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하가 웃으며 캐리어를 들어주려고 하자 소지훈은 그녀가 도와주지 못하게 막으며 말했다.“내 캐리어에는 옷 몇 벌만 들어있어서 무겁지 않아요. 도와줄 필요 없어요. 게다가 저도 다 큰 성인 남자인데 어떻게 윤하 씨를 제 캐리어를 들게 할 수 있겠어요?”“멀리서 오셨으니 손님이시잖아요. 소시지 두 개도 남겼는데 아저씨께서 매운 거 싫어하시니 제가 안 매운 거 남겨놨어요. 제 소시지는 매운 고춧가루를 넣었는데 엄청 매워요.”소지훈은 그녀가 건네준 소시지 두 개가 들어있는 작은 봉지를 건네받아 하나를 꺼내 한입 물었다.정윤하는 그녀가 산 다른 간식들을 모두 소지훈에게 건네주었다. 소지훈이 그 봉지를 받을 때 정윤하는 한 손으로 캐리어를 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아직 다 먹지 않은 소시지를 먹으면서 걸어갔다.소지훈은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소지훈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정윤하는 그를 대신해 캐리어를 끌어주었다.소지훈은 정윤하가 자신의 캐리어를 끌도록 놔두었다.정윤하는 캐리어를 끌고 앞장서서 걸었고 소지훈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두 사람은 그렇게 소시지를 먹으면서 걸어갔다.정윤하가 가지고 있던 소시지를 다 먹자 소지훈이 또 다른 간식을 건네주었다.주차장으로 도착한 두 사람은 이미 그 간식들을 다 먹었다.정윤하는 입에 기름기를 가득 머금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소지훈을 도와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넣으며 말했다.“정말 잘 먹었어요. 평소에는 우리 엄마가 밖에서 파는 간식 같은 것들을 먹지 못하게 하거든요. 위생적이지 못하다면서요. 아주 가끔 먹어도 자꾸 잔소리하세요. 하지만 저는 그런 간식들이 정말 맛있거든요.”“가끔 한두 번은 괜찮아요. 자주 먹지 않으면 되는데. 정말로 좋아하면 식자재를 사서 직접 만들어서 드세요. 그러면 최소한 위생과 안전은 보장할 수 있잖아요.”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제 요리 솜씨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엄마께서 그런 간식들을 맛있게 잘하세요. 그런데 간식들을 해주기
소지훈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어르신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잔소리도 많아요. 아버지들도 다 똑같으니 저의 어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저는 지금도 저의 아버지를 보면 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실까 봐 쥐가 고양이를 만난 듯 숨어다녀요.”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다.소지훈은 차를 운전하려고 했는데 정윤하가 직접 운전석에 앉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윤하 씨가 운전하려고요?”“네, 제가 운전할게요. 아저씨가 길도 익숙하지 않을 텐데. 제 차가 평범한 차라서 아저씨가 차를 몰 때 습관이 안 될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차 기술도 좋아서 괜찮을 거예요.”소지훈은 차를 에돌아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면서 말했다.“저는 어떠한 차도 다 몰아봤어요. 예전에 돈을 벌지 못했을 때 자전거와 지하철 그리고 버스도 다 타봤어요. 지금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저의 체면 때문에 몰고 다니는 것뿐이죠.”소지훈은 저번에 정윤하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차가 아직도 차 대출을 갚지 못했다고 말했을 것이다.그는 진짜 신분을 말했기 때문에 더는 정윤하를 속이기 어려웠다.정윤하는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는 지금 회사의 대표님이니 외출할 때는 반드시 좋은 차를 운전해야 해요. 우리 아버지와 오빠도 외출할 때 좋은 차를 운전하시거든요. 그러나 평소에는 2000만 원대 되는 차를 몰고 다니세요. 제가 지금 운전하고 있는 이 차는 2400만 원밖에 안 돼요. 물론 제 지갑이 넉넉하지 않아 더 비싼 차를 구매할 수 없지만요.”정윤하의 적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정합 도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하여 번 돈으로 차를 샀기에 얼마 남지 않았다.지난번에 학생들을 데리고 관성에 가서 무술 대회에 참가했을 때 정윤하는 사비를 털어 관성 호텔에 주숙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작은 선물도 많이 샀다.하여 얼마 되지 않은 적금도 거의 다 써버렸다.정윤하는 지금 다시 저축하여 몇 년 후에 집을 한 채 사서 대출하
정윤하가 말을 이었다.“아저씨 싸움 실력이 너무 좋기 때문에 경호원이 필요 없다고 봐요. 그날 밤은 제가 너무 빨리 움직였어요. 제가 그날 밤 아저씨를 구하지 않았더라도 아저씨 실력으로도 충분히 그 나쁜 사람들은 해결하셨을 거예요. 제가 너무 빨리 참견해서 오히려 아저씨 실력이 드러날 기회가 없어진 거죠. 저도 아저씨의 실력을 볼 기회가 줄어든 거죠.”그러자 소지훈은 재빨리 말했다.“제가 무술 할 줄 아는 건 맞지만 윤하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그날 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저 혼자서는 분명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거에요. 제가 윤하 씨만큼 대단하지 않아요.”“우리 집에도 경호원이 있지만 저는 거의 데리고 다니지 않아요. 가끔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외출하는 편이죠. 하지만 제가 고용한 경호원들은 몸집이 커서 다른 사람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정도뿐이지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아요. 단지 몇몇 건달들을 상대할 수 있을 실력이에요.”“만약 전업적인 사람들을 만난다면 전혀 상대되지 않을걸요. 게다가 지난번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는 윤하 씨와 같은 진정한 고수가 필요해요.”소지훈은 자기 경호원들이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정말 애를 쓰고 있었다.어차피 소지훈의 부하들이 곁에 없기 때문에 그가 뭐라고 해도 부하들이 변명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그들이 모두 소지훈의 눈앞에 있다고 해도 감히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소지훈은 운명적인 여신에게 구애하기 위해 그의 경호원들을 정윤하에게 매를 맞고 경찰서까지 끌려가게 했다.그들은 지금은 회복해서 퇴원했지만, 앞으로는 정윤하가 알아볼까 봐 그녀를 피해 다녀야 했다.정윤하가 말했다.“관성의 안전 상황은 이미 매우 좋다고 봐요. 지난번처럼 사고는 조사해 보셨어요? 누군가 일부러 아저씨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노린 것 같아요.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평소에 경호원이 필요 없는데 경호원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소지훈이 웃으면서 말했다.“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참, 제가 두 박스의 물건을 배송했는데 받으셨나요? 제가 배송 기록을 확인해보니 오늘 받아보실 수 있다고 하던데.”소지훈은 관성의 특산품을 많이 샀다. 그중 정수호 부부의 영양제도 들어있었다.물론 수신자는 정윤하의 이름으로 적어놓았다.정윤하는 그의 운명적인 여신이기 때문에 정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그리고 먼 곳에서 왔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정윤하가 대답했다.“그건 잘 모르겠어요. 오후에 공항으로 왔기 때문에 택배가 있으면 아마 집에 배송될 거에요. 우리 엄마가 종일 집에 있으니까 택배를 받으실 거예요. 지훈 씨, 무슨 물건을 보냈어요? 너무 돈을 낭비하지 마세요.”“관성의 특산품들이에요. 지난번에 너무 급하게 가서 준비한 특산품이 많지 않았어요. 이번에 제가 좀 더 사서 이틀 전에 택배로 보냈거든요. 그럼 오늘 제가 도착하면 택배도 도착할 수 있잖아요.”“저의 부모님은 윤하 씨가 제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고도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고 저를 호되게 꾸지람하셨어요. 감사할 줄 모른다면서요. 은혜는 항상 몇 배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어요. 제가 감사할 줄 모르는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요.”정윤하도 웃으며 말을 건넸다.“지훈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이미 저에게 보답했는걸요. 지난번에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시합에 갔을 때 제가 돈 한 푼도 낼 필요 없이 우리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나가서 재미있는 것도 놀게 해줬잖아요. 그리고 특별히 저를 전 대표님 결혼식에 데려간 것도 모두 저에 대한 보답이세요.”“그래도 부족하죠. 보답은 많이 해야 해요.”몸으로 보답을 허락해 주면 더 좋지만 말이다.“지훈 씨 부모님들 너무 놓은 분들이시네요.”정윤하는 소균성 부부를 만났는데 너무 열정적이고 자상한 느낌을 받아 그들에 대한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소균성 부부의 소질은 매우 좋고 말씨도 매우 부드러웠다. 최민주가 자신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본 정윤하는 최민주가 그녀를
정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안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정씨 가문 식구들은 모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차 소리가 나자 정윤하의 큰오빠 정혁주가 여동생의 차인 것을 확인하더니 웃으면서 마중 나갔다. 그리고 소지훈을 도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소 대표님.”“형, 저는 소지훈이에요.”소지훈은 정혁주보다 나이가 많지만, 정윤하를 따라 형님이라고 불렀다. 정혁주는 노동명처럼 성격이 털털한 사람이라 소지훈이 뭐라고 불러도 개의치 않았다.“다들 두 사람이 도착하여 밥 먹기를 기다려요.”정혁주는 차 뒤로 가더니 트렁크를 열어 안에서 소지훈의 캐리어를 꺼냈다.정윤하가 말했다.“오빠, 지훈 씨가 호텔 예약했어요. 이따가 밥 먹고 제가 호텔까지 데려다줄 거에요. 캐리어를 꺼낼 필요 없어요.”“그래? 혹은 호텔 예약을 취소하시겠어요? 우리 집에 빈방이 많은데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에서 묵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연성으로 출장을 오실 때마다 우리 집에서 묵으세요.”정혁주는 소지훈과 여동생이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친구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소지훈이 연성으로 출장을 온 이상 소지훈을 잘 대접해 주고 싶었다.“그럴 리가요. 예약한 호텔을 취소해도 돼요. 그럼 저는 지금 호텔을 취소하고 여기에 묵도록 할게요. 여러분을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가 일이 바빠서 매일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데 여러분의 정상적인 휴식을 방해할 것만 같아 걱정이네요.”소지훈의 출장은 핑계였지만 또 핑계가 아니었다.소지훈은 정말로 연성에서 사업을 발전하고 투자를 늘리고 싶어 했다.이렇게 하면 그는 자주 와서 정윤하를 볼 수 있었고 또 정윤하가 앞으로 친정집에 가서 며칠 더 묵을 수 있었다.그리고 그들 소씨 가문이 연성에 세력이 없으면 안 되었다.앞으로 그는 연성에 자주 오려고 계획했다. 만약 연성에 세력이 없다면 소지훈의 개인 안전은 물론, 소지훈 때문에 정씨 가문 식구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걱정했다. 그는 그런 일들을 허용하지 않았다.하여 소지
정윤하는 정혁주를 꾸지람했다.“또 술을 마시면 엄마가 우리 집안의 좋은 술을 다 팔아버릴걸요.”그녀도 술을 좋아하지만, 술에 아주 약했다.정윤하의 어머니 윤미연도 계집애가 주량이 약한데도 술을 마시면 사고 치기 쉽다고 정윤하를 술을 못 마시게 했다.정혁주가 멋쩍게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소 대표님을 우리 집에 있게 해야지. 소 대표님은 우리 집의 손님이니까 우리 집에 야식을 포장해 오시면 우리가 술을 내놓고 마시면 얼마나 좋아. 술을 적게 마시면 이튿날 출근하는 데 지장도 주지 않아서 엄마도 아무 말 안 하실 거야.”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과 다름없었다.그때 정혁주는 소지훈이 생각났다.지난번에 소지훈이 왔을 때, 정윤하만 빼고 모두 술을 마셨다.정혁주는 소지훈을 이용해서 술을 마시려고 했다. 누가 그들 정씨 성을 가진 부자가 정씨 성을 가지지 않은 윤미연의 손에 꽉 잡혀 살게 했는지...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소지훈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여기 있는 동안 형이 드시고 싶은 야식이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포장해 올게요.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시고 한 잔만 하시죠. 이모도 형님 건강을 고려하셔서 그러는 거예요.”그는 미래의 처남에게 잘 보이고 싶지만 그렇다고 또 장모님의 미움을 살 수는 없었다.장모님과 처남 사이에서 소지훈은 분명 장모님의 편을 들 것이다.정혁주가 말을 건넸다.“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마시고 싶을 때만 조금씩 마시는 편이에요. 우리 어머니께서 나오셨으니까 그만 말해요.”어머니의 익숙한 발걸음 소리를 들은 정혁주는 정윤하와 소지훈에게 술에 관한 주제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었다. 윤미연이 들으면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소지훈은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정씨네 남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밖으로 마중 나온 윤미연을 보면서 예의 갖춰 인사했다.“이모, 제가 또 폐를 끼치러 왔어요.”윤미연은 소지훈을 반갑게 맞아주며 인사
윤미연은 늘 정수호에게 딸을 잘못 가르쳤다고 잔소리했다. 24살의 처녀가 연애해본 적이 없고 중매 아주머니가 남자친구를 소개해도 사귀지 못한다면서, 정윤하가 남자를 형제로 생각하게 했다고 늘 불평했다.친구는 무슨... 정녕 애인으로 될 수는 없단 말인가!정수호는 윤미연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윤미연을 놀렸다. 두 사람 함께 몸조리 잘해서 딸 하나 더 낳아 막내딸을 숙녀로 키우면 어떻겠냐면서 말이다. 결국, 윤미연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정수호를 한 대 때렸다.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될 나이인데 어찌 또 낳을 수 있겠는가!낳고 싶었으면 젊었을 때 벌써 낳았을 텐데.“식사하세요. 밤에 수면에 영향이 갈 텐데 지훈 씨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어떡해요? 당신도 참, 밤에 잘 주무시지 못하면 어떡해요...”윤미연이 부엌에서 요리들을 들고나오면서 남편에게 몇 마디 했다.정수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지훈 씨가 멀리서 오신 손님인데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하는 게 도리 아니야? 지훈 씨, 식사하러 가요. 윤하야, 가서 좋은 술 한 병 가져와. 내가 지훈 씨랑 말도 잘 통하니 오늘 저녁에 한 잔 마셔야겠어.”정윤하는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엄마, 나도 마셔도 돼?”윤미연은 정윤하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두 모금만 마셔. 너의 주량으로 더 마시면 망신당할 수 있으니까.”두 모금 마시는 것이 술 못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윤하는 기뻐하며 가서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좋은 술 한 병을 가져왔다.정혁주는 일찍이 술잔을 준비해 두었다.소지훈이 있었기에 술을 좋아하는 정씨 가문의 식구들은 술을 맛볼 수 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윤미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많이 마시지는 못했다.“엄마, 지훈 씨가 출장하러 와 있는 동안 큰오빠가 지훈 씨를 우리 집에 머물게 하시라면서 예약한 호텔을 취소하라고 했어요.”정윤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윤미연과 정수호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윤미연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에 빈방이 있는데... 지훈
정씨 가문 사람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지훈은 부모의 행동을 막을 능력이 없다고 하여 정씨 가문 식구들은 허탈해했다.소지훈의 부모님이 정말 오신다면 그들이 잘 대접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따르릉...윤미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쳐다보지도 않고 이내 전화를 받았다.“박씨 아줌마시군요.”전화기 너머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윤하 남매는 귀가 솔깃해져 윤미연과 박선주의 전화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우리 윤하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시려고요? 상대방은 무슨 직업을 가진 남자예요? 우리 윤하 상황을 아시죠? 예전처럼 윤하가 또 폭행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겠죠? 박씨 아줌마, 제가 먼저 말하는데 만약 남자가 우리 윤하가 가정폭력을 휘두를까 봐 걱정하는 남자라면 이 일을 주선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는 남자라면 우리 윤하가 평생 혼자 살게 할지언정 시집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런 가정폭력 성향의 남자와 저의 딸을 결혼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박선주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이번에는 그런 남자 아니에요. 저도 그 남자와 분명히 말했어요. 윤하가 좋은 아가씨라고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소탈해서 저도 윤하를 너무 좋아하는걸요. 우리 아들이 성년이라면 윤하를 저의 아들과 맞세웠을 거예요.”“이번에 윤하에게 소개한 사람은 제 동료의 아들이에요. 제 동료의 집안 형편이 좋아서, 당신 집안의 형편과도 겨룰 수 있다니까요. 그 집 아들은 큰 회사에서 일하는데 평소에 일이 너무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요. 하여 저를 찾아왔는데 제가 윤하가 생각났던 거에요. 저의 동료가 내일 두 사람을 만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는데 윤하가 시간이 있을까요?”박선주가 물었다.“박씨 아줌마 동료의 아들은 사람 됨됨이가 어때요? 인품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우리 사이가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 딸을 함정에 빠뜨리면 안 돼요. 호호호...”윤미연은 정윤하가 스물네 살에 아직 연애를 못 해 봐서 좀 조급한 마음은 있지만 그렇다고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