다니며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것까지 별장에 남겨뒀다니. 마치 도겸을 향한 사랑도 전부 버리려는 것 같았다...도겸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은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모두 진심이었단 것을.‘정은은 지금 진심으로 나와 헤어지길 원해.’...쿵-위층에서 굉음이 울리자, 왕순자는 깜짝 놀라 재빨리 위층으로 달려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도겸은 마침 옷방에서 나왔는데, 안색이 어두웠고, 수시로 화를 낼 것만 같았다.“도련님...”왕순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방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옷방 안의 귀중한 주얼리들은 이미 박살 났고, 일부 가격표를 뜯지 않은 옷도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카펫은 그야말로 쓰레기 더미처럼 옷이 가득 쌓여있었다. ‘내가 방금 상한 죽 한 솥을 버린 다음 주방을 다 정리했는데. 지금 또 침실을 치워야 한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알록달록한 불빛, 시끌벅적한 노래, 노출된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무대 중앙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도겸은 구석에 혼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는 위스키 한 병을 시켰는데, 한 입 한 입 쉬지 않고 마셨다. 술을 마시기보다는 오히려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어두컴컴한 불빛은 도
고동건이 나타나더니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언제 왔어? 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위층에 룸 하나 예약했으니까 같이 가서 좀 마실까?”도겸은 관자놀이를 비볐다.“난 안 마실래, 너희들 마셔.”도겸이 떠나는 것을 보고, 동건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전에 도겸은 절대로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는데. 설마, 정은 씨와 화해한 거야?’‘그래, 금방 화해했다면 당분간 우리와 놀 수가 없겠군.’“동건아, 뭘 봐? 너밖에 안 남았어.”계단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0시였다.왕순자는 이미 도겸의 방과 옷방을 정리했고, 정은의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로 복구되었다.그는 발길을 돌려 서재로 갔다.책꽂이 위에는 거의 생물학과 관련된 책들이 널려 있었다.정은은 비록 석사 입학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공을 줄곧 연구하며 틈만 나면 서재에 하루 동안 앉아 공부를 했다. 이 책들도 모두 그녀가 남긴 것이었다.그녀는 가끔 도겸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어떤 책은 이미 절판되었고, 어떤 책은 그녀가 원판을 찾아 복사한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들을 분류했는지를. 자신의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정은은 유난히 즐겁게 웃었다...도겸은 그윽한 눈빛으로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쓰레기를 들고 떠나려던 왕순자를 불렀다.“이모님 핸드폰 좀 빌려줘요.”왕순자는 즉시 경계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저, 도련님, 저번에 제 핸드폰을 바닥에 부쉈잖습니까.”“새 거 사주지 않았어요?”왕순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리 줘요.”“이, 이건 제가 금방 산 거라서...” ‘망가지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내일 이모님에게 아이폰 16 두 대를 보내라고 할게요.”“네!” 왕순자는 즉시 기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을 받자, 도겸은 몸을 돌려 정은에게 전
가는 길, 두 사람은 처음에 몇 마디 나누었지만, 후에 각자 침묵을 지켰다.재석은 오늘 자주 운전하던 차를 선택했다. 정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별장에 도착하자, 문 앞의 경호원은 심지어 정은에게 인사를 했다.“정은 아가씨,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출장 가셨어요?”정은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별장 문 앞에 도착하자, 재석은 차를 세웠고,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책 들고 나올게요.” 정은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내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건가?”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책이 많지 않아서요. 나 혼자도 들 수 있거든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초인종을 누른 순간, 왕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그리고 문 밖의 사람을 보고, 왕순자는 기쁨에 소리쳤다.“정은 아가씨!”‘마침내 돌아오셨네요!’정은은 웃으며 설명했다.“물건 챙기러 왔는데...”“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옷을 입은 도겸은 방금 일어난 듯 위층에 나타났다. 그는 가슴을 안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혼자 온 거야? 옮길 수 있겠어?”그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차가운 눈으로 정은을 내려다보았다.“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머지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서재로 갔다.도겸의 곁을 지날 때, 그도 정은의 뒤를 따라갔다.서재에서 책을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 정은은 미리 준비한 큰 가방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에 넣었다.도겸은 옆의 책장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서 땀을 흘릴지언정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다니.’10분 뒤, 정은이 가방을 단단히 묶은 다음, 서재를 떠나려 할 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도겸이 갑자기 발작했다.그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책을 담은 가방
정은의 쉰 목소리는 떨림과 공포를 띠고 있었고, 마치 놀란 토끼처럼 절망적이면서도 연약했다.도겸은 더욱 다급해지더니, 그녀의 상의를 벗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치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정은은 더욱 당황해졌다.“강도겸, 당신 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전 여자친구인 날 강요하는 거냐고?!”“정말 하고 싶다면, 내가 지금 바로 서연희에게 연락할게.”“아, 이러지 마!”정은이 자신을 피하는 동시에, 붉어진 두 눈에 고집과 거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며, 도겸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왜? 헤어진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 나와 같이 침대를 뒹군 적이 수백 번도 더 넘었을 텐데, 어디서 청순한 척이야?”정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나쁜 자식!”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들었다.“날 떠나면 무슨 좋은 남자라도 만날 것 같아? 누가 다른 남자와 잔 여자를 받아들이겠어?”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전혀 쏟아져 나왔고, 정은은 자신이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가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뭘 그렇게 보는 거야?” 도겸은 나지막이 웃으며 정은의 떨리는 입술을 쳐다보았다.“날 원하는 거야?”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은의 손을 조금씩 떼어내며, 악랄하게 그녀의 상의를 찢었다.정은은 울고 있었고, 도겸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그제야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됐어,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절망에 처한 순간, 그녀를 압박하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 누군가 포악하게 정은을 억누르고 있던 도겸을 떼어낸 것이었다.미처 방비를 하지 않은 도겸은 그 힘에 뒤로 후퇴했고, 등이 책장에 부딪혀서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재석은 정은이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자, 책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왕순자가 문을 연 후, 재석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다툼을 똑똑히 들었고, 망설이지 않고
도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주먹을 쥐며 재석에게 돌려주었다.“날 때려? 네가 뭔데?” 그는 주먹을 날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소정은과 알콩달콩 침대를 뒹굴 때, 넌 어디에 있었지...”재석은 도겸이 휘두르는 주먹을 가로막았다. 도겸의 허술한 공격보다 그의 주먹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재석의 눈에 맺힌 차가운 기운을 보면, 또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그럼 넌? 넌 또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헤어지고도 남에게 매달리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성추행범?”재석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도겸의 정곡을 찔렀다.“이게 죽으려고.”도겸은 힘을 주며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재석은 그의 손을 잡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강도겸, 그만해!” 정은은 지금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재석의 외투를 당기며 더 이상 도겸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녀는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린 다음, 시선을 드리웠다.“조 교수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요.”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경찰에 신고할래?”정은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됐어요. 그냥 가요.”“음.” 재석은 정은의 뜻을 존중했고, 또한 남의 갈등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이거 다 내 책인데, 지금 힘이 좀 없어서요. 교수님이 대신 옮겨주면 안 될까요? 고마워요.”재석은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든 다음, 정은을 부축하여 이곳을 떠났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화가 나서 옆에 있는 식물을 걷어찼다.차에 탄 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갈수록 멀어지는 별장을 바라보았다. 6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처음 이사 왔을 때, 그녀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고, 도겸과 함께 별장을 장식하면서 또 함께 화원을 꾸몄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이런 결말을 맞이하다니.‘이제 난 더 이상 이 별장에 올 일이 없을 거야.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아무런
정은은 학교 다닐 때, 2층의 한식을 가장 좋아했다. 밥을 떠 주는 아주머니는 동그란 얼굴에 웃으면 무척 상냥해 보였고,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관심을 가지며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 고기 한가득 담아주었다.멀리 있어도 정은은 단번에 그 아주머니를 발견했다.‘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으시네. 졸업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아주머니는 아직도 날 기억하고 계실까?’정은은 뒤에서 줄을 섰다. 아주머니는 밥을 떠주느라 바빴기에 그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식판의 무게를 느끼자, 정은은 활짝 웃었다.“아주머니, 감사합니다.”재석이 돈을 낸 다음, 두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오랜만에 먹는 거지만, 맛은 예전과 똑같네요.”셰프의 솜씨는 3년 전보다 못하긴커녕 심지어 많이 진보했다.정은은 예전을 떠올렸다.“대학 때, 난 늘 실험을 하느라 점심을 깜박했거든요. 실험실에서 나오면 시간은 거의 2시가 다 되어 갔기에, 음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매번 나에게 닭다리를 하나 남겨주시더라고요.”재석은 방금 정은의 뒤에서 줄을 섰는데, 그 아주머니가 그녀를 본 순간, 짜증 대신 웃음을 지은 것을 발견했다.정은은 식판에 있는 밥을 보면서 갑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사실 나와 룸메이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수민과 오미선 교수님 외에, 식당 아주머니는 가장 친절하신 분이셨어요. 이젠 선배님도 내게 있어 무척 고마운 사람이에요.”재석은 멈칫했다.정은은 계속 말했다.“그래도 학교가 좋네요. 환경이 조용하고 인간관계도 단순해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죠. 어쩌면 석사 입학을 준비하는 일이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요.”...밥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즉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안에서 돌아다녔다.자갈길을 따라 포도나무를 지나니, 한바탕 맑은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서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정은은 그들이 어느새 학교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미름 호수에 도착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방에 들어서자, 정은은 가장 먼저 그 책들을 정리했다. 한 권 한 권 책꽂이에 끼워 넣은 후, 그녀는 땀투성이로 되었다.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탁자 위에 놓인 연고를 보고, 정은은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면봉으로 가슴과 허리 등 멍든 곳에 꼼꼼히 발랐다.차가운 연고에 박하향이 있어 바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었다.시간이 아직 이르기에, 정은은 원래 책을 좀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한 데다 그녀는 머리까지 심하게 아파서 힘없이 침대에 누웠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한밤중에 정은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꿈속에서 도겸은 마치 악마처럼 정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도저히 그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 두려움과 공포는 너무나 생생해서, 정은은 옷깃을 꽉 움켜쥔 채 눈을 번쩍 뜨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밤이 깊었지만, 정은은 다시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핸드폰을 들고 가장 먼저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방은 줄곧 받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꽉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때, 옆집 베란다의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재석에게 톡을 보냈다.[자요?]상대방은 줄곧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기다리다가 다시 잠이 들려 할 때,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아직.]정은은 천천히 문자를 확인했다. 이때 상대방은 또 다른 문자를 보내왔다.[창밖을 내다봐.]정은은 고개를 들었다. 고요하고 깊은 밤,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 널려 있었고, 얼룩덜룩한 동시에 밝고 찬란했다.[뿔 같은 모양으로 된 별자리 봤어? 그건 쌍둥이자리야.]핸드폰은 계속 진동했다.[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는 황금알에서 나왔어. 형은 태어나자마자 왕국에 전쟁과 수해를 가져왔기에, 재앙의 존재로 불렸어. 동생은 사랑의 신의 입맞춤을 받은 아이였기에 인류의 수호자였지.][형은 동생을 질투해서 몇 번이나 동생을 죽이려 했지만, 동생은 형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이 필요할 때 스
“그럼 연락처 줬어?”정은이 대답했다.“아니요.”“둘 다?”“네.”교수님은 그제야 알아차렸다.‘이 여자애는 그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데, 두 사람이 착각을 하고 싸우기 시작했던 거구나.’지도원도 도리를 따지는 사람이었기에, 이 일은 정은과 무관하며 본교 학생이 잘못한 거라 매듭을 지었다.“이제 별일 없으니까 그만 가봐.”그 후로 정은은 점심에 식당에 가서 먹지 않았고, 배달을 시키거나 민지에게 포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이제야 겨우 조용해졌다.그러나 이 일은 이웃 대학에서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캔들이 되었다.하지만 모두 정은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문을 닫고 실험에 몰두하며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논문을 썼다.그 외에 외부의 어떤 소리도, 좋든 나쁘든, 선악을 막론하고 정은은 일절 듣지 않고 묻지 않았다....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과학자 표창 대회가 J시 시청에서 거행되었다.재석은 두 개의 최고급 상장을 수여 받으며 장내의 주목을 끌었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전공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둔 거물이었지만, 거물과 거물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다.재석은 의심할 여지 없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최고의 거물이었다.“축하한다, 재석아, 벌써 3년 연속 상을 받았지?”“마 교수님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 당시 교수님은 5년 연속 상을 받으셨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잖아요. 제 작은 성과는 언급할 가치도 없죠.”“하하... 재석아, 넌 여전히 이렇게 겸손하구나!” 마정일이 그때 받은 상은 재석에 비하면 훨씬 못했다.그러나 재석은 말을 예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듣기에도 편안했다.“시대도 부단히 앞서가고 있으니, 앞으로 학술계는 너희 젊은이들의 천하가 될 거야.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그저 너희들에게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는 것 같군. 그래야 우리도 큰 공을 세운 셈이지.”“저희들의 천하가 된다 하더라도, 구관이 명관 아니겠어요?”“하하하... 난 말주변이 없어서 널 이길 수가
민지는 눈알을 굴렸다.‘내 이럴 줄 알았어.’고개를 돌리자, 서준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민지는 침을 삼켰다.“왜, 왜 날 그렇게 보고 있는 건데?”서준은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백을 받은 사람은 네가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정은 언니를 위해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은 정말 짜증난다니깐... 그나저나 쮼, 정은 언니는 이렇게 예쁘고, 능력도 이렇게 강한데, 넌 마음이 조금이라도 설렌 적이 없는 거야?”민지를 바라보던 서준은 이 순간 어이가 없었다.“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그런 적 없었어?”“응.”“그럼 넌 눈에 문제가 있는 거구나.”서준은 민지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나도 내 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정은은 그 남학생을 한 번 바라보았다.“미안, 난 너희 학교의 학생이 아니야.”“괜찮아, 그럼 톡이라도 추가하자!”“그것도 안 될 것 같아.”“왜?”“남자친구 있으니까.”“아, 그래...” 남자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실례해서 미안!”말이 끝나자 바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정은은 한숨을 돌렸다.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학생들도 모두 흩어졌다.실험실로 돌아가는 길에 민지는 갑자기 물었다.“정은 언니, 남자친구 사귀었어요?”“아니. 그거 거짓말이야.”오직 이 이유를 대야 가장 빨리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그럼 나중에 언니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그 이유로 대처할 생각이에요?”“어? 사람들? 그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지금도 하나밖에 없잖아...”“언니 정말 너무 단순하시다! 미녀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는 법이죠. 오늘은 하나겠지만, 내일은 한 무더기가 찾아올 거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두고 봐요.”“에이, 설마?”“허.”이때의 정은은 민지의 말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러나 다음날, 또 한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더니, 번호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은은 그제야 자신이 단순하단 것을 알아차렸다.연속 3일, 매일
도겸이 말하기 전에 경혜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곳을 선택했어요. 학교와 가까워서 몇 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까요. 특별히 운전하거나 미리 예약할 필요가 없으니, 간단하고 편리하잖아요. 이 가게의 맛도 꽤 괜찮고요.”현빈은 담담하게 응답했지만, 믿지 않은 모양이었다.“강 대표님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야.”번마다 다정한 여자친구를 찾을 수 있다니.경혜는 웃음 하나 변하지 않고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어머! 조 교수님도 계셨네요? 모두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같이 앉는 건 어때요?”그녀는 열정적으로 말을 마친 다음, 또 고개를 돌려 도겸을 바라보았다.“어때요?”“나야 상관없지. 너만 괜찮다면.”“아.” 인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미안하지만 우린 이미 식사를 마쳤거든요.”경혜는 깜짝 놀랐다. “네?”“이 테이블에 앉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잘됐네요, 자자...”말하면서 인훈은 바로 일어서더니 외투를 들었다.재석, 현빈과 정은도 얼른 일어나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자, 두 사람 얼른 앉아요.”경혜와 도겸은 말문이 막혔다.현빈이 말했다.“난 계산하러 갈게.”인훈과 정은도 말을 이어받았다. “저도 같이 가요.”“그럼 다 같이 가면 되겠네.”말이 끝나자, 일행은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했고, 곧이어 식당을 나왔다.도겸과 경혜는 테이블 앞에 서서 앉지도 못했다.경혜는 눈을 드리우며 말했다.“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네요.”도겸은 무뚝뚝하게 앉아 메뉴판을 내밀었다.“음식 시켜.”경혜는 조심스럽게 세 요리를 주문한 다음 그에게 물었다.“도겸 씨는 뭘 먹고 싶어요?”도겸은 고개를 저었다.“난 필요 없어.”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남자는 연거푸 담배 세 대나 피웠다.하얀 연기가 감도는 가운데, 도겸의 눈빛은 음침하고 포악했다....또 월요일이 찾아왔고, 아침수업이 끝난 후, 정은과 민지, 서준은 곧장 이웃 대학으로 달려갔다.실험실로 가서 실험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세 사람은 각자 일
현빈이 말했다. “이번 주는 주로 주체의 구조를 짓기 시작했고, 현재 진도는...”현빈이 본론을 얘기하자, 정은은 열심히 듣기 시작했고 씹는 동작도 느려졌다.마침 치킨이 올라왔는데, 재석은 하나 집어서 정은의 그릇에 넣으려 했다. 같은 시간, 현빈도 생선 고기를 집어주었다.두 사람은 멈칫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교수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심 대표님보다 못하죠.”정은은 앞에 있는 치킨과 생선을 바라보았다.“고마워요. 다 이리 줘요.”두 남자는 그제야 눈을 돌렸다.“물고기는 고단백이라서 많이 먹어.”“치킨이 엄청 바삭바삭해. 네가 좋아하는 맛이야.”“감사합니다, 심 대표님, 선배님.”정은은 두 사람을 공정하게 대했다.“얼른 먹어요, 나한테 집어줄 필요 없고요.”분위기는 방금 전처럼 싸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경쾌하지도 않았다.바로 이때, 문이 열리더니 인훈이 찬바람을 맞으며 들어왔다.“미안 정은아, 길이 막혀서.”“오빠? 왜 왔어? 이번엔 안 온다며?” 정은은 질문을 하며 얼른 앉으라고 했다.5일 전, 세 사람은 단톡방에서 약속 시간을 잡았는데, 인훈은 출장을 가야 하는 바람에 이번 주에 올 수 없다고 했고, 현빈에게 위탁하여 공사 진도를 정은에게 보고하라고 했다.그래서 음식이 올라오자, 그들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기 시작했다.인훈은 맞은편에 앉아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이번에 아주 순조로웠어. 국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주문했기에, 어젯밤에 바로 돌아왔어. 오늘 공사장에 다녀왔는데 큰 문제도 없더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것이니, 그래도 직접 와서 소통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정은은 재빨리 종업원에게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했고, 또 요리 두 개를 더 추가했다.인훈은 정말 배가 고팠다.젓가락을 들자마자 먹기 시작하더니, 배를 조금 채우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그의 눈빛은 먼저 정은에게 떨어졌고, 이어서 재석에게 떨어졌
여전히 서비대학교 근처의 그 식당이었다.정은과 재석이 도착했을 때, 현빈은 이미 안에 있었다.“정은아, 왔어...”그는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은에게 집중했다.마치 재석이 보이지 않은 것처럼.“오래 기다렸죠, 심 대표님.”‘심 대표님’이란 호칭에 재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현빈은 그제야 그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조 교수님, 또 이렇게 만났네요.”재석은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심 대표님과 꽤 인연이 있나 봐요.”“그럼 들어오세요.”말하면서 현빈은 재석을 자신의 옆자리로 인도한 후, 또 정은을 위해 다른 한쪽의 의자를 당겼다.이 순서대로 앉으면, 재석 옆에 현빈, 현빈 옆에 정은이었다.“저쪽은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사람들 드나들면, 바람이 세니 정은아, 넌 그냥 내 옆에 앉아.”말하면서 재석은 자기 옆의 의자를 당겼다.정은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앉았다.그렇게 정은 옆에 재석, 재석 옆에 현빈, 세 사람은 이런 순서로 앉았다.“좀 따뜻해졌어?” 재석은 현빈의 어두운 안색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쪽은 바람이 정말 세서 확실히 쌀쌀하네요. 그럼 나도 안쪽으로 앉을게요.”그리고 세 사람은 현빈, 정은, 재석의 순서대로 앉았다.재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현빈은 웃으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난 이미 주문했어. 모두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야.”정은은 고맙다고 말했지만, 재석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님, 메뉴에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좀 봐요.”“아니야, 난 다 돼.”“그럼 절대로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어요.”“좋아.”현빈은 마음이 씁쓸했다.‘왜 나한테 메뉴 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왜 나한테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라고 하지 않는 거냐고?’그러나 현빈은 자신이 요리를 주문했다는 것을 잊었다.정은은 자연히 현
물의 온도가 컵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정은은 방금 허리에 닿은 그 뜨거운 온도를 떠올렸다.똑똑-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 정은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재석이 밖에 서 있었다. “신발.”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뜻밖에도 개에게 물려간 그 신발을 되찾았던 것이다.“고마워요, 선배님.”“별 거 아닌데 뭘.”...오후에 정은은 한잠 잤다.그리고 2시에 일어나서 실험실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서준은 이미 있었지만, 민지는 없었다.“아, 민지는 마실 거 사러 갔어요.”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민지는 밀크티를 들고 돌아왔다. 물론 정은의 것도 있었다.이 실험실은 여전히 전처럼, 실험대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에 그들이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을 하나 만들어 놓았고, 수시로 간식과 물컵을 여기에 놓을 수 있었다.서준이 먼저 밀크티 한 잔을 받을 때, 정은은 깜짝 놀랐다.전에 민지가 아무리 말려도 서준은 한 번도 마시려 하지 않았다.가끔 한 번 마셔도 민지의 핍박을 받아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만 골랐고, 마지막에 태반이 남아 있었다.이번엔...“쮼, 어때? 새로 나온 밀크티 맛있어?”“...음.”“다음에 내 거 한 번 마셔 봐, 이것도 맛있어.”“응.”정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보이지 않아, 지금 동쪽에 걸려 있는지 아니면 서쪽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세 사람은 실험실에서 오후 내내 실험을 했고, 밤이 되자, 민지와 서준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 언니, 안 가요?”“난 마무리 좀 하고. 이따가 갈게.”“그럼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요.”“응.”7시, 정은은 실험대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다음 떠났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불빛이 밝아졌다.찬바람이 불자, 정은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멀리서 보면 마치 걸어가는 뚱뚱한 공과 같았다.“정은아...”뒤에서 누가 그녀를 불렀다.정은은 고개를 돌렸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
정은은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꼭 안고 있었고, 두 다리는 상대방의 몸을 감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마치 나무에 걸린 코알라와 같았다.재석이 바로 그 나무였다.“미안해요, 선배님,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방금 그 개가 너무 무서웠어요...”정은은 사과하면서 내려올 준비를 했다.그러나 남자의 큰 손은 여전히 정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정은의 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이어서 얼굴 전체로 번졌다.마지막에 귀까지 빨개졌다.“선, 선배님...”정은은 힘을 조금 썼다.그러나 재석의 두 손은 마치 집게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어 정은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무서웠어?” 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목소리가 약간 쉬었다.그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몰랐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조, 조금이요.”개든 사람이든 정은은 다 조금 무서웠다.“네가 스스로 뛰어오른 거 맞지?”재석이 또 물었다.이번에 정은의 볼은 더욱 붉어졌는데, 마치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미안해요. 나도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무서운 바람에...”문제는 무서웠던 것이다.그렇게 큰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왔으니, 좁은 계단에서 피할 곳도 없었다.만약 멍하니 서 있다면, 그 개는 정은의 다리에 꼿꼿이 부딪힐 것이다.그래서 정은은 어색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해도, 정은은 여전히 재석의 품에 안길 것이다.“선배님, 저기... 나 좀 내려주겠어요?”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그녀의 입술이 남자의 귓가에 있었는데, 말 할 때 내쉰 숨결은 재석의 볼과 귀에 떨어지며 따뜻한 향기를 띠고 있었다.재석은 온몸이 굳어지더니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정은을 내렸지만, 손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그렇게 꽉 달라붙지 않았다.“확실해?” 한참 후에야 재석이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좀 더 잠겼다.“네?” 정은은 그제야 그 개가 자신의
곧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재석이 교실에 들어섰다.“오늘 우리는 분자의 진화 및 시스템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할 거야...”수업 시작한지 10분, 민지는 풀이 죽은 채로 책상 위에 엎드렸다.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요 며칠 상태가 아주 안 좋아!”“지금 나랑 얘기하는 거야?”“그래!”민지는 화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준은 멈칫했다.“나도 엄청 야위었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 다이어트는 정말 어려우니까 이제부터 나도 결심했어.”“응?”“다이어트 포기할 거야! 죽어도 살 빠지 않겠다고!”“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이따가 수업 끝나면 내가 너랑 정은 언니한테 밥 사줄게, 응?”서준과 정은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민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그래, 그럼 이렇게 정하자!”서준과 정은은 어리둥절해졌다.“스테이크를 먹을래, 아니면 샤브샤브 먹을래? 아니면 분식집? 아니면 뷔페? 아니면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과 콜라도 되는데! 아니면... 다 먹을까? 종류별로 시키면 되지! 이게 좋겠네!”민지는 배를 곯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다.‘준비...’재석은 강단에 서서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말이 끝나자마자 민지는 정은과 서준을 끌고 교실을 뛰쳐나와 바람처럼 사라졌다.“정은 학생은 좀 남아...”재석이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사라졌다....한끼 배불리 먹은 민지는 만족스럽게 의자에 기대었고, 온몸에서 쾌적함을 발산했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내가 왜 살을 빼야 하는 건데? 누가 원하면 가서 빼라 그래, 어차피 난 다시는 이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에 호감이 가는 남자를 만나도 굶지 않을 거야.’태민에 대해서는...상대방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민지는 더 이상 헛된 상상을 하지 않았다.‘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남의 남자친구에게 반하겠어?’오
하정남은 제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예전에는 남이 어떻게 말하든 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왜 갑자기 살을 빼겠다는 거야? 누가 널 괴롭힌 거 아니야?”민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난관적이어서 종래로 몸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뚱뚱해서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해도 하루 종일 웃으며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다이어트를 하겠다니?[민지는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어. 그러나 이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을 빼다니... 대체 얼마나 큰 일에 부딪힌 거야?’하정남은 가슴이 떨렸다.민지는 하정남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설명했다.[뉴스에서 그러던데, 적당한 다이어트는 몸에 좋다고 했어요. 나도 이렇게 계속 뚱뚱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하정남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뉴스에서 들었다고? 이상해! 분명히 이상해!’그는 자신의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장 큰 취미는 먹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틱톡이 유행하는 요 몇 년 동안 민지는 영상 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다.그런데 뉴스 하나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다니.이때 하정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너 연애라도 한 거냐?”민지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전화를 사이에 두고 있어 하정남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난 공부를 하러 온 것이지, 사랑을 하러 온 게 아니잖아요! 아이고, 아빠, 나 아직 수업이 있는데, 곧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끊을게요,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반응이 이렇게 큰데 아직도 발뺌을 하는 거야?! 흥! 우리 딸 아직 어리니, 어느 남자가 감히 지금 내 딸을 빼앗아간다면, 난 그 자식의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민지는 아침을 사서 곧장 교실로 갔다.오늘은 재석의 수업이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정은과 서준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