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 내가 쓴 글이 말이 아예 통하지 않다뇨? 지금 작가인 날 모욕하는 거예요?!”“그래요, 당신은 편집장이라서, 나도 당신의 안목과 판단을 믿어야 하지만, 난 전혀 그런 스타일의 소설을 쓸 수가 없단 말이에요. 바꾸고 싶어도 이건 변화가 너무 크잖아요!”“우리 모두 진정해야 할 것 같네요.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끊고 돌아서자, 정은의 의혹의 눈길을 마주한 이미숙은 웃으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야. 출판사 편집장이 날 찾아서.”“정말 괜찮으세요?”“그럼 가짜일 수 있겠어?” 이미숙은 웃으며 정은을 끌어안았다.“요 몇 년 전통적인 출판업이 불경기라서, 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인터넷 소설을 쓰기 시작했거든. 많은 돈을 벌었다나. 물론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된 사람도 있어. 편집장도 내가 인터넷 소설을 창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난 아직 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거야.”“인터넷 소설이요?” 정은은 많이 놀랐다.“어떤 내용인데요”이미숙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로맨스 소설.” 이미숙은 추리 소설가로, 예전에 추리 소설이 한창 인기를 끌던 때에 『살기』라는 책을 써서 연간 50만 부 이상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해 하반기에는 스릴러 소설 『황량한 마을 학교』를 출판하며 다시 판매 기록을 갱신했다.그해는 심지어 ‘이미숙의 해’라고 불릴 정도였고, 도합 5권의 책으로 연간 도서 판매 순위 5위에 올랐다. 지금의 편집장도 바로 그때 찾아온 사람이었다.한동안 접촉하면서 이미숙은 편집장이 생각이 깊고 선견지명이 있으며, 여러 번 찾아와 준 성의에 감동해 단숨에 10년 계약을 맺었다. 이후 이미숙의 작품은 모두 이 편집장이 수정하고 출판 및 발매를 맡았다.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던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숙은 창작의 정체기에 빠진 듯했다. 독자들의 기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상이 줄곧 부결되거나, 겨우 구상이 통과되어 대강을 준비하려 할 때마다 편집장은 전화로
그동안 이미숙은 하마터면 우울증에 시달릴 뻔했다.다행히 남편과 딸이 곁에 있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악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 이미숙은 더 이상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았고 휴대폰조차도 전화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이 10년, 청춘 로맨스 소설 한 권 외에 이미숙에게 더 이상 신작이 없었다.“아이고, 이런 말은 그만하자. 국수 맛있니?”“네, 여전히 그 맛이에요.”정은은 이미숙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국물이 좀 뜨겁네요.”“그래? 그럼 좀 더 식혀.”...새해가 다가오면서 작은 도시의 평온한 분위기도 조금씩 떠들썩해졌다. 큰길 양쪽과 길가의 가로수에는 장식들이 늘어났고, 집 근처 슈퍼마켓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품들도 거의 다 팔려나가서 이미숙은 아예 차를 몰고 도심의 큰 마트로 향했다.차를 주차하고 모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 앞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설맞이 용품을 사러 온 사람들로 정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집에는 비록 아이가 없었지만, 설을 맞아 친척집을 방문해야 했고, 졸업한 학생들이나 근처 이웃들이 가끔 놀러 올 수도 있었기에 사탕과 과일을 준비해야 했다.간식 코너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비싼 과자들을 골랐다. 그리고 집에 기름, 소금, 간장, 식초도 거의 다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물건을 추가로 샀다.해산물 코너에서 팔딱거리는 새우를 보니 이미숙은 정은에게 새우를 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줄곧 뒤따라오던 정은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이미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카트를 밀고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은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카트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초콜릿은 좀 쓰지만, 집에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정말 시원하고 편안했다.정은은 몰래 두 개만 사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고, 눈을 깜박이며 불쌍한 표정으로 이미숙을 바라보았다.“두 개
이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까나리액젓 사는 것을 깜박했네. 정은아, 저기 가서 한 통 들고 와.”“네.” 정은은 이미숙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정은이 가는 것을 본 이미숙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아침에 말했잖아요. 아직 생각 중이라고.”“이 일은 내가 3개월 전에 이미 말한 것 같은데요? 그때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이 작가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준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나에게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잖아요.”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함께 일했으니,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장르가 바로 미스터리 스릴러류의 중단편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대략 20~30만 자 정도이죠.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인터넷 소설을 쓰라고 하다니, 이건 아예 상관이 없는 두 장르잖아요!”“모두 소설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문학은 모두 공통된 것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유보영은 좀 엄격해지더니 웃음을 거두었다.이미숙은 애써 설명하려 했다.“우선 인터넷 소설은 기본적으로 장편이라서, 툭하면 백만 자 이상이에요. 둘째, 인기 있는 인터넷 소설은 대부분 로맨스, 대표님과 연애하는 거죠. 이것 모두 내가 잘 모르는 장르이니 지금 어떻게 글을 쓰라는 거예요? 『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에서 받은 교훈이 아직도 부족한 거예요? 애초에도 장르를 바꾸었지만, 그 결과는요?”『풋풋한 나의 학교 시절』이 바로 이미숙이 비참하게 욕을 먹었던 청춘 로맨스 소설이었다.유보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그 소설이 이 작가의 평판을 폭락시켰다는 거, 나도 잘 알아요. 지금까지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인터넷을...”“그래요, 이제 내가 인터넷을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왜 나에게 인터넷 독자들을 영합하는 도시 로맨스를 쓰라고 하는 거죠?”“이 작가, 일단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봐요.”유보영은 좋은 태도로 설득하려 했다.“그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하고, 판매량을 창출하지 못하는 작가가 그래도 작가냐고요?”이미숙도 화가 났다.“나에게 구상이 아주 많았지만, 편집장님이...”유보영은 바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당신의 그 구상들은 아무런 특색도 없고, 임팩트도 없으니 쓰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동시에 출판사의 노력을 낭비하는 거라고요! 전혀 팔리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은 자신이 여전히 그 잘나가는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좀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아웃되었어요! 이미숙, 당신은 지금 현실을 똑똑히 알아야 하고, 자신을 주제를 똑똑히 파악해야 한다고요!”“엄마...” 정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진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이미숙은 눈물을 금세 삼키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가져왔어?”정은은 까나리액젓을 흔들었다.“여기요.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아빠가 이미 학교에서 돌아오셨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얼른 계산하고 돌아갈까요?”“그래.”“그럼 아주머니, 우리 먼저 갈게요.” 정은은 이미숙을 대신해서 작별 인사를 했다.왜냐하면 정은은 이미숙이 지금 무척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슬프게 만든 사람을 전혀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유보영은 담담하게 웃었다.“그래, 나도 물건을 사야해서.”말이 끝나자 그녀는 이미숙을 쳐다보았다.“내가 방금 말한 거 잘 생각해 봐요. 아이고, 다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인데다, 줄곧 함께 일해왔잖아요.”이미숙은 눈을 반쯤 드리우며 말을 하지 않았다. 정은은 카트를 받고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엄마, 그 유보영 아주머니와 10년이란 계약을 한 거예요?”“음.”“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올해가 마지막 해죠?”이미숙은 계산을 해봤다. “정말이네.”“엄마는 그 사람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이미숙은 잠시 침묵하며 억지로 대답했다.“그래도 프로긴 하지.”정은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약서 아직 있죠?”“응
게다가 방금 이미숙과 대화할 때, 정은은 작가에 대한 편집장의 관심을 보지 못했고, 오직 압박밖에 느끼지 못했다.“보여주세요!”“그래, 이따가 돌아가서 보내줄게. 너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봐야 한다!”정은은 맹세했다.“그럼요!”...집에 도착하자, 소진헌은 문에 복조리를 걸고 있었다. 그는 복조리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정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아빠, 좀 비뚤어진 것 같아요. 왼쪽으로 좀 옮겨보세요.”이미숙은 차에서 내리더니 쯧쯧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보기엔 너무 위로 걸어놓은 것 같은데요? 좀 아래로 걸어요.”소진헌은 또 복조리를 아래로 당겼지만, 이때 이미숙이 계속해서 말했다.“아니다, 너무 낮으니까 좀 높게 걸어요.”정은이 말했다.“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아요.”소진헌은 다 걸은 다음,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양쪽을 비교해보니, 또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왼쪽이 좀 높은 것 같은데?”이미숙은 그제야 문제점을 알아차렸다.“당신 설마 다른 복조리와 헷갈린 거 아니에요?”소진헌은 헛기침을 했다.“확실히 그런 것 같아.”그는 며칠 전에 복조리를 샀는데, 하나는 너무 작고, 다른 하나는 또 너무 커서 어제 또 새로 몇 개 샀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방에 새것을 걸고 나니, 문 앞에 걸어야 하는 복조리는 대칭이 되지 않은 것만 남았던 것이다.이미숙은 유유히 입을 열었다.“망했네요. 겨울방학 하자마자 머리가 돌아가지 않다니.”정은은 피식 하며 참지 못하고 웃었다....새해 아침, 이미숙은 직접 밀가루를 반죽하며 정은이 좋아하는 시래기 만두를 빚었는데, 껍질이 얇고 속이 꽉 차서 식초와 간장을 조금 묻혀 먹으니 그야말로 식욕을 돋우었다.풍습에 따라, 소진헌은 요리를 한 상 가득 준비했고, 꼭 필요한 떡국, 생선 외에 또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나물 무침까지 있었다.정은은 식탁에 가득한 음식을 보며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세 식구는 함께 앉아서 푸짐한 설날 음식을 먹었다.식사 후
평소에 만날 일도 없었으니, 서로 건드리지 않고 지내면 그만이었다.중간에 낀 도겸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늘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먼저 묻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며 모른 척해버렸다. 그는 여자친구와 어머니 사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은도 그런 도겸을 이해하고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설날을 어디서 보낼지, 자신과 함께할지 아니면 서영숙을 찾아갈지에 대해서도 정은은 한 번도 도겸을 괴롭히지 않았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자신의 양보와 이해, 그리고 인내심은 결국 자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그저 습관처럼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정은이 대답해다.“응,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그녀는 비록 간단하게 말했지만, 수민은 정은이 용기를 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건강하셔? 오랜만에 뵙지 못했으니 안부 전해줘.]“아주 건강하셔. 방금 밥 먹을 때 네 얘기까지 했는데.”대학 시절, 소진헌 부부는 수민이 정은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고, 여름방학에 정은이 돌아올 때마다 늘 특산물을 가지고 가서 수민에게 주라고 했다.수민은 지금까지도 소진헌이 만든 소고기 양념을 생각하면 배가 고팠다.[그럼 언제 돌아올 거야? 고향에 얼마나 있을 건데?]정은은 잠시 생각했다.“좀 오래 있을 거야.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두 분과 같이 있어주고 싶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그동안 줄곧 돌아가지 않았으니 두 분도 네가 많이 그리웠을 거야.]수화기 너머에서 수민은 아이패드에서 무엇을 봤는지 눈빛이 밝아졌다.[웃겨 죽겠네. 나 방금 재밌는 거 하나 봤는데.]“뭔데?”[너 못 봤어?]“아니.”수민은 그제야 생각났다. 정은은 이미 도겸의 번호를 차단했던 것이다.[에헴! 그럼 내가 알려줄게! 방금 서SNS를 올렸는데, 아마도 강도겸이 에르메스 켈리백을
정은은 담담하게 입술을 구부렸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침묵에 잠겼다.이때 수민 쪽이 무척 시끄러워졌다.[정은아, 먼저 끊을게. 집안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우리 엄마가 지금 여기저기서 날 찾고 있어.]“그래.”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또 연이어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왔다.심현빈이었다.다국적 기소장, 접수 영수증이 있었는데, 그는 또 현재의 진도에 관한 설명을 했고, 나머지는 정은 본인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다국적 기소는 일반기소 수속보다 더 복잡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기에, 이렇게 빨리 추진될 수 있다니, 솔직히 정은도 많이 놀랐다.그녀는 파일을 받아 온라인으로 사인을 한 뒤, 다시 현빈에게 보냈다.그쪽은 바로 문자를 읽더니 곧이어 또 농담을 하며 답장했다.[날 그렇게 믿는 거야? 널 배신할 수도 있는데?][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현빈은 마음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웃었다.정은의 말에 설렜기에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재빨리 타자를 했다.[단지 사인해야 할 서류일 뿐이야. 기소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까 안심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현변의 설명에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서명해야 할 서류들도 모두 자세히 보고 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사인한 것이다.게다가 현빈이 정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다면, 이렇게 복잡하고 저질한 수단을 쓰지 않을 것이다.2초 후,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에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정은은 핸드폰을 침대에 엎었다. 그녀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으니, 현빈의 소원은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정은아, 네 아빠가 만두를 만들었으니 빨리 와서 먹어.”아래층에서 이미숙의 함성이 들려오자, 정은 즉시 일어나 경쾌하게 대답했다.“가요.”저녁, 정은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따끈따끈한 만두를 먹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재밌는 예능을 보니, 그야말로 천국이
맞은편에서도 역시 축복을 보냈고, 소녀의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섞인 것 같았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기원하는 정은의 모습이 떠올랐다.‘불꽃놀이가 피어난 순간, 정은의 모습을 비추는 그 장면은 정말 예쁠 텐데.’...이튿날 아침, 정은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11시까지 일어나면 된다.태양이 중천에 뜨자,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졸린 두 눈을 떴고.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며 커튼에 그림자를 남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해가 벌써 떴어?!’정은은 얼른 하품을 하고 일어서며 커튼을 쫙 열었다.햇빛이 먼 산에 쌓인 하얀 눈을 비추더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소진헌과 이미숙은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소진헌은 귀가 밝았는데, 창문을 여는 소리를 듣자 바로 정은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님이라 줄곧 시간관념이 있어서 정은이 늦잠을 자는 습관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그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네 엄마가 나쁜 습관만 길들였어. 이 시간까지 자고,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위에 병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몸을 하나도 중시하지 않아. 늙으면 다...”이미숙은 귤 한 조각을 소진헌의 입에 쑤셔 넣었다.“늦잠 자는 거 가지고 언제까지 잔소리할 거예요? 정은이는 이미 졸업했으니 더 이상 당신의 학생이 아니라고요. 새해에 늦잠 자면 뭐가 어때서요?”말하면서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네 아빠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그런 잔소리 듣지 마. 식탁 위에 아침밥 있으니 좀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어.”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아침을 다 먹은 정은도 정원에 가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었다.“아빠, 이게 무슨 차예요? 냄새가 구수하네요.”정은은 찻잔 냄새를 맡았다. 담백하고 그윽한 차는 싱겁지도 느끼하지도 않았다. 입을 다시니 또 은근히
민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일 2킬로미터 더 달려야 한다는 말을 뒤로 했다.그리고 정은을 안고 애완동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사랑해요, 정은 언니, 내가 그 가게의 닭볶음탕을 먹고 싶어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어요?”정은은 민지가 자신을 안도록 내버려두더니 웃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한 번 말했잖아, 그래도 기억해뒀지. 그리고 나도 그 닭볶음탕이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네.”“날 믿어요, 절대로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 가게는 맛이 아주 좋아요!”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먹방들의 타고난 능력일 것이다. 민지가 추천한 것이라면, 대부분 엄청 맛있는 음식이었다.이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아주 정통적인 닭볶음탕을 만들었다.또 J시 사람의 입맛을 결합하여 간단하게 개량했기에 엄청 고소하고 맛있었다.닭고기가 부드러우며 매콤한 향기까지 곁들이니, 생각만 해도 민지는 이미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요 며칠, 조깅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준은 민지의 식단을 엄격히 통제했다. 매일 그 싱겁고 무미건조한 음식들만 먹으니 민지는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비록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몰래 간식을 훔쳐 먹었지만, 간식이 어떻게 맛있는 요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정은 언니, 완전 사랑해요.”마침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민지는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다.“야, 내가 언제 널 학대했어?”“그럼 조깅 취소해.”“그래, 그럼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내년 건강검진 보고서에 ‘지방간’이라는 결과가 또 나올 테니까.”‘됐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을 말자. 난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서준은 민지의 다이어트를 돕기 위해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렀다.사실 민지는 가끔 서준의 얼어붙은 볼과 코를 보고, 또 아직 이불 속에 틀어박혀 쿨쿨 자는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건 죽을 죄야! 한겨울에 누가 더 자고 싶지 않겠어?’‘우리 아빠도 서준처럼 매일 일찍
민지가 대답했다.“여행 이미 마쳤어요!”“벌써?”“여긴 그리 크지 않으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며칠 걸릴 리가 없잖아요?”정은의 의혹스러운 눈빛은 서준에게 향했다.만약 그녀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그때 서준은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 기간에 몇 번 더 보완되었고, 코스도 더 많아졌다.그러니 하루 만에 끝내는 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다.정은이 입을 열어 물어보려고 할 때, 서준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콜록... 맞아요, 하루 만에 끝냈지만 즐거우면 됐죠.”“정은 언니, 이번에 서준이 가방이 나보다 더 큰 거 있죠!”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말하지도 않고, 놀 때도 꺼내 쓰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산을 올라갔는데, 엄청 대단하죠!”‘칭찬인 건가... 그건 좀...’정은은 이상한 눈빛으로 서준을 보더니, 마치 그의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힌 것 같다.2박 3일 동안 여행할 준비를 한 이상, 갈아입을 옷, 생활용품 따위를 챙겨야 하지 않을까?아마 민지는 원래 이것이 2박 3일 여행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에헴, 누나!”정은은 크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오직 민지 만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정은 언니, 바쁜 일이 끝난 후, 하루 동안 쉬는 느낌은 정말 너무 좋아요! 그냥 점심까지 자고 나서 여러 코스를 돌아다니니...”‘그래서 2박 3일은 그렇다 쳐도, 온전한 하루조차 여행하지 못한 거야?’“서준이 줄곧 재촉했는데, 귀찮아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야 그냥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편한 대로 행동해야지, 누가 꼭 몇 시에 외출해야 한다고 규정했죠?”“늦잠을 잔 후에 다크서클이 바로 없어졌어요. 전에 밤을 새울 때 눈까지 작아졌는데.”서준이 말했다.“그래? 네 눈은 항상 그렇지 않았어? 이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민지는 허리를 짚으며 눈을 부릅떴다.“임서준, 너 나한테 얻어맞고 싶은
수민은 차여 넘어진 의자를 향해 턱을 들었다.동건은 재빨리 알아차리고 즉시 의자를 들고 제자리에 놓았다.“이제 나랑 좀 더 있을 수 있지? 헤헤...”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동건은 이미 수민의 가녀린 허리를 껴안고 침대 위로 가져갔다.5분 후.“수민아...”“너 뭐 하는 거야? 잠깐 누워있겠다며? 왜 내 단추를 풀어?”“쉿, 말하지 말고 우리 한 판 더 하자.”수민은 말문이 막혔다.새벽 3시,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건은 그녀가 이곳에 밤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차 좀 빌려줘.” 수민은 거울을 보고 체크하다가 목에 담담한 키스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흔적 좀 남기지 말고 조심해.”동건은 침대에 기대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왜? 다른 남자가 볼까 두려워?”“또 말을 이따위로 할 거야?”동건은 긴장을 하며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아니... 내가 너무 매료되어서 이런 흔적 남기는 것도 정상이잖아. 내 등 좀 봐...”말하면서 그는 돌아섰다.“다 네가 손톱으로 파낸 흔적이야, 그런데 내가 언제 뭐라고 했어?”수민은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등에 긁힌 자국이 가득하고, 심지어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니 확실히 무서웠다.“에헴!” 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했지만 지지 않으려 했다.“그 뭐야... 넌 흔적이 다 등에 있으니 옷만 입으면 누가 알겠어? 이건 목이잖아. 내일 색깔이 더 깊어질 텐데. 어떻게 동료를 만나라는 거야?”“헤헤... 그럼 만나지 말고 휴가를 내. 우리 둘이 별장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자!”“허, 네 말에 속을 것 같아? 꿈이나 깨!”동건은 마음이 찔렸다.“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런 뜻이 아니라고.”“그건 너 자신이 더 잘 알갰지. 차 키 가져와.”동건은 침대 머리맡에서 BMW의 키를 꺼내 던졌다.수민은 힐끗 보더니 다시 던져주었다.“난 마이바흐를 원해.”“까다롭긴!”“내일 저녁에 퇴근하면 이리 와.” 남자는 이 기
“수민아, 정말 보고 싶었어!”말을 마치자마자 동건은 뜨거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수민도 능숙하게 응답했다.사실 그녀도 동건이 꽤 그리웠다.동건의 손은 수민의 옷자락으로 파고들며 점점 대담해졌다.그러나 수민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응?” 동건이 물었다.“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 집에 가서 하자.”그 한마디에 동건은 억지로 욕구를 참으며 가속페달을 쭉 밟았고,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원래 20분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지만, 10분 만에 동건의 집앞에 도착했다.문이 닫히자마자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더니 곧바로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그렇게 침실에 들어갔고, 옷이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한 시간 후, 정은은 나른한 눈빛을 띠며 욕실로 향했다.동건은 침대에 기대어 단단한 가슴을 드러냈다.“어딜 가?”“샤워.”“씻지 말고 좀 더 누워 있어.”“땀 냄새 나서 싫어.”동건은 다정하게 속삭였다.“안 나. 네 땀은 엄청 향기로워.”“내 땀이 아니라 네 땀이잖아.”“아...”샤워를 마친 수민은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동건은 점점 이상하다고 느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놀란 눈으로 물었다.“설마 지금 가려고?”“응.”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내일 출근해야 했기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동건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수민은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동건은 침대에서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자고 바로 가다니, 내 집이 호텔이야? 내가 무슨 제비냐고?”수민은 부드럽게 설명했다.“난 그런 뜻이 아니야...”“아니긴 개뿔! 나를 심심풀이로 쓰는 거잖아?!”말을 마치자, 화를 못 참은 동건은 침대 끝에 있는 벤치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수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래도 설명을 하려 했는데... 이 남자는 정말 어이가 없군.’“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지?”“나는...”“네가 자신을 제비라 생각한다면
남자는 이 상황을 보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동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민아, 이분은...?”분명히 수민이 직접 소개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동건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궁금했다.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눈빛 속에 심지어 작은 기대가 어렴풋이 비쳤다.“아, 이분은 고씨 가문의 큰아들, 고동건이야.” 수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대답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 남자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그런데, 이분은 수민과 무슨 사이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이번에 동건은 수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말했다. “남자친구예요.”말을 마치며 동건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수민의 남자친구라고요.”동료는 수민을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젓길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이에 동건은 화가 나더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고,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강한 소유욕을 과시했다.수민도 뭐라 하지 않았고, 부드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남자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수민은 즉시 똑바로 서더니, 자신의 어깨에 놓은 동건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됐어. 그 사람 이미 떠났잖아.”동건은 손을 호호 불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야! 좀 살살 해!”수민은 대꾸했다. “싫어.”“너 정말... 전화해도 안 내려오고, 전화도 안 받고. 대단하네.”“누가 그렇게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는데, 너였구나.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야?”동건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제시간에 내려왔으면 내가 전화를 그렇게 했겠어?”“제시간? 내가 너랑 약속했던가?” 수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동건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가 오늘 야근 안 한다고 했잖아!”“그렇게 말했지만, 데리러 오라고 한 적은 없어.”수민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었고, 동건이 데리러 올 필요
그리고 도겸은, 상대방의 이런 모습을 보며 현빈이 묵인했다고 느꼈다.화가 난 그는 핸들을 내리치더니 고요한 밤에 갑자기 경적 소리가 울렸다.위층에서 직접 욕을 하기 시작했다.“한밤중에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말을 마치자 물 한 대야가 쏟아졌다.마침 도겸의 차 꼭대기에 뿌렸다.현빈은 이미 쿨하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났다.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모든 것, 앞서 현빈이 정은을 위층으로 데려다 준 장면까지, 베란다에 서 있던 재석은 똑똑히 보았다.찬바람이 쌩쌩 불며 눈까지 그의 얼굴에 떨어졌지만, 재석은 마치 추위를 모르는 듯 30분 넘게 이렇게 서 있었다.그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그저 가슴이 심하게 답답하고 숨조차 잘 쉬지 못했다.머릿속은 많은 생각을 했지만 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지난번 정은을 떠보며, 그녀가 연애 대신 학업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대답을 받은 재석은 자신이 마음속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다시 친구로 되어 이렇게 정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도 좋았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재석은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그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정은의 곁에 남자라곤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고.그녀의 눈빛은 영원히 자신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다고.정은의 미소도, 그녀의 기쁨도 오직 자신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만약 가능하다면, 재석은 심지어 자신이 정은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이런 미친 생각들은 정은이 현빈의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 때 들끓기 시작했다.재석은 쓴웃음을 지었고, 자신도 이렇게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더 슬픈 것은 감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뿐이라는 것이다....같은 밤,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동건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수민의 전화를
눈에 거슬리는 동시에 도겸은 두 눈이 붉어졌고, 현빈의 뒷모습을 보며, 펑하고 핸들을 내리쳤다.도겸은 내려가서 현빈의 멱살을 잡고 그를 호되게 한 대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손을 대는 것일까?단념하지 않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예전의 절친?그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결국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물건을 올려준 뒤, 현빈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은 거실에서 물을 따르며 건네주었다.“고마워요, 오빠, 물 좀 마시고 가요.”현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정은은 물건을 간단히 정리하고 내일 다시 차츰차츰 치우려 했다.바로 이때,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은은 낮에 베란다 문을 닫지 않았는데, 이때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화분이 아직 베란다에 있었기에, 만약 바람에 날려 가서 사람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큰일이었다.그래서 정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화분을 실내로 옮겼다.그중 하나가 비교적 무거워서 그녀는 몇 번 시도했지만 조금도 들지 못했다.이때 두 손이 나타나더니, 화분을 받으며 듬직하게 들어올렸다.현빈이 말했다.“내가 할게.”정은은 한숨을 돌렸다.“고마워요, 오빠.”손을 거둬들일 때, 부주의로 현빈의 손을 부딪혔지만, 정은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남자의 눈빛은 조여졌고, 그다지 많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현빈이 그 잘 자란 코코넛을 쉽게 실내로 옮기는 것을 보고, 정은은 또 손을 들어 다른 몇 개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말했다.“이거, 그리고 이거도 다 옮겨야 하는데...”현빈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내가 짐꾼처럼 보여?”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하지만 내 오빠잖아요. 전에 어려움이 있으면 오빠를 찾으라고 했고요.”이번에 현빈이 말문이 막혔다.‘오빠, 오빠, 그놈의 오빠!’그는 자신이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 느꼈다. 어떤 호칭이든 정은의 입에서 나오면 이유 없
“도겸이는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아! 싸다 싸! 그러게 누가 그때 저런 말을 하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도겸이 형이 언제 단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은 누나는 이미 그 과거에서 벗어났는데.”“흥.” 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도겸이가 단념을 한다고? 두고 봐. 정은 씨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저 자식 평생 이러고 있을 거야.”“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그 가사가 뭐였더라? ‘얻을 수 없다면 영원히 소란을 피울 거야.’ 남자는 말이야, 정말 천박한 존재지. 됐어, 너희들 천천히 놀아, 나도 갈게.”“아니... 이제 막 왔는데 왜 가는 거예요?”동건은 헤헤 웃었다.“수민이가 갑자기 야근을 안 해도 된다고 했거든. 수민이 데리러 갈 거야.”선우의 눈빛은 더욱 이상해졌다.“그런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동건은 변명했다.“네가 뭘 알아? 나는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남자친구가 퇴근한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것은 정상 아니야? 이것도 할 수 없다면, 양가 부모님들은 또 어떻게 우리 둘이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어?”“아, 늦었으니 먼저 갈에! 안녕!” 말하면서 동건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엄청난 의혹이 나타났다.‘왜 다들 요즘 귀신에 홀린 것 같지... 이상해! 너무 이상해!’...겨울의 비는 마치 바늘을 숨긴 듯 했고, 쌀쌀한 바람은 뼈를 에는 듯 했다.8시도 안 되었지만,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도겸은 클럽을 떠난 후, 차를 몰고 정은의 거처로 곧장 달려갔다.도중에 그는 질투와 불쾌감을 느끼며 심지어 정은에게 어떻게 따져야 할지를 생각했다.‘심현빈이랑 안 친하다며?’‘둘이 불가능하다며?’‘그런데 왜 그 자식과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난 거야?’‘두 사람 언제 사귄 거냐고?’‘심현빈이 대체 뭐가 좋은 거야?!’‘대체 왜?!’그러나 막상 도착하자, 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갈 용기조차 없었다.그저 차 안에 멍하니 앉아서 비가 유리창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고, 지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전하고 있는데!’선우는 또 다른 한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도겸은 한 잔 한 잔 이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공도 치지 않았으며 여자가 다가오면 더욱 멀리 피했다.다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우리 도겸이 형 지금 정말 침울해진 것 같아.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네!”“꺼져, 오글거려 죽겠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우리 도겸이는 사랑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니, 이건 일편단심이라고!”“그래도 여자는 다 똑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를 살 수 없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선우는 그들이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을 듣고 즉시 호통을 쳤다.“이제 그만 좀 해. 그딴 말 좀 적게 하고. 너희들은 뭐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아!”그들 중에는 심지어 ‘소정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선우는 가슴이 떨렸다.그것은 절대로 도겸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는 이름이었고, 도겸은 듣자마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동건은 연속 몇 판 지자, 카드를 던졌다.“재미없네. 너 무슨 속임수 썼지? 어떻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거야?”“형은 운이 나쁜 데다가 머리도 좋지 않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야! 전선우, 너 많이 컸다?”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칭찬으로 들을게요.”동건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놀아.”그가 가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자연히 흩어졌다.선우는 카드놀이를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술을 마실 흥미도 없었다. 무대 아래는 분위기가 막 뜨거워졌기에, 춤을 춰도 재미가 없어 아예 소파 구석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보았다.그렇게 선우는 현빈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모임? 누구랑 가족 모임에 참가한 거야?” 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사진을 클릭하며 맛있는 것이 참 많다고 감탄하려 하다가, 갑자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