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도겸은 마치 피곤함이 극에 달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잠을 잤는데, 주위의 모든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와우!” 이때, 잘생긴 외국 남자가 엄청난 감탄을 했다.“너무 예쁜데!”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연희는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정은이 한쪽의 비치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목에 두른 흰색 스카프는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어머 세상에! 샤넬 그 자체야! 너무 예쁘잖아!”연희는 차갑게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예뻐요?”외국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샤넬 브랜드의 창시자 가브리엘 샤넬 여사를 아세요? 검은 치마에 하얀 베일을 두르며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죠. 그리고 바람이 치맛자락을 날리며, 그 베일도 하늘하늘 바람에 흩날렸죠...”연희는 이를 악물었다.“그럼 당신은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나요?”“당연히 예쁘죠.” 남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 여자와 비교하면요?“아, 신사로서 이 문제를 대답하기가 많이 어렵네요. 하지만 정말 비교하고 싶다면, 저는 그 아가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연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하얀 피부, 그리고 곱슬머리를 뒤로 넘겨 매우 섹시해 보였다.반면 정은은 비교적 노출이 적은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치맛자락은 절반쯤 허벅지를 가렸고, 색깔도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하얀 피부 덕분에 오히려 검은색이 정은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다.하얀 스카프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는 몸매는 이 외국인조차도 그 함축적이고 우아한 매력에 매료되게 만들었다.흔치 않은 것이 귀한 법이다. 알록달록한 비키니 미녀들 사이에서 정은은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하지만 연희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도겸이 마치 텔레파시라도 받은 듯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다.정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경악, 놀라움, 찬탄, 괴로움, 후회 등 온갖 감정이 도겸의 눈 속에서 소용돌이쳤
그 결과, 장미꽃은 점점 많아졌다.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왜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거지?”정은도 마찬가지였다.“나 좀 살려줘! 이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르잖아!”군중 속의 도겸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연희는 손에 들려 있는 몇 송이의 장미를 보며 화가 나 눈시울이 붉어졌다.‘이 사람들, 눈이 없는 거야 뭐야?’정은은 지금 심지어 방금 전의 그 검은색 비키니도 입지 않았고, 도중에 전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연희가 보기에 그 모습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그러나 바로 그런 정은의 모습에 도겸은 넋을 잃고 말았다.정은은 넓고 큰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고, 옅은 색의 리본이 모자를 따라 나비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아주 심플한 스타일이었지만, 정은이 쓰니 오히려 대범하고 존귀한 느낌을 자아냈다.정은이 나타나자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민과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미소를 지을 때마다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답답하지?” 현빈은 어느새 도겸의 곁에 나타나더니, 분노로 붉어진 그의 두 눈을 보고 웃으며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정은 씨는 결코 네가 독차지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도겸은 주먹을 꽉 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은 씨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눈부셔서, 넌 그런 정은 씨를 몰래 숨겨둘 수 없어.”현빈은 감탄과 애모의 눈빛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자신의 장미를 잃었으니 지금 후회하는 거야? 그러나 정은 씨는 이미 네 여자가 아니야.”이때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왔다. 현빈은 자신의 코앞에 멈춘 주먹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매번 너에게 만회할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아.”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지만, 너 지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은은 내가 정성껏 키운 장미야. 난 정은이 오늘처럼 눈부시게 변한 것을 줄곧 지켜보았다고. 정은의 아
상자를 여는 순간, 뱀 한 마리가 안에서 튀어나왔다.그 뱀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엇갈려 있었고, 꼬리까지 가늘고 길어 딱 봐도 독사였다.정은은 반사적으로 상자를 던져버렸지만, 그 뱀은 이미 날아오르며 독니를 드러내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옆에 있던 사회자는 이미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이크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순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사람들은 즉시 뒤로 물러나며 본능적으로 뱀과 거리를 두려 했다.하지만 정은은 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도겸이 더 가까웠기에 현빈보다 먼저 정은을 잡아당겼다.그러나 그 순간, 도겸의 뒤통수가 독사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다.“위험해!”“조심해요!”정은과 연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정은은 이미 도겸의 품에 안겼고, 연희는 얼른 앞으로 돌진하더니 자신의 몸으로 뱀의 공격을 막았다.그래서 뱀은 연희의 종아리를 세게 깨물었다.“으악.” 연희는 아파서 천천히 쓰러졌다.도겸은 흠칫 놀라며 정은을 밀어내고 얼른 연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종아리를 살펴보았다.그의 예상대로 그것은 독사였다!“도겸 오빠...” 소녀는 눈물을 글썽였다.“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이를 악물며 연희를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는 아파서 땀을 뻘뻘 흘렸지만,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오빠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도겸은 감동을 받으며 연희의 손을 잡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의사가 곧 올 거야. 너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연희는 이미 초점을 잃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점점 약해졌다.“알아요, 저는 줄곧 도겸 오빠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저는 무사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희는 기절했다.도겸은 자신의 품에 쓰러진 연희를 보며 당황해지더니 얼른 소리쳤다.“의사, 의사는? 빨리 구급차
‘이 순간부터 도겸은 정식으로 아웃되었군.’...연희는 체질이 나쁘지 않았고, 제때에 혈청을 주사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안전을 위해 도겸은 한 의사를 동행시켜 연희를 돌보게 했다.방 안에서 연희는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는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하고 있었다.도겸은 침대 옆에서 연희를 지키고 있었지만, 몇 번이나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연희는 입을 열며 말했다.“오빠, 너무 무서워요...”“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네?”“만약 또 독사가 저를 물면 어떡하죠? 흑흑...”연희가 스스로 다칠지언정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도겸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의사 선생님 말 잘 들어.”“네.”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검사를 마친 다음, 링거를 뽑고 몸을 돌려 떠났다.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이때 연희는 일어나고 싶었다.도겸이 그녀를 부축하자, 연희는 일부러 힘없이 남자의 가슴에 기대었다.“저 종아리가 너무 아픈데. 흉터 남는 건 아니겠죠?”“그럴 리 없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고.”“그런데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금방 약을 발랐으니까 좀 참아.”말하는 사이, 도겸은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대학 시절 운동회에 참가한 정은을 떠올렸다. 그녀는 스타트하자마자 발목을 삐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달렸다.종점에 도착할 때, 정은의 복사뼈는 이미 말이 안 될 정도로 부었다.도겸은 얼른 정은을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의사는 책상을 두드리며 하마터면 뼈를 다칠 뻔했다고 그녀를 나무랐지만,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시울만 약간 붉혔다.도겸도 정은을 바보라고 욕했다. “처음부터 멈췄어야지. 왜 굳이 달린 거야?”“그래도 이건 시합이잖아... 이를 악물고 버티면 돼! 너도 참,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계속 나한
“저는 도겸 오빠가 정은 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는 정은 언니 때문에 애가 타겠지만, 저도 그런 오빠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방금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죠? 저는 단지 도겸 오빠의 곁에 있을 기회만 원할 뿐이에요.”소녀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진지하면서도 또 비천했다.도겸은 자신의 마음이 은근히 흔들린 것만 같았다.“안심해, 앞으로 난 널 잘 챙겨줄 테니까. 다시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연희는 웃으며 도겸의 품에 엎드렸고,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꿀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사실 저도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도겸은 연희를 더욱 세게 안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답답해졌다.‘왜 이러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행사장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발생하자, 호텔 직원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뒷수습을 했다.이 일은 손님들의 안전과 관련이 되었기에 책임자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이 와서 모든 관련자들을 찾아가 사건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물론 그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수상함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경찰들도 이번 사건을 뜻밖의 사고라고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다.이곳은 열대 지역이었고, 호텔 뒤쪽에 원시림까지 있어 뱀이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그런데 독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텐데요?” 수민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건...”“그리고 해변에 사람도 많았으니, 그런 곳에 나타나는 건 더 흔치 않은 일이겠죠?”경찰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호텔 책임자도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냉소를 지었다.“이번이 두 번째예요. 제 친구는 이 섬에서 두 번이나 위험에 부딪쳤으니, 딱 기다려요. 이 일은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정은아, 가자!”말이 끝나자, 수민은 정은을 끌고 성큼성큼 떠났다.“됐어, 화 풀어. 그 사람들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간 후, 정
사장님은 단번에 정은이 H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외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자, 그 태도도 무척 열정적이었다.“아가씨 안목이 좋네. 이 조각상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선물로 줘도 문제가 없다고.”정은은 웃으며 가격을 물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포장해주세요.”“오케이!” 사장님은 포장을 하면서 엽서 한 장을 안에 넣었다.“만약 하고 싶지만 하기가 쑥스러운 말이 있다면, 이 엽서에 쓰면 돼.”정은은 입술을 오므리며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열정적으로 포장을 해준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호텔로 돌아온 정은은 샤워를 하러 갔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책상 위에 놓인 그 선물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가가 엽서를 꺼냈다.엽서에는 몰디브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정은은 그것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어차피 쓸모가 없잖아.’...이튿날 아침, 심현빈은 시간이 다 됐다 싶어 레스토랑에 갔지만, 한 바퀴 돌아보아도 정은을 보지 못했고, 오직 수민 혼자만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테이블 위에는 컵 하나와 샐러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수민은 먼저 웃으며 인사를 했다.“세 바퀴나 돌면서 줄곧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은 거예요?”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말 의자를 가져와서 수민의 맞은편에 앉았다.“좋은 아침.”“네.”현빈은 수민의 컵을 힐끗 보았다.“우유가 참 맛있어 보이네.”“이거 두유예요.”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수민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현빈도 연기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정은 씨는? 왜 여기에 오지 않은 거지?”“무슨 일로 정은을 찾는 거죠?”“심심해서 찾으면 안 되는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금융
현빈은 떠날 때 마침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도겸과 어깨를 스쳤다.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정은을 보지 못했다.“자기야,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예요?” 연희는 도겸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도겸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넌 다리를 다쳤으니 굳이 날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룸서비스를 부를 수는 있지만, 너무 오래 누워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 곰팡이가 낄 것 같아요...”말하면서 연희는 혀를 내밀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뭘 먹고 싶어?”“샌드위치랑 우유요. 고마워요, 도겸 오빠.”점심에 도겸은 섬에 있는 4개의 레스토랑을 두루 찾았지만 여전히 정은을 보지 못했다. 오후에 그는 또 해변가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정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밤이 되자, 도겸은 도리여 섬의 한식당에서 수민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정은이 없었다.더 이상한 것은 아침 때 현빈을 잠깐 만난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설마... 정은이 심현빈과 데이트를 하러 간 건 아니겠지?’이 생각에 도겸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희가 의자에 걸쳐둔 숄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이것은 섬에서 산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 손에 하나씩 있었다. 물론 정은도 마찬가지였다.도겸은 걸어가서 수민에게 말했다.“점심때 정은이가 날 찾아왔었는데, 이 숄을 남겨두고 갔어. 네가 대신 돌려줘.”수민은 한창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점심에요? 그럴 리가요? 정은은 이미 돌아-”‘앗!’이때 수민은 이상함을 감지했다.“강도겸,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도겸은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이 어디로 돌아갔는데? 귀국한 거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확실히 귀국했구나.”원하는 답
두 나라의 온도 차가 큰 걸 알았던 정은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미리 롱패딩을 꺼내 자신을 꽁꽁 감쌌다.하지만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며칠 전 비가 쏟아진 탓에 나무와 전봇대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비록 눈에 보이기엔 가벼워 보였지만 옷에 닿는 순간 바로 얼음으로 변해버렸다.공항은 언제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한겨울의 한밤중이라 그런지 택시 한 대 잡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차량을 확인했다. 3분 전까지만 해도 5분 내 도착 예정이던 차가 이제는 30분 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녀는 지도 어플을 확인해 보니 공항으로 오는 길이 온통 막혀 있었다. 취소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차 한 대가 천천히 정은의 곁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 짙은 회색의 터틀넥 스웨터가 목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정은의 각도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따뜻함을 더하는 듯했다.“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마침 나도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얼른 타.”차 안에서, 정은이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조재석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차 안의 서랍에 핫팩이 있는 것을 떠올리며 재석은 또 얼른 그것을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걸로 손 좀 따뜻하게 해.”정은은 자신의 손이 아이스바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핫팩과 차 안의 에어컨 덕분에 그녀는 그제야 좀 살 것 같다고 느꼈다.“고마워요. 방금 공항에서 얼어 죽을 뻔했거든요.”정은은 코를 훌쩍였다. 수민이 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수민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공항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줄이야.재석은 정은을 바라보았다.“요 며칠 우리나라에서 국제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서 그래. 최근에
“다 심 대표님의 그 두 공사팀 덕분이야...”원래 그들은 기초 토목 건설을 책임졌지만, 인훈은 곧 자신이 상대방의 실력을 얕잡아 봤다는 것을 발견했다.기초 토목 건설을 제외하고, 이 사람들은 인테리어, 자재 감식까지 훌륭했다.그래서 토지 건설이 완료된 후, 인훈은 당분간 공사팀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이어서 공사팀으로 하여금 내부 인테리어와 스마트 배치 제어까지 완성하게 했다.“심 대표님, 무슨 문제 없죠?”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과 함께 현빈을 바라보았다.현빈은 정은의 눈빛을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당연히 없죠.”정은이 입을 열기만 하면, 현빈은 더 많은 사람을 불러올 수 있었다.“고마워요, 심 대표님!”“현빈 오빠라 불러.”‘또 시작이네.’인훈이 말했다.“헤헤... 현빈 형 고마워요.”현빈은 깜짝 놀랐다.다 먹자, 인훈은 계산하려고 했다.현빈은 이미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사장님, 계산이요.”“심 대표님, 식사 끝나셨어요? 오늘 꽃등심 맛은 어때요?”현빈은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보았다.“맛 어때?”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은 사실대로 말했다.“맛있어요.”“그럼 됐어요! 최근 이 요리가 얼마나 잘 팔리는지, 저희 예전의 간판 메뉴보다 더 잘 팔리고 있어요. 장사도 많이 좋아졌고요. 말하자면 심 대표님의 소중한 제안 덕분이기도 하죠.”현빈은 돈을 지불하고 핸드폰을 거뒀다.“정은이 덕분이죠.”사장님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애매한 눈빛으로 정은과 현빈을 바라보았다.“그럼요! 다 고맙죠!”문을 나서자, 찬바람은 옷 안으로 파고들어갔다.정은은 재빨리 패딩 지퍼를 당겼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다음 순간, 현빈은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그녀의 목에 둘렀다.정은은 멈칫하더니 얼른 벗으려 했다.“아니에요, 지퍼를 높게 당기면 바람을 막을 수 있어요...”그러나 현빈은 듣지 않았다.“그냥 두르고 있어.”...이웃 대학교 문 앞에서, 민지와 서준은 실험실에서 떠
정은은 오미선을 위로한 다음 또 직접 그녀의 몸을 닦아주었다. 마지막에는 링거를 다 맞아야 퇴원할 수 있다고 신신당부했다.떠나기 전에 정은은 또 박애영을 한쪽으로 불렀다.“전 이미 교수님과 얘기를 마쳤으니, 내일 요양원에서 차를 보낼 거예요. 밖에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박애영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그래도 정은이 너밖에 없구나! 나도 말렸지만 효과가 없었어. 네가 나서니 바로 해결됐잖아. 안심해, 교수님을 잘 돌볼 테니까!”“그럼 수고 많으세요.”“수고는 무슨...”정은이 간 후, 박애영은 문을 밀고 병실로 들어갔다.오미선은 그녀의 뒤를 쳐다보았다.“정은이 갔어?”“네, 갔어요. 가기 전에 특별히 저에게 교수님 잘 챙겨드리라고 했어요. 정은이도 정말 정성을 다했어요.”오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는 참 좋은 아이지. 다 내가 쓸모없어서 그래. 늙어서 아이들을 위해 자원을 쟁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송지혜의 괴롭힘을 받게 하다니.”“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정은은 교수님을 탓한 적이 없어요. 하물며 정은이도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한 이상, 틀림없이 계획이 있을 거예요.”“정은이는 해결할 방법이 있지만,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지...”박애영은 흠칫 놀랐다.“핸드폰 줘. 전화 한 통 좀 할게.”...시간은 쏜살같이 지나며 어느덧 또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시간이 되었다.세 사람은 여전히 학교 밖의 그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현빈은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미리 음식을 시켰다.인훈과 정은은 하나는 공사장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실험실에서 왔으며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오빠!”“어, 정은아, 넌 왜 목도리도 안 하고 나왔어? 안 추워?”“목도리를 실험실에 두고 왔어. 괜찮아. 지퍼를 당기면 얼굴을 다 가릴 수 있거든.”식당에 들어간 두 사람은 단번에 현빈을 보았다.양복 차림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꼿꼿했고, 어깨가 넓어서
“그래서 어제 아침에 도대체 누구의 전화를 받으셨어요? 화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니.”“흥!”정은도 서두르지 않았다.“제가 한 번 맞춰볼게요... 학장님은 아닐 텐데. 줄곧 이런 사소한 일들을 상관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럼 백 부총장님? 그런데 최근 스폰서의 고소로 방금 처벌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오랫동안 꼬리를 숨기셔야 할 텐데...”여기까지 말하자 정은은 잠시 멈추더니 눈알을 굴렸다.“이 두 사람을 모두 배제한다면, 생명과학대학에서 교수님을 이렇게 도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송지혜 교수님일 뿐이겠죠?”이 이름을 듣자마자 오미선은 눈을 부릅떴다.“그 사람 언급하지 마!”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심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그 교수님밖에 없는 것 같네요.”“심심해? 만약 송지혜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속고 있겠지! 나한테 어떻게 실험실이 소방대 시정 요구를 받았다는 이렇게 큰 일을 속일 수가 있니?!”“속이지 않으면요? 교수님께서 먼 M국에서 날아와 학원 측, 심지어 학교 측을 찾아가서 따지는 것을 지켜보라고요? 그러다 결국 저희의 실험실이 확실히 소방 규정에 맞지 않아 시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실 거예요. 이 시정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빠르면 2, 3개월, 느리면 1년 정도 걸릴 거고요.”“이쪽도 똑같이 처벌하고, 저쪽은 교수님이 이유 없이 세미나를 결석하고, 자의로 팀을 떠난 일로 학교 측의 문책을 받으시라는 거예요?”“이번 일로 누가 가장 이득을 보겠어요? 당연히 송지혜 교수님 아니겠어요?”오미선은 화가 나서 되려 웃음이 나왔다.“그럼 나란 교수님은 조금도 쓸모가 없겠구나?”정은은 경탄하며 천천히 말했다.“그거 알고 계세요? 이번 소방검사는 시에서 조직한 것이었어요. 만약 일반적인 교내 검사일 뿐이라면, 저도 두말없이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사람을 찾아 평정하게 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요. 시 소방대가 주도하고 학교 측은 협조만 하면 됐거든요.”오
“왜? 왜 날 이렇게 보는 건데?”“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선배님이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요.”‘진짜 엄청 좋은 사람이야.’“가자, 이렇게 서 있으면 안 추워?” 재석이 웃었다.정은은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좀 춥네요.”...또 토요일이 찾아왔다.정은은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든 다음, 또 두유를 마셨다.재석이 외출할 시간에 맞춰, 정은은 샌드위치와 두유를 봉지에 담아서 그에게 건네주었다.“아침밥이야?”“네!”“마침 안 먹었는데. 고마워.”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했고, 정은도 가려고 했지만 먼저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싶었다.바닥을 다 닦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나 애영 아주머니야! 얼른 병원에 와서 오 교수님 좀 보러 와...]병실에서.정은은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왔다.“교수님?!”오미선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고, 박애영은 옆에서 초조하게 머리채를 붙잡고 있었다.정은을 보고서야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정은아, 왜 이제야 왔어!”“아주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이랑 같이 요양하러 갔잖아요?”매년 서비대학교는 외지에 나가 요양하는 정원이 있었는데, 교직원 복지라고 할 수 있었다.대선배인 오미선은 이미 명단에 있었지만, 예년처럼 그녀는 스스로 포기했다.올해도 정은이 말렸던 것이다. 학교에 아무 일도 없고, 자신이 민지와 서준을 데리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게다가 시일내에 아무런 중요한 세미나도 없었기에 오미선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했다.“그래, 어제 출발했어야 했는데, 아침에 교수님이 전화를 받으신 거야. 누가 전화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차피 전화를 받고 나서 교수님이 쓰러지셨는데, 난 재빨리 병원으로 데려다준 거야.”“의사 선생님은 뭐래요?”“너무 흥분해서 그런 거래. 이틀 동안 입원해서 관찰을 받아야 하는데, 오늘 아침, 교수님이 퇴원하시겠다고 난리를 부리신 거야. 난 교수님에게 남은 두 링거를 다 맞고
기사는 차를 몰고 온 다음, 길가에 천천히 멈추었다.“사모님.”강서원은 차에 올라탄 다음, 실망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집으로 가요.”차가 떠나는 순간, 재석과 정은은 쇼핑백을 들고 길을 건너고 있었다.그들은 마침 어깨를 스쳤다.재석이 말했다.“그냥 다 줘.”말하면서 그는 정은에게서 쇼핑백을 받았다.정은도 거절하지 않았다.왜냐하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좀 무거웠다.두 사람이 골목 어귀로 걸어가자, 재석이 갑자기 물었다.“요즘 이웃 대학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실험실은 설비가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넓어요. 마 교수님도 엄청 친절하시고, 그 선배님들도 아주 다정해요. 소모품을 수령할 때, 꼭 우리를 도와 기록해 줬거든요.”그러나 이 소모품들도 다 정은이 견적서에 따라 돈을 지불했던 것이다.원래 실험실을 무료로 빌려 쓰는 것 자체가 쑥스러웠으니, 또 어떻게 공짜로 남의 소모품을 쓰겠는가?재석은 멈칫하더니 계속 물었다.“무슨 문제 없어?”정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실험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동안 밀렸던 진도도 점점 따라잡고 있었다. 전공 과목에서도 정은은 크게 어려움 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지난번 수행평가에서 ‘A+’를 받지 못하고 ‘A’에 그친 것이 아쉬웠지만, 그것은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어 반 전체가 만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머릿속에서 최근의 큰일을 모두 한 번 생각한 다음, 정은은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다.“지금 망설이고 있잖아. 학교 식당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정은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요?!”“오늘 오전에 참석한 회의에서 마 교수님을 만났거든.”정은은 마음이 다급해지더니 이어서 미안함을 드러냈다.“미안해요, 뜻밖에도 마 교수님께서 그 소란을 듣게 되실 줄이야. 선배님에게 다 말한 거예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고개를 푹 숙였다.부끄럽기도
재석은 아주 빠르게 주방을 정리했다. 거실로 나왔을 때, 그는 정은이 이미 과일을 깎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설거지하지 말라고 했더니 과일을 깎는 거야?” 재석은 어쩔 수 없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정은은 이쑤시개로 사과 한 조각을 들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그래도 해야 할 건 해야죠. 난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재석은 과일을 받았다.“참, 나 돌아가서 쓰레기 좀 치워야 하는데, 이따가 같이 내려갈래요?”“좋아.”쓰레기를 버리고자, 정은은 집의 냉장고가 비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최근 구매할 시간이 없어 그녀는 마트에 가자고 제의했다.재석은 자연히 동의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강서원이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여기서 차 세워요, 안에 못 들어가니까.”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모님.”강서원은 차 문을 열다 갑자기 멈칫하더니, 미리 준비한 플랫슈즈를 꺼내 갈아 신었다.‘하마터면 이걸 잊을 뻔했네.’그녀는 단숨에 7층까지 올라갔는데, 이번에 플랫슈즈를 갈아 신었으니 지난번처럼 그렇게 낭패스럽지 않았다.강서원은 열쇠를 꺼냈는데, 생각하다가 다시 가방에 넣으며 문을 두드렸다.똑똑.“재석아, 집에 있니?”몇 번 물어도 대답이 없는 후에야 강서원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어? 사람은?”마침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강서원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소기봉이었다.[당신 정말 재석이네에 찾아간 거야?!]“그래요.”[자금이 몇 시인데! 시간도 확인하지 않는 거야! 밤중에 달려가서 재석이 쉬는 것만 방해하잖아. 당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강서원은 사방을 둘러보다 또 침실 두 칸과 주방, 베란다를 다시 한번 찾아봤다.“이상하네... 재석이가 어디에 간 거지?”[왜? 재석이 집에 없어?]“한 바퀴 찾았는데 아무도 없네요.”[아이고! 신나서 달려갔더니 허탕을 쳤구나. 이게 무슨 헛수고야?]“당신은 몰라서 그래요. 재석이 오늘 저녁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 다시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는데, 직접 요리하려
정은은 옷걸이 옆에 따로 걸어놓은 양복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짙은 검은색이라 너무 고리타분했다.비록 재석은 평소에도 양복을 입었지만, 이것보다 훨씬 세련됐다.그렇다, 이 정장은 고리타분했다.정은은 안으로 들어간 다음 식탁 앞에 멈추었다.식탁 위에 요리 세 개와 국 하나가 놓여 있었다.“갈비찜과 소고기 볶음은 너한테서 배웠어. 야채볶음은 내가 영상을 따라 배운 거고, 무국은 원래 할 줄 알았던 음식이야.”재석은 각 요리의 내력을 분명하게 설명했다.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가 가르쳐준 적이 있나요? 왜 기억이 안 나죠?”“난 몰래 배운 거라.”말하는 사이에 재석은 이미 밥 두 그릇을 담았다.“앉아.”또 정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정은은 먼저 갈비를 집었고, 남자의 기대에 찼지만 또 일부러 침착한 척하는 눈빛을 맞이하며 입에 넣었다.“이 맛은... 어때?”정은은 남자가 똑바로 앉더니 표정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발견했다.“아주 맛있어요,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어요!”재석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어디 너와 비교할 수 있겠니?”“선배님, 너무 겸손하지 마요!”정은은 정말 억지로 칭찬하는 것이 아니었고, 맛은 확실히 괜찮았다.“옆에서 일을 거두면서 보고 배운 거예요?“절차도 묵묵히 기억했지.”똑똑한 사람은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었다.소고기 볶음과 야채볶음은 모두 맛있었다.“정말?” 당당한 재석도 자신이 없을 때가 있었다.정은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거짓말이에요.”“응?”“그럴 리가요.”...다 먹고 정은은 그릇을 치우려 했지만 남자가 엄숙하게 거절했다.“너는 소파에 가서 앉아 있어. 핸드폰 놀든, 텔레비전 보든 다 괜찮으니까. 주방은 내가 치울게.”정은은 눈을 깜박였다.“전에 내 집에 있을 때, 우리 같이 치우지 않았어요?”“너도 너희 집이라고 했잖아. 지금 내 집에 있으니까 내 말 들어.”‘이건 또 무슨 도리지?’“그럼 다음에 내
“재석아, 그 아이는 네가 추천한 사람이니 넌 어떻게 생각하니?”마정일은 말을 마친 다음, 재석에게 질문을 던졌다.재석은 한순간 침묵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우선, 저는 이것이 정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원에 핀 꽃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벌과 나비가 스스로 찾아왔죠. 그럼 이것이 꽃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요? 둘째, 이 학교 학생들의 자질을 강화해야 할 것 같아요.”“둘째, 사람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고작 이런 일 때문에 크게 싸우다니. 소문이 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밖으로 알려지면 학교에 망신을 주는 동시에 학교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예요. 그래서 학교 교사와 학생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시급한 일인 것 같네요.”중점이 바로 교사와 학생의 자질이었다.“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제가 정은이를 믿는다는 거예요. 그 아이는 종래로 이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왜 아무도 정은이의 처지와 심정을 고려하지 않는 거죠? 정은이도 피해자잖아요.”재석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마정일은 그가 단숨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그래, 그 학생은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어. 예쁘고 매력이 넘친 것은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니, 어떻게 무턱대고 탓할 수 있겠어?”재석은 안색이 누그러졌다.“그렇게 말씀하시면 다행이고요.”마정일은 은근히 놀라서 재석을 힐끗 보았다.‘대놓고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다니?’“아이고, 우리 학교의 그 녀석들은 조금도 차분하지 못하다니깐. 정은이가 예쁘다고 하나같이 달려들어 고백하는 것 좀 봐. 지금은 사회도 참 달라졌어. 우리 그때는 이럴 엄두조차 없었잖아. 나는 오히려 이런 게 좋다고 생각해. 좋아하면 대담하게 고백을 해야지!”“그나저나, 만약 정은이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면, 우리 학교의 아이들을 고려해 보는 건 어때? 서비대학교와 우리 학교도 엄청 가깝고, 평소에 수업이 끝나면 함께 데이트도 할 수 있잖아. 나도 내 실험실도 장기
“그럼 연락처 줬어?”정은이 대답했다.“아니요.”“둘 다?”“네.”교수님은 그제야 알아차렸다.‘이 여자애는 그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데, 두 사람이 착각을 하고 싸우기 시작했던 거구나.’지도원도 도리를 따지는 사람이었기에, 이 일은 정은과 무관하며 본교 학생이 잘못한 거라 매듭을 지었다.“이제 별일 없으니까 그만 가봐.”그 후로 정은은 점심에 식당에 가서 먹지 않았고, 배달을 시키거나 민지에게 포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이제야 겨우 조용해졌다.그러나 이 일은 이웃 대학에서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캔들이 되었다.하지만 모두 정은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문을 닫고 실험에 몰두하며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논문을 썼다.그 외에 외부의 어떤 소리도, 좋든 나쁘든, 선악을 막론하고 정은은 일절 듣지 않고 묻지 않았다....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과학자 표창 대회가 J시 시청에서 거행되었다.재석은 두 개의 최고급 상장을 수여 받으며 장내의 주목을 끌었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전공에서 중요한 성과를 거둔 거물이었지만, 거물과 거물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다.재석은 의심할 여지 없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최고의 거물이었다.“축하한다, 재석아, 벌써 3년 연속 상을 받았지?”“마 교수님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 당시 교수님은 5년 연속 상을 받으셨고, 그 기록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잖아요. 제 작은 성과는 언급할 가치도 없죠.”“하하... 재석아, 넌 여전히 이렇게 겸손하구나!” 마정일이 그때 받은 상은 재석에 비하면 훨씬 못했다.그러나 재석은 말을 예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듣기에도 편안했다.“시대도 부단히 앞서가고 있으니, 앞으로 학술계는 너희 젊은이들의 천하가 될 거야.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그저 너희들에게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는 것 같군. 그래야 우리도 큰 공을 세운 셈이지.”“저희들의 천하가 된다 하더라도, 구관이 명관 아니겠어요?”“하하하... 난 말주변이 없어서 널 이길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