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는 마음이 좀 찝찝해서 도겸의 팔을 흔들었다.“오빠, 왜 그래요?”도겸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나도 이제 다 나았으니, 너는 수업에 전념해. 더 이상 이쪽으로 찾아올 필요가 없어.”“앞으로 회사 일 때문에 나도 많이 바쁠 거야. 그래서 아마도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연희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별장을 나서자, 그녀는 웃음을 점차 거두더니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고. 눈빛도 많이 우울해졌다.‘방금 도겸 오빠는 분명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잖아.’한참 망설이다가, 연희는 핸드폰을 꺼내 동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겸의 절친들 중, 그녀는 오직 동건의 연락처밖에 없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연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동건 오빠, 저예요. 요 며칠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저 방금 별장에서 나왔는데, 도겸 오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혹시 정은 언니 때문에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요?”전화기 너머의 동건은 술집에서 어렵게 한 여자와 눈이 맞았는데, 두 사람 마침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희의 질문을 듣고, 그는 얼버무리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정은 씨는 오지 않았지만, 죽을 두 번 끓여줬지.]말을 마치자, 사정없이 전화를 끊었다.‘역시 그 여자였어...’연희는 이를 악물며 눈빛은 차가웠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가서 복습하고 있는 정은을 찾았다.“도겸 오빠는 지금 내 남자친구예요. 두 사람 이미 헤어졌으니 좀 깔끔하게 정리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에요. 두 사람 완전히 끝났다고요!”정은은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비록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대답했다.“걱정 마, 난 전 남자친구와 아예 화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남자를 빼앗을 리가 없어.”연희가 떠나는 것을 보며, 정은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
성준은 교수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비록 정은과 같은 전공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 때, 의외로 잘 맞았다.심오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꽤 즐거웠다.그녀는 아직 석사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록 대부분 내용은 이미 술술 외울 수 있었지만, 현재 전공의 연구방향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었기에, 대량의 논문을 읽으면서 천천히 지식을 쌓아 나가야지, 단번에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그리고 성준은 재학 중인 석사로서, 이미 학교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된 정은보다 이 방면이 훨씬 강했다.그들을 미행하고 있는 도겸은 두 사람이 매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렇게 모질게 대하더니, 다른 남자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웃어?’정은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한가득 차렸고, 양식이 무척 다양했다.성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풍부한 음식을 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에 너무 많지 않을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선배님, 날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연히 풍성한 요리로 고마움을 표시해야죠.”성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사실 나도 뭐 도와주지 못했어. 네가 복습하는 효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거든.”함께 복습할 때, 그는 정은의 진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나를 말하면 셋까지 알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아주 강해서, 한 번 가르치며 두 번 다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복습은 그중 하나일 뿐이죠. 나를 도와 논문 자료를 찾는 것 외에, 또 선배님 덕분에 내가 서비대학교 학생들만이 찾아볼 수 있는 원문 자원을 빌릴 수 있었잖아요.”성준은 의아해했다.“너 복습하는 동시에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니...”그는 마침내 오미선이 정은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다 먹은 후, 성준은 잠시 앉아 얘기를
“출세했네, 소정은.”“남자들이 하나둘씩 끊이질 않구나.”도겸의 말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방금 그 남자는 누구야? 너희들 위에서 무슨 짓 했지?”정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손목이 아파 벗어나려 했지만, 도겸의 힘은 더 강해졌다. 정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칠수록 도겸은 더욱 세게 그녀를 움켜쥐었다.“강도겸, 이거 놔!”“먼저 대답해!”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픔을 참고 말했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전 남자친구로서 전 여자친구의 감정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니잖아?”정은은 웃으며 담담하게 눈을 들었다.“당신도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내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도겸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지나가던 길이었어, 왜? 안 돼?”말이 끝나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으며 골목으로 들어왔다.“누가 차를 골목 앞에 세운 거야? 도로가 이렇게 좁은데, 딱 출구를 막고 있다니. 자기가 스포츠카 차주면 다야? 교양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지나가라는 거야...”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정은은 한눈에 그 눈에 차가 바로 도겸의 포르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도 그가 도대체 왜 왔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쓰레기를 버린 다음 돌아섰다.“나한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든 말든, 그게 한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모두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 우린 이미 헤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내가 설명해줘?”“당신의 미래는 나와 상관이 없으니, 당신도 나의 현재와 미래에 끼어들지 마. 우리 그냥...”정은은 잠시 멈추었다.“낯선 사람처럼 지내자.”“그리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마. 당신 여자친구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그때 서연희에게 명분을 주기로 선택한 이상, 당신이 약속한 것처럼, 일편단심으로 그 여자를 대했으면 좋겠어.”정은은 도겸 때문에 상처를 입었기에, 연희도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꽃다운 나이에 남자 때문에 인
방에 들어서자, 도겸은 미친 듯이 옷장을 열더니 또 정은의 옷방에 들어갔다. 명품가방, 옷,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준 손목시계며 팔찌까지 전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앵두 팔찌에 시선이 떨어진 순간, 도겸은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빛도 어두워졌다.이것은 정은과 사귄 지 3년 되었을 때, 그가 외국에서 산 정은의 생일 선물이었다.앵두는 영어로 cherry였고, 발음은 cherish와 비슷하며,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팔찌는 그녀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그때 정은은 줄곧 끼고 다니며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것까지 별장에 남겨뒀다니. 마치 도겸을 향한 사랑도 전부 버리려는 것 같았다...도겸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은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모두 진심이었단 것을.‘정은은 지금 진심으로 나와 헤어지길 원해.’...쿵-위층에서 굉음이 울리자, 왕순자는 깜짝 놀라 재빨리 위층으로 달려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도겸은 마침 옷방에서 나왔는데, 안색이 어두웠고, 수시로 화를 낼 것만 같았다.“도련님...”왕순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방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옷방 안의 귀중한 주얼리들은 이미 박살 났고, 일부 가격표를 뜯지 않은 옷도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카펫은 그야말로 쓰레기 더미처럼 옷이 가득 쌓여있었다. ‘내가 방금 상한 죽 한 솥을 버린 다음 주방을 다 정리했는데. 지금 또 침실을 치워야 한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알록달록한 불빛, 시끌벅적한 노래, 노출된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무대 중앙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도겸은 구석에 혼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는 위스키 한 병을 시켰는데, 한 입 한 입 쉬지 않고 마셨다. 술을 마시기보다는 오히려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어두컴컴한 불빛은 도
고동건이 나타나더니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언제 왔어? 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위층에 룸 하나 예약했으니까 같이 가서 좀 마실까?”도겸은 관자놀이를 비볐다.“난 안 마실래, 너희들 마셔.”도겸이 떠나는 것을 보고, 동건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전에 도겸은 절대로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는데. 설마, 정은 씨와 화해한 거야?’‘그래, 금방 화해했다면 당분간 우리와 놀 수가 없겠군.’“동건아, 뭘 봐? 너밖에 안 남았어.”계단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0시였다.왕순자는 이미 도겸의 방과 옷방을 정리했고, 정은의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로 복구되었다.그는 발길을 돌려 서재로 갔다.책꽂이 위에는 거의 생물학과 관련된 책들이 널려 있었다.정은은 비록 석사 입학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공을 줄곧 연구하며 틈만 나면 서재에 하루 동안 앉아 공부를 했다. 이 책들도 모두 그녀가 남긴 것이었다.그녀는 가끔 도겸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어떤 책은 이미 절판되었고, 어떤 책은 그녀가 원판을 찾아 복사한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들을 분류했는지를. 자신의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정은은 유난히 즐겁게 웃었다...도겸은 그윽한 눈빛으로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쓰레기를 들고 떠나려던 왕순자를 불렀다.“이모님 핸드폰 좀 빌려줘요.”왕순자는 즉시 경계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저, 도련님, 저번에 제 핸드폰을 바닥에 부쉈잖습니까.”“새 거 사주지 않았어요?”왕순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리 줘요.”“이, 이건 제가 금방 산 거라서...” ‘망가지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내일 이모님에게 아이폰 16 두 대를 보내라고 할게요.”“네!” 왕순자는 즉시 기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을 받자, 도겸은 몸을 돌려 정은에게 전
가는 길, 두 사람은 처음에 몇 마디 나누었지만, 후에 각자 침묵을 지켰다.재석은 오늘 자주 운전하던 차를 선택했다. 정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별장에 도착하자, 문 앞의 경호원은 심지어 정은에게 인사를 했다.“정은 아가씨,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출장 가셨어요?”정은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별장 문 앞에 도착하자, 재석은 차를 세웠고,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책 들고 나올게요.” 정은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내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건가?”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책이 많지 않아서요. 나 혼자도 들 수 있거든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초인종을 누른 순간, 왕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그리고 문 밖의 사람을 보고, 왕순자는 기쁨에 소리쳤다.“정은 아가씨!”‘마침내 돌아오셨네요!’정은은 웃으며 설명했다.“물건 챙기러 왔는데...”“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옷을 입은 도겸은 방금 일어난 듯 위층에 나타났다. 그는 가슴을 안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혼자 온 거야? 옮길 수 있겠어?”그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차가운 눈으로 정은을 내려다보았다.“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머지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서재로 갔다.도겸의 곁을 지날 때, 그도 정은의 뒤를 따라갔다.서재에서 책을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 정은은 미리 준비한 큰 가방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에 넣었다.도겸은 옆의 책장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서 땀을 흘릴지언정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다니.’10분 뒤, 정은이 가방을 단단히 묶은 다음, 서재를 떠나려 할 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도겸이 갑자기 발작했다.그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책을 담은 가방
정은의 쉰 목소리는 떨림과 공포를 띠고 있었고, 마치 놀란 토끼처럼 절망적이면서도 연약했다.도겸은 더욱 다급해지더니, 그녀의 상의를 벗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치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정은은 더욱 당황해졌다.“강도겸, 당신 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전 여자친구인 날 강요하는 거냐고?!”“정말 하고 싶다면, 내가 지금 바로 서연희에게 연락할게.”“아, 이러지 마!”정은이 자신을 피하는 동시에, 붉어진 두 눈에 고집과 거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며, 도겸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왜? 헤어진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 나와 같이 침대를 뒹군 적이 수백 번도 더 넘었을 텐데, 어디서 청순한 척이야?”정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나쁜 자식!”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들었다.“날 떠나면 무슨 좋은 남자라도 만날 것 같아? 누가 다른 남자와 잔 여자를 받아들이겠어?”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전혀 쏟아져 나왔고, 정은은 자신이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가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뭘 그렇게 보는 거야?” 도겸은 나지막이 웃으며 정은의 떨리는 입술을 쳐다보았다.“날 원하는 거야?”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은의 손을 조금씩 떼어내며, 악랄하게 그녀의 상의를 찢었다.정은은 울고 있었고, 도겸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그제야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됐어,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절망에 처한 순간, 그녀를 압박하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 누군가 포악하게 정은을 억누르고 있던 도겸을 떼어낸 것이었다.미처 방비를 하지 않은 도겸은 그 힘에 뒤로 후퇴했고, 등이 책장에 부딪혀서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재석은 정은이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자, 책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왕순자가 문을 연 후, 재석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다툼을 똑똑히 들었고, 망설이지 않고
도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주먹을 쥐며 재석에게 돌려주었다.“날 때려? 네가 뭔데?” 그는 주먹을 날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소정은과 알콩달콩 침대를 뒹굴 때, 넌 어디에 있었지...”재석은 도겸이 휘두르는 주먹을 가로막았다. 도겸의 허술한 공격보다 그의 주먹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재석의 눈에 맺힌 차가운 기운을 보면, 또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그럼 넌? 넌 또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헤어지고도 남에게 매달리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성추행범?”재석의 말은 날카로운 칼처럼 도겸의 정곡을 찔렀다.“이게 죽으려고.”도겸은 힘을 주며 주먹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재석은 그의 손을 잡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강도겸, 그만해!” 정은은 지금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재석의 외투를 당기며 더 이상 도겸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녀는 재석을 향해 고개를 돌린 다음, 시선을 드리웠다.“조 교수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요.”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경찰에 신고할래?”정은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됐어요. 그냥 가요.”“음.” 재석은 정은의 뜻을 존중했고, 또한 남의 갈등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이거 다 내 책인데, 지금 힘이 좀 없어서요. 교수님이 대신 옮겨주면 안 될까요? 고마워요.”재석은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바닥에 있는 가방을 든 다음, 정은을 부축하여 이곳을 떠났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화가 나서 옆에 있는 식물을 걷어찼다.차에 탄 정은은 백미러를 통해 갈수록 멀어지는 별장을 바라보았다. 6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처음 이사 왔을 때, 그녀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고, 도겸과 함께 별장을 장식하면서 또 함께 화원을 꾸몄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이런 결말을 맞이하다니.‘이제 난 더 이상 이 별장에 올 일이 없을 거야.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아무런
어떤 곡인지, 어떻게 변주를 했는지 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현장의 어두운 조명은 가장 좋은 은폐가 되어, 현빈이 거리낌 없이 부드러움과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시선은 통제되지 않고 정은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그 손을 꽉 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잠시 후, 현빈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 밤만 지나면... 더 이상 급해할 필요 없어, 정은이를 놀라게 해선 안 돼...’두 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과 시련이겠지만, 정은에게는 엄청난 시청각 향연이었다.그렇기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정은은 입맛을 다셨다.“방금 그 ‘크로아티아 랩소디’ 들었어요? 록 요소를 추가한 거 있죠! 예상치 못한 낭만과 생동감이 넘쳤고, 특히 중간의 변주는 더욱 놀라웠어요! 심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해요?”현빈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듣기에는 확실히 괜찮았지.”정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자의 이상한 반응을 놓쳤다.홀을 나서자,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땅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가 쏟아져 내리며, 그때서야 정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이다.정은은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일 실험실에 가져갈 점심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먼저 가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갑자기 말했다.“나랑 어디 좀 가줄래?”“네?”“안 돼?” 남자의 검은 눈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정은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승낙했다.하지만...“9시 전에 집에 가야 돼요.”“좋아.” 현빈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정은은 자신의 차에 올라 현빈의 차를 따라 근교로 향했다.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두 사람은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정은아, 봐봐...”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차를 멈추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패딩으로 자신을 꼭 싸맸다. 이때 현빈이 갑자기 입을 열
“켁...” 정은은 놀라서 기침을 했다.밥을 잘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다니? 정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심 대표님에게 있어 이번 식사는 확실히 공짜와 다름없죠. 왜냐하면...”정은은 웃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제가 사는 거니까요.”사장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녀석도 당하는 날이 있군! 잘됐어!’다 먹고 정은은 주동적으로 계산하러 갔다.사장은 현빈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야, 너도 열심히 노력 좀 해. 얼른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야지. 다음에 올 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 정말 널 비웃을 거야!”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러고 싶지.” “이야, 이 세상에 드디어 너를 혼내 줄 여자가 나타났구나, 희한하다.”“야...”“그래! 이 친구가 도와줄게.”정은은 이미 계산대에 가서 결제를 하려 했다.결제한 후, 그녀는 뒤에 있는 현빈을 바라보았다.“갈까요?”“에이, 잠시만요!” 사장이 먼저 입을 열더니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네?” 직원은 어리둥절해졌다.“티켓.”“아!”사장은 받아서 현빈에게 주었다.“자, 내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 티켓 두 장을 구했는데, 음치인 내가 또 어떻게 그걸 들으러 가겠어? 자리에 앉으면 정말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거잖아! 하하... 오늘 마침 만났으니 너한테 줄게!”현빈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정말 나한테 줄 거야?”“그럼, 가져가!”“그래, 그럼 나도 고맙게 받을게.”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고 샤브샤브 가게를 떠났다.현빈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정은에게 물었다.“맥심 피아노 연주회, 가고 싶어?”“맥심이요? 진짜예요?” 정은은 의아함을 참지 못했다.“연주회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자, 직접 확인해 봐...”정은이 머리를 숙였는데 정말 맥심의 연주회였다.“내 친구가 호의로 우
현빈이 말했다.[일단 생각 좀 해볼게. 만나서 얘기하자.]“좋아요.”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3분 안으로 패딩 코트를 걸치고 두꺼운 스노우부츠를 신은 뒤 가방을 들고 외출했다.소한이 지난 후, 그렇게 춥지 않은 것 같지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정은은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현빈이 골목 어귀에 서서 한정판 마이바흐 옆에 기대어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자동차 열쇠를 들고 노는 것을 보았다.그녀를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똑바로 섰다.정은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이 덤덤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입꼬리를 들어올렸다.차에 오르자 현빈은 그녀에게 아침을 건네주었다.“두유와 만두, 뜨거울 때 먹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은 기사로 됐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아침까지 사온 거예요? 쯧쯧, 꿈도 꾸지 못한 대우를 받았네요.”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왜? 넌 심지어 더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정은은 말을 받지 않고 두유만 들고 몸을 녹였다. “왜 안 먹어?”“뜨거우니까요.”“에헴! 방금 수리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네 차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된 것은 아니니, 다시 페인트를 칠한 후에는 이미 흔적을 볼 수 없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20분 후에 두 사람은 수리점에 도착했다.정은은 사인을 하고 차를 운전했고, 현빈에게 밥을 사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생각 다 했어요? 뭐 먹을래요?”“이렇게 추운 날에는 샤브샤브 먹기 딱이지.”정은은 표정이 환해졌다.샤브샤브 가게는 현빈이 골랐는데, 정은은 도착해서야 그것이 아주 유명한 가게라는 발견했다.입구에 길게 줄이 늘어졌고, 모두 젊은이들이었다.정은은 침을 삼켰다.“우리 그냥 다른 집으로 갈까요?”‘언제까지 줄을 서야 하는 거야?’그러나 현빈은 그녀를 데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뭘 바꿔? 따라와.”“아니...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종업원은 현빈을 보자 제지하기는커녕 웃으며
“정은아, 우리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어? 조 교수님, 정은아!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안 올라가고?”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두 사람의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지금 그녀는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단지 입구로 들어오며 활짝 웃었다.“이 추운 날씨에 하마터면 꽁꽁 얼 뻔했네... 할인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 늦은 시간에 나올 리가 없었을 텐데!”근처 대형 마트는 밤 9시 이후부터 할인 행사를 했다.살림에 알뜰한 아주머니는 종종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재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재석은 입가까지 올라왔던 말을 조용히 삼켰다.“같이 올라가자.”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말했다.정은은 곧장 다가가 그녀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제가 도와드릴게요.”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재석이 자연스럽게 정은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넘겨받으며 앞장섰다.“내가 들게.”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행동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아주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조 교수님은 말이야, 정말 다정해! 너희 젊은이들은 그걸 뭐라고 했더라... 매너! 맞아, 매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은아?”정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렇게 좋은 총각이면 진작에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그저 연구와 학술밖에 모르잖아! 하루 종일 실험하고 논문 쓰느라 바쁘다니까!”“노벨상이라도 받으려는 건지 원. 그래, 남자가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 그런데 연애도 좀 하고, 일도 하면 더 좋잖아?”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정은을 보며 말을 이었다.“정은아, 넌 몰라서 그래. 나랑 3층 왕 교수님이 조 교수한테 여자아이를 얼마나 많지 소개해 주려고 했는지 알아? 말로는 좋다고 해놓고, 막상 약속 잡으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며칠씩 집에도 안 들어오고! 우리가 그걸 모를 줄 아나 봐?”앞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재석은 갑자기 움찔했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니,
정은은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석은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왜인지 그녀의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덜컥하게 만들었다.마치...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이 공장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경비도 교대 시간이라, 유쾌하고 농담을 잘하던 아저씨는 퇴근했고, 대신 젊은 청년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성격이 조금 내성적인지, 청년은 말없이 열쇠를 받아 제자리에 두고는 조용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밤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 하늘가에는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고, 길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황혼 속 적막함을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정은과 재석은 나란히 걸으며, 둘 사이에는 자연스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재석은 입을 떼려다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정은은 문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이 정성껏 준비해 준 생일 선물, 정말 의미 있었어요. 덕분에 기뻤어요. 고마워요. 그럼, 나도 보답으로 저녁을 살 테니, 뭐 먹고 싶어요?”재석은 그녀가 눈을 드리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정은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결정했어요?”재석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매운 요리 어때? 괜찮겠어?”“좋아요!” 정은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밝게 웃었다.매운 걸 먹고 나오자, 정은은 입김을 불며 목도리를 꼭 맸다.재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목도리를 벗어 숄처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그러나 정은은 한 발짝 물러서며 환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선배님. 안 추워요.”재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옅은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게 퍼
두 사람의 학술 토론이 마침내 끝나자, 수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다음에 또 이런 얘기할 거면 나 부르지 마, 정말 지루해...”수민은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그리고 모두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밥을 다 먹은 뒤, 수민은 정은과 쇼핑을 하려 했는데,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알았어, 알았다고! 하루조차 기다릴 수 없는 거야 뭐야?!”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민은 전화를 끊고 급히 회사로 달려갔다.떠나기 전에 재석에게 당부했다.“오빠, 오늘 정은 생일이니까 뭐든 다 들어줘야 지!”“알았어.”“어디로 가고 싶어?” 수민을 보낸 후, 재석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어디든 다 되는 거예요?” 정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그럼 그 다이아몬드를 만든 곳으로 가봐도 돼요?”“정말 가고 싶어?”“네!”“좋아.”정은은 그곳이 실험실이나 조작실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자신을 공장으로 데리고 갈 줄은 몰랐다.“조 교수! 무슨 일로 또 온 거야?” 재석이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점심 드셨어요?”“그럼! 오늘 식당에서 족발을 삶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맞다. 그 다이아 목걸리 여자친구가 어땠어?”콜록콜록-재석은 좀 어색해하며 자연스럽지 않게 몇 번 기침을 했다.정은은 옆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경비 아저씨가 그제야 재석 곁에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이 친구가 바로 네 다이아몬드를 받은 여...”“아저씨! 7호 작업장의 열쇠 좀 주시겠어요?” 재석은 소리를 높여 경비의 말을 끊었다.“그래!” 경비는 바로 열쇠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어색하게 정은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워낙 농담을 좋아하셔서...”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 같았어요.”열쇠를 받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7호 작
“자, 내가 끼워줄게.”수민은 팔찌를 정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주었고, 이는 정은의 손을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이럴 줄 알았어! 이 디자인과 컬러는 너와 아주 잘 어울려!”정은은 고개를 숙이며 팔찌를 바라보았고,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수민이 입을 열었다.“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응?” 정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가 더 있어?”수민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가 울려펴졌다.잔잔한 음악소리 속에서 재석은 케이크를 밀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핑크색 크림 위에 예쁜 인형이 하나 서 있었다. 커다란 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정은과 똑 닮았고, 주위는 핑크색 진주로 장식되었다.심플하면서도 예뻤다.“선배님?” 정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재석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웃었다.음악이 점차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레스토랑 안이 너무 따뜻해서, 남자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고,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수많은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정은은 일시에 멍해졌다.재석은 정은의 앞에 멈춰 서며 손에 든 파란 아이리스를 건넸다.“생일 축하해.”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고마워요, 선배님. 꽃과 케이크 정말 너무 예뻐요...”파란 아이리스의 꽃말은 우아함과 생기, 꿈과 희망, 그리고 찬양과 애모였다.수민은 이 상황을 보고 웃으며 일깨워주었다.“정은아, 잘 봐봐, 정말 꽃과 케이크밖에 안 보여?”정은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그 파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은은 멈칫했다.은색과 핑크색으로 된 작은 선물함이 꽃다발 속에 숨겨져 있었다.수민의 주시와 재석의 기대를 감지한 정은은 그 선물함을 열었는데, 예쁜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건...?”수민이 대답했다.“우리 오빠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목걸이 외곽은 둥근 호형으로, 마치 행성 궤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궤도’에는 9개의 다이아몬드가 분포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펑!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정은은 멍해졌다.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추운 섣달, 낡은 주택 단지는 저녁 9시가 넘으면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근처의 가로등은 또 켜졌다 꺼졌다 했으니, 재석은 정은이 걱정되어 틈만 나면 시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렸다.비록 정은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고정되지 않았지만, 겨우 20분에서 30분 정도 차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옹근 두 시간이나 늦었다.그리고 현빈의 차에서 내렸다.재석은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밤바람이 불자, 이따금 한기를 안겨왔고, 재석은 정은의 코가 얼어서 빨개진 것을 보았다.“가자, 밖은 너무 추우니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손바닥에 입김을 불었고, 고개를 돌려 현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가로등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고, 걸음걸이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복도의 음향 제어등은 층층이 켜져 있는데, 은은한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응시했다. 정은이 재석을 언급할 때 엄청 기뻐해하며 그란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보고, 현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때는 나와 강도겸이 절친이었기에 정은을 놓쳤는데, 지금은 또 정은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을 지켜볼 거야?’일이 자연스럽게 성사되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이 순간, 현빈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이러다가 무슨 이변이 생길지도 몰라.’그는 전에 망설였기에 6년이란 기다림을 바쳤고, 정은도 이제 겨우 도겸과 헤어졌다.‘같은 잘못은 절대로 다시 범하면 안 돼. 그건 바보와 다름없으니까.’몸을 돌리는 순간, 남자의 눈빛은 마치 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확고해졌다....이 날은 소한이었다.사람들은 소한과 대한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섣달 그믐날 전의 마지막 두 번째 절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정은에게 있어, 이것은 또 다른 특수한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축복을 보낸 사람은 정은의 아버지 소진헌이었다.정은이 아직 자고 있을 때, 그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