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은 떠날 때 마침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도겸과 어깨를 스쳤다.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정은을 보지 못했다.“자기야,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예요?” 연희는 도겸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보고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도겸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넌 다리를 다쳤으니 굳이 날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룸서비스를 부를 수는 있지만, 너무 오래 누워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온몸에 곰팡이가 낄 것 같아요...”말하면서 연희는 혀를 내밀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했다.“뭘 먹고 싶어?”“샌드위치랑 우유요. 고마워요, 도겸 오빠.”점심에 도겸은 섬에 있는 4개의 레스토랑을 두루 찾았지만 여전히 정은을 보지 못했다. 오후에 그는 또 해변가를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정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밤이 되자, 도겸은 도리여 섬의 한식당에서 수민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정은이 없었다.더 이상한 것은 아침 때 현빈을 잠깐 만난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설마... 정은이 심현빈과 데이트를 하러 간 건 아니겠지?’이 생각에 도겸은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연희가 의자에 걸쳐둔 숄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이것은 섬에서 산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 손에 하나씩 있었다. 물론 정은도 마찬가지였다.도겸은 걸어가서 수민에게 말했다.“점심때 정은이가 날 찾아왔었는데, 이 숄을 남겨두고 갔어. 네가 대신 돌려줘.”수민은 한창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점심에요? 그럴 리가요? 정은은 이미 돌아-”‘앗!’이때 수민은 이상함을 감지했다.“강도겸,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도겸은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정은이 어디로 돌아갔는데? 귀국한 거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확실히 귀국했구나.”원하는 답
두 나라의 온도 차가 큰 걸 알았던 정은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미리 롱패딩을 꺼내 자신을 꽁꽁 감쌌다.하지만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며칠 전 비가 쏟아진 탓에 나무와 전봇대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고, 비록 눈에 보이기엔 가벼워 보였지만 옷에 닿는 순간 바로 얼음으로 변해버렸다.공항은 언제나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지만, 지금은 한겨울의 한밤중이라 그런지 택시 한 대 잡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예약한 차량을 확인했다. 3분 전까지만 해도 5분 내 도착 예정이던 차가 이제는 30분 후에나 도착할 수 있다는 알림이 떴다.그녀는 지도 어플을 확인해 보니 공항으로 오는 길이 온통 막혀 있었다. 취소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차 한 대가 천천히 정은의 곁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 짙은 회색의 터틀넥 스웨터가 목을 반쯤 감싸고 있었다. 정은의 각도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따뜻함을 더하는 듯했다.“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것 같은데. 마침 나도 집으로 가는 길이니까 얼른 타.”차 안에서, 정은이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조재석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차 안의 서랍에 핫팩이 있는 것을 떠올리며 재석은 또 얼른 그것을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걸로 손 좀 따뜻하게 해.”정은은 자신의 손이 아이스바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핫팩과 차 안의 에어컨 덕분에 그녀는 그제야 좀 살 것 같다고 느꼈다.“고마워요. 방금 공항에서 얼어 죽을 뻔했거든요.”정은은 코를 훌쩍였다. 수민이 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수민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바로 거절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공항에서 택시를 잡지 못할 줄이야.재석은 정은을 바라보았다.“요 며칠 우리나라에서 국제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서 그래. 최근에
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변명’했다.“에이, 지금 이 표정이 선배님과 똑 닮았는데요?”그녀가 조각상을 들고 흔들자, 재석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아, 지금은 별로 안 닮았네요.”그러나 재석은 여전히 그 선물을 받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천만에요, 아, 파란불이네요...”...집에 돌아올 때, 이미 새벽이 되었다.정은은 출발하기 전에 집을 깨끗이 청소했고, 귀국하기 전에 또 도우미를 불러 청소를 했기에, 먼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는 샤워를 한 다음, 부드러운 큰 침대에 누웠다. 바디워시 향기를 맡으며 정은은 흡족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역시, 어딜 가든 집이 제일 편해.’다른 한편, 재석은 아직 자지 않았다.실험이 첫 번째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기에 그는 요즘 무척 바빴고, 오늘도 억지로 시간을 비워서 공항에 간 것이었다.그래서 재석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려 했다.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정은이 준 조각상을 보았다.집에 들어선 다음, 재석은 이것을 신발장 위쪽의 책꽂이에 올려놓았는데, 단독으로 비워둔 그 한 칸 외에, 주위는 전부 책으로 가득했다.재석은 갑자기 입가를 구부리며 웃었다.‘닮긴 정말 닮았네.’...1월 중순, J시에는 천지를 뒤덮을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정은은 창문을 열고, 온 세상이 새하얀 새 옷으로 갈아입은 듯한 풍경에 감탄했다.8시가 지나자, 근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래층에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와 상인들의 고함 소리가 뒤섞여 무척이나 떠들썩한 분위기였다.장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정은은 키가 제각각인 작은 눈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가지런히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그중 가장 큰 눈사람은 특히 우스꽝스러웠다. 과일 열매 두 개로 만든 눈, 머리 위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풍차가 놓여 있었는데, 언뜻 보면 마치 도라에몽을 연상케 했다. 정은은 이미 계단에 도착했지만, 잠
밤 10시, 큰 눈이 또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재석이 우산을 접자, 그 위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지며 바로 녹아 물이 되었다.실험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데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어지면서 그조차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점점 더 떠들썩해져 갔다.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재석은, 오늘 마침내 실험 데이터가 안전한 수치로 수정된 것을 확인하고는 곧 다가올 주말을 떠올리며 모두에게 이틀간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재석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려던 찰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불빛이 문틈을 뚫고 나와 바닥에 쏟아졌고, 그 빛은 재석의 몸을 감싸며 어두운 복도를 순식간에 밝게 비추었다.정은의 목소리는 이 추운 겨울을 녹여줄 한 줄기 따뜻한 햇살 같았다.“오늘 일찍 돌아왔네요. 3층에 사시는 아주머니의 며느님이 딸을 낳으셨다고 오후에 이웃에게 떡을 돌리셨어요. 선배님이 집에 없어서 아주머니는 그 떡을 나에게 맡겼는데, 잠깐 좀 기다려요. 내가 가져올게요...”재석은 일반인보다 더 예민했지만, 이때 정은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새하얘졌다. 정은은 그에게 작은 바구니를 건넸는데, 안에는 떡 그리고 그녀가 오늘 끓인 소갈비탕이 들어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재석은 정신을 차렸고,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찬바람이 복도를 뚫고 지나가자, 정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떡과 국은 내가 다 데웠으니 뜨거울 때 먹어요.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요.”“음.”빛이 꺼지자, 문도 다시 닫혔다.재석은 문을 밀고 들어갔고, 방안의 불을 켜자, 넓은 방은 오늘 유난히 쓸쓸한 것 같았다.그는 피곤하게 미간을 비비며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따끈따끈한 탕에는 파가 떠 있었는데, 무는 이미 푹 익어서 맛이 들었다. 한 입 먹어보니 간도 딱 맞았다.재석은 옆에 있는 떡을 보며 갈등을 느꼈지만, 결국 하나를 들고 소갈비탕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맛
새벽 8시, L시에서 가장 큰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떠들썩했다.“소 선생님, 또 생선 사러 오셨어요?”“맞아요. 오늘은 농어 있어요?”“그럼요, 있죠! 자, 특별히 선생님을 위해 남긴 거예요...”중년 여자는 말하면서 잽싸게 저울로 무게를 잰 다음, 물고기를 손질해 부었다.“자요.”소진헌은 핸드폰을 꺼냈다.“얼마예요?”“에이, 돈은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져가서 드세요! 우리 성민이 때문에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그건 안 돼요. 장사를 하는 분이 어떻게 돈을 받지 않을 수가 있어요?” 소진헌은 바로 6천 원을 주었다. 심지어 많기만 할 뿐, 적게 주지 않았다.여자는 돈을 받으면서 계속 말했다.“이걸 어떻게 받아요...”“돈을 받지 않으면 내가 더 미안하죠. 그럼 먼저 일보세요, 난 파 좀 사러 갈게요.”“아, 소 선생님 잠깐만요...”“무슨 일 있어요?”“그게 말이에요.”여자는 긴장해서 몸에 입은 가죽 앞치마를 꽉 쥐었다.“우리 학교에서 매년 물리 경기 추천 정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국제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서비대학교, 연성대학교 같은 명문 학교로 갈 수 있다면서요!”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였다.“추천 정원이 있긴 하죠.”“그럼 우리 성민이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소진헌은 잠시 침묵했다.“성민 어머니, 우선 경기가 무엇인지부터 잘 파악하셔야 해요. 학생들이 지금 단계를 초월하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운용하여 학과의 경기 대결을 완성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시험 문제는 평소보다 훨씬 거 어려울 거예요. 물론 학교에는 확실히 각 학과마다 모두 추천 정원이 있지만, 보통 단일 학과 성적이 특별히 뛰어나고, 학습 능력과 사고력이 강한 학생을 선발하여 참가시킬 거예요.”여자는 조급해했다.“우리 성민이도 성적이 아주 좋은데요! 학년에서 순위가 20등 밖으로 떨어진 적이 없잖아요, 이게 유난히 뛰어나고 능력이 강한 편이 아니라고요?”“성민 어머니, 일단 설명 좀 들어보세요.”
“에이? 설마?! 공부도 안 하고, 일도 안 하면 뭘로 먹고 살려고?”“돈 많은 남자 꼬시는 거지! 누워서 다리만 벌리면 돈이 오는 게 아니겠어? 이게 얼마나 쉬워? 그러니 무슨 일자리를 찾겠어?”“쉿! 왕 씨, 이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 그 아가씨의 명성이 더러워지잖아!”“흥, 소 선생의 딸이 만약 정당한 일자리를 찾았다면 왜 몇 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겠어? 창피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거지. 이 작은 곳에서 무슨 소문이 생기면 바로 쫙 퍼지니까, 소 선생도 막고 싶어서 그런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남의 자식들을 가르칠 수 있겠어?”“세상에...”소진헌은 그런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마 듣더라도 그는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왜냐하면 소진헌에게 있어, 딸이 한 그런 일들은 재벌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정은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패딩을 꽁꽁 여몄다. L시는 J시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지만, 겨울의 추위는 여전했다.택시에 앉아 창밖으로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니, 기억 속의 고향이 서서히 떠올랐다. L시는 인구가 많지 않았고, 중공업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되면서 최근 몇 년간 정부는 관광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도로 양쪽에는 많은 나무와 풀을 심어 도시의 모습을 바꾸었다.작고 낡은 건물들은 새롭게 개축되었고, 공원도 새로 조성되었다. 구시가지만이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대략적으로 신구 두 구역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여름에는 사람들이 강에서 배를 띄웠고, 겨울이 되면 흐르는 물 위로 살얼음이 살짝 얹혀져, 가볍게 만지기만 해도 바로 흩어져 물결 위에서 출렁였다. 그 모습은 마치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밝은 빛을 발하는 듯했다.강 위에는 오래된 아치형 다리가 하나 있었고, 정은의 집은 바로 그 다리의 한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골목을 지나면 멀리서 ‘인성 고등학교 교직원 공동주택'이라는 몇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소진헌은 그 시절 연성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인재로, 특별히
“누구세요?”소진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즉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리고 방금 만든 농어찜을 보더니, 그것을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그제야 문을 열었다.방 안에서 꽃에게 물을 주고 있던 이미숙도 이를 듣고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지? 건우 아니야?”“건우는 오늘 아침에 문자를 보냈는데,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이 시간이면 아마도 옆집 양 씨 아주머니일 거야. 당신 요 며칠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아주머니에게 토종닭을 좀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거든.”문 앞에서, 정은은 문을 열어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6년 동안 보지 못한 소진헌은 귀밑에 백발이 좀 더 많아진 것 같았고, 네모난 얼굴에도 주름이 더 많아졌다.어렸을 때, 정은은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늙은 데다가 등도 약간 구부러졌다. 그러나 그 두 눈만이 여전히 6년 전처럼 맑고 예리했다.“아빠...”정은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소진헌은 처음에 멈칫하더니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네가 왜 돌아온 거야?”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이미숙은 잠시 기다렸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정원으로 걸어갔다. “여보,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예요? 누군데 그래요?”그러나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이미숙은 손에 힘이 풀리더니 주전자가 탁 하고 땅에 떨어졌다.정은은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로 예쁘고 우아했다. 세월은 그녀의 몸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시선이 마주치자, 정은은 참지 못하고 불렀다.“엄마...”딸의 목소리에 이미숙은 손이 살짝 떨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벌렸지만,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일단 들어와서 얘기해요.”거실에서, 방안의 분위기는 마치 비 오는 날처럼 답답하고 무거웠다.소진헌은 소파에 앉아 무표정하게 말했다.“돌아와서 뭘 하려는 거야? 애초에 했던 말을 다 잊은 건가?”6
“이번에 돌아온 것도 엄마와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두 분께서 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며, 제가 예전의 잘못을 메울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요.”그동안 정은은 부모님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볼까 봐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꾹 참았던 것이다.그러나 현실은 그녀를 제대로 실망시켰다. 정은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소진헌은 놀라서 입술이 떨렸다.‘내가 방금 무엇을 들었지? 정은이 마침내 잘못을 인정했다니?’이미숙은 오히려 가슴이 찡했다. 만약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고집이 센 딸이 어떻게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너, 정말 똑똑히 생각한 거야?” 소진헌은 말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정은은 입술을 오므렸다.“네, 이미 똑똑히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분께서 화를 내실까 봐 줄곧 돌아올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집에 돌아가기 전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엄마 아빠, 저 여기에 남을 수 있을까요? 저도 두 분과 함께 설을 쇠고 싶거든요.”소진헌은 얼굴을 돌리며 아내와 딸이 자신의 눈물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돌아온 이상, 며칠 있다가 다시 돌아가.”이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야? 빨리 트렁크를 방에 안 갖다 놔? 음식 다 식었겠다...”정은은 꾹 참았지만, 이 말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우는 동시에 또 웃었다.“엄마 아빠,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마침내 집에 돌아오는 길을 찾았어요.”이미숙은 눈시울을 붉히며, ‘잃어버렸던’ 딸을 다시 품에 안았다.6년 만에 그들 일가족은 마침내 단란하게 모일 수 있었다....6년의 시간을 거쳐 오늘 가까스로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울다가 이제 겨우 회복되었다.소진헌은 자신이 울었다는 것을
정은은 벌떡 일어나 재석에게 달려갔다.남자의 눈은 꼭 감긴 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선배님?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재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좀처럼 뜨이지 않았다.“선배님! 제발 깨어나세요!”간절한 외침 끝에, 재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정은아?”“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정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재석의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센 힘으로 당기더니 그녀는 고스란히 재석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다.“꺅...!”‘지금... 뭐야 이게?!’“정은아...”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칠게 들려왔다.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둘이 몸이 너무 가까워서,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로를 녹일 것만 같았다. “읏...”재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뱉었다.정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신이 흐려진 듯한 재석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설마, 약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거야?’정신을 다잡은 정은은 바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재석을 밀어 침대 쪽으로 눕힌 후,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앗!!!”뜨거운 열기에 놀란 정은이 입을 틀어막았다.‘이건... 단순한 열이 아니야. 열기가 심하게 오르고 있어...’“선배님! 제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님!”하지만 재석은 계속해서 중얼댔다.“정은아... 정은...”단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묘하게 끈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그 숨소리와 어우러지니,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하... 미치겠네. 이 분위기 뭐야...’정은은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드러난 재석의 단단한 상체.잘 정리된 근육, 그리고 땀으로 촉촉이 젖은 피부.‘어?!’‘눈을 어디에
수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해졌다. 그녀는 마치 정신 잃은 파리처럼 방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의심하면 어때? 네가 입 다물고 있으면, 증거는 없어. 결국엔 풀어줄 수밖에 없어.]그 말을 듣자, 수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기 시작했다.“그 약... 도대체 뭐야? 순도가 높고 효과도 강하다고 했잖아. 근데 조재석은 멀쩡해 보이던데?”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쪽이 대답했다.[질문이 너무 많네.]수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자. 우린 협력 관계야. 말투 좀 조심하지 그래?”[하... 말투? 협력 관계라 했지? 좋아, 그럼 하나 묻자. 넌 뭘 했는데? 약은 내 거고, 약을 넣은 것도 내가 보낸 사람이야.][넌? 목욕하고, 옷 벗고 조재석이랑 자는 게 다였지? 웃기지 마. 날로 먹으려다 다 망쳐놓고, 지금 나한테 협력을 운운해? 네가 감히?]그 모욕적인 말에 수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분노했다.“너... 대체 누구야? 뭘 원하는 건데? 피해자인 척하지 마. 너도 결국 나를 이용해서 조재석을 치려고 한 거잖아! 우리 둘 다 깨끗한 거 없어!”[쳇, 멍청한 것.]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수아는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야! 뭐?! 누가 멍청하다는 거야?! 말해봐! 여보세요?!”[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를 바랍니다.]‘없는 번호?’수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췄다. ‘그 사람이 전화를 끊고 내가 다시 걸기까지는 고작 몇십 초...’ ‘그 사이에 유심을 빼고 번호를 없애버린 건가?’‘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그리고... 그 약은...?’...한편, 재석은 2층 방으로 가지 않고, 아직도 정은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그래도 내가 2층에 가는 게 낫겠지?”정은은 체온계를 내려놓고 말했다.“지금 선배님의 체온 몇 도인지
경찰 쪽의 출동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호텔 측도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직원을 보내 협조에 나섰다. 양쪽이 제일 먼저 한 건 재석이 머물던 객실을 출입 통제하고, 실내 공기 샘플을 채취하는 일이었다.이후 호텔 총지배인과 함께 보안실로 이동해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이런 소란이 벌어졌으니, 구경하러 몰려드는 투숙객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호텔 직원들의 빠르고 능숙한 대응 덕에 곧 정리되었다....그 와중에 재석 옆방, 수아의 방은 단 한 번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궁금해서라도 문 열고 한 번쯤 내다보지 않겠는가? 하물며 ‘잘 아는 조 교수’가 쓰러졌다면 더더욱.피하려는 티가 너무 나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그런 태도는 더 수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아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챌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방 안을 종횡무진 오가며, 말 그대로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진 개미처럼 불안과 초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등줄기는 땀으로 흥건했고, 입가는 경련이 난 듯 떨렸으며, 손의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정은과 얘기하고 나서 돌아온 뒤부터 수아의 가슴은 한시도 가라앉지 않았다.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옆방은 너무 조용했고, 마치 재석이 그 방 안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 같았다.그리고 경찰이 도착했다.도어 스코프로 제복을 본 순간, 수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경, 경찰? 누가, 누가 신고를? 설마...’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정은은 방에서 나온 재석이 경찰과 정식으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을 본 순간,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진짜 신고했어... 조 교수가... 직접...’‘어떡해... 이러다 경찰이 나까지...’절망감에 휩싸인 수아는, 침대 위에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전화해야 해. 지금 이대로면 안 돼.
“왜... 그러세요?” 정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의 손바닥은 너무 뜨거웠다. 마치 불에 달군 듯한 쇠가 손목을 감싸는 순간, 그 열기가 피부를 타고 전해져왔다. ‘이건... 단순한 열 아니야.’ “정은아, 너...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재석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묘하게 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은은 한 손에 든 해열 패치를 흔들며 말했다. “선배님의 이마에 해열패치를 붙이려고요. 이게 문제라도 되나요?”재석의 시선이 깊어졌다. “지금 넌, 약 먹은 남자를 곁에 두고 있는 거야.”“그래서요...?” 정은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위험할 수 있어.”“선배님, 날 위험하게 만들 거예요?” 정은의 반문에, 재석은 씁쓸하게 웃었다.“나...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야. 이런 상태에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가 정은의 손목을 붙잡은 순간, 말랑하고 차분한 감촉이 손끝에 번졌다. 마치 고운 비단처럼 스치는 그 감촉은 도리어 더욱 강한 갈증을 불러왔다. ‘더... 갖고 싶어졌어. 손목만으로는 부족해. 그 이상을 원해.’하지만, 정은이 나직이 말했다. “아니에요.” 재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뭐?” “선배님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에요. 정말로 선을 넘었을 거였다면, 아까 욕실에서 이미... 그렇게 됐겠죠.”재석은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정은은 아무 말 없이 해열 패치를 꺼내 남자의 이마에 붙였다.“좀 괜찮아졌어요?” “응, 약 먹었으니까 곧 나아질 거야.”“그, 그거 말고요.” 정은은 살짝 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열 말고... 그쪽 말이에요. 몸 상태는... 좀 가라앉았어요?”재석의 얼굴은 이미 붉었지만, 그 순간엔 귀까지 활활 타올랐다. “너... 그거, 들었어?” ‘설마... 그 소릴 들었단 말이야?’‘얼마나 들은 거지?’ ‘혹시 나를... 더럽다고 생각했다면...’재석의 입술이 움찔거
정은은 남자의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 재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가...그게 어떤 감정의 결과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설마...’“그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었어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는 재석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들려온 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응...” “그럼, 선배님... 난...” 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쩐지 숨이 막히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정은아... 나가줄래?” 재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이런... 비참한 모습, 너한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부탁이야...”그 말에 정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알겠어요.”조용히 욕실을 나서며,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그 순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참자, 참아야 돼...’정은은 견딜 수 없었다. ‘저 남자... 지금 나한테 애원하고 있잖아.’ ‘자존심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나한테 부탁하고 있잖아.’ 그래서, 정은은 뒤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욕실 안, 문이 닫히자마자 재석의 굳어 있던 등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그대로 물 속으로 몸을 맡기며, 다시 깊숙이 침잠해 버렸다. 차가운 물이 사지를 감쌌지만, 몸 안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아니야... 아까, 잠깐이었어. 정은이가 손을 댔을 때... 그때는 분명...’정은의 그 손길에서 전해졌던 미묘한 시원함, 재석은 그 순간만큼은 분명 조금 나아졌었다. 그걸 느꼈기에, 그는 오히려 더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게 얼마나 달콤했는지 알기에, 지금 이 고통은 배가 됐다. ‘이 상태로 정은이를 곁에 두면... 분명 난, 감당 못 할 거야.’ 재석은 다시 머리까지 물에 담갔다. 시야는 가려지고, 숨결은 끊겼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정은
정은은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수아는 참다못해 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조 교수님 뵌 적 있어?” “네, 만찬 자리에서요... 같이 돌아왔죠.”“그, 그다음엔...?”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물었다.“그다음이요?” 정은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돌아온 이후에, 조 교수님이 너한테 다시 안 오셨어?” 정은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수아를 몇 번 훑어보았다. “이 시간에, 조 교수님이 저를 찾아올 이유라도 있나요?”“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수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하지만 정은은 수아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다가,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선배님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설마... 조 교수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그 말과 동시에 정은은 재석이 있는 맞은편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수아는 재빨리 정은을 붙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조 교수님은 분명히 쉬고 계실 텐데, 괜히 방해해서 뭐 하려고?” “그럼 방금 말한 건... 도대체 뭐예요?” 정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그, 그냥 물어본 거야. 조 교수님이 혹시 너한테 들렀나 해서. 왜, 안 돼?” 수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 자기 방으로 걸어가 버렸다.걸으면서도 투덜거렸다. “진짜 피곤하게 굴어. 피해망상 있는 거 아냐...?”‘더 말하다간 내 표정에서 다 티 날지도 몰라... 소정은, 눈치는 또 왜 이렇게 빠른 거야.’수아는 차마 더 머물 수도, 더 물을 수도 없었다. 정은의 방에 들어갈 기회를 찾기는커녕, 지금은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은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욕실로 향했다.욕실 안, 커다란 욕조는 이미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수도꼭지는 아직도 틀어져 있었고, 넘친 물은 욕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상태였다.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정은은 물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아는 초조하게 방안에서 왔다갔다했다.1분 안에 시계를 수십 번도 더 본 것 같았다.수아는 입술을 깨물었고, 조용한 환경은 그녀의 마음속의 불안함을 확대시켰다.수아는 몇 차례 핸드폰을 들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마침내 그 시간이 되자, 수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재빨리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왔다.이어 표정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린 뒤, 평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교수님, 계세요? 제가 방금 실험보고서를 정리할 때 A, 아니다, 3조의 데이터에 문제가 좀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교수님 찾아 토론하고 싶은데, 지금 괜찮으세요?”안에는 응답이 없었다.“교수님? 저 수아예요.”안은 여전히 인기척이 없었다.‘발작하기 시작했나 봐. 아마 지금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을 거야.’“교수님?! 괜찮으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일단 문부터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너무 걱정된단 말이에요...”문을 족히 2분이나 두드린 수아는 손까지 부었지만, 안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수아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설마,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아니야, 난 분명히 옆방에서 문 여는 소리를 들었고, 특별히 문구멍으로 확인했어. 교수님은 40분 전에 확실히 방으로 돌아갔다고,’‘설마... 돌아온 후에 또 나간 거야?’‘그런데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그러나 안에 만약 정말 사람이 있다면, 재석은 문을 열지 않더라도 대답을 했을 것이다. 절대로 지금처럼 귀머거리인 척할 리가 없었다.수아는 참지 못하고 문구멍으로 다가가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러나 안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수아는 또 문에 엎드려 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계속 두드리며 떠볼 수밖에 없었다.“교수님, 안에 계신 거 알아요. 저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 있으니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그러나 적막이 흐를 뿐이었다.여자의 안색은 점
정은은 차갑게 웃었다.“송 교수님에게 있어, 약간의 성과를 거둔 여성은 모두 남자에 의지했단 건가요?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네스과학기술대학교 백지예 교수님은요?”“국내에서 손꼽히는 천문 물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 우주선 발사기지의 교수이기도 하잖아요.”“백 교수님은 누구를 의지하셨나요? 이 분야에서 누가 백 교수님보다 더 대단한 거죠? 송 교수는 어떻게 한 마디로 우수한 여성의 노력과 성과를 부정할 수가 있죠?”“그 더러운 생각 때문에? 그래서 누구를 봐도 다 부당한 수단으로 올라온 것 같은 거예요?”“아니면, 송 교수님의 머릿속에는 더럽고 저속한 것들만 있을 뿐, 과학사업을 위해 헌신한 여성의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예요?”“오늘까지만 해도 정상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박식하고 덕망이 높은 교수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네요.”송정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화가 나서 무슨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이때, 오미선은 왼쪽의 작은 문을 열고 나왔고, 안경 뒤의 눈은 차갑게 그를 주시했다.“송 교수, 방금 한 그 말 다 들었어. 정은이는 내 학생이야. 지금 무엇을 암시하거나 인도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난 내 학생이 그 어떤 모독과 무시를 받는 것도 용납하지 않아.”“당장 정은이에게 사과해!”오미선은 목소리가 우렁차서 마치 자식을 보호하는 암컷 사자와 같았다.송정후의 안색이 갑자기 보기 흉해졌다.‘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니. 잠시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지도 몰라. 그래도 내 체면이 중요하지...’“방금 난 농담을 한 것일 뿐인데...”정은은 송정후의 말을 끊었다.“이런 농담은 조금도 웃기지 않아요.”재석도 담담하게 말 한마디 덧붙였다.“만약 이런 농담이 여성의 노력과 헌신을 무시하고, 교수님과 학생에게 부당한 관계가 있다고 모함하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과분한 것 같은데.”송정후는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물어본 후에야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다.그러나 다가오자마자 송정후가 쫓아오더니, 더러운 손으로 정은을 잡으려 하는 것을 볼 줄이야. 재석은 다급해지는 바람에 바로 입을 뗐다.송정후는 몸이 굳어졌다.정은은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재석을 향해 걸어갔다.“교수님.”재석은 정은이 다치지 않았단 것을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왜 나왔어? 밖은 춥지도 않니?”지금 재석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방금 송정후를 호통친 모습과 그야말로 극과극이었다.“안이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미친 개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걸 그랬어요.”정은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지금 그녀는 송정후의 코를 가리키며 ‘네가 바로 그 개’라고 말할 뻔했다.송정후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이때 갑자기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또 누구의 학생이 이렇게 날뛰는지 했는데, 알고 보니 조 교수의 학생이었구나? 어쩐지.”“한동안 못 봤는데, 조 교수는 언제 이렇게 예쁜 여학생을 제자로 삼은 거지? 가르칠 때 몸이, 아니지, 마음이 엄청 편하겠지? 말하자면, 네 곁에는 항상 예쁜 여자가 많았지. 정말 부럽네 부러워.”송정후는 갑자기 비아냥거리더니 재석을 모함했다.올해 초, 두 사람은 같은 국가급 프로젝트를 경쟁했는데, 송정후는 재석에게 졌기에 두 사람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그후 또 ‘가장 뛰어난 청년 연구원’ 선정에서 재석과 다투었는데, 송정후는 재차 실패를 거두었다.두 사람은 지금 라이벌과 다름이 없었다.송정후는 H시에 있고, 재석은 J시에 있는데, 두 사람은 일년 내내 몇 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송정후가 수를 써서 체면을 되찾으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지금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당연히 잘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송정후는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나는 또 조 교수가 정말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저 눈이 좀 높았던 것뿐이었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만 손을 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