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해맑게 웃어? 남편한테서 온 문자구나?”심효진이 장난치듯 물었다.하예정과 전태윤의 사이가 점점 더 돈독해지자 심효진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두 사람이 하루빨리 결혼식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우리 집 손님방에 아직 침대가 없거든. 남편이 마침 요 며칠 상여금을 받아서 내게 300만 원 입금해줬어. 침대도 사고 옷장이랑 침대 용품도 사라고 했어. 아주머니, 이따가 점심 먹고 우빈이가 낮잠 자면 나랑 함께 쇼핑하러 가요. 아주머니가 쓰실 물건들이니 직접 고르세요.”숙희 아주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저는 뭐든 다 돼요. 지낼 곳만 있으면 되죠 뭘.”“그럼 안 되죠. 반드시 편하게 지내셔야 해요. 사장님이 직접 돈을 주며 물건을 사라고 하는데 아낄 필요가 있나요. 우리 함께 좋은 거로 골라봐요.”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일을 잘하면 장기간 함께 지내기로 했다. 아주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며 뭐든 잘해주고 싶었다.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성소현에게 물었다.“소현 씨, 이따가 함께 밥 먹을래요?”성소현은 이젠 더는 관성 호텔에 찾아가 전태윤을 지켜볼 일도 없고 집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곧바로 대답했다.“그래요, 그럼.”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에게 식사를 1인분 더 준비하라고 했다.“알았어요, 예정 씨. 지금 바로 음식 준비할게요.”하예정은 신나게 장난감을 노는 조카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세요. 우빈이는 제가 돌볼게요.”숙희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 재빨리 전태윤에게 문자를 보냈다.「도련님, 성소현 씨가 오셨는데 사모님께서 함께 남아 점심 먹자고 하셨어요. 소현 씨도 허락하셨고요.」전태윤은 회의를 마치고 하예정에게 계좌 이체한 후 중요한 서류 몇 부를 처리했다. 그는 이제 막 정리를 마치고 또 미리 퇴근하여 와이프와 함께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숙희 아주머니가 때마침 문자를 보냈다.전태윤은 순간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이 식었다.“성소현, 참 지긋지긋해.”그에게 집착하지 않으니 이젠
전태윤은 어안이 벙벙했다.“할머니도 참... 너무 멀리 가셨어요. 할머니 아드님들한테 말씀하세요. 노력해서 손녀 좀 안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아마 그게 더 빠를 거예요.”어르신은 웃으며 그를 나무랐다.“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우리더러 노력해서 딸아이 낳는 게 더 빠르다고 할 셈이냐? 너희 아빠, 엄마랑 삼촌 숙모는 이미 중년인데 낳긴 뭘 낳아? 젊었을 때 딸을 낳지 못했으니 이젠 손녀라도 기대해봐야지 않겠어?”“셋째 삼촌과 숙모는 이제 고작 40대예요. 노력하면 낳을 수 있을 거예요.”얼떨결에 언급된 셋째 삼촌 부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카가 한심하다고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지금 바빠?”“할머니랑 통화 중이죠.”“이것 봐, 말하는 말투가 전혀 귀엽지 않잖아. 안 바쁘지? 안 바쁘면 할미가 회사로 찾아갈게. 우리 손주랑 함께 쇼핑해야겠어.”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할머니, 나 아직 근무 중이에요.”“회사가 너 없다고 망하는 건 아니잖니? 할미도 다 널 위해서 함께 쇼핑하는 거란다. 여자랑 함께 쇼핑도 할 줄 알아야 나중에 예정이랑 같이 다니지. 경험 쌓을 좋은 기회니까 소중히 여겨.”전태윤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이진이랑 함께 쇼핑하세요. 저는 점심 약속이 있어요.”“미룬 거 아니었어?”전태윤이 잠시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와이프랑 함께 못 먹으니 제 약속 마저 챙겨야죠.”“하하, 녀석, 너도 이런 날이 있네! 애초에 이 할미가 뭐랬어?”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알았어, 그럼 네 볼일 봐. 난 셋째랑 함께 쇼핑하러 갈 거야. 너희 형제 중에 그래도 셋째가 제일 낫다니까. 걔랑 함께 있으면 심심할 새가 없어.”말을 마친 어르신은 전화를 끊었다.‘그래도 전화한 보람이 있네. 태윤이가 마음을 조금 연 모양이야. 그 녀석의 평생 행복을 위해서 내 속이 재가 다 되었어. 흰머리가 가득 났잖아.’전태윤은 휴대폰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하예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점심에 바이어와 약속이 잡혀 가게로 가지 못한다고
김은희는 주서인네 셋째를 끌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주서인은 직장으로 돌아간 모양인지 함께 따라오지 않았다.“우빈아, 정한이 왔어.”김은희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오며 주우빈을 불렀다.“예정 씨, 효진 씨.”그녀는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힐긋 쳐다봤다.곧이어 성소현에게 시선이 쏠렸다.성소현은 우빈을 품에 안고 물었다.“우빈아, 저분 누구야?”하예정이 허리를 펴고 담담하게 말했다.“아주머니가 여긴 어쩐 일이시죠?”이어서 성소현에게 소개했다.“이분은 우리 언니 시어머님이세요. 우빈의 친할머니고요.”하예정은 친할머니라는 단어를 거듭 강조했다.성소현은 정한의 손을 꼭 잡은 김은희를 보다가 다시 고개 숙여 우빈을 쳐다봤다. 우빈은 할머니께 인사만 할 뿐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보아하니 하예정의 언니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듯싶었다.“우빈이가 평소 놀아줄 친구가 없어서 오늘 이렇게 정한이 데려왔어요.”김은희는 장난감 두 박스에 두 눈을 반짝이는 정한이를 보자 얼른 손을 놓아주며 가서 놀라고 했다.“내 장난감이야.”아이는 제 물건을 지키는 법이었다.주우빈도 마찬가지였다.정한은 평소 우빈의 물건을 뺏는 게 습관 되었고 안 주면 때리기까지 했다. 우빈이가 울면 정한의 엄마는 남자아이가 울긴 왜 우냐고, 정한 형이 장난감 뺏는 것도 아니고 놀다가 돌려준다면서 훈계를 놓았다.주우빈은 고모의 말을 썩 믿지 않았다.나이가 어려 말이 서툴지만 정한 형이 매번 돌아갈 때마다 그의 장난감을 가져갔고 더는 돌려주지 않았다. 가끔 장난감을 고장 내기까지 했다.주우빈은 성소현의 품에서 내려와 정한이 장난감을 놀지 못하게 마구 밀쳤다.“우빈아, 형 밀치면 안 돼. 장난감이 이렇게 많은데 함께 놀아야지.”김은희는 우빈이가 정한을 밀치자 본능적으로 정한을 보호하며 우빈을 내팽개쳤다.이 행동을 본 세 여인은 울화가 치밀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성소현이 벌떡 일어나 김은희의 손에서 우빈이를 당겨왔다. 그
하예정이 차갑게 되물었다.“정한이가 누구죠? 나랑 뭔 상관인데요? 우빈이는 내 외조카예요. 외조카를 서운하게 만들면서까지 딴 아이를 달래줄 순 없죠. 우빈이가 뭘 잘못했나요? 잘못 가르친 건 아주머니예요. 정한이가 평소에도 우빈이 괴롭히고 때리고 장난감을 빼앗아 집까지 가져갔잖아요. 외할머니가 돼서 대체 뭘 하셨나요? 아니면 혹시 그냥 이딴 식으로 가르친 건가요? 아주머니, 정한이는 외손자이고 우빈이는 친손자라서 이렇게 편애해요? 정말 너무하시네요!”김은희는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곧이어 반박에 나섰다.“예정 씨, 정한이는 아직 어린애예요. 그리고 우빈이는 장난감도 많은데 정한이가 좀 놀면 어때요? 우빈아, 정한 형이 울잖아. 장난감 좀 형한테 나눠줘.”우빈이가 머뭇거렸다.성소현은 그런 우빈에게 말했다.“우빈아, 주기 싫으면 주지 마. 쟤가 울고 싶거든 실컷 울라고 해. 바닥도 깨끗이 닦고 얼마나 좋아. 그냥 발버둥 치게 놔둬. 그럼 예정 이모도 바닥 청소할 필요가 없잖아.”우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형 나빠요.”정한은 그에게 나쁜 인상을 안겨주었다.“형 나쁘면 함께 놀지 마. 이봐요, 아줌마, 그 댁 외손자 데리고 나가줄래요? 내 친구 가게가 작아서 애 데리고 밖에 나가서 실컷 뒹굴게 하세요.”하예정은 조카를 억울하게 만들면서 다른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성소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줄곧 제멋대로였고 감히 따져 묻는 자에겐 서슴없이 싸대기를 날린다.“정한이 착하지, 얼른 일어나. 우린 그깟 장난감 필요 없어. 외할머니가 데리고 나가서 더 많이 사줄게.”김은희는 하예정과 성소현의 말에 화가 잔뜩 치밀었고 바닥을 나뒹구는 외손자가 가슴 아파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를 달랬다.“싫어요, 난 우빈이 장난감 가질래요!”정한은 예쁘게 자란 탓에 한사코 우빈의 장난감을 욕심냈다.“정한이 착하지, 우빈이 장난감 하나도 재미없어. 외할머니가 재밌는 장난감 더 많이 사줄게.”“싫어요, 싫다고요. 나 우빈이 장난감 가질
하예정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마음도 덜 아프지. 그런데 진짜 친할머니 맞대요.”‘거의 우리 할머니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니까.’하예정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감기 걸린 정한이를 데려와서 우빈이한테 옮겨놓으려고 했어요. 우빈이가 아프면 우리 언니도 시름 놓고 출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분명 휴가 내고 우빈이 돌보려고 할 거예요. 출근한 지 이틀 만에 자꾸 휴가 내면 언니는 직장에서 잘릴 거예요.”주씨 집안 사람들은 하예진이 출근하는 걸 막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하예진이 직업을 찾았으니 이젠 이혼만 하면 된다. 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이혼하고 지옥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예정 씨, 언니분 시어머니는 왜 언니가 출근하는 걸 반대해요?”성소현이 물었다.하예정은 빗자루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주우빈이 나오자 허리 숙여 아이를 안아 올렸다.“그 인간쓰레기 같은 형님이 두 아이를 도시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우리 언니가 마침 학교 근처에 살아서 그 집을 노리고 있어요. 머저리 형부더러 그 집을 본인 명의로 바꾸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두 아이가 좀 더 좋은 중학교에 다닐 수 있거든요. 그런데 형님이란 인간은 직장에 출퇴근해야 해서 아이 뒷바라지를 못 해요. 그래서 우리 언니더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주고 밥도 해주고 숙제도 가르쳐주라고 하잖아요 글쎄! 물론 언니가 거절했어요.”“언니는 겨우 직장을 찾아서 인제 매일 출근해요. 그 집 사람들 우리 언니를 부려먹기 위해 이런 비겁한 수법을 생각한 거예요. 부모가 돼서 왜 그렇게 딸만 편애하는지 모르겠어요. 형부도 마찬가지예요. 제 누나만 챙기려 하잖아요. 전에는 다들 우리 언니한테 잘해줘서 시집 잘 갔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한 뒤에도 나름 괜찮았어요. 문제는 우빈이 낳고 나서부터죠. 그 집 사람들 아이가 생기니 슬슬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우리 언니가 집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종일 애만 본다고 잔소리를 했어요. 돈은 엄청 쓰면서 벌 생각은 없다고
“언니, 언니 이젠 일자리도 찾았으니까 주형인한테 이혼 얘기 꺼내도 돼.”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이혼하길 바랐다. 심효진과 성소현도 맞장구를 쳤다.“빨리 이혼해서 빨리 벗어나야죠.”하예진은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에 형인 씨가 퇴근하면 이혼하자고 얘기할 거야.”그녀는 이미 주형인이 외도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의 외도 증거를 손에 넣었을 때 그녀는 바로 까발리지 않았다. 아직 일자리도 없고 안정된 수입이 없는 탓에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곧 새해도 되고 해서 원래는 첫 월급을 받은 후에 이혼 얘기를 꺼낼 계획이었지만 오늘 시어머니의 행동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에게 매정하게 군다면 몇 번이고 참겠지만 주우빈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녀는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이틀 전 시어머니와 주서인이 왔을 때 하예진은 주서인이 동생에게 정한이 독감에 걸려 아직 낫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시아버지는 정한이 주우빈에게 옮겨놓을까 봐 주서인에게 정한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그런데 하예진이 출근한 후 시어머니는 아직 낫지 않은 정한을 데려왔다. 일부러 주우빈에게 독감을 옮겨 그녀가 마음 편히 출근하지 못 하게 한 다음 회사에서 잘리길 바란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이런 독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지...‘내가 출근하지 않으면 주서인의 애를 봐줄 것 같아? 꿈 깨!’“예진 언니.”성소현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하예진을 볼 때마다 자꾸만 예전에도 알던 사이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익숙함에 성소현은 하예진과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이상하단 말이야. 전생에 이 두 하씨네 자매랑 자매였나?’성소현은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하씨네 자매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다.“예진 언니, 이혼할 때 소송해야 한다면 나한테 얘기해요. 가장 좋은 변호사를 찾아서 도와줄게요. 언니가 쟁취해야 하는 건 그 사람들한테 빼앗기지 말고 끝까지 쟁취해요. 그리고 우빈이 양육권도 꼭 가
주우빈은 엄마 품에서 바로 단잠에 빠졌다.하예진은 아들이 잠든 틈에 아들을 여동생에게 맡겼다. 동생네 부부가 주우빈을 챙기려고 가정부까지 구했다는 걸 안 하예진은 그들에게 고맙기 그지없었다.아직 그녀가 완전히 일어서지 못했기에 두 사람의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나중에 일어서면 제대로 보답할 생각이었다.하예진은 곧장 출근하러 갔다.유일한 절친의 전화를 받은 성소현은 하예정과 심효진에게 인사한 후 부랴부랴 가버렸다.“효진아, 먼저 가게에서 우빈이 봐줘. 숙희 아주머니랑 침구 용품 좀 사고 올게.”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쓸 침대, 서랍, 침구 용품을 사야 한다는 걸 잊지 않았다.“알았어.”심효진이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지금부터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주 한가한 시간이라 그녀는 늘 소설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숙희 아주머니가 말했다.“예정 씨 혼자 가서 사도 돼요. 이따가 우빈이 깨어나면 봐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주우빈에게 그런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안 숙희 아주머니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성소현의 말대로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를 어찌 미워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예진 씨가 아들을 낳았는데도 시댁에서 우빈이한테 이러는데 만약 딸이었으면 어땠겠어. 그래도 예진 씨가 이혼하겠다고 마음먹어서 다행이야. 저런 시댁이라면 진작 이혼했어야 해.’숙희 아주머니가 남아서 주우빈을 돌보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혼자 차를 운전하여 숙희 아주머니가 쓸 침대와 서랍을 사러 갔다. 그렇게 온 오후 돌아다니고 나서야 모든 일을 마쳤다.해 질 무렵 가게로 돌아와 바쁜 시간을 보낸 후 퇴근한 언니가 주우빈을 데리러 왔고 심효진도 집으로 돌아갔다. 하예정과 숙희 아주머니 둘이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30분 후, 전태윤이 가게로 왔다.“오늘은 야근 안 해요?”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남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하예정은 마음이 설렜다. 그의 비주얼은 뭐 말할 것도 없었고 남성적인 매력이 흘러넘쳤다.“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친구들도 하나같이 경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웃으시겠는가 말이다.얼마 전에 할머니 앞에서 절대 와이프에게 목을 매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것만 생각하면 전태윤은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굳이 목을 매지 않아도 하예정은 이미 그의 아내다.“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몸 상하지 않게 쉬면서 할게요.”하예정은 민첩하고 교묘한 두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태윤 씨, 먼저 아주머니랑 집에 가 있어요. 갈 때 봄이랑 얘네들 데려가는 거 잊지 말고요.”전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싫어, 안 데려가.”“그럼 아주머니한테 맡겨요. 지금 가게도 바쁜 타임이 아니라서 두 사람 여기 있어 봤자 도와줄 것도 없어요. 차라리 집에 가서 아주머니한테 방 정리나 하라고 하세요.”“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하예정은 그를 힐끗 올려다보더니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하며 피식 웃었다.“태윤 씨 참 예민한 사람 같아요. 솔직하게 말해서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럼 말해봐요, 여기 남아서 뭘 도와줄 수 있는지?”전태윤은 얼굴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예품을 만들 줄도 모르고 물건을 팔아주려고 해도 표정이 너무 심각하여 학생들이 놀랄 게 뻔했다.현실 앞에서 전태윤은 자신이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할머니는 왜 하필 이렇게 뭐든지 다 잘하는 와이프를 찾아준 거야? 내가 나설 기회가 없잖아!’전태윤은 속으로 할머니를 탓했다. 만약 할머니가 그의 생각을 들었더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어차피 예정이랑 반년 계약을 했으니 계약이 만료되면 이혼할 거잖아.”전태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자 숙희 아주머니가 나서서 말했다.“예정 씨, 저 갈아입을 옷만 몇 벌 가져와서 정리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리 급하게 안 가도 돼요.”그들 모두 집에 갈 생각이 없자 하예정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숙희 아주머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
여운초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전이진을 대신하여 은행카드만 보관할 뿐일 것이었다. 그가 돈 쓰는 것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의 돈을 쓸 일이 없을 테였다.전이진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만 했다.“왜 계속 날 보면서 웃어요?”“좋으니까. 운초 씨, 나 지금 너무 좋아. 그냥 웃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또 웃었다.그러는 전이진을 지켜보는 여운초도 참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둘이서 한참 동안 알콩달콩한 후 전이진이 시계를 보니 어머니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는 약혼녀를 보면서 말했다.“운초 씨, 엄마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우리 지금 출발해. 우리가 구청에 도착하면 아마 엄마도 도착하실 거야.”그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야 했다.여운초가 불시에 결혼 신고하자는 바람에 그가 아직 준비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꽃다발, 다이아몬드 반지 둘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한평생 소중히 여길 여자임으로 절대로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그래요.”그가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여운초도 편안하게 자신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이끌려 일어섰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고로‘그대의 손만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라고 했다.그녀는 전이진과 백년해로하고 평생 금실이 좋기를 원했다. 시부모님처럼 애들이 부러울 정도로 몇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첫 사람처럼 달콤하게 지내길 원했다.여운초는 저의 집에 있는 차를 안 타고 전이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그녀가 16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기에 운전면허를 딸수 없었던 것이었다.집에 있는 운전기사는 전이진이 그녀에게 보낸 경호원인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운전도 해줄 수 있었다.20분 뒤.구청 입구명해
“운초씨, 잠깐만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당장 전화할게.”전이진은 약혼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명해은은 전화벨이 한참 울린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엄마, 오늘 시간 돼요?”“이제 방금 일어났어. 오늘은 별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 왜? 아들, 엄마 도움이 필요해?”명해은이 잠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들이 다 크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졌다.애들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명해은은 너무 일찍 맛봤다.“저와 운초 씨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려 하는데 제가 가족관계등록부를 안 가져왔어요. 엄마 혹은 아버지가 지금 저한테 가져다줄 수 있어요? 혹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보내줘도 되고요.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시간이 지체되어 아마도 오후나 돼야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후까지 못 기다리겠어요.”가족관계등록부만 손에 가지고 있다면, 전이진은 지금이라도 여운초를 데리고 혼인 신고하러 갔을 테였다.진정으로 여운초가 좋아진 그 시각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때의 여운초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훌륭한 전이진을 앞두고 자비감에 모대기었다. 전이진의 사랑마저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녀는 전이진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정 선생을 찾으러 여러 번 예진 리조트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것이었다.그래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 가서 결혼하기를 원했다.그녀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전이진이 곧 시어머니로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여운초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이 사람 뭐가 그리 급해...’이 반가운 소식을 들은 명해은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시간이 있고말고, 엄마 시간은 남아돌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줄게. 넌 지금 여씨 저택에 있니? 아니면 회사에 있니?” “저는 지금
그는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믿었다. 그는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인품, 일하는 스타일 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해요. 나는 이혼 따위는 할 마음이 없으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당신처럼 훌륭한 남자는 앞으로도 나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이 결혼은 할머니가 강요하셔서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넌 아직도 바깥사람들이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 전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아내한테 일편단심이야. 전씨 집안의 가훈에는 결혼 후 한평생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혼인에 충실해야 하며 바람을 피워선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어.”“누구든 가훈을 어기는 즉시, 전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전씨 일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돼버려.”“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할머니가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가 강요하셔도 소용없어.”전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여운초는 그가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려나 싶어서 한마디 물었다.“내가 가족관계등록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려면 내 가족관계등록부도 필요할 거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급히 가져다 달라 하면 우리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 절차를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결혼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이었다.전이진은 여태 자기가 한시 급히 여운초랑 결혼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애초에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그를 볼 수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이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끝내 그녀의 눈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또 법을 어기는 일까지 했다.비록 모든 불법적인 장사는 이미 압류당했고 관련된 금액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액이 바닥을 쳤으며 여씨 그룹의 재산도 많이 수축했다.큰누나가 여씨 그룹을 이어받은 후, 한동호 형님과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여씨 그룹을 이끌고 이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이런 얘기를 큰누나는 그한테 한 적 없었지만, 그는 한동호 형님과 매형을 통해서 알게되었다.비로소 그는 큰누나의 홀가분해 보이는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쓰라림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비록 큰누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큰누나의 대의멸친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이해만은 할 수 있었다.현재 여씨 그룹은 큰누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큰누나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재산은 한 푼도 탐하지 않는다고. 그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은 언젠가는 돌려줄 것이었다.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그와 둘째 누나 단둘의 소송일 것이었다.큰누나는 단지 여천우 부모님에게 속하는 재산만 그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자식이라곤 그와 둘째 누나밖에 없으니 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상대는 그일 수밖에 없었다.“누나, 나 먼저 수업 들으러 들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휴가 내서 돌아갈 테니 그때 천천히 얘기해.”“알았어, 얼른 가서 수업 봐.”동생과의 통화를 마친 여운초는 동생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여운별 방의 물건은 여운초가 기분을 봐서 언제든 연락하여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와 여운별은 남남일 것이었다.“아가씨, 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여운초는 알았다고 하면서 핸드폰을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