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여는 순간, 뱀 한 마리가 안에서 튀어나왔다.그 뱀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엇갈려 있었고, 꼬리까지 가늘고 길어 딱 봐도 독사였다.정은은 반사적으로 상자를 던져버렸지만, 그 뱀은 이미 날아오르며 독니를 드러내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옆에 있던 사회자는 이미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마이크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순간, 현장은 혼란에 빠졌다.사람들은 즉시 뒤로 물러나며 본능적으로 뱀과 거리를 두려 했다.하지만 정은은 피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손목을 물어뜯으려는 그 순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도겸이 더 가까웠기에 현빈보다 먼저 정은을 잡아당겼다.그러나 그 순간, 도겸의 뒤통수가 독사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다.“위험해!”“조심해요!”정은과 연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정은은 이미 도겸의 품에 안겼고, 연희는 얼른 앞으로 돌진하더니 자신의 몸으로 뱀의 공격을 막았다.그래서 뱀은 연희의 종아리를 세게 깨물었다.“으악.” 연희는 아파서 천천히 쓰러졌다.도겸은 흠칫 놀라며 정은을 밀어내고 얼른 연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종아리를 살펴보았다.그의 예상대로 그것은 독사였다!“도겸 오빠...” 소녀는 눈물을 글썽였다.“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이를 악물며 연희를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는 아파서 땀을 뻘뻘 흘렸지만,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오빠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도겸은 감동을 받으며 연희의 손을 잡았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의사가 곧 올 거야. 너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연희는 이미 초점을 잃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점점 약해졌다.“알아요, 저는 줄곧 도겸 오빠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저는 무사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희는 기절했다.도겸은 자신의 품에 쓰러진 연희를 보며 당황해지더니 얼른 소리쳤다.“의사, 의사는? 빨리 구급차
‘이 순간부터 도겸은 정식으로 아웃되었군.’...연희는 체질이 나쁘지 않았고, 제때에 혈청을 주사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안전을 위해 도겸은 한 의사를 동행시켜 연희를 돌보게 했다.방 안에서 연희는 허약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고, 의사는 그녀를 위해 검사를 하고 있었다.도겸은 침대 옆에서 연희를 지키고 있었지만, 몇 번이나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연희는 입을 열며 말했다.“오빠, 너무 무서워요...”“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네?”“만약 또 독사가 저를 물면 어떡하죠? 흑흑...”연희가 스스로 다칠지언정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도겸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의사 선생님 말 잘 들어.”“네.”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검사를 마친 다음, 링거를 뽑고 몸을 돌려 떠났다.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는데, 이때 연희는 일어나고 싶었다.도겸이 그녀를 부축하자, 연희는 일부러 힘없이 남자의 가슴에 기대었다.“저 종아리가 너무 아픈데. 흉터 남는 건 아니겠죠?”“그럴 리 없어,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고.”“그런데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금방 약을 발랐으니까 좀 참아.”말하는 사이, 도겸은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대학 시절 운동회에 참가한 정은을 떠올렸다. 그녀는 스타트하자마자 발목을 삐었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달렸다.종점에 도착할 때, 정은의 복사뼈는 이미 말이 안 될 정도로 부었다.도겸은 얼른 정은을 병원에 데려다주었고, 의사는 책상을 두드리며 하마터면 뼈를 다칠 뻔했다고 그녀를 나무랐지만, 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시울만 약간 붉혔다.도겸도 정은을 바보라고 욕했다. “처음부터 멈췄어야지. 왜 굳이 달린 거야?”“그래도 이건 시합이잖아... 이를 악물고 버티면 돼! 너도 참,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계속 나한
“저는 도겸 오빠가 정은 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빠를 사랑하고 있어요. 오빠는 정은 언니 때문에 애가 타겠지만, 저도 그런 오빠 때문에 속상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방금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죠? 저는 단지 도겸 오빠의 곁에 있을 기회만 원할 뿐이에요.”소녀는 목소리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진지하면서도 또 비천했다.도겸은 자신의 마음이 은근히 흔들린 것만 같았다.“안심해, 앞으로 난 널 잘 챙겨줄 테니까. 다시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연희는 웃으며 도겸의 품에 엎드렸고,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꿀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요, 사실 저도 줄곧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도겸은 연희를 더욱 세게 안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답답해졌다.‘왜 이러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네.’...행사장에서 이렇게 큰 사고가 발생하자, 호텔 직원은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뒷수습을 했다.이 일은 손님들의 안전과 관련이 되었기에 책임자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이 와서 모든 관련자들을 찾아가 사건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물론 그들의 예상대로 아무런 수상함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경찰들도 이번 사건을 뜻밖의 사고라고 결정지을 수밖에 없었다.이곳은 열대 지역이었고, 호텔 뒤쪽에 원시림까지 있어 뱀이 나타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그런데 독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텐데요?” 수민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건...”“그리고 해변에 사람도 많았으니, 그런 곳에 나타나는 건 더 흔치 않은 일이겠죠?”경찰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호텔 책임자도 말문이 막혔다.수민은 냉소를 지었다.“이번이 두 번째예요. 제 친구는 이 섬에서 두 번이나 위험에 부딪쳤으니, 딱 기다려요. 이 일은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정은아, 가자!”말이 끝나자, 수민은 정은을 끌고 성큼성큼 떠났다.“됐어, 화 풀어. 그 사람들 때문에 화낼 필요가 없잖아.”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간 후, 정
사장님은 단번에 정은이 H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외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자, 그 태도도 무척 열정적이었다.“아가씨 안목이 좋네. 이 조각상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선물로 줘도 문제가 없다고.”정은은 웃으며 가격을 물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포장해주세요.”“오케이!” 사장님은 포장을 하면서 엽서 한 장을 안에 넣었다.“만약 하고 싶지만 하기가 쑥스러운 말이 있다면, 이 엽서에 쓰면 돼.”정은은 입술을 오므리며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막상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장님이 열정적으로 포장을 해준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호텔로 돌아온 정은은 샤워를 하러 갔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책상 위에 놓인 그 선물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가가 엽서를 꺼냈다.엽서에는 몰디브의 가장 아름다운 바다 경치가 그려져 있었다. 정은은 그것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어차피 쓸모가 없잖아.’...이튿날 아침, 심현빈은 시간이 다 됐다 싶어 레스토랑에 갔지만, 한 바퀴 돌아보아도 정은을 보지 못했고, 오직 수민 혼자만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테이블 위에는 컵 하나와 샐러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수민은 먼저 웃으며 인사를 했다.“세 바퀴나 돌면서 줄곧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아침을 먹고 싶은 거예요?”현빈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말 의자를 가져와서 수민의 맞은편에 앉았다.“좋은 아침.”“네.”현빈은 수민의 컵을 힐끗 보았다.“우유가 참 맛있어 보이네.”“이거 두유예요.”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수민은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예요?”현빈도 연기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정은 씨는? 왜 여기에 오지 않은 거지?”“무슨 일로 정은을 찾는 거죠?”“심심해서 찾으면 안 되는 거야?”수민은 어이가 없어서 되려 웃었다.“금융
현빈은 떠날 때 마침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도겸과 어깨를 스쳤다.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정은을 보지 못했다.“자기야,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예요?” 연희는 도겸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도겸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넌 다리를 다쳤으니 굳이 날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룸서비스를 부를 수는 있지만, 너무 오래 누워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 곰팡이가 낄 것 같아요...”말하면서 연희는 혀를 내밀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뭘 먹고 싶어?”“샌드위치랑 우유요. 고마워요, 도겸 오빠.”점심에 도겸은 섬에 있는 4개의 레스토랑을 두루 찾았지만 여전히 정은을 보지 못했다. 오후에 그는 또 해변가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정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밤이 되자, 도겸은 도리여 섬의 한식당에서 수민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정은이 없었다.더 이상한 것은 아침 때 현빈을 잠깐 만난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설마... 정은이 심현빈과 데이트를 하러 간 건 아니겠지?’이 생각에 도겸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희가 의자에 걸쳐둔 숄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이것은 섬에서 산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 손에 하나씩 있었다. 물론 정은도 마찬가지였다.도겸은 걸어가서 수민에게 말했다.“점심때 정은이가 날 찾아왔었는데, 이 숄을 남겨두고 갔어. 네가 대신 돌려줘.”수민은 한창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점심에요? 그럴 리가요? 정은은 이미 돌아-”‘앗!’이때 수민은 이상함을 감지했다.“강도겸,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도겸은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이 어디로 돌아갔는데? 귀국한 거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확실히 귀국했구나.”원하는 답
두 나라의 온도 차가 큰 걸 알았던 정은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미리 롱패딩을 꺼내 자신을 꽁꽁 감쌌다.하지만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며칠 전 비가 쏟아진 탓에 나무와 전봇대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비록 눈에 보이기엔 가벼워 보였지만 옷에 닿는 순간 바로 얼음으로 변해버렸다.공항은 언제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한겨울의 한밤중이라 그런지 택시 한 대 잡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차량을 확인했다. 3분 전까지만 해도 5분 내 도착 예정이던 차가 이제는 30분 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녀는 지도 어플을 확인해 보니 공항으로 오는 길이 온통 막혀 있었다. 취소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차 한 대가 천천히 정은의 곁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 짙은 회색의 터틀넥 스웨터가 목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정은의 각도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따뜻함을 더하는 듯했다.“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마침 나도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얼른 타.”차 안에서, 정은이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조재석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차 안의 서랍에 핫팩이 있는 것을 떠올리며 재석은 또 얼른 그것을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걸로 손 좀 따뜻하게 해.”정은은 자신의 손이 아이스바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핫팩과 차 안의 에어컨 덕분에 그녀는 그제야 좀 살 것 같다고 느꼈다.“고마워요. 방금 공항에서 얼어 죽을 뻔했거든요.”정은은 코를 훌쩍였다. 수민이 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수민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공항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줄이야.재석은 정은을 바라보았다.“요 며칠 우리나라에서 국제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서 그래. 최근에
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변명’했다.“에이, 지금 이 표정이 선배님과 똑 닮았는데요?”그녀가 조각상을 들고 흔들자, 재석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아, 지금은 별로 안 닮았네요.”그러나 재석은 여전히 그 선물을 받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천만에요, 아, 파란불이네요...”...집에 돌아올 때, 이미 새벽이 되었다.정은은 출발하기 전에 집을 깨끗이 청소했고, 귀국하기 전에 또 도우미를 불러 청소를 했기에, 먼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샤워를 한 다음, 부드러운 큰 침대에 누웠다. 바디워시 향기를 맡으며 정은은 흡족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역시, 어딜 가든 집이 제일 편해.’다른 한편, 재석은 아직 자지 않았다.실험이 첫 번째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기에 그는 요즘 무척 바빴고, 오늘도 억지로 시간을 비워서 공항에 간 것이었다.그래서 재석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려 했다.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정은이 준 조각상을 보았다.집에 들어선 다음, 재석은 이것을 신발장 위쪽의 책꽂이에 올려놓았는데, 단독으로 비워둔 그 한 칸 외에, 주위는 전부 책으로 가득했다.재석은 갑자기 입가를 구부리며 웃었다.‘닮긴 정말 닮았네.’...1월 중순, J시에는 천지를 뒤덮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정은은 창문을 열고, 온 세상이 새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풍경에 감탄했다.8시가 지나자, 근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래층에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고함 소리가 뒤섞여 무척이나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장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정은은 키가 제각각인 작은 눈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가지런히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그중 가장 큰 눈사람은 특히 우스꽝스러웠다. 과일 열매 두 개로 만든 눈, 머리 위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풍차가 놓여 있었는데, 언뜻 보면 마치 도라에몽을 연상케 했다. 정은은 이미 계단에 도착했지만, 잠
밤 10시, 큰 눈이 또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재석이 우산을 접자, 그 위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지며 바로 녹아 물이 되었다.실험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데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어지면서 그조차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점점 더 떠들썩해져 갔다.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재석은, 오늘 마침내 실험 데이터가 안전한 수치로 수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곧 다가올 주말을 떠올리며 모두에게 이틀간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재석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던 찰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불빛이 문틈을 뚫고 나와 바닥에 쏟아졌고, 그 빛은 재석의 몸을 감싸며 어두운 복도를 순식간에 밝게 비추었다.정은의 목소리는 이 추운 겨울을 녹여줄 한 줄기 따뜻한 햇살 같았다.“오늘 일찍 돌아왔네요. 3층에 사시는 아주머니의 며느님이 딸을 낳으셨다고 오후에 이웃에게 떡을 돌리셨어요. 선배님이 집에 없어서 아주머니는 그 떡을 나에게 맡겼는데, 잠깐 좀 기다려요. 내가 가져올게요...”재석은 일반인보다 더 예민했지만, 이때 정은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새하얘졌다. 정은은 그에게 작은 바구니를 건넸는데, 안에는 떡 그리고 그녀가 오늘 끓인 소갈비탕이 들어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재석은 정신을 차렸고,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찬바람이 복도를 뚫고 지나가자, 정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떡과 국은 내가 다 데웠으니 뜨거울 때 먹어요.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요.”“음.”빛이 꺼지자, 문도 다시 닫혔다.재석은 문을 밀고 들어갔고, 방안의 불을 켜자, 넓은 방은 오늘 유난히 쓸쓸한 것 같았다.그는 피곤하게 미간을 비비며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따끈따끈한 탕에는 파가 떠 있었는데, 무는 이미 푹 익어서 맛이 들었다. 한 입 먹어보니 간도 딱 맞았다.재석은 옆에 있는 떡을 보며 갈등을 느꼈지만, 결국 하나를 들고 소갈비탕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맛
재석은 멈칫했다.진욱은 호들갑을 떨었다.“내가 맞혔구나! 이야, 조 교수, 너한테도 이런 날이 있다니!”“정은이 때문이지?”재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쯧쯧, 나한테 거짓말 하지 마. 조 교수는 남을 속일 수 있어도, 평소 늘 함께 지낸 날 속일 수 없잖아?”“꺼져, 누가 너와 함께 지냈단 거야?”“헤헤, 넌 당연히 나와 함께 하고 싶지 않겠지, 왜냐하면 넌 정은이를 좋아하니까.”재석은 눈빛이 싸늘해졌다.“이런 농담 함부로 하지 마. 난 남자라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정은이는 달라. 여자아이는 항상 이런 일에서 더 손해를 보니까. 정은이 아직 학생이니 너 이상한 소리하고 다니지 마.”“이것 좀 봐, 지금 정은이를 이렇게 보호하고 있는데도 발뺌하고 있다니?”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안심해, 나도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 다 안다고. 내가 어떻게 정은이를 해칠 수 있겠어?”재석은 한숨을 돌렸다.“알면 됐어.”“이제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지?”“그런 거 없어.”“정은이 요즘 널 무시한 거야? 너 설마 정은이를 화나게 했니?”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오늘 아침에도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했으니, 삐진 것 같지 않았다.“그럼... 갑자기 너와 거리를 둔 거야?”“그것도 아니야...”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어.”“아! 알았다! 너랑 갈등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우울하고, 슬프고, 의심하고...”“닥쳐.”“네네!” 진욱은 손가락을 튕겼다.“바로 이 반응이야! 내가 또 알아맞혔군!”“그리고 그 사람은 분명히 남자일 거야! 심지어 모든 면이 아주 훌륭한 남자. 그래서 네가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지!”재석은 할 말을 잃었다.“조 교수.” 진욱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도 이제 정신 좀 차려. 정은이를 좋아한다면 대담하게 고백을 해
휴일이 또다시 찾아오자, 현빈은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정은을 데리러 왔다.오늘은 이원에 가는 날이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지금 정은이 쉴 때 와서 자신들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이번에는 미리 약속을 잡았기에, 일어나자마자 두 노인은 현빈에게 얼른 출발하라고 재촉했다.정은도 당연히 기뻤다. 두 노인은 친절하고 자상했으며, 그녀를 아주 다정하게 대했으니, 정은은 또 어떻게 두 사람의 호의를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알람이 울리자마자 얼른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또 설탕이 적고 먹기에 편한 간식을 만들어 두 노인에게 가져다주려 했다.8시, 현빈은 제시간에 위층으로 올라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서 슬리퍼를 갈아신은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았는데.”정은은 의혹을 느꼈다.“먹을 거 있어?”“네.”저번에는 샌드위치, 이번에는 표고버섯과 고기로 만든 만두였다.현빈이 물었다.“네가 직접 만든 거야?”“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왜요? 맛 없어요?”“아니... 너무 맛있어서.”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칭찬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나갈 때, 현빈은 자연스럽게 물건을 들어줬다.문을 연 순간, 정은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입을 열었다.“잠깐만 기다려요.”현빈은 제자리에 서서 정은이 베란다로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화분을 안으로 옮긴 뒤 또 베란다 문을 꼭 닫고 나서야 안심하고 떠났다.“자, 갑시다.”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이때, 재석이 맞은편에서 나왔는데,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했다.“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현빈은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매번 우리 두 집이 동시에 문을 여는 거죠?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우리 두 집?’재석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그는 정은의 표정을 살펴보았는데, 현빈이 아침 일찍 그녀의 집에 나타난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 같았다.‘예전에 정은이는 분명히 심현빈을
“그래요? 그런데 왜 음료수와 같은 맛이죠? 새콤달콤하고 심지어 복숭아향까지 나잖아요.” 경혜의 볼은 이미 홍조를 띠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런 게 싫어요?”도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경혜도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한 잔 더 따랐다.환경이 바뀐 데다가 또 음악이 분위기를 더해주었는지, 남자는 많이 편해졌고, 기분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그래서 경혜가 입을 열자, 도겸도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드디어 ‘모노드라마’가 아니었다.바로 이때, 떠들썩한 음악소리는 더욱 커졌고, 불빛도 현란해졌다. 댄스풀에 있던 남녀는 음악리듬에 따라 춤을 추며 마음껏 몸을 흔들었다.경혜는 눈앞이 밝아지더니 이런 분위기에 젖어 뜻밖에도 주동적으로 도겸의 손을 잡았다.“우리도 춤추러 가요. 네?!”그녀는 취한 듯 표정이 약간 망연했지만,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겸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경혜에 의해 댄스풀로 끌려갔다.경혜는 춤을 출 줄 몰라 그저 음악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서투른 춤사위에 도겸은 좀 우습다고 느꼈다.“왜 웃어요?” 경혜는 우울해졌다.남자의 웃음은 더욱 환해졌다.그녀는 화가 났다.“안 되겠어요, 나 혼자 이렇게 웃길 순 없으니까 도겸 씨도 같이 춰요!”알코올의 자극을 받은 경혜는 대담하게 도겸의 손을 잡고 마음대로 흔들었다.남자가 반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경계는 점차 대담하게 도겸의 손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도겸은 비록 나른해서 흥이 나지 않았지만, 경혜를 막지 않았다.경혜는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만, 나중에는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칠 때까지 음악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다.불빛이 희미하며 음악이 떠들썩했다.어느새 경혜와 도겸의 몸이 맞닿았고,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술 향기가 전해왔다. 그 사이, 경혜는 더 취한 것 같았다.고개를 들자 경혜의 심장은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겸의 눈
“그럼 마음대로 시킬게요!”“음.”“사장님, 이거랑 이거...”경혜는 많은 음식을 주문했는데, 딱 봐도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나만 믿어요, 여긴 정말 맛있으니까요. 고급 레스토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여자는 극구 추천을 하면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도겸은 가끔 응답했지만, 태도가 미적지근했다.그을리고 타는 바비큐 냄새에 목이 간지러웠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그를 불편하게 했다. 올라온 바비큐는 한 번만 봐도 입맛을 전부 잃을 정도였다.‘전에 정은이랑 처음 연애할 때도 포장마차에 와서 자주 먹었는데... 사람이 틀리니 입맛도 없는 것 같아.’경혜는 고기 하나 들고 웃으며 도겸에게 건네주었다.“이것 좀 먹어봐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도겸은 받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이런 거 못 먹는 거예요?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경혜는 얼른 꼬치구이를 내려놓더니 다급하고 궁색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장소를 바꿀까요? 도겸 씨가 정해요.”“아니야, 나 요즘 위장병이 도져서 입맛이 없어, 너 먹어.”“그렇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많이 시켰다니...”도겸은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남은 건 그냥 버려.”결국 경혜는 몇 개밖에 먹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계산을 마친 뒤, 사장이 와서 테이블을 치웠는데, 이 상황을 보고 혀를 찼다.“요즘 젊은이들도 참, 먹을 수 없으면 이렇게 많이 주문하지 말든가. 돈이 있다고 음식을 함부로 낭비하다니... 쯧쯧...”도겸은 차로 경혜를 학교로 데려다 주었는데, 도중에 표정이 담담하고 말도 많지 않았다.가끔 경혜가 무엇을 물었을 때만 겨우 대답을 했다.후에 경혜 자신도 침묵했다.주동적으로 화제를 이끄는 사람이 없자, 차 안의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다.도겸은 앞을 바라보며 전혀 아무렇지 않는 것 같았다.경혜는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바깥의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멍을 때렸다.한 술집을 지나자, 경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시
“도겸 씨, 왜 그래요?” 경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질문과 답답함을 억눌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동안 연기를 해왔으니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면, 정은은 또 도겸을 피할 것이고, 이렇게 가끔 만나서 인사를 건네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경혜는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정은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남자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는 것을.정은은 고개를 돌려 민지와 서준을 보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우리 이제 돌아갈까?”“네!” 민지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곧 9시가 다 되어 가네요. 빨리 가요. 너무 추워요...”말하면서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그녀는 사실 도겸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겨울, 영하의 온도에 스포츠카를 운전하며 멋을 부릴 수 있다니.‘사람을 기다린다고 해도 그냥 차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잖아? 굳이 차에 기대서 멋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안 추워? 쯧쯧... 이런 재벌 집 도련님들은 도대체 매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우리 먼저 갈게. 넌 네 남자친구와 천천히 데이트해. 안녕.”민지는 도겸의 정곡을 쿡쿡 찔렀다.정은이 택시에 탄 것을 지켜보다가 차가 사라질 때에야 도겸은 시선을 거두었고, 동시에 경혜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도 거두었다.경혜는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비록 마음속은 이미 씁쓸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여전히 웃음을 유지했다.아파도 웃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경혜가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처음에 두 사람의 거래가 바로 도겸이 돈을 내고 경혜가 여자친구인 척 연기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그녀는 도겸 앞에서 질투하는 감정을 조금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경혜는 도겸이 정은을 속인 것처럼 도겸을 속여야 했다.정말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었다.정은이 떠나자, 도겸도 계속 여기에 남을 필요가 없었다.그는 차를 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특별히 화
민지가 대답했다.“잘 아는 편도 아니야. 하지만 재운이는 사람이 꽤 착하잖아. 지난번에 식물 기지에서도 남들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서 우릴 도와주었고. 난 다 기억하고 있다고!”“기억력이 좋아서 좋겠다.”“뭐?”“넌 남을 칭찬할 때, 항상 ‘좋은 사람’이란 말을 쓰더라? 그게 무슨 칭찬이지?”“아니... 너 뭐 잘못 먹었어?”맞은편의 도겸은 차 옆에 기대어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마치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경혜도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 나왔다.종종걸음으로 달려왔기에, 경혜의 볼이 빨갰고 숨이 가빴다.도겸을 만나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통통해 보이는 패딩을 입지 않고, 몸매가 돋보이는 코트로 갈아입었다.뿐만 아니라, 경혜는 평소에 머리를 묶지 않았는데, 오늘은 머리를 걷어 올려 똥머리로 묶은 뒤, 진주 머리핀을 장식했다. 시원시원하고 대범해 보이며, 귀엽고 깜찍했다.“오래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나올 때 스카프를 잊어버려서 다시 기숙사에 돌아갔거든요.”도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 아무런 정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 같았다.눈길도 자꾸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경혜는 주위를 힐끗 훑어보더니, 정은을 본 순간에야 깨달았다.그렇지 않으면 도겸은 늦은 밤에 그녀에게 전화를 할 리가 없었다.‘그곳도 학교 앞에서 만나자니?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올 리가. 허... 지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먼저 시작하지.’경혜는 주먹을 꽉 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곧 다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은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공교롭게 여기서 만나네, 정은아.”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경혜는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서준과 민지를 본 것 같았다.“너희들도 있었구나, 정말 반가워.”민지가 말했다.“이렇게 말하니 마치 우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잖아? 나와 서준이는 바로 정은 언니 옆에 서 있는데, 그런데도 보이지 않은 거야?”“미안해, 정말,
민지는 세입자들에게서 인간성을 엿볼 수 있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과 갈등에도 익숙해졌다.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서준이 말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절대적으로 심플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또 다른 요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처럼, 세계는 전체이고, 개체 간에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거지...”민지는 머리가 아팠다.“넌 생물 대신 철학을 연구해야 했어.”“네 닭다리나 먹어!”“흥, 원래 먹으려 했어! 그리고, 이건 네가 허락한 거야!”‘아싸, 이제 실컷 먹을 수 있겠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다 먹고 정은은 계산을 했다.세 사람은 직접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책을 하며 소화했다.“우리 같은 방향에 살아서 다행이야. 그리 멀지도 않고. 조금 있다가 학교 앞에서 택시 잡고 돌아갈까? 어차피 너도 가는 길이니 우릴 태워다 줄 수 있잖아! 헤헤!”“너 돈 많잖아? 왜 택시비가 아까운 거야?”전에 수억 원짜리 차를 선물로 준다고 한 사람이, 지금은 몇 천원 안 되는 택시비를 절약하려 했다.“돈 많으면 왜? 내 돈도 다 돈이야! 우리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돈을 벌 줄 알고 돈을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어. 절약할 수 있으면 절약하고, 쓸 수 있지만 낭비해서는 안 돼!”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거봐, 정은 언니도 실험실을 짓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썼지만, 혼자 아파트에서 살고 있잖아. 이게 뭔 줄 알아?”정은과 서준은 동시에 민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돈을 알뜰히 쓰는 거야. 전부 써야 할 곳에 썼으니까!”“그래, 내가 잘못했어. 오늘 정말 좋은 가르침을 받았네.”“흥! 쮼, 넌 아직 너무 어려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내가 어리다고?”이때 서준은 갑자기 멈추었다.민지도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래?” 정은은 두 사람이 주시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참지 못
그 닭다리를 다 먹은 뒤, 민지는 만족스럽게 트림을 했다.“아! 너무 행복해! 흑흑... 난 소원이 이것밖에 없어. 맛있는 것만 먹을 수 있으면 되니까. 물론 미식가로 되면 더 좋고.”민지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학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미식도 좋아했다. 이 두 사물을 결합하면 바로 민지가 가장하고 싶은 일이었다.“정은 언니는요?” 민지는 갑자기 정은을 쳐다보았다.“언니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갑자기 이상과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멍해졌다.생각하다 천천히 대답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내 꿈이야.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면...'정은은 잠시 멈추었다.“오 교수님과 같은 연구학자.”“그런데...”민지는 갈등을 드러냈다.“교수님은 확실히 위대하시지만 때로는 난 교수님이 너무 외롭다고 생각해요.”오미선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과학 연구에 바쳤다.이런 추구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혼자 병원에 외롭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민지는 가슴이 아팠다.“예전에 난 교수님께 물어본 적이 있어. 이 선택을 후회하시냐고. 교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아니?”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얼른 말해요, 언니!”서준도 정색을 했다.“사람의 일생은 원만하기 어려우며, 항상 우왕좌왕한다고 말씀하셨어. 그것은 우리의 정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만약 제한된 정력을 끝없는 과학 연구에 투입할 수 있다면, 교수님에게 있어서 이건 또 다른 의미의 행복이기도 하지.”비록 개인의 행복을 잃었지만, 오미선은 전심전력으로 연구에 몰두했다.“그런데... 이건 너무 극단적인 선택 아닌가요?” 민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정은은 감탄했다.“아마도. 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한 선택도 다르잖아. 자신의 생각을 따라 확고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어.”“그럼 정은 언니는 결혼할 거예요?”정은은 민지가
민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일 2킬로미터 더 달려야 한다는 말을 뒤로 했다.그리고 정은을 안고 애완동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사랑해요, 정은 언니, 내가 그 가게의 닭볶음탕을 먹고 싶어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어요?”정은은 민지가 자신을 안도록 내버려두더니 웃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한 번 말했잖아, 그래도 기억해뒀지. 그리고 나도 그 닭볶음탕이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네.”“날 믿어요, 절대로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 가게는 맛이 아주 좋아요!”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먹방들의 타고난 능력일 것이다. 민지가 추천한 것이라면, 대부분 엄청 맛있는 음식이었다.이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아주 정통적인 닭볶음탕을 만들었다.또 J시 사람의 입맛을 결합하여 간단하게 개량했기에 엄청 고소하고 맛있었다.닭고기가 부드러우며 매콤한 향기까지 곁들이니, 생각만 해도 민지는 이미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요 며칠, 조깅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준은 민지의 식단을 엄격히 통제했다. 매일 그 싱겁고 무미건조한 음식들만 먹으니 민지는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비록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몰래 간식을 훔쳐 먹었지만, 간식이 어떻게 맛있는 요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정은 언니, 완전 사랑해요.”마침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민지는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다.“야, 내가 언제 널 학대했어?”“그럼 조깅 취소해.”“그래, 그럼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내년 건강검진 보고서에 ‘지방간’이라는 결과가 또 나올 테니까.”‘됐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을 말자. 난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서준은 민지의 다이어트를 돕기 위해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렀다.사실 민지는 가끔 서준의 얼어붙은 볼과 코를 보고, 또 아직 이불 속에 틀어박혀 쿨쿨 자는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건 죽을 죄야! 한겨울에 누가 더 자고 싶지 않겠어?’‘우리 아빠도 서준처럼 매일 일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