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미숙은 하마터면 우울증에 시달릴 뻔했다.다행히 남편과 딸이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악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 이미숙은 더 이상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았고 휴대폰조차도 전화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이 10년, 청춘 로맨스 소설 한 권 외에 이미숙에게 더 이상 신작이 없었다.“아이고, 이런 말은 그만하자. 국수 맛있니?”“네, 여전히 그 맛이에요.”정은은 이미숙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국물이 좀 뜨겁네요.”“그래? 그럼 좀 더 식혀.”...새해가 다가오면서 작은 도시의 평온한 분위기도 조금씩 떠들썩해졌다. 큰길 양쪽과 길가의 가로수에는 장식들이 늘어났고, 집 근처 슈퍼마켓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품들도 거의 다 팔려나가서 이미숙은 아예 차를 몰고 도심의 큰 마트로 향했다.차를 주차하고 모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 앞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설맞이 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정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집에는 비록 아이가 없었지만, 설을 맞아 친척집을 방문해야 했고, 졸업한 학생들이나 근처 이웃들이 가끔 놀러 올 수도 있었기에 사탕과 과일을 준비해야 했다.간식 코너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비싼 과자들을 골랐다. 그리고 집에 기름, 소금, 간장, 식초도 거의 다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물건을 추가로 샀다.해산물 코너에서 팔딱거리는 새우를 보니 이미숙은 정은에게 새우를 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줄곧 뒤따라오던 정은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이미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카트를 밀고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은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카트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콜릿은 좀 쓰지만, 집에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정말 시원하고 편안했다.정은은 몰래 두 개만 사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고, 눈을 깜박이며 불쌍한 표정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개
이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까나리액젓 사는 것을 깜박했네. 정은아, 저기 가서 한 통 들고 와.”“네.” 정은은 이미숙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정은이 가는 것을 본 이미숙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아침에 말했잖아요. 아직 생각 중이라고.”“이 일은 내가 3개월 전에 이미 말한 것 같은데요? 그때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이 작가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준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잖아요.”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함께 일했으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장르가 바로 미스터리 스릴러류의 중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대략 20~30만 자 정도이죠.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인터넷 소설을 쓰라고 하다니, 이건 아예 상관이 없는 두 장르잖아요!”“모두 소설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문학은 모두 공통된 것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유보영은 좀 엄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었다.이미숙은 애써 설명하려 했다.“우선 인터넷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편이라서, 툭하면 백만 자 이상이에요. 둘째, 인기 있는 인터넷 소설은 대부분 로맨스, 대표님과 연애하는 거죠. 이것 모두 내가 잘 모르는 장르이니 지금 어떻게 글을 쓰라는 거예요? 『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에서 받은 교훈이 아직도 부족한 거예요? 애초에도 장르를 바꾸었지만, 그 결과는요?”『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이 바로 이미숙이 비참하게 욕을 먹었던 청춘 로맨스 소설이었다.유보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그 소설이 이 작가의 평판을 폭락시켰다는 거, 나도 잘 알아요. 지금까지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을...”“그래요, 이제 내가 인터넷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왜 나에게 인터넷 독자들을 영합하는 도시 로맨스를 쓰라고 하는 거죠?”“이 작가, 일단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봐요.”유보영은 좋은 태도로 설득하려 했다.“그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하고, 판매량을 창출하지 못하는 작가가 그래도 작가냐고요?”이미숙도 화가 났다.“나에게 구상이 아주 많았지만, 편집장님이...”유보영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당신의 그 구상들은 아무런 특색도 없고, 임팩트도 없으니 쓰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동시에 출판사의 노력을 낭비하는 거라고요! 전혀 팔리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은 자신이 여전히 그 잘나가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좀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아웃되었어요! 이미숙, 당신은 지금 현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고, 자신을 주제를 똑똑히 파악해야 한다고요!”“엄마...” 정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진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이미숙은 눈물을 금세 삼키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가져왔어?”정은은 까나리액젓을 흔들었다.“여기요.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아빠가 이미 학교에서 돌아오셨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얼른 계산하고 돌아갈까요?”“그래.”“그럼 아주머니, 우리 먼저 갈게요.” 정은은 이미숙을 대신해서 작별 인사를 했다.왜냐하면 정은은 이미숙이 지금 무척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슬프게 만든 사람을 전혀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유보영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래, 나도 물건을 사야해서.”말이 끝나자 그녀는 이미숙을 쳐다보았다.“내가 방금 말한 거 잘 생각해 봐요. 아이고, 다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인데다, 줄곧 함께 일해왔잖아요.”이미숙은 눈을 반쯤 드리우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카트를 받고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엄마, 그 유보영 아주머니와 10년이란 계약을 한 거예요?”“음.”“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올해가 마지막 해죠?”이미숙은 계산을 해봤다. “정말이네.”“엄마는 그 사람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이미숙은 잠시 침묵하며 억지로 대답했다.“그래도 프로긴 하지.”정은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약서 아직 있죠?”“응
게다가 방금 이미숙과 대화할 때, 정은은 작가에 대한 편집장의 관심을 보지 못했고, 오직 압박밖에 느끼지 못했다.“보여주세요!”“그래, 이따가 돌아가서 보내줄게. 너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봐야 한다!”정은은 맹세했다.“그럼요!”...집에 도착하자, 소진헌은 문에 복조리를 걸고 있었다. 그는 복조리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정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아빠, 좀 비뚤어진 것 같아요. 왼쪽으로 좀 옮겨보세요.”이미숙은 차에서 내리더니 쯧쯧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보기엔 너무 위로 걸어놓은 것 같은데요? 좀 아래로 걸어요.”소진헌은 또 복조리를 아래로 당겼지만, 이때 이미숙이 계속해서 말했다.“아니다, 너무 낮으니까 좀 높게 걸어요.”정은이 말했다.“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아요.”소진헌은 다 걸은 다음,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양쪽을 비교해보니, 또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왼쪽이 좀 높은 것 같은데?”이미숙은 그제야 문제점을 알아차렸다.“당신 설마 다른 복조리와 헷갈린 거 아니에요?”소진헌은 헛기침을 했다.“확실히 그런 것 같아.”그는 며칠 전에 복조리를 샀는데, 하나는 너무 작고, 다른 하나는 또 너무 커서 어제 또 새로 몇 개 샀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방에 새것을 걸고 나니, 문 앞에 걸어야 하는 복조리는 대칭이 되지 않은 것만 남았던 것이다.이미숙은 유유히 입을 열었다.“망했네요. 겨울방학 하자마자 머리가 돌아가지 않다니.”정은은 피식 하며 참지 못하고 웃었다....새해 아침, 이미숙은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며 정은이 좋아하는 시래기 만두를 빚었는데, 껍질이 얇고 속이 꽉 차서 식초와 간장을 조금 묻혀 먹으니 그야말로 식욕을 돋우었다.풍습에 따라, 소진헌은 요리를 한 상 가득 준비했고, 꼭 필요한 떡국, 생선 외에 또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나물 무침까지 있었다.정은은 식탁에 가득한 음식을 보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세 식구는 함께 앉아서 푸짐한 설날 음식을 먹었다.식사 후
평소에 만날 일도 없었으니, 서로 건드리지 않고 지내면 그만이었다.중간에 낀 도겸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늘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먼저 묻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며 모른 척해버렸다. 그는 여자친구와 어머니 사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은도 그런 도겸을 이해하고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설날을 어디서 보낼지, 자신과 함께할지 아니면 서영숙을 찾아갈지에 대해서도 정은은 한 번도 도겸을 괴롭히지 않았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자신의 양보와 이해, 그리고 인내심은 결국 자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그저 습관처럼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정은이 대답해다.“응,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그녀는 비록 간단하게 말했지만, 수민은 정은이 용기를 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건강하셔? 오랜만에 뵙지 못했으니 안부 전해줘.]“아주 건강하셔. 방금 밥 먹을 때 네 얘기까지 했는데.”대학 시절, 소진헌 부부는 수민이 정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여름방학에 정은이 돌아올 때마다 늘 특산물을 가지고 가서 수민에게 주라고 했다.수민은 지금까지도 소진헌이 만든 소고기 양념을 생각하면 배가 고팠다.[그럼 언제 돌아올 거야? 고향에 얼마나 있을 건데?]정은은 잠시 생각했다.“좀 오래 있을 거야.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두 분과 같이 있어주고 싶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동안 줄곧 돌아가지 않았으니 두 분도 네가 많이 그리웠을 거야.]수화기 너머에서 수민은 아이패드에서 무엇을 봤는지 눈빛이 밝아졌다.[웃겨 죽겠네. 나 방금 재밌는 거 하나 봤는데.]“뭔데?”[너 못 봤어?]“아니.”수민은 그제야 생각났다. 정은은 이미 도겸의 번호를 차단했던 것이다.[에헴! 그럼 내가 알려줄게! 방금 서SNS를 올렸는데, 아마도 강도겸이 에르메스 켈리백을
정은은 담담하게 입술을 구부렸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침묵에 잠겼다.이때 수민 쪽이 무척 시끄러워졌다.[정은아, 먼저 끊을게. 집안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우리 엄마가 지금 여기저기서 날 찾고 있어.]“그래.”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또 연이어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왔다.심현빈이었다.다국적 기소장, 접수 영수증이 있었는데, 그는 또 현재의 진도에 관한 설명을 했고, 나머지는 정은 본인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다국적 기소는 일반기소 수속보다 더 복잡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기에, 이렇게 빨리 추진될 수 있다니, 솔직히 정은도 많이 놀랐다.그녀는 파일을 받아 온라인으로 사인을 한 뒤, 다시 현빈에게 보냈다.그쪽은 바로 문자를 읽더니 곧이어 또 농담을 하며 답장했다.[날 그렇게 믿는 거야? 널 배신할 수도 있는데?][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현빈은 마음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웃었다.정은의 말에 설렜기에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재빨리 타자를 했다.[단지 사인해야 할 서류일 뿐이야. 기소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까 안심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현변의 설명에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서명해야 할 서류들도 모두 자세히 보고 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사인한 것이다.게다가 현빈이 정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다면, 이렇게 복잡하고 저질한 수단을 쓰지 않을 것이다.2초 후,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에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정은은 핸드폰을 침대에 엎었다. 그녀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으니, 현빈의 소원은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정은아, 네 아빠가 만두를 만들었으니 빨리 와서 먹어.”아래층에서 이미숙의 함성이 들려오자, 정은 즉시 일어나 경쾌하게 대답했다.“가요.”저녁, 정은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따끈따끈한 만두를 먹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재밌는 예능을 보니, 그야말로 천국이
맞은편에서도 역시 축복을 보냈고, 소녀의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섞인 것 같았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기원하는 정은의 모습이 떠올랐다.‘불꽃놀이가 피어난 순간, 정은의 모습을 비추는 그 장면은 정말 예쁠 텐데.’...이튿날 아침, 정은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11시까지 일어나면 된다.태양이 중천에 뜨자,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졸린 두 눈을 떴고.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며 커튼에 그림자를 남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해가 벌써 떴어?!’정은은 얼른 하품을 하고 일어서며 커튼을 쫙 열었다.햇빛이 먼 산에 쌓인 하얀 눈을 비추더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소진헌과 이미숙은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소진헌은 귀가 밝았는데, 창문을 여는 소리를 듣자 바로 정은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님이라 줄곧 시간관념이 있어서 정은이 늦잠을 자는 습관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그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네 엄마가 나쁜 습관만 길들였어. 이 시간까지 자고,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위에 병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몸을 하나도 중시하지 않아. 늙으면 다...”이미숙은 귤 한 조각을 소진헌의 입에 쑤셔 넣었다.“늦잠 자는 거 가지고 언제까지 잔소리할 거예요? 정은이는 이미 졸업했으니 더 이상 당신의 학생이 아니라고요. 새해에 늦잠 자면 뭐가 어때서요?”말하면서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네 아빠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그런 잔소리 듣지 마. 식탁 위에 아침밥 있으니 좀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어.”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아침을 다 먹은 정은도 정원에 가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었다.“아빠, 이게 무슨 차예요? 냄새가 구수하네요.”정은은 찻잔 냄새를 맡았다. 담백하고 그윽한 차는 싱겁지도 느끼하지도 않았다. 입을 다시니 또 은근히
지금은 겨울방학 기간이라 대부분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는 무척 한산했다.경비원은 정은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아가씨, 지금 방학이라 선생님을 보러 돌아온 거야?”고3은 과외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는 여전히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은 뒤로 한 손을 흔들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얼른 들어가라. 소란 피우지 말고. 그리고 3학년 학생들의 수업을 절대로 방해하면 안 돼.”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침묵하길 다행이야.’그녀는 선생님을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의동으로 가지 않고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아다녔다. 막 떠나려고 할 때, 학교의 전시대를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보았다.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된 소개가 있었다.[소정은: 20XX년, L시 이과수석으로 서비대학교 생물학부에 입학.]바람이 불자, 정은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땅 위의 낙엽은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었고, 원래 밝고 화창한 날씨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졌다.정은이 팔을 들어 바람을 막고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소 선생님!”눈을 들어 보니 정말 소진헌이었다.어제 텔레비전을 볼 때, 소진헌은 오늘 학교에 와서 고3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렇게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쳤다.“소 선생님,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집에 볼일이 많이 않나요?”인사하는 사람은 소진헌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 선생님이었다.정은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도 그들과 같은 주택 단지에서 살지만, 다른 건물에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 선생님도 물리를 가르쳤는데, 소진헌과 같은 학년을 맡았다. 당시 소진헌은 우수학생을 책임졌고, 그녀는 일반 학생을 가르쳤다.그래서 정은은 그녀의 수업을 들은 적이 없지만, 그녀의 딸 장소연과 같은 반 친구였다.“주 선생님.” 소진헌은 웃으며 인사했다.“다행히 별로 바쁘지 않네요.”“왜요? 정
“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말하면서 민지는 서준의 팔짱을 끼고 기뻐하며 학교 밖으로 돌진했다.서준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손을 빼려고 했다.민지는 바로 그를 잡아당겼다.“야, 쑥스러워하지 마. 우린 절친이잖아!”민지는 말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팔을 못 빼겠네! 이 여잔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두 사람은 교문을 나서자마자 케이크를 들고 스포츠카에서 내려오는 도겸을 보았다. “어머!”민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왜 매번 차를 교문 앞에 세우는 건지 모르겠네. 심각한 교통 체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서준은 잠시 침묵했다.“아마도 이런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어디가 멋있다는 거야? 포르쉐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까?”“그럴 수도?”민지는 서준을 바라보았다.“너도 이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집은 국산 자동차를 선호해서.”민지가 말했다.“나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삼촌 할아버지는 모두 렉서스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거든.”“그럼 왜 자꾸 포르쉐를 운전하는 거지?”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도겸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들고 있는 케이크는 아주 맛있어 보이는데.”서준은 그녀가 침을 삼키는 동작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도겸은 몇 번이나 찾아오면서 정은이 늘 민지와 서준과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횟수가 많아지자, 그도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도겸은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정은이는? 오늘 왜 너희들과 같이 있는 않는 거야?”민지는 사실대로 말했다.“정은 언니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요.”“왜?”“휴가를 냈거든요.”“왜 갑자기 휴가를 낸 거야?”“그건 저희도 잘 몰라요.”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묻고 싶었다.그러나 민지는 이미 서준의 팔을 잡으며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저희는 아직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도겸은 허탕을 쳤다. 양복 차림을 한 사람이 미니언즈 포장의 케이
“선배님, 다 됐어요?”정은이 입을 열고서야 재석은 정신을 차렸다.“응, 다 됐어.”“고마워요.”재석은 또 정은의 허리를 힐끗 쳐다보았다.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너무 말랐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게 분명해!’...도겸은 해가 지고 다음 날 날이 밝을 때까지 줄곧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도 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예 잠이 오지 않았다.머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했다.두 사람이 달콤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고, 자신이 찌질하게 굴던 장면도 있었다.날이 밝자, 도겸은 그제야 추억의 늪에서 벗어났다.아침 8시, 직장인들은 저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운전을 하며 달북동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평소에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은 거리였지만, 오늘 꼬박 한 시간이나 걸렸다.“안녕하세요, 망고 케이크 하나 주세요.”점원은 멈칫했다.“통째로 된 케이크를 원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한 조각을 원하시는 거예요?”“통째로 된 거요.”“손님, 정말 운이 좋네요. 지금 금방 하나 만들었는데 곧 자르려고 했거든요. 몇 분만 늦으셨다면 아마도 1시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점원은 포장을 하면서 물었다.“이렇게 일찍 케이크를 사러 오셨다니,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내 여자... 전 여자친구가 좋아해서요.”이 말 한마디에 젊은 점원은 바로 예전에 본 로맨스 소설을 떠올렸다.‘누가 진정한 주인공인지 모르겠네.’도겸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케이크를 받은 다음 바로 차에 올라탔다.점원은 카운터 앞에 서서 유리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이야, 스포츠카라니... 더 소설 주인공 같잖아.’...오전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자, 하민지와 임서준은 실험실에 가려고 했다.강의동을 나오자마자 민지는 참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목이 좀 마른데.”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이미 그의 침묵에 익숙해진
도겸의 심장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소진헌이 재석을 대할 때의 열정과 자신을 대할 때의 냉담함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도겸은 계속 서 있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문을 닫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는데, 재석이 정은의 집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도겸은 거절당한 선물 더미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왕순자는 이미 청소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곳은 다시 정은이 금방 떠났을 때의 쓸쓸하고 적막한 곳으로 변했다.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 안방으로 들어갔다.화장대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고, 그 위에는 아직 다 쓰지 않은 스킨케어 제품이 놓여 있었지만, 그들의 주인은 이미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정은이 날 버린 것처럼.’도겸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전에 이 안에는 수표 한 장과 토지 증여 계약서, 그리고 다이아몬드 팔찌가 들어 있었다.몇 개의 다이아몬드는 사수자리의 모양을 이루었다.이것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 팔찌였다. 정은의 22번째 생일이 되던 해에 도겸은 특별히 유명한 디자이너인 존 스미스를 청하여 그녀를 위해 디자인했고, 그녀가 자신의 삶을 비춘 별이라는 뜻이었다.정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기 위해 도겸은 고의로 그녀와 말다툼을 벌였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톡까지 차단했다.정은의 생일날인 새벽 12시, 도겸은 이 팔찌를 들고 서비대학교 문 앞에 나타나 그녀에게 가장 큰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주었다.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비록 정은이 팔찌를 받았고, 두 사람도 오해를 풀고 다시 화해했지만 도겸은 그녀가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느꼈다.그 후 그도 정은이 이 팔찌를 몇 번 찬 것을 보았다.그러나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은이 이 팔찌를 낄 때마다 두 사람은 크게 싸우곤 했다.후에 정은은 아예 팔찌를 서랍에 잠그며 다시는 끼지 않았다.“도겸아, 난 너와 다투고 싶지 않아. 정말이야. 매번 다툴 때마다 난 우리의 감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만 같아. 나와 너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고
“이 물건들 그냥 가져가. 우리는 친척도 친구도 아니니, 이 물건들이 비싸든 안 비싸든 우리는 받을 이유가 없어. 그리고 너와 정은이는 이미 헤어졌어. 지금은 낯선 사람과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네 선물을 받을 이유가 더욱 없지 않겠어?”도겸과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났을 때, 이미숙은 소진헌과 레스토랑에서 30분 넘게 기다렸다.도겸은 빈손으로 와서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먼저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때 이미숙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 남자는 우리 정은이와 어울리지 않아.’그러나 정은은 그때 도겸에게 푹 빠졌다. 도겸이 핑계를 대고 떠난 뒤, 그녀는 열심히 그의 편을 들어주며 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이미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마음이 아팠다.굽실거리는 딸이 안타까웠고, 남자의 존중을 받지 못해서 더욱 안쓰러웠다.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든, 적어도 도겸은 그들을 하나도 존중하지 않았다.한 남자가 자신의 부모님조차 존중하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그 여자를 존중하겠는가?이미숙은 어머니로서 기쁨을 안고 찾아왔지만, 다시 근심과 걱정을 안고 돌아갔다.물론, 그녀도 또한 이러한 도리를 정은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심지어 좀 더 강경하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으니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미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녀는 정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끝을 보지 않는다면, 정은은 앞으로 후회할 것이고, 줄곧 이 일이 마음에 걸려 평생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다.아이가 성인이 된 이상, 부모로서 그들도 이제 손을 놓아줘야 했다. 정은이 스스로 인생을 겪도록.그러나 이미숙은 정은이 이대로 공부를 포기할 줄은 몰랐다.그 대가는 너무 컸다.“다행히 모든 일이 지나갔고, 정은이도 이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했어. 만약 마음속으로 여전히 우리 정은이에게 미안하다면, 더 이상 찾아와서 방해하지 마.”이미숙은 다른 사람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투는 것을 더욱 좋아하지
도겸은 바로 확인을 한 다음, 전화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대리를 불렀다.“이것들 모두 종료해.”“네?” 대리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회사가 현재 가장 중시하는 프로젝트인데, 그중 몇 개는 곧 수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갑자기 종료를 하다니?“내가 한 말에 무슨 이의라도 있는 거야?”“아, 아닙니다.”“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거야?”“그것도 아닙니다.”“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대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대표님, 저 이해가 좀...”“이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시킨 대로 해.”...20여개의 프로젝트를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지 모두 큰 문제였다.도겸이 회의실에서 나올 때, 이미 깊은 밤이 되었다.그는 사무실의 창문 앞에 서서 먼 곳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휘영청 밝고 등불은 희미했다.“처음에 정은이가 전 세계와 맞선다 하더라도 의롭게 널 선택했던 거야.”“아쉽게도 넌 정은이의 마음을 저버렸어.”현빈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도겸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회도 여러 가지로 나뉘었는데,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너에게 네가 얼마나 좋은 여자를 놓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그런데 그 전에 그들은 분명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왜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거지?’도겸은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고, 이런 느낌은 별장에 돌아가 텅 빈 거실을 바라볼 때 절정에 달했다.‘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심현빈은 이미 정은이의 부모님을 만났다고 했어...’이른 아침, 금빛 햇살이 대지에 쏟아졌다.정은은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했는데, 소진헌과 이미숙을 깨우지 않고 혼자 먹고 조용히 아침운동을 하러 나갔다.오전에 수업이 없어서 그녀는 아침 운동을 마치고 시장에 들렀다.그렇게 소진헌과 이미숙이 일어났을 때, 아침식사뿐만 아니라, 정은은 신선한 채소와 고기까지 사왔다.
“정은이는 사랑이 부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도겸은 몸을 돌렸다.현빈이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에게 한 사람을 사랑할 용기가 있고, 동시에 그 사람을 포기할 용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아마도 이것 때문에 처음에 정은이가 전 세계와 맞선다 하더라도 의롭게 널 선택했던 거야.”“아쉽게도 넌 정은이의 마음을 저버렸어. 아마도 너와 다른 사람들은 정은이가 너한테 미쳐서 6년 동안 참아왔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알아. 정은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정은이는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전에 내린 결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배신을 당했더라도 정은이는 너와 좋게 끝내고 싶었어.”현빈의 말은 도겸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도겸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눈시울을 붉혔다.“너 지금 나한테 자랑하는 거야?”“그렇게 생각해도 돼.” 현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더 이상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가정에서 나온 아이는 감정에 대한 요구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 정은이는 온전하고 포용적이며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을 원하거든.”재삼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 아니라.현빈은 도겸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신도 불합격이었다.그는 생각이 많은 여우라서, 예전 같으면 절대로 한 여자를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왜냐하면 확실히 도겸이 말한 대로, 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모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현빈은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그는 정은을 위해 제멋대로 굴고 싶었다.앞으로 두 번, 심지어 세 번, 수천수만 번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결국 도겸은 문을 박차며 가버렸고, 그 소리는 하늘을 뒤흔들었다.선우와 동건은 문 뒤에 서 있었는데, 하마터면 놀라 죽을 뻔했다.“도겸이 형 그 눈빛 봤어요?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아요.”동건이 대답했다.“야, 그 자식 정말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너 설마, 나와 깨끗이 선을 그으면, 정은이는 절친이었던 우리의 사이를 개의치 않고, 네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멍청하긴!” 도겸은 현빈이 든 찻잔을 빼앗아오며 땅에 찧었다.낭랑한 소리와 함께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심현빈, 전에는 왜 몰랐지, 너 사랑꾼이었어? 여자 없인 못 사는 거냐고?”선우와 동건은 얼른 뒤로 물러서며, 깨진 조각에 다치지 않도록 했다.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도겸의 말 때문에 은근히 놀랐다.현빈은 뜻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방식으로 도겸과 강제로 선을 긋고 있었다.전에 두 사람은 비록 사이가 틀어졌지만, 사적으로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에 불과했다.그러나 투자할 프로젝트는 여전히 함께 투자하며 같이 돈을 벌었다.이익 앞에서 개인적인 일은 전부 보잘것없었으니까.선우와 동건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여자 때문에 싸우더라도 장사는 계속해야 했다.하물며 현빈은 여우였다.‘그런데 이번엔 왜...’도겸이 현빈을 사랑꾼이라 욕하는 것을 듣고, 선우와 동건도 현빈이 이해되지 않아 침묵을 지켰다.현빈은 바닥에 깨진 찻잔을 바라보았다.“정말 아깝네. 멀쩡한 찻잔이 이렇게 깨졌다니. 넌 성질이 참 더러워. 그나저나, 넌 그때 정은이를 이 찻잔과 똑같이 대하지 않았니?”도겸은 매섭게 눈살을 찌푸렸다.“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쩨쩨하면 뭐가 어때? 유치하면 또 어때? 난 쩨쩨하고 유치해서 너와 깨끗하게 선을 그을 거야. 뭐 굳이 완벽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길 원해서 그래. 왜, 안 돼?”“너...”이 말에 도겸은 화가 나서 숨이 거칠어졌고, 이를 꽉 물었다.현빈은 웃으며 도발했다.“왜? 그 프로젝트들이 아까운 거야? 그 돈이 그렇게 아까워?”“그래, 너만 잘났다. 넌 돈이 싫은 거야?!”“그건 아니지만 돈보다 정은이가 더 중요해.”선우와 동건은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네 말대로, 내가 너와 깨끗하게 선을
“심현빈, 이게 무슨 뜻이야?” 강도겸은 다탁 앞으로 걸어왔다.“뭐가?”“왜 개발구역의 프로젝트를 중단한 거지?”현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협력하고 싶지 않아서 중단했어.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네가 중단하고 싶으면 다야?! 하루 지체하면 얼마나 큰 손실을 봐야 하는지 아냐고?”“아마도.”“그런데도 중단을 해?!”현빈은 차를 다 마신 다음, 아주 능숙하게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도겸은 찻주전자를 꾹 눌렀다.“넌 3일 동안 피해 다녔고, 지금은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있어. 계속 질질 끌면서 태도를 표명하지 않을 작정이냐?”현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내가 피했다고? 언제?”“네 비서가 너 출장 갔다고 했어. 그게 일부러 나 피한 거 아니야?”“허, 널 피한다고? 착각 좀 하지 마. 내가 L시 시찰을 하러 가는 일정은 이주 전에 이미 정해졌어. 내가 굳이 너를 피할 필요가 있을까?”“L시?” 도겸은 예민하게 무언가를 알아차렸다.현빈은 담담하게 웃었다.선우가 갑자기 다가와서 말했다.“현빈이 형, L시에 갔었어요? L시는 정말 좋은 곳이죠. 먹는 것도 모두 내 입맛에 맞고요... 그런데 정은 누나의 고향이 L시에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날 때리고 그래요!”동건은 미친 듯이 눈짓을 했지만, 선우는 좀처럼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선우를 때렸다.선우는 그제야 반응을 하더니 즉시 입을 다물었다.도겸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현빈을 보며 또박또박 물었다.“너 L시에 가서 정은이를 만난 거야?”현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시찰하러 갔다고 말했잖아.”“그런데...”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확실히 정은이를 만났지.”“지금 뭐라고 했어?”“정은이를 만났다고.”“너 한 번만 더 말해봐?!”“정은이 만났는데.”도겸는 그의 옷깃을 덥석 잡아당겼다.“심현빈, 내가 지난번에 경고했었지?”현빈은 도겸의 손을 뿌리치며 유유히 옷깃을 정리했다.“경고?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경고를 해? 전 남자친구
이미숙은 현빈이 자신의 책까지 보았을 줄은 몰랐다.“『7일담』이 내가 쓴 책이란 것을 알고 있었어?”현빈은 정은을 힐끗 바라보았다.“네, 알아요.”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이미숙도 물어보지 않았다.다만 정은은 두 똑똑한 사람의 눈빛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아이고...’“그래서 범인은 정말 그 성실한 물리 선생님인 거예요?”이미숙은 깜짝 놀랐다.“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지?”책 속의 모든 증거는 전부 물리 선생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식으로 완벽한 범죄를 실시했다.명확한 증거가 있는 이상, 그가 범인인게 확실했지만, 현빈은 오히려 그 사람이 정말 범인이냐고 물었다.그를 바라보는 이미숙은 은근히 감탄했다.“책에 몇 군데 숨겨진 묘사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첫 번째, 계단 사이의 어긋난 그림자.두 번째, 알 수 없이 사라진 흉기. 결국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세 번째, 혼자 사는 딸 집에 슬리퍼 두 켤레가 나타났다. 책에서는 손님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왜 하필 남자 슬리퍼였을까?혼자 사는 여자가 자주 남자를 집에 초대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특별히 슬리퍼를 준비했단 말인가?이것은 불합리했다.준비해도 남자가 아닌 여자 슬리퍼를 준비해야 마땅했다.“모든 숨겨진 단서는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요.물론.”현빈은 말머리를 돌렸다.“이것은 단지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에요.”이미숙은 웃으며 말했다.“이 질문을 했을 때, 답은 이미 네 마음속에 있을 거야.”현빈도 따라서 웃었다.“그래서 2부가 더 있는 거네요, 맞죠?”이미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이미 모든 것을 설명했다.현빈이 차를 골목 어귀에 세우자, 정은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부모님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고마워, 현빈아.”“아저씨, 별말씀을요.”위층으로 올라갈 때, 소진헌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